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단군세기에 나온다.
조선 15대 단군 대음 40년(5576-BC1622) 임금이 아우 대심(大心)을 봉(封)하여 남선비(南鮮卑) 대인(大人)으로 삼았다.
조선 32대 단군 추밀 3년(6351-BC847) 선비산(鮮卑山)의 추장 문고(們古)가 조공을 바쳤다.
그러나, 중국측의 대부분의 사서에는 선비는 오환(烏丸)과 더불어 동호(東胡)족의 한 갈래로 흉노(匈奴)의 모돈(冒頓) 선우(單于)에 의해 동호가 무너진후 비로소 독립하여 선비산에 머물던 후부터 선비족이라 칭하게 되었다.(6992-BC206)
고 기록하고 있으니, 정확한 것은 알지 못하겠다.
고구려 유리왕 11년(7189-BC9) 선비가 고구려를 자주 침략하니, 부분노가 계략으로 이를 물리치고, 속국으로 삼았다.
흉노가 흥하였을 때 흉노에 속하여, 흉노의 북쪽에 머물다가, 흉노가 무너진 후 흉노의 뒤를 이어, 한과 통교하고(7246-AD49) 북방 초원지대를 점유하게 되었다. 선비인 편하(偏何)는 약화된 흉노를 지속적으로 정벌하면서, 한과 통교하였다. 이때부터 선비가 서서히 뭉치기 시작하였다.
7287(AD90)년 북흉노가 무너지고 선비가 이 지역을 아우르자 흉노족 10만 여호를 지배함으로써 점차 강성해 졌다.
이후 교위(校尉) '외'가 후한으로부터 솔중왕(率衆王)에 봉함을 받았다.
7294(97)년 비여현(肥如縣)을 공격하였다.
7303(106)년 선비가 어양(漁陽)을 공격하는등 한과 적대 관계에 놓이게 된다.
이후 다시 연려양(燕려陽)이 후한의 궁궐에 입궐하여 왕으로 봉함을 받았다.
7312(115)년 요동 선비가 무려현(無廬縣)을 공격하여 현령을 살해하였다.
7315(118)년 선비의 대인 기지건(其至건)이 만여기병으로 후한을 침략하여 장사(長史)를 죽였다.
7318(121)년 선비가 현토를 침략하였다.
7323(126)년 선비의 대인 기지건이 대군(代郡)을 침략하여 태수 이초(李招)를 죽였다.
7324(127)년 요동선비 육천여기가 현토를 침략하였다.
선비 대인 기지건의 등장은 드디어 선비족들이 큰 부족단위로 통합됨을 보여준다.
이는 다음 등장할 선비족을 최초로 통일시킨 단석괴 출현의 밑거름이 되었다.
단석괴(檀石槐)
단석괴의 아버지는 투록후(投鹿侯)로 요서선비족이다. 투록후가 흉노를 정벌하기 위해 3년간 집안을 비웠는데, 그 처가 단석괴를 낳았다. 이때가 7335(138)년 경이다.
단석괴(檀石槐)는 탄한산(彈汗山) 철구수(철仇水)에서 선비족 각 부락에 의해 '대인(大人)' 추대되었다.
7353(156)년 한의 운중(雲中)을 침략하였다.
7355(158)년 선비가 한의 북변을 침략하자 사흉노중랑장(使匈奴中郞將) 장환(張奐)이 남선우를 거느리고, 선비를 공략하였다. 7356(159)년 한의 안문을 침략하였다.
7363(166)년 여름 단석괴가 기병 수만을 나누어 한의 변방 아홉군을 침략하자, 한은 화친을 구하였다.
이로부터 해마다 한의 변방을 침략하였으나, 한은 대항하질 못하였다.
이로써 선비의 영역은 동쪽으로는 부여(夫餘), 서쪽으로는 오손(烏孫), 북쪽으로는 정령(丁令), 남쪽으로는 한(漢)과 접해 있어 동서가 일만 이천여리고 남북이 칠천여리이다.
