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4일, 얼굴을 에는 칼바람이 불었다. 4개 조로 나뉜 108가구는 이미 경찰에게 4번에 걸쳐 추방당했던 이른바 나란히토 마을을 다시 점거했다. 이들은 바람을 피해 사람들과 짐 보따리 사이에 임시 천막을 설치했다. 점거를 주도한 호르헤 메르카도가 풀죽은 모습을 보인다. “당장 내일부터 생계형 경작을 시작할 것이다.” 강력한 기억이 그를 파도처럼 엄습한다. 특히 무자비했던 마지막 추방이 떠올랐다. “경찰은 184개의 오두막집 불태웠다! 이들은 닭과 가축을 훔치고, 돼지를 죽였다.”
1967년, 독재자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는 독일인 에리히 벤드리에게 이 땅을 선물했다. 이자의 자손인 라이너와 마가리타가 이 땅을 상속 받았다. 하지만 이 땅은 국가 땅이다. 메르카도는 “우리는 법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 살피고 있다. 우리는 파라과이의 영토를 한 조각 한 조각 되찾은 수년간의 경험이 있다”라고 지적한다. 그가 대지주들과 콩 재배자들의 탐욕을 계속 얘기하고 있는 가운데 천막촌에 어둠이 깔렸다. 농민들이 붉게 타고 있는 화로 곁에 쭈그리고 앉아 마테차를 마시며 몸을 녹인다.
이틀 후, 경찰은 습관적인 폭력으로 점거자들을 다시 추방했다. 인구 670만 명인 파라과이에서, 대략 30만 가난한 농민 가정은 땅을 소유하지 못했다. 파라과이의 과거를 들먹일 필요는 없지만, 라티푼디오(거대 사유 농장) 모델이 확고히 뿌리 내린 시기는 19세기 말이다. 스트로에스네르 치하에서, 나란히토와 같은 국가 소유의 땅이나 법적으로 농지개혁 대상인 많은 땅들, 즉 임자 없는 땅들이 독재자의 친구, 공범자, 군부, 가신들에게 분배됐다. 더군다나 1970년대 말부터는 큰 변화가 생겼다. 이웃 국가인 브라질 남부 주로부터 농업기계화의 주력 작물인 콩이 파라과이 국경을 넘어 왔기 때문이다.
콩 시장 확대에 중소 농장주의 반대
시골에 분란이 일었다. 역사적으로 파라과이를 먹여 살리던 중소 농장주들이 수출로 선회한 콩 시장의 확장을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물론 반대자들을 꼼짝 못하게 추방하는 방법은 다양했다. 경제학자 루이스 로하스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땅을 매입하는 것이다. 평생 구경하지 못한 돈을 농민에 건네는 것이다. 하지만 일확천금을 손에 쥔 농민은 도시로 나가 3, 4개월 만에 돈을 탕진하고 가난에 허덕인다. 왜냐하면 도시엔 일자리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콩은 뱀 같은 가시 덩굴을 사방으로 뻗친다. 삼림 벌채로 인한 황폐화로 공동체 전체가 이주했다. 더군다나 살충제 공중 살포가 인근 경작지에 악영향을 주고 강물을 오염시키는 바람에, 가축들이 마지막 남을 풀을 뜯기 위해 수 ㎞를 돌아다니며 처량하게 울부짖고 있다. 구토, 설사, 두통, 성기능장애 등에 시달리던 인근 주민들은 자신들의 땅뙈기를 헐값에 팔아 치웠다. 그리고 콩이 마을과 촌락을 집어 삼켰다.
