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쓰 무네미쓰
일본은 전쟁을 바라고 있었고, 폭풍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거대한 바람이 되어 동북아를 휩쓸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조선에 7월 22일까지 형식적인 최후 통첩을 보냈는데, 서울 - 부산 간의 군용 전선을 일본 정부가 착수하는 일,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에 의거하여 일본 군대를 위한 병영을 조선 내에 설치하는 일, 아산에 있는 청군을 철수시키는 일, 조선의 독립에 위배되는 조선 - 청나라 간의 조약을 모두 폐기하는 일 등이었습니다. 이는 모두 조선 입장에선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제물포조약은 '조선이 청의 속방이 아닌 독립국' 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여 조선과 일본 간에 체결된 조약입니다. 물론 일본이 조선의 '독립성' 을 강조하는것은, 조선이 독립국으로 있다는것은 곧 청나라의 영향력이 한반도에서 약해진다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조선에게 제시된 일본의 기한이 7월 22일 인데 반하여, 반면 청나라에 대한 일본의 최후 통첩은 7월 24일까지였습니다. 무쓰 등은 어차피 조선은 일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것이라 예상하고, 7월 23일을 기점으로 조선의 왕궁을 점령하고, 이어 군대를 아산으로 진격시켜 정확히 25일이 되는 순간 청나라 군을 공격하자는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즉, 부대의 이동 속도를 고려해서 빈틈없이 짜놓은 계략이었습니다.
물론, 아무리 협상이 결렬되었다고 해도 느닷없이 타국의 왕궁을 습격한다는 일은 대단히 무례한 행위 입니다. 따라서 명분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명분을 세운다고 해도 조선 내의 외국인들 시선을 막는것은 무리고, 일단 여기서 가능한 범위는 '일본 국내' 에 대한 여론이었습니다. 일단 전쟁의 명분을 강조한다면, 국내에서 반발이 나오는건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일단 일본은 다음과 같은 구실을 만들어 두었습니다.
그 구실이란 이렇습니다. 우선 조선의 국왕인 고종이 대원군에게 국정을 자문해주십사 하고 요청했지만, 대원군은 민씨 일파의 암살이 두려워 가지 못했고, 이에 고종은 일본 공사인 오토리에게 대원군을 호위해 달라고 하였다, 그런데 오토리 공사가 호위병을 이끌고 대원군을 보호하여 왕궁에 들어섰지만, 민씨 일파가 조선군을 지휘하며 총을 쏘아 공격하였기에, 호위병들이 응전해서 진압하였다는 식입니다.
일단 7월 23일, 일은 저질러졌고, 동시에 조선 주재의 청국 총리공서도 공격을 받았습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원세개는 이미 도주한 후였고, 대신 자리를 지키던 당소의는 재빨리 영국 총영사관으로 몸을 피했습니다.
7월 24일이 되었을때, 고종은 사실상의 항복 선언으로 봐도 무방한, 대원군에게 모든 전권을 위임한다는 조서를 내렸습니다. 실의에 빠져있던 대원군은 즉시 민영준 등을 유배형에 처하면서 민씨 일파에 대한 보복을 단행했지만, 일본의 오토리 공사가 요구한 공문은 이리저리 핑계를 대며 거절했습니다. 공문의 내용은 '조선 정부를 대신해서 아산의 청군을 일본군이 격퇴해 주길 바란다.' 는 요지였습니다.
흥선대원군
일본이 만약 이러한 공문을 얻게 된다면, 앞으로 있을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보다 유리한 명분을 얻게 되는 셈입니다. 전쟁이 벌어지는 땅의 주인인 조선에서 직접 일본에게 청나라를 물리쳐줄 것을 요구한게 되니 말입니다.