단석괴는 그 땅을 삼부(三部)로 나누어 각각 삼부대인(三部大人)이 다스리게 하였다.
동부(東部)는 우북평(右北平)의 동쪽으로 부여와 맥에 접해 있다. 이십여개의 읍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인은 미가(彌加), 궐기(闕機), 소리(素利), 괴두(槐頭)가 있었다.
중부(中部)는 우북평(右北平)의 동쪽 상곡(上谷)의 서쪽으로 십여개의 읍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인은 가최(柯最) 궐거(闕居), 모용(慕容)이 있었다.
서부(西部)는 상곡(上谷)의 서쪽에서 돈황(敦煌)에 이르는 곳으로 오손(烏孫)과 접해 있다. 이십여 읍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인은 치건락라(置건落羅), 일율추연(日律推演), 연려유(宴려游)가 있었다.
7374(177)년 한의 영제가 호오환교위(護烏桓校尉) 하육(夏育)과, 파선비중랑장(破鮮卑中郞將) 전안(田晏), 흉노중랑장(匈奴中郞將) 장민(藏旻)을 파견하여 선비를 정벌하려 하였지만, 단석괴에게 크게 깨졌다.
7379(182 혹은 183)년을 전후로 단석괴가 45세의 나이로 죽었다. 아들 화련(和連)이 대인을 계승하였다.
화련이 단석괴의 뒤를 이었으나, 삼람됨이 모자라, 7385(188)년에 화살을 맞아 죽자, 화련의 아들 건만(騫曼)이 나이가 어려, 화련의 형의 아들 괴두(槐頭)가 대신하여 섰다. 괴두가 죽자, 막내 보도근(步度根)이 섰다. 이에 둘째 부라한(夫羅韓)도 스스로 대인의 자리에 올랐다.
이로써 선비는 동부대인에 보도근이, 중부대인에 가비능(軻比能), 서부대인에 부라한이 각각 서게 되어 분열하였다.
선비가 불열하자 한이 건안(196 - 219)중에 유주를 평정하였다.
가비능(軻比能)
가비능은 단석괴가 죽은 후 중부대인으로 올라 선비족 재통합의 길을 마련하였다.
7417(220)년 비능이 위(魏)에 사람을 보내어 통교하니 문제가 비능을 부의왕(附義王)으로 삼았다.
이 당시 동부대인 보도한과 자주 전쟁을 하였다. 차츰 보도한이 약해지자 보도한은 부락민 만여락(萬餘落)을 거느리고, 태원(太原) 안문군(안門郡)으로 들어갔다.
또한 비능이 서부대인 부라한을 죽이자, 부라한의 아들 설귀니(泄歸泥)가 처음에는 비능에게 복속하더니 후에 보도한에게 들어가자 보도한은 다시 강해졌다.
7418(221)년 비능이 위(魏)와 화친하고, 동부대인 소리(素利)와 보도한을 공격하였다.
7421(224)년 동부대인 소리를 공격하자 오환교위(烏丸校尉) 전여(田予)가 비능의 뒤를 공격하였다. 이에 비능이 쇄노를 보내어 대응하였지만, 전여가 이를 크게 깨뜨렸다. 비능이 위험을 느끼어 위(魏)의 보국장군(輔國將軍) 선우보(鮮于輔)에게 도움을 청하자, 전여가 이에 물러났다.
7445(228)년 전예(田豫)의 통역관인 하사(夏舍)가 비능의 사위인 울축건(鬱築건)에게 살해되자 전예가 서부선비 만두(滿頭), 설귀니와 함께 울축건을 토벌하자, 비능이 몸소 삼만 기병으로 환군하는 전예를 마성(馬城)에서 포위하니, 상곡(上谷)태수 염지(閻志)가 그 포위를 풀 것을 설득하여 비능이 물러 났다.