1996년, 아르헨티나에서 다양한 유전자변형 품종, 즉 몬사토의 “라운드업 레디(roundup ready)” 씨앗이 등장했다. 아르헨티나는 이를 계기로 브라질, 볼리비아, 파라과이 등에서 이들 정부의 승인도 없이 환경을 파괴하는 대대적인 살충제 선전과 함께 종자 전쟁을 주도했다. 이후, 냉혹한 콩 쓰나미가 평야와 초원을 잠식했다.(1) (어쩔 수 없이 콩 쓰나미에 갇힌) 주민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찾으려 했다. 농촌 및 원주민 여성 조정위원회(CONAMUR)에서 일하는 펠라 알바레즈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한다. “정부는 주민들의 요구를 충족시킨다는 명목으로 이들을 이주시켰다. 요컨대 가장 가까운 도로가 80km나 떨어져 있고 보건소나 그 밖의 부대시설도 전무한 숲 한 가운데로 주민들을 이주시켜 땅을 개간하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주민들이 압수당한 비옥한 땅에 눌러 앉거나 다시 그 땅을 점거했고, 농장업주들은 그 곳에 개를 풀었다. 파라과이 인권 조정위원회(Codehupy)의 휴고 발리엔테 변호사는 다음과 같이 규탄한다. “민주주의 태동 초기인 1989년부터 현재까지, 농민조직의 지도자나 농민 운동가를 대상으로 한 암살과 실종 사건이 밝혀진 것만 106건이다.” 게다가 정부 요원이나 대규모 민간 농장의 경비들은 무슨 행동을 해도 어떤 처벌도 받지 않는다. 이런 와중에 콩밭은 끝없이 확장되고 있다.
대단한 영향력과 강력한 조직력을 자랑하는 전통적인 두 거대 정당, 페루 국민공화당(ANR, 1946~2008년까지 줄곧 집권했다가 2013년 재집권에 성공한 이른바 콜로라도당)과 급진 자유주의정당(PLRA)에 뿌리를 둔 대지주들은 개인 활주로와 전용 비행기를 갖춘 채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 “콩의 제왕”이라 불리는 브라질 그룹, 트랑킬로 파베로는 파라과이 8개 주(알토파라나, 카닌데유, 이타푸아, 카아과수, 카아사파, 산페드로, 센트랄, 차코)에 14만 헥타르의 땅과 9개의 기업(종자 가공 및 유통기업, 농약과 비료 제조 및 수입 담당기업, 생산 업자에 금융지원을 담당하는 기업, 기계와 연료를 공급하는 기업 등)을 비롯한 본토의 주요 인프라 프로젝트에 꼭 필요한 강줄기, 파라나 강에 민간항구까지 소유하고 있다. 국가 중앙협동조합(Unicoop)의 회원 8명이 35만 헥타르가 넘는 땅을 관리하고 있다. 에스피리투산토 그룹은 11만 헥타르의 땅에 만족하고 있다. 어쨌든, 2008년도 (토지소유권) 조사에 따르면, 파라과이 국토의 85%를 2%의 국민이 독점하고 있다.
한편, 다국적 기업들은 콩 산업에서 두둑한 이익을 챙기고 있다. 미국의 카길 사는 20개의 사일로와 1개의 공장 그리고 3개의 민간항구를 소유하고 있고,(2) 파라과이의 에이디엠 사에카 사와 붕헤 사는 각각 30개의 사일로와 6개의 민간항구와 23만 톤의 콩을 저장할 수 있는 5개의 사일로를 소유하고 있다. 프랑스의 루이 드레퓌스 사와 홍콩의 노블 사는 파라과이 전체 수출의 40%를 장악하고 있다. 이 밖에도 독일의 바스프와 바이엘 사를 비롯한 세계 최대 화학업체인 미국의 다우 사와 스위스의 네슬레, 이태리의 파르마라트 사, 네덜란드와 영국에 본부를 둔 유니레버 사 등이 정기적으로 돈을 챙겨가고 있다.(3)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라티푼티스트(대지주)와 다국적 기업은 자신들의 기업 활동을 통해 국내 총생산(GDP)의 28%를 생산하지만, 이들의 파라과이 세금 수입 기여도는 대략 2%밖에 되지 않는다.(4)
요란한 경적소리와 함께, 농기계와 트럭들의 끝없는 행렬이 도로를 달린다. 한편, 콩 농사가 지속적으로 동부지역의 홍토로 확대되며, 축산업을 하던 땅까지 집어 삼켜 1400만의 가축업자들은 척박한 차코 지역으로 밀려났다. 파라과이를 세계 4위의 콩 수출국으로 만든 이 “녹색 금(콩)”이 잠식한 땅은 1993년 150만 헥타르에서 현재 310만 헥타르로 증가했다. 이 콩의 60%는 유럽이 가축 사료나 식물성 대체연료로 쓰기 위해 수입한다. 그러나 고분고분하지도 않고 우둔하지도 않은 농민들은 백정의 도축 칼에 목을 들이밀지는 않는다. 국가 토지수호투쟁조직(OLT)의 국가 조정위원 에스더 레이바는 지적한다. “우리는 많은 토지를 되찾았다. 현재 300명 이상의 동료들이 이타푸아와 카사아파 지역에서 점거 농성을 벌이고 있다.”(5) 1990년과 2006년 사이, 980건의 충돌이 발생했고 이 와중에 414건의 점거 농성이 있었다. 점거 농성은 정부당국을 계도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압박 방법이다. 땅 주인들은 이를 ‘침입’으로 간주했고, 정부당국은 366건의 점검농성을 해산하고 7346명을 구금했다. 카닌데유의 사회운동단체 지도자 도밍가 노헤라는 “카닌데유에서만 30만 헥타르의 토지를 되찾았다”고 했다.