하지만 대원군의 입장에서 보면, 만일 청나라가 승리한다면 지금 정권을 가지고 있는 자신은 박살이 나는 셈입니다. 당시 대원군으로서는 청나라와 일본, 어느 나라가 승리자가 될지 확신 할 수 없었고, 가장 좋은 판단은 '일본의 협박에 못 이겨 울며 겨자먹기로 나선' 상황이 되어야 했기에, 일단 뜸들이며 지체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정교하게 짜 놓은 계획으로 인해 일본군은 아산으로 진격을 이미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원하던 공문은 얻지 못했고, 공문은 군대가 출발한 후에야 손에 넣었고, 오토리 공사가 그 날짜를 출발일에 맞춰 바꾸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정설입니다. 일본의 메이지 덴노에게 이 사실이 알려진것은 7월 28일은 되어서였습니다.
메이지 덴노
덴노 본인의 반응은 마땅찮은 편이었고, 이토 히로부미 역시 전쟁에 대해서는 적극적이지 않았으므로 외무대신 무쓰에게 일단 아산 공격을 중지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하지만 무쓰는 이러한 지시도 무시했습니다. 공격 명령을 중지시키지 않은 것입니다. 이 때문에 불쾌했는지 청일전쟁 당시 덴노는 이세 신궁과 고메이 왕릉에 보고할 칙사를 파견하지 않았습니다. '이 전쟁은 내가 하는 전쟁이 아니고, 무쓰, 네가 하는 전쟁이다.' 같은 의미가 있는 행위 입니다.
그만큼 무쓰는 적극적이었습니다.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지금이야말로 일본이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열강의 한 축으로 올라 설 수 있는 시점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이미 일본군은 아산을 향해 진격 중이었고, 이제 와서 멈출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전쟁의 또 다른 당사자였던 청나라의 준비 태세는 어찌하였을까?
당시의 정황이 심상치 않다는건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일이었고, 이홍장은 6월 20일 무렵부터 전쟁 준비에 들어간 참이었습니다. 그는 상군 6개 부대를 평양에 진주하도록 했고, 또 수군은 뱃길을 통해 대동강 입구에 상륙할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부족했고, 일본군은 이미 8천여명이 넘는 병력을 한성 내에 들여보낸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홍장은 우선 평양에 부대를 집결시켜, 남북 구도를 취하려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장기전이 된다면 요동에서 보급을 받을 수 있는 청에 비해, 보급선이 긴 일본이 불리하다 여긴 것입니다. 이홍장은 아산에 있는 2천여명의 병력도 평양에 집결키시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독이었던 섭지초(葉志超)는 이를 거절했습니다. 평양에 대군을 집결을 시키는데, 동시에 아산에도 병력을 더 보내 양쪽에서 일본군을 협공하자는 의견입니다.
이 당시 청나라군의 지휘 계통은 오락가락 했습니다. 이홍장은 청나라를 대표해서 부대를 지휘하는것이지만, '이홍장의 부대' 와 '다른 부대'는 미묘한 차이가 있었고, 다시 이런 부대들도 안휘계니, 복건계니 하여 서로의 인간관계로 복잡하게 갈라졌습니다. 따라서 일괄적인 명령을 내리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일단 계획은 변경되어, 아산에도 증원군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영국 상선을 빌려 증원군을 상륙시켰습니다. 이 증원군이 상륙하는 동안 이를 보호하기 위해 순양함 제원(濟遠)과 포함 광을(鑛乙)이 내항하고 있었는데, 일본 해군은 7월 24일 시점에서 이들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최후 통첩의 마지막 날이므로, 공격은 가하지 않았습니다.
일본 해군이 7월 25일이 되기까지 기다리고 있을때, 역시 일본 해군을 보았으나 적이 공격을 하지 않자 어느정도 마음을 놓은 제원호와 광을호는 전투 배치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일본 해군은 7월 25일이 되기가 무섭게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제원 호의 함장인 방백겸(方佰謙)은 너무 놀라 백기를 내놓고 포격을 하면서 도망쳤고, 여순까지 달아났습니다. 하지만 광을호는 연안에 좌초해 화약고가 폭발했습니다.