7430(233)년 6월 비능이 보도한과 연합하여 설귀니와 함께 병주(幷州)를 공략하여 많은 재물을 획득하였다. 이에 병주자사 필궤(畢軌)가 소상(蘇尙)과 동필(董弼)을 보내어 토벌게 하였는데, 비능이 아들에게 천여기로 보도한과 연합하여 누번(樓煩)에서 이를 맞아 두 장군을 죽였다. 이에 위(魏)의 명제가 진랑(秦郞)을 보내어 정벌하니, 이에 막남(漠南)으로 패주하였다. 설귀니가 비능에 반란하여 위나라에 복속하고, 보도한이 비능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해 10월 보도한이 살해되자, 대인 대호아랑니(戴胡阿狼泥)가 병주로 가서 진랑에 항복하였다.
7432(235)년 유주자사(幽州刺使) 왕웅(王雄)이 용사(勇士) 한룡(韓龍)을 보내어 비능을 죽이자 비능의 동생이 대인으로 올랐다. 그러나 그 부락이 흩어지니, 한수(漢水)의 남쪽, 황룡(黃龍)의 북에 머물게 되어 거란(契丹)이 되었다.
모용부(慕容部)
그의 조상은 유웅씨(有熊氏)의 묘예(苗裔)로 동호족(東胡族)으로 흉노에 의해 깨진후 선비가 되었다. 후에 단석괴에 의해 중부대인이 된 모용(慕容)에 의해 그 씨족이 일어나게 되었다. 막호발(莫護跋)은 모용(慕容)의 아들로 부족을 이끌고 요서로 들어가 자립하였다.
막호발의 뒤를 이어 목연(木延)이 서고, 목연의 뒤를 이어, 섭귀(涉歸)가 섰다. 섭귀는 창려군(昌黎郡)을 점령하니, 이로써 발전하게 되었다.
7466(269)년에 모용외(慕容외)가 태어났다.
7480(283)년 섭귀가 죽자 동생 산(刪)이 섰다.
7482(285)년 산이 서자 산이 외를 죽이려고 하자 요동의 서욱가(徐郁家)에 숨어 있다가 산이 부하에 의해 살해되자, 외가 드디어 선우(單于)가 되었다.
7486(289)년 진(晉)과 통교하여 화친하였다. 이 무렵 우문부(宇文部), 단부(段部)와 사이가 좋지 않아 단부의 선우(單于) 계(階)의 딸을 처로 맏이 하였다. 이에 황, 인(仁), 소(昭)를 낳았다.
7490(293)년 고구려를 침략하였으나, 고구려 장수 고노자에게 패하였다. 이때가 고구려 봉상왕 2년이다.
7491(294)년 수도를 극성(棘城)으로 옮기었다. 극성은 단석괴의 수도였다.
7493(296)년 고구려를 침략하여 서천왕의 묘를 파해쳤다.
7499(302)년 우문선우 막규(莫圭)가 아우 굴운(屈雲)으로 하여금 외를 공격하자, 외도 우문의 소노정(素怒廷)을 공격하였다. 소노정이 이에 병사 십만으로 극성을 포위하였는데, 외가 이를 크게 격파하였다.
7504(307)년 외가 스스로 선비대선우(鮮卑大單于)라 칭하였다.
7508(311)년 외가 선비 소희련(素喜連)과 선비 목환진(木丸津) 이부(二部)를 통합하였다.
7510(313)년 진의 백성 만여가가 이주하였다.
7516(319)년 진의 평주자사 최비와 고구려, 단씨, 우문씨가 극성을 공격하였으나, 이를 쳐부수고, 모용한과 모용인을 보내어 고구려를 치니 고구려가 화평하길 청하자, 돌아왔다.
7517(320)년 고구려가 침략하자, 모용인이 이에 맞섰으나 깨졌다.
7518(321)년 황이 외를 이어 선우(單于)에 올랐다.
7530(333)년 외가 죽었다.
전연(前燕)
1대 문명제(文明帝)
1년(7534-337) 이름은 모용황으로 이때에 나라를 열어 국호를 연(燕)이라 하였다.
