Marx의 노동의 잉여가치에 대하여
학문과 삶은 서로 연관이 있지만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하면 理論과 實踐은 다른 次元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론을 구성환 學者이면서 동시에 그 이론에 입각하여 현실에 내포된 문제점과 모순을 바로 잡는 革命을 시도한 예외적인 사람이 바로 K.Marx이다.
20세기 세계사에 마르크스는 엄청난 영향을 끼쳤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제 마르크스의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Marxism을 이루는 근본 개념인 勞動의 剩餘價値에 대하여 제대로 알아야 할 것이다.
백화점이나 어떤 가게에 가도 팔기 위하여 수많은 종류의 물건들이 있다. 판매를 위한 물건을 商品이라고 한다. 이 상품의 가격은 어떻게 정해지는 것일까?
상품을 생산한 곳, 즉 공장이 매긴 그 상품의 가격을 공장도 가격이라고 부르며, 이 상품이 도,소매의 유통 경로를 거치면서 유통 마진이 붙어 최종 판매가격, 즉 소비자 가격이 결정된다.
우리는 누구나 공장도 원가에(그 상품을 만드는데 든 費用) 즉 原價에, 利潤을 더하여 판매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이윤이란 원가에 덧붙는 액수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 상품의 가격을 매기는 공장 사장도 자신이 필요로 하는 상품을 구매해야 살아갈 수 있다. 바꿔 말하면 누구나 사회 속에서 살아 가는 한 판매자인 동시에 購買者이다. 따라서 販賣者로서 얻는 것은 구매자로서 잃게 된다.
이것이 전 사회적으로 일반화되면, 판매자로서 얻는 이득의 총액은 구매자로서 잃는 손해의 총액과 같아지게 된다. 그러므로 이윤이 생겨날 구석은 없다.
마르크스의 답은 이렇다.
이윤이란 상품을 원가 이상으로 판매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바로 원가대로 판매하는 데서 생긴다.
(그렇다면 자본가가 손해보고 판매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생산원가 속에 이미 이윤이 포함되어 있다는 이야기이다.)
모든 상품에는 두 가지의 기본적인 가치가 있다. 하나는 그 물건의 ‘쓸모’로서 使用價値이다. 또 하나는 그 물건으로 ‘다른 물건’과 바꿀 수 있는 交換價値이다.
사용가치란 물건이 가지는 기능과 용도로써 욕망을 충족시키는 주관적이고 質的인 屬性을 가지는 것이며, 교환가치란 교환비율로 표시되는 객관적인 ,量的 가치이다.
경제학에서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교환가치인 것이고, 그 교환가치를 바로 價値라 부른다.
교환가치는 量的 가치이고, 객관적이므로 교환비율에 의해 그 크기를 잴 수 있다.
그러나 그 교환비율이란 것은 무수히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한 상품이 다른 상품들과 교환되려면 그저 상대적인 비교만이 무한히 가능할 뿐이다.
가치(교환가치)의 크기를 알려면 뭔가 다른 기준이 있어야 한다. 마르크스의 말을 빌리면, ‘다양한 상품들과의 다양한 등식을 하나의 전혀 다른 형식’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기준은 바로 돈이 아닐까?
하지만, 돈은 절대적인 가치 기준이 되지 못한다. 돈도 다른 상품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상품인 것이다. 우리는 가게에서 돈을 주고 물건을 사지만, 가게 주인은 우리에게 물건을 주고 돈을 사는 것이다.
돈은 하나의 媒介物이지 그 물건의 가치 전체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마르크스가 말하는 ‘하나의 전혀 다른 형식’은 무엇일까?
그는 다각형의 예를 든다. 다각형의 면적은 한 눈에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다각형의 면적을 하나의 공통적 요소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으면 양적으로 잴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삼각형이다.