그런데 이후에 1천여명의 증원군을 태운 청나라의 고승호가 도착했습니다. 이 고승호는 앞서 청나라가 영국에 빌린 상선들 중 하나로, 우선 영국배라는 사실 때문에 다짜고짜 공격 할 수는 없어 잠시 일본 해군의 임검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때, 일본 나니와 함의 함장은 도고 헤이하치로(東鄉平八郎]) 였습니다.
도고 헤이하치로
도고는 고승호를 격침해버렸고, 백인 선원만 구조하였습니다. 청나라의 장병들은 바다에 버려졌는데, 다음날이 되어서 이곳을 지나간 프랑스 선원들로 인해 200여명 정도가 간신히 목숨을 구했습니다. 700여명 정도가 때죽음을 당했습니다.
풍도해전
이것이 바로 청일전쟁의 시작인 풍도 해전으로, 실상을 보자면 일본의 일방적인 공격에 청나라가 얻어맞은 정도입니다. 일본에서는 청나라가 먼저 포격했다고 선전되었지만 실제 청나라 함선은 넋을 놓고 있다가 당했습니다. 두척의 전함이 크게 피해를 입은것도 타격이었고, 증원이 되어야 했던 1천여명이 오지 않아 아산에 있던 청나라군의 사기도 땅바닥에 떨어졌습니다.
당시 아산의 섭지초가 거느리고 있던 병력은 3,500명. 그는 이를 둘로 나누어, 아산에서 동북쪽으로 20km에 있는 성환(成歡)에 2천여명을 배치하고, 그 후방인 공주에 1,500명을 주둔시켰습니다. 바로 여기서 일본군과의 전투가 벌어졌는데, 사기가 바닥한 청군은 참패를 거듭했습니다.
성환전투(成歡戰鬪)
패배한 청군은 산을 넘고 들을 지나 비참한 꼴이 되어 북쪽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섭지초는 자신이 일본군 5,000여명을 사살했다는 거짓 승전보를 올렸고, 이에 베이징에서는 병사들에게 2만200은을 포상으로 내렸으며, 군관들을 승진시켰습니다.
과거에 이홍장이 회군을 처음 창설할 당시, 그를 따르던 용장들은 태평군이나 염군과의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웠고, 이홍장과의 관계도 긴밀하여 서로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청일전쟁 당시 나가 있는 장수들은 그 아래 세대라 서로 사이도 별로 좋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은 9월 13일 대본영을 히로시마로 옮겨, 마치 덴노가 친정한다는 듯한 제스처를 보여 사기를 크게 높이는데 성공했습니다.
또 당시 청나라의 장수들은 싸우는걸 무서워해서, 일부러 얆은 바다에서만 돌아다니다가 문제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어쩔 수 없이 보조함을 내보내 30리나 50리 정도 정찰을 하다가 재빨리 돌아오게 했습니다. 그렇게 하고 난뒤에, 이홍장에게는 부대가 이렇게 군함을 항행하여 정찰을 했는데 적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보고를 올렸습니다. 양계초는 이런 정황들에 이렇게 평론했습니다.
"우습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평양 전투
일본군은 그런 상황에서 북상하여 평양에 이르렀습니다. 당시의 날씨, 그리고 지나는 길에 있는 사람들이라곤 가난한 사람들 밖에 없었기에, 일본군은 군량을 얻지 못해 매우 힘들어 했습니다. 노즈 미치즈라 등이 이끄는 일본군은 1만 7천여명 정도였고, 평양에 모인 청군의 병력은 최대 1만 4천여명 정도였으니, 공격자에 대한 방어자의 우세를 생각한다면 일본군은 쉽게 승리를 거두기는 어려웠습니다.