3년(7536-339) 고구려를 침략하자, 고구려왕 쇠가 화친을 구하니 돌아왔다.
6년(7539-342) 10월 용성으로 수도를 옮겼다. 11월 중원을 도모하기 앞서 고구려를 치길 모용한이 청하자. 황이 모용한(翰)과 모용패(覇)를 선봉으로 하여 군사 4만으로 남쪽길로 가고, 왕우(王宇)등 1만 5천으로 북쪽으로 갔다. 이에 고구려가 군사 5만으로 북쪽을 막았으나, 남쪽으로 고구려를 격파하고, 환도성을 빼앗았다. 고구려 미천왕의 묘를 파고, 왕모와 각종 보물 그리고 5만여호를 포로로 하고, 환도성을 허물고 돌아왔다.
7년(7540-343)년 고구려왕이 그 부왕의 시체를 돌려줄 것을 청하며 물자 수천을 받치자, 부왕의 시체를 돌려 주었다.
9년(7542-345)년 모용각으로 하여 고구려를 침략하니 남소를 빼앗고, 술진을 설치하였다.
12년(348) 52세로 황이 죽으니, 태자 준(雋)이 제위에 올랐다.
2대 경소제(景昭帝)
1년(7545-348) 이름은 모용준(慕容雋)으로 황의 둘째 아들이다.
2년(7546-349) 조위(趙魏)에서 대란이 일어나자 모용각(恪)을 보국장군으로, 모용평(評)을 보필장군으로, 양무를 보의장군으로, 모용 수(垂)를 전봉도독 건봉장군으로 삼아 병사 이십여만으로 대비하였다.
3년(7547-350) 삼군을 나누어 남쪽을 정벌하여 중산(中山)에 이르렀다.
8년(7552-355) 고구려의 태자를 인질로 잡고, 왕모를 돌려 보내주었다.
10년(7554-357) 태자 모용엽(曄)이 죽자, 차자 모용위(暐)를 태자로 세웠다.
13년(7557-360) 준이 죽으니, 나이 42세였다.
3대 유제(幽帝)
1년(7557-360) 이름은 모용위(暐)로 준의 셋째아들이다.
5년(7561-364) 모용각과 모용평을 보내어 남쪽을 정벌하니, 허창(許昌), 현호(懸瓠), 진성(陳城)을 함락하였다. 여름 비가 많이 와 이내 그치었다.
7년(7563-366) 모용려로 하여금 진(晉)의 태산을 공격하니 태수가 회남으로 도망하였다.
11년(7567-370) 진(晉)나라 왕맹이 침략하여 모용위를 사로잡았다. 이로써 연(燕)나라가 무너졌다.
이로써 모용외 이후 3대를 이어, 33년간 나라를 이어왔음이다.
서연(西燕) [7551(354)-7591(394)]
전연의 마지막 황제 위의 동생 홍(泓)과 충(沖)으로 시작되었으나 곧 후연에 합병되었다.
후연(後燕)
7582(385)년 6월고구려가 군사 4만으로 용성을 침략하고, 요동과 현도를 함락하여 1만을 포로로 하여 돌아갔다. 11월 모용농(農)으로 하여 고구려를 침략하여 요동과 현도를 회복하였다.
1대 성무제(成武帝)
1년(7583-386) 황의 다섯째 아들로 이름은 모용수(垂)이다. 전진이 쇠약해지자, 나라를 열으니, 일명 후연이라 한다.
10년(7582-395) 수가 나이 71세로 죽었다.
2대 혜민제(惠愍帝)
1년(7593-396) 이름은 모용보(寶)로 모용수의 넷째아들이다.
3년(7595-398) 위(魏)가 중산을 침략하자, 모용호(皓)가 보(寶)를 죽이고, 모용린(麟)을 세우고자 하였으나, 성(盛)이 이를 물리치고, 제위에 올랐다.
3대 소무제(昭武帝)
1년(7595-398) 이름은 모용성(盛)으로 모용보의 서자이다.