토지 대장에 없는 가짜 소유권자 기승
소형 오토바이만 겨우 접근이 가능한 시골에 있는 대단위 농장, 아센타미엔토에 갔다. 이곳 이타푸아 지역 한복판에 들어선 일명 ‘7월 12일의 아센타미엔토’는 17년 전인 1996년에 있었던 일을 상기시켜 준다. 당시 70명의 사람들은 메논파(6) 독일인 신도, 니콜라이 뉴펠드가 소유한 것으로 알려진 1600 헥타르의 농장을 강제 점거한 채 농사를 지은 죄로 6개월간 수감됐다.
토지대장에도 등재되어 있지 않은 이 지역의 가짜 토지소유권들은 독재자 스트로에스네르와 콜로라도당과 연루된 법조인들의 주도로 운영되고 있는 법률 시스템이 발급하고 있다. 같은 땅을 두고 각기 다른 서너 명의 소유주들이 나타날 수 있어 행정의 혼선이 우려된다. 따라서 만약 파라과이의 토지소유권을 모두 합하면 세계 유일의 2층 국가(한 지분에 두 명이 소유주가 등재된 국가)가 될 판이다.
2005년 7월 12일의 아센타미엔토 사람들은 OLT와 전국농민조직위원회(MCNOC)와 함께 다시 투쟁을 시작했다. 이들은 네 번에 걸쳐 농장을 점거했지만 네 번 다 친(親)과두정부의 언론매체들-맨발 의 ‘범죄자들(주민들)’의 판잣집이 불타는 것을 즐겁게 구경나온-즉 <에이비씨 컬러>(7), <라나시온>, <울티마 호라>의 특파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경찰, 군인, 농장의 사설경비원들에 의해 강제 퇴거됐다. 그렇다고 투쟁의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현재 230 가정이 합법적으로 이 땅에 (7월 12일의 아센타미엔토) 거주하며 마니옥(카사바속의 식물), 옥수수, 콩, 고구마, 땅콩, 참깨 등의 농사를 짓고 있다.
2009년, 농지개혁을 담당하는 조직인 농촌진흥청(INDERT)은 결국 뉴펠드의 땅을 매입하기에 이른다. 이후 뉴펠드는 2007년과 2011년 사이에, 자신 소유가 아닌 땅을 독일 이주민들에게 1400만 유로를 받고 매도한 죄로 5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강성 사회단체 지도자인 마그노 알바레즈는 이 같은 해피엔딩을 이렇게 설명했다. “2009년에 긴장이 완화되었는데, 그것은 페르난도 루고 대통령 시대였기 때문이다.”