본래대로라면 일본군의 3사단도 합류해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병력으로 공격해야 했지만, 지치고 군량이 떨어지고 있는 노즈의 부대는 기다릴 시간이 없었습니다. 이미 소금도 숟가락을 서로 나눠먹을 지경이었던 것입니다. 일본군은 무리인 줄은 알지만, 더 나은 방법도 없어 총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이 당시 평양 내에서는 청군 지휘관 끼리의 의견대립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섭치조는 싸우지 말고 후퇴를 주장했고, 좌보귀는 거기에 반대했습니다. 싸운다면 싸우는 일이고, 물러난다면 좀 더 빨리 물러나서 일본군의 전선을 지금보다 더 길게 하여, 안그래도 군량 보급에 힘들어하는 일본군을 물리치는 방법도 있을테지만, 의견 대립이 극심하여 아무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전쟁은 해야 하지만, 부대를 아끼고 싶은 이홍장 역시 딱히 공격에 대한 지시를 내리지 않아 결론은 나지 않았습니다.
이후 전투에서 청군은 큰 손실을 입었지만, 일본군도 총탄이 거의 바닥나 백병전을 치루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포위를 풀고 다시 기회를 노리려던 찰나, 섭지초는 항복의 백기를 내걸었습니다. 이전의 싸움에서 좌보귀가 전사했기 때문에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황해해전
평양에서 일본군의 총공격이 이루어진 그날 밤, 북양 함대는 여순에서 대규모 부대를 이끌고 압록강 어귀에 있는 대동구로 이동했습니다. 부대를 상륙시켜 평양으로 가게 하려던 것입니다. 그런데, 9월 17일 정오 쯤에 수송을 마치고 이동하려는 청나라 해군을 일본의 연합함대가 습격했습니다.
이 문제는 교리에 대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청나라는 군함 전력은 있었으나, 딱히 제해권이란 개념에 대해서는 그다지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북양 함대는 주로 수송 중 경호등을 했던 반면에 일본 해군은 제해권을 당연히 알고 있었기에 쉴새없이 정찰하여 적을 찾았습니다.
양측 해군의 전력을 보면, 당시 북양 함대군은 연합함대에 비해 중포는 두배 이상을 갖추었으나, 배수량, 철갑선 숫자, 평균 속력, 실제 마력, 속사포 등에서는 크게 밀렸습니다. 특히 속사포는 청군이 6문이었지만 일본군은 67문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다섯시간 동안 치열하게 펼쳐진 전투에서 청군은 세척의 군함을 잃었는데, 일본 해군은 정원과 진원, 두 철갑선을 집요하게 노려 200발 이상의 포탄을 쏘아댔습니다. 그러나 두 함대는 200발이 넘는 포탄을 맞고도 침몰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기함이었던 정원은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신호 마스트가 포탄을 맞고 부러졌는데, 해전에서 지시를 내릴 정원의 신호 마스트가 부러졌기에 북양 함대는 오합지졸이 되어 서로 각자 싸울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정원 등의 저력은 대단하여, 정원은 연합함대의 기함 마쓰시마에게 주포 공격을 퍼부어 100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이때 수병이었던 미우라 토라지로(三浦虎次郞)는 중상을 당하고 죽어가면서 부함장 무코야마 신키치(向山愼吉)에게 물었습니다.
"정원은 아직 가라앉지 않았습니까?"
무코야마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전투불능으로 만들었다."
이 일화는 용감한 수병(勇敢なる水兵)이라는 이름의 창가로 이후 만들어져 일본인들에게 인기를 끌었습니다. 정오 무렵 시작된 해전은 오후 5시가 지나서야 연합함대가 물러나면서 끝이 났습니다. 포탄이 거의 떨어진 탓이었는데, 북양 함대는 만신창이가 되어 대련항으로 돌아왔습니다.