3년(7597-400) 모용성이 표기장군 모용희를 선봉으로 하여 군사 3만으로 고구려를 침략하여 신성과 남소성을 공취하였다.
4년(7598-401) 성이 전쟁에 나서 상처를 입어 죽으니, 나이 29세 였다.
4대 소문제(昭文帝)
1년(7598-401) 이름은 모용희(募容熙)로 모용수의 아들이다.
2년(7599-402) 고구려가 숙군성을 공격하자 모용귀가 깨졌다.
4년(7601-404) 고구려가 침략하였다.
5년(7602-405) 모용희가 고구려 요동성을 공략하였으나 이길 수 없었다.
6년(7603-406) 모용희가 거란을 공격하고 경북에 이르렀다. 고구려 목조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길 수 없었다.
7년(7604-407) 중위장군 풍발이 모반하여 고운을 세우니, 모용희 나이 23세였다.
남연(南燕)
1대 헌무제(獻武帝)
1년(7595-398) 이름은 모용덕(德)이다. 모용황의 아들이다.
8년(7602-405) 모용덕이 죽으니, 나이 70이었다. 모용초가 섰다.
2대 모용초(慕容超)
1년(7602-405) 모용덕의 형 북해왕 모용납(納)의 아들이다.
6년(7607-410) 동진(晉)이 침략하여 나라가 무너졌다.
북연(北燕)
1대 고운(高雲)
1년(7604-407) 조부는 고구려의 고양고씨의 후예이다. 처음 모용보가 고운이 무예가 능함으로 양자로 맞이하고 모용씨를 주었다. 풍발(馮跋)이 모반하여 모용희를 죽이고, 고운을 왕으로 세웠다.
2년(7605-408) 3월 고구려와 종족의 예로써 화친하였다.
3년(7606-409) 풍발이 고운을 죽이고, 제위에 올랐다.
2대 문성제(文成帝)
1년(7606-409) 이름은 풍발(馮跋)이다. 장락신도(長樂信都)인이다. 아버지는 안(安)이다.
22년(7627-430) 발이 죽고 아우 홍이 섰다.
3대 소성제(昭成帝)
1년(7627-430) 이름은 풍홍(馮弘)이다. 풍발의 아우로 풍발의 아들 익(翼)을 죽이고 제위에 올랐다.
7년(7633-436) 위가 침략하니, 왕이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어 도움을 청하였다. 고구려가 장군 갈로맹광을 보내어 풍홍을 보호하였으나 이내 용성이 불타고 무너졌다. 이로써 연나라는 완전히 망하였다.
요동에 자리잡은 풍홍은 결국 2년 후 고구려에 의해 북풍에서 살해되었다.
토곡혼부(吐谷渾部)
토곡혼은 외의 배다른 형으로 아버지 보귀가 혼(渾)에게 천칠백호를 준데서 시작하였다.
보귀가 죽고 외가 모용의 선우에 오르고, 외와의 사이가 좋지 않아 부락을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스스로 자립하였다. 이때가 바로 7482(285)년경이다.
토곡혼은 처음 음산(陰山)에 머물다 후에 복후성(伏侯城)에 자릴 잡았다.
토곡혼이 대를 이어 토연(吐延), 엽연(葉延), 쇄해(碎奚), 시련(視連), 시비로 이어지더니, 시비를 이어 형제 호흘제(烏紇提)가 이었고, 다시 시비의 아들 수락간(樹洛干), 아시(阿豺)가 차례로 서고, 호흘제의 두아들 모귀와 모리연(慕利延)이 서고, 다시 수락간의 아들 습인(拾寅), 도이후(度易侯), 복련주(伏連籌), 과여로 이어졌다.
7773(576)년 과여때에 대란이 일어나 북주의 고조가 태자 윤(贇)을 보내어 토곡혼부를 치니, 이에 부락이 무너져 흩어져 버렸다.