상품이란 다각형에서 삼각형의 노릇을 하는 것, 모든 상품을 하나의 공통된 표현으로 환원할 수 있는 基準, 그것은 바로 노동이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노동은 개인적 노동이 아니라 사회적 노동, 즉 숙련도나 노동의 강도에서 사회적으로 평균적인 노동을 뜻한다.
그러면 노동은 또 무엇으로 잴까? 잴 수 없는 기준이라면 그 것은 기준이 아니다.
사회적 노동은 양적 개념이므로 실제로 잴 수가 있다. 바로 시간으로 재면 된다.
상품의 가치는 바로 그 상품을 생산하는 데 들어간 노동시간의 양이 된다.
임금이란 대가를 받는 한 노동력도 하나의 상품이다. 따라서 노동력이란 상품의 가치도 다른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생산하는 데 들어간 노동시간으로 결정된다.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노동력도 하나의 상품이기 때문에 그 것을 다른 상품처럼 마음대로 이용할 권리가 있다. 따라서 그 노동력이라는 상품이 훼손되지 않는 한에서 최대한 이용하려 할 것이다.
그 결과 노동자는 자기 노동력의 가치 이상을 생산하게 된다.
노동자가 일하는 시간과 그가 가진 노동력의 가치는 서로 차이가 있게 되고, 이 차이는 바로 잉여노동시간이 된다.
이 잉여노동시간에 노동자가 생산하는 가치가 바로 剩餘價値이다.
그리고 이 잉여가치가 시장에서 판매되어 현실적인 이득이 생기면 그게 바로 이윤이 되는 것이다. 자본가는 생산품에 얼마의 이윤을 붙여서 판매함으로써 이윤을 얻는 것이 아니라, 생산과정에서 이미 노동의 잉여가치를 통해 이윤을 얻고 있는 것이다.
자본가는 상품을 팔아 남은 이윤으로 노동자에게 賃金을 주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임금이 되는 몫은 노동자가 상품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상품과 동시에 생산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윤은 전부 자본가의 것이 된다. 자본가는 그 이윤으로 자기 개인의 몫을 챙기고, 상품 생산에 필요한 원료나 도구를 구입하고, 각종 세금을 내고, 신규투자를 통해 확대재생산을 한다. 이렇게 해서 자본주의는 유지 성장된다. 결국 잉여가치의 생산이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는 근본적인 動力인 것이다.
그러네, 자본주의는, 생산은 사회적으로 이루어지는 데 반하여 所有는 私的으로 이루어 지는 體制이다.
이 불공평하고 不當함이 바로 마르크스 혁명의, 노동자혁명을 불 붙인 심지이다.
첫댓글 註1)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분석에 따르면 사회주의 혁명이란 중국이나 러시아에서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자본주의 단계가 최종적으로 성숙해 졌을 때 사회주의로 이행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했으며, 농업국가인 러시아나 중국에서 이런 넌센스같은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다는 것은 그로서도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니었을까?
註2) Jesus-Christ 이후 가장 Humainist였던 K.Marx가 유물론을 주창한 이유는 물질적 조건이 인간해방을 위한 필요조건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해방을 이념으로 이론과 실천을 전개했던 진정한 휴머니스트였음에 틀림없다.
註3) 사회주의의 몰락은 마르크스가 예언했던 사회주의 이행과정을 거치지 못한, 즉 밑으로부터의 혁명이 아닌 위로부터의 혁명이었고, 이념과 이해가 부족한 채 그렇게 권력을 장악한 자들이 권력을 유지에만 급급하다가 결국 官僚主義에 의해 망해버린 것이다.
註4) 자본주의의 근본적 모순이 완전히 해결될 이론과 방책은 아직 모연하며, 그런 의미에서 마르크스의 "豫言"은 현재까지 그 판단을 중지한 상태이지 결코 폐기될 수는 없는 것이다.
민초들로부터, 밑으로 부터의 혁명이 가능한가?
역사는 이긴자의 기록이고, 잘못도 연유도 모르고
반평생을 아니 거의 전생을 감시와 굴레속에서 보낸
보통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