한편 원세개는 병이 회복된지 이홍장의 지시에 따라 평양에서 일하게 되었지만, 원세개는 죽어도 이 일을 맡기 싫어 육촌 동생을 한성에 파견했습니다. 하지만 이홍장의 압려이 워낙 심해 요동으로 나아갔지만, 이 무렵 청군은 연전연패하고 있었습니다. 계속된 패배에 이홍장을 책망하는 목소리도 당연히 높아졌고, 실제로 이홍장은 수많은 실책을 저질렀습니다. 이에 대해 양계초는 "이홍장의 11가지 책임" 이라는 내용으로 그를 크게 비난 했습니다. 그런데, 양계초는 또 이렇게 평론했습니다.
"만약 이 모든 잘못을 이홍장 한 사람의 책임으로 돌린다면, 이홍장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어디 받아들일 수 없는 정도뿐이겠는가?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 이홍장을 질책하는 자들 역시 그 책임이 이홍장보다 몇 배는 더 컸다. 청일전쟁 중에 나라를 욕되게 하지 않은 지휘관은 단 한명도 없었다."
양계초는 당시 조정에서 이홍장을 탄핵하는 움직임에 대해, '위선자들이 남을 삿대질하며 함부러 지껄였다.' 는 식으로 신랄하게 비난했습니다. 당시 한림원의 시독학사였던 문정식(文廷式) 등은 35명의 동조자를 모아 이홍장을 탄핵했는데, 문정식은 광서제의 총비를 가르쳐 출세한 인물로 군무는 커녕 일반 정무도 모르는 인물이었습니다. 당시 이홍장을 비난하는 사람들 중에 태반은 '서태후가 사라지고, 이홍장이 탄핵 되고 난 뒤 다음 세상' 에서 자신들의 한 자리를 차지하려는 인물들이 절대 다수였던 것입니다.
양계초는 격분하여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청일전쟁의 결과를 놓고 볼 때, 나는 이홍장과 회군을 조금도 용서할 마음이 없다. 그러나 나는 위선적이고, 난폭하며, 제멋대로 날뛰는 자들이 더 싫다. 그들은 일말의 책임감도 느끼지 못한 채 다른 사람 뒤에 숨어 헐뜯기만 했지, 오늘날에 이르도록 개선할 방법을 생각한 적도 없다. 이들이 실제로 나라를 망하게 한 자들이다. 이홍장은 비난 받아 마땅하지만, 이런 자들은 이홍장을 비난할 자격조차 없다!"
"전쟁은 단지 하나의 측면에 불과하다. 일본군은 최근 30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군대를 육성했고, 천황과 신하들이 모두 함마음이 되었다. 만약 자신감이 없었다면 어떻게 그렇게까지 싸울 수 있었겠는가? 실패하고 나서야 실패의 원인을 아는 자는 어리석은 자이다. 게다가 실패하고 난 뒤에도 실패 원인을 알지 못하는 자는 송장과도 같다. 그런데 모두가 이홍장 한 사람에게만 죄를 묻고 있으니,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이 전쟁을 본 서양의 매체에서는 다음과 같이 평론했습니다.
"일본은 결코 중국과 전쟁을 한 것이 아니다. 실제로는 이홍장 한 사람과 전쟁을 한 것이다."
실제로 각 성의 봉강대리는 나타나지도 않은 채 자신들의 땅만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재밌는 사례로, 청일전쟁 당시 일부 함대가 투항 할때, 이를 풀어주라고 요청하는 쪽에서 그 배는 광둥 수군 소속의 배로, 광둥 지역은 청일전쟁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각국 인사들은 모두 비웃었지만, 이는 농담도 아니었고,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청일전쟁에 나서는 대부분의 봉강대리들이 가지고 있던 인식이었습니다.
양계초는 이러한 에피소드를 적으면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상황이 정말 이러했다면, 일본은 바로 이홍장 한 사람과 전쟁을 했던 것이다. 한 사람의 힘으로 하나의 국가에 대항하다니……이홍장이여, 이홍장이여! 당신은 비록 지긴 했지만, 그래도 분명한 호걸임엔 틀림없다!"