탁발부(拓跋部)
탁발부는 탁발씨의 선조 모(毛)로부터 시작되고, 대(貸), 관(觀), 루(樓), 월(越)이 대를 이어, 6대 추인(推寅)이 단석괴 때에 서부대인이 되면서 일어나게 되었다. 리(利), 사(俟), 사(肆), 기(機), 개(蓋), 쾌, 인, 힐분(詰汾)이 차례로 대를 이었다.
7417(220)년 탁발부의 15대 선우인 력미(力微)가 섰다. 력미는 추인의 후손 힐분(詰汾)의 아들이다. 력미가 몰록회부(沒鹿回部) 대인 두빈(竇賓)과 더불어 서부를 공략하였는데, 패하였다.
7445(248)년 두빈이 죽자 몰록회부를 병합하니, 여러 부들이 모두 복종하였다.
7455(258)년 제천행사에 여러부의 대인들이 왔으나 백부(白部) 대인이 오지 않아 력미가 이를 죽였다. 도읍을 성락(盛樂)에 정하였다.
7458(261)년 력미가 아들 사막한(沙漠汗)을 위(魏)에 보내어 화친하였다.
7474(277)년 력미가 죽고, 아들 실록(悉鹿)이 섰다.
7483(286)년 실록의 뒤를 이어 력미의 아들 작(綽)이 섰다.
7490(293)년 작의 딸을 우문부(宇文部)의 보발(普撥)에게 시집보냈다. 작이 죽고, 소막한의 아들 불(弗)이 섰다.
7491(294)년 불이 죽고, 력미의 사자(四子) 록관(祿官)이 섰다.
록관이 즉위하자 나라가 나뉘어 삼부(三部)가 되니, 하나는 의이, 나머지 하나는 의로가 각각 다스렸다. 의이와 의로는 력미의 손자로 아버지는 력미의 장자 사막한이다. 사막한은 력미 말년에 부족장들의 간언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7495(298)년 록관의 딸을 우문부의 손일연(遜일延)에게 시집보냈다.
7504(307)년 록관이 죽자 의이가 록관을 계승하였다.
7512(315)년 의이의 뒤를 이어, 아들 보근(普根)이 섰는데, 의로가 보근의 자리를 빼앗고, 마침내 재통합을 이루었다.
의로가 즉위하자 아들 육수(六脩)와 비연(比延)사이에 계승 다툼이 일어났는데, 비연이 살해 되었다.
7513(316)년 의로가 전사하자, 보근이 다시 즉위하였다. 이해 보근이 죽고, 불의 아들 울율(鬱律)이 즉위하였다.
7518(321)년 의이의 처 유씨(惟氏)가 울율을 죽이고, 의이의 아들 하녹을 세웠다.
7522(325)년 하녹의 뒤를 이어 동생 흘나(紇那)가 섰다.
7524(327)년 흉노의 석륵(石勒)이 석호(石虎)를 보내어 침략하자, 모용부(慕容部)에 피해있다가 대령(大寧)으로 옮기었다. 이로부터 세력이 약화되더니, 흘나의 뒤를 이어 울율의 아들인 예괴가 섰고, 이때에 이르러 석륵에 복속하게 되었다. 예괴를 이어 십익건(什翼건)이 서고 도읍을 다시 성락으로 옮기며 중흥을 꾀하였지만, 전진(前秦)의 부견(符堅)이 침략하자 다시 음산(陰山)의 북쪽으로 이주 하였다. 부견이 후퇴함에 다시 성락으로 돌아오자, 부견이 독고부(獨孤部)의 유고인(劉庫仁)과 흉노의 철불위장(鐵弗衛長)으로 제압하려 하였으나, 같은 선비인 유고인은 탁발과 친하였다.
전진이 동진(東晋) 정벌에 실패한 틈을 타서 부락에서 유고인과 함께 십익건의 손자 규(珪)를 부락의 대표로 세우니, 이가 바로 북위(北魏)를 건국한 도무제(道武帝)이다.