한편, 일단 불을 꺼야 했던 조정에서는 태평천국을 운동을 겪은 노장인 75세의 송경(宋慶)을 기용했고, 송경은 여순의 의군을 이끌고 요동에서 전선으로 급히 이동했습니다. 하지만 그 후에 일본의 제2군이 요동에 상륙해 여순을 점령했는데, 이때 일본군은 일반 시민과 부녀자를 학살했습니다. 여순에 있던 각국의 신문기자들은 이를 대서특필했고, 특히 '뉴욕 월드' 는 일본군이 비전투원 6만 명을 학살했다고 보도하면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문명의 거죽을 뒤집어쓰고, 야만의 근골을 지닌 괴수가 이제 문명의 가면을 벗고 야만의 정체를 드러냈다."
영국의 '타임스'는 일본군의 포로 학살, 여성 살패 등을 보도하고, 목격자 등을 언급한 후에, 지면을 통해 전쟁을 일으킨 무쓰 무네미쓰에게 따져 물었습니다.
"일본 정부는 이것을 어떻게 처리하겠는가?"
이때 일본군의 제1군은 압록강을 건넌 시점이었습니다. 이제 전쟁의 무대는 조선을 떠나 청나라로 이르렀는데, 당시 일본의 국력으로는 더 이상 진군하는건 한계였습니다. 게다가 중국 땅에서는 게릴라화된 장병들이 협력하는 농민들과 함께 일본에 대항했는데, 중일전쟁 당시도 극복하기 어려웠던 일을 이 시점에서 헤쳐나갈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제1군 사령관이었던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아랑 곧 하지 않고 베이징으로 진격하자는 주장을 했습니다. 아마도 제2군의 여순 함락에 자극을 받은 면도 있어 보입니다. 대본영은 폭주를 막가 위해 아리토모를 해임했습니다. 베이징까지 진격하기도 무리고, 만일 베이징으로 진군하여 만에 하나 청나라 조정을 분쇄시킬 수 있다 쳐도, 그 때문에 얻을 이득은 거의 없었습니다. 어차피 협상을 통해 뜯어낸다고 해도 청나라가 잔존하는 편이 나으면 나았지, 청나라가 사라진다면 이후에는 중국이라는 가공할 영토의 어마어마한 게릴라를 상대로 끝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을 진흙탕 싸움을 해야 합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일본도 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더욱이 여순 학살 사건 때문에 미국에서도 반응이 이상했습니다. 당시 미국과 일본은 새로운 조약에 관한 교섭을 진행 중이었는데, 미국의 국무부 장관은 일본의 공사에게 "만일 여순 사건이 진실이라면, 조약 비준에 대해 상원의 찬성을 얻기가 힘들다." 는 말을 전했습니다. 게다가 송경의 의군도 꽤 성과를 내고 있었습니다. 여담의 이야기지만, 이 송경이 이끌던 의군에는, 훗날 만주 봉천군 80만의 지배자였던 사나이, 젊은 시절의 장작림도 병사로 부임하고 있었습니다.
장작림
무쓰 무네미쓰는 이제 적당한 타이밍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청나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좀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청나라의 '만주족 정권' 이야말로 가장 고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태평천국과 홍수전의 대두 이래, 만주족 정권은 순전히 한족 군벌의 힘으로 나라를 지켰습니다. 제아무리 이홍장을 탄핵한다고 해도, 팔기군으로 일본에 맞서라고 한다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마침내 공친왕 혁흔이 전면으로 나섰습니다. 그 뒤에는 강화를 바라는 서태후가 있었습니다. 중화 제국은, 이제 일본에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다 아는 예기지만, 평양성 전투에서 그 군복이 화를 불렸죠. 결과적으로 청군의 보물인 개틀링건의 위치를 알려주는... ㅡㅡ;; 물론 말씀하시는 요지는 동감입니다.
정말 이거 연재 쩔어주네요 ㄷㄷ 얼마 안 있으면 의화단도 나오겠군요 ㅋ
혹시 이거 책으로 내실 생각 없으세요? 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