북위(北魏)
1대 도무제(道武帝)
1년(7583-386) 이름은 탁발규(珪)이다. 나라를 열어 위(魏)라 하였다.
24년(7606-409) 제가 승하하자 묘호를 태조(太祖)라 하였다.
2대 명원제(明元帝)
1년(7606-409) 이름은 탁발사(嗣)이다. 도무제의 장자로 10월에 자리에 올랐다.
15년(7620-423) 제가 병으로 승하하자 묘호를 태종(太宗)이라 하였다.
3대 태무제(太武帝)
1년(7620-423) 이릉은 탁발도(燾)이다. 명원제의 장자로, 이해 11월에 자리에 올랐다.
30년(7649-452) 3월 제가 승하하자 묘호를 세조(世祖)라 하였다.
4대 경목제(景穆帝)
1년(7649-452) 이름은 탁발황(晃)이다. 태무제의 장자이다. 이해에 제가 승하하자 묘호를 공종(恭宗)이라 하였다.
5대 문성제(文成帝)
1년(7649-452) 이름은 탁발준(濬)이다. 경목제의 장자이다.
14년(7662-465) 4월 제가 승하하자 묘호를 고종(高宗)이라 하였다.
6대 헌문제(獻文帝)
1년(7662-465) 이름은 탁발홍(弘)이다. 문성제의 장자이다.
7년(7668-471) 제가 아들 굉에게 천자의 물려주었다.
7673(476)년 제가 승하하니 묘호를 현조(顯祖)라 하였다.
7대 효문제(孝文帝)
1년(7668-471) 이름은 탁발굉(宏)이다. 헌문제의 장자이다.
29년(7696-499) 제가 승하하니 묘호를 고조(高祖)라 하였다.
8대 선무제(宣武帝)
1년(7696-499) 이름은 탁발각(恪)이다. 효문제의 둘째 아들이다.
17년(7712-515) 1월에 제가 승하하니 묘호를 세종(世宗)이라 하였다.
9대 효명제(孝明帝)
1년(7712-515) 이름은 탁발후이다. 선무제의 둘째 아들이다.
14년(7725-528) 3월 제가 승하하니 묘호를 숙종(肅宗)이라 하였다.
10대 효장제(孝莊帝)
1년(7725-528) 이름은 탁발자유(子攸)이다. 팽성왕(彭城王) 협의 셋째 아들로 조부는 헌문제이다.
4년(7728-531)
1대 효정제(孝靜帝)
1년(7731-534) 이름은 탁발선견(善見)이다. 청하(淸河)의 문선왕(文宣王) 단(亶)의 아들로 효문제의 3대손이다.
17년(7747-550)
서위(西魏)
1대 문제(文帝)
1년(7732-535)
17년(7748-551)
2대 폐제(廢帝)
1년(7748-551)
4년(7751-554)
3대 공제(恭帝)
1년(7751-554)
4년(7753-556)
우문부(宇文部)
우문부는 그 선조가 보회(普回)이다. 보회의 자(子)가 우문(宇文)으로 이를 부족명으로 삼았다. 그 연대는 가히 알 수 없으나, 7482(285)년에 최초로 우문이 등장하게 된다.
7490(293)년 막괴(莫槐)가 포악하여 부하에게 살해되고, 동생 보발(普撥)이 대를 이었다. 이에 보발은 탁발씨의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보발의 대를 이어 구불근(丘不勤), 막외, 손일연(遜일延), 걸득귀(乞得歸), 가 차례로 대를 이었다.
7499(302)년 막규(莫圭)가 동생 굴운(屈雲)을 보내어 모용외(慕容외)를 공격하였다.
7530(333)년 별부(別部)의 대인 일두귀(逸豆歸)가 걸득귀를 죽이고 선우가 되었다.
독발부(禿髮部)
독발부는 7417(220)년 경 독발오고(禿髮烏孤)의 8대조 필고(匹孤)가 하서(河西)로 옮겨와 부락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필고가 죽고, 아들 수전이 섰다.
7467(270)년 오고의 5대조 수기능(樹機能)때에 진주자사(秦州刺史) 호열(胡烈)이 공격해 오자 만곡퇴(萬斛堆)에서 호열을 죽였다. 수기능의 대를 이어 몰골(沒骨)이 대를 이었다. 몰골이 부족에 의해 살해되고 동생 무환(務丸)이 섰다.
무환의 3대손 사복건(思復건)이 서자 부락이 강성해지기 시작하였다.
독발오고(禿髮烏孤)에 이르자 드디어 선우에 올랐다.
오고가 죽고 동생 리록고(利鹿孤)가 서고, 도읍을 서평으로 옮겼다.
리록고가 죽고 그의 동생 녹단이 대를 이었다.
녹단이 전쟁을 좋아하여, 부족이 약화되더니 걸복부의 치반(熾磐)에게 항복하였다. 끝내 치반이 녹단을 독살하자. 그의 아들 하(賀)는 도망치 독발부는 망하게 된다.
단부(段部)
단부의 시작은 취육권(就六眷)으로부터 시작된다. 2대조 일륙권(日陸眷)이 오환의 대인 고욕관(庫辱官)의 밑에 있다가, 배반하고 독립하였다. 일륙권이 죽고 동생 걸진(乞珍)이 서고, 걸진이 죽자, 아들 무목진(務目塵)이 섰다.
무목진은 취육권의 아버지로 요서의 땅에 거하며, 진(晋)에 복속하였다. 무목진은 삼만여가를 거느리고, 공현상마(控弦上馬) 사오만기를 거느렸다.
7500(303)년 목제(穆帝)가 무목진을 요서공에 봉하였다.
무목진이 죽자 아들 취육권(就六眷)이 섰다.
취육권이 유주자사(幽州刺史) 왕능(王凌)을 도와 아우 문앙(文鴦), 과 말배, 필제등과 함께 석륵(石勒)을 쳤다. 석륵이 패하여 돌아가는데, 말배가 석륵을 뒤쫓다 패하여 포로가 되자. 취육권이 석륵과 화친하고 말배가 돌아 왔다.
취육권이 죽자 걸진의 아들 섭복진(涉復辰)이 섰다. 이때 필제가 말배를 공격하자, 이에 말배가 필제를 격파하고, 섭복진을 죽이고, 그의 아버지 홀발린(忽跋린)이 섰다. 홀발린을 이어 말배가 섰다.
7522(325)년 말배가 죽고 동생 아(牙)가 섰다. 아가 바로 그해에 죽고, 말배의 아들 근(勤)이 섰다. 그러나 그 부족이 갈라져 일륙권의 2대손인 호요(護遼)가 자립하였다.
7535(338)년 호요가 석호(石虎)에게 쫓기어 모용황(慕容晃)에게 의탁하더니, 황에게 살해 당했다.
호요의 동생 울란(鬱蘭)이 다시 석호에 의지하더니, 울란의 아들 감(龕)에 이르러 모용준(慕容儁)의 아우 현공(玄恭)에게 정벌되어 멸망하였다.
한편 말배의 아들 권(勸)은 모용준에게 의탁하다 준에게 정벌당했다.
이로써 단부(段部)는 모용부(慕容部)에 흡수 동화 되었다.
걸복부(乞伏部)
걸복부가 언제부터 존재했는지는 알 수 없다.
7526(329)년 농서선비(농西鮮卑) 걸복술연(乞伏述延)이 범천(范川)에 머물며 이웃 부락을 침략하였다.
술연의 대를 이어, 녹대한(녹大寒), 사번(司繁), 국인(國仁)에 이르고, 국인의 동생 건귀(乾歸)에 이어지고, 아들 치반(熾磐)이 섰다. 치반이 죽고, 아들 모말(暮末)에 이르렀다.
7628(431)년 나라에 반란이 빈번하자, 모말이 종족 오백여명과 함께 북위에 항복함으로써 걸복부는 소멸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