2008년 4월 20일 실제로, 61년간 콜로라도당의 독재를 방치했던 파라과이 유권자들의 40.8%가 자신들의 희망을 강성 사회운동가인 ‘가난한 전직 주교(루고)’에게 걸었다. 조직적인 정치적 기반의 부재 속에서, 루고는 사회단체와 8개 정당의 연합-아직까지 ANR의 통치를 공격할 수 없는 보수정당인 PLRA를 제외한-이른바 변화를 추구하는 애국연맹(APC)을 통해 정권을 잡았다.(8) 하지만 이 같은 연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미주볼리바르동맹(ALBA)(9)의 진보적인 성향을 지닌 정부들과 가까운 루고는 적어도 온건한 정책을 펼치진 않았다. 그러기엔 시기상조였다. 그는 차고 지역의 마리스칼 이스티가리비아에 미군기지 건설 반대와 파라나 강가에 알루미늄 공장을 설립하려 한 캐나다의 다국적기업 리오 틴토 알칸에 연간 최대 2억 달러에 달하는 에너지 보조금 지원 거부를 비롯해 사회복지비 지출 인상, 가난한 사람들에게 병원 무료진료 허용과 농지개혁 등을 거론했고, 농민단체는 이 같은 암묵적인 그의 강력한 지지 하에 점거농성을 일삼지 않았던가? 대선 때 순전히 기회주의적인 성향을 보이며 루고를 지지했던 PLRA 출신 부통령, 페데리코 프랑코의 PLRA는 이내 대통령에 등을 돌렸다. 이 정당은 전날까지 정적이었던 콜로라도당과 연합해(두 정당은 의회의 절대 대수를 차지했다) 공개적으로 (사회적) 불안정을 야기했다.
또한 자신을 지원사격하는 언론 매체에 힘입은 생산협동연합(UGP)은 선동에 나선다. 이 강력한 로비단체(UGP)가 옥수수, 목화, 콩 등의 새로운 다양한 유전자변형 식품의 유입을 요구하며 갈등을 심화시켰다. 한편, 식물 및 종자의 품질과 건강을 위한 국가 서비스기관(SENAVE)의 소장, 미구엘 로베라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자유주의 성향을 지닌 농업장관 엔조 카르도소는 철저히 몬산토, 카길, 시젠타 등의 기업에 유리한 쪽으로 행동했다. 말 그대로 그는 이들 기업의 직원인 동시에 UGP의 대변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UGP는 정부로부터 유전자변형 식품 유입 허가를 받아 내지 못했다. 에스페란사 마르티네스 보건부 장관을 비롯한 오스카르 리바스 환경부 장관과 SENAVE의 로베라 소장이 유전자변형 식품 유입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에이비씨 컬러>는 반대자들을 비판하는 캠페인 기사를 내보내며 미쳐 날뛰었다. 그리고 프랑코 부통령은 “정치적 판단(미국판 탄핵)”을 통해 루고 대통령 해임을 선동했다. (탄핵을 위해) 꼬투리를 찾아야 했다.
아순시온에서 북동쪽으로 400km 떨어진 쿠루구아티 지방 부근엔 3개의 좁은 거리와 10개의 교차로가 있고, 거리 모퉁이마다 대두농장의 돈이 쌓이는 은행들이 들어서 있는 이른바 ‘마리나 쿠’라는 빈민촌이 있다. 이 빈민촌은 땅 없는 자들이 콜로라도당의 전직 당수인 블라스 N. 리켈메(1989~2008년 상원대표를 지냄)가 탈취한 땅과 그가 소유한 캄포스 모롬비 사의 7만 헥타르의 땅을 평화적으로 점거해 거주하고 있는 곳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마리나 쿠의 분쟁 중인 몇 천 헥타르의 땅은 1999년 말까지 파라과이 군부소속이었다가 2004년 10월 4일, 국가법령 제3532호에 의해 주인 없는 땅으로 선포되며 INDERT로 편입됐다. 하지만 2012년 6월 15일, 324명의 중무장한 경찰은 주민들을 몰아내기 위해 마을로 들이닥쳤다. 10년 사이 7번째였다! 당시 현장엔 60여명의 농민들이 있었다. 이후 무슨 일이 벌어졌던가? 당시 남동생을 잃었던 마리나 쿠의 희생자 가족 위원회 회원, 마르티나 파레데스가 한숨을 내쉰다. 6월 15일, 첫 총성이 울린 후, 격렬한 총격전이 발생했고, 이 와중에 농민 11명과 경찰 6명이 희생됐다. 현재까지도, 사람들은 어느 쪽이 먼저 총을 발사했는지 모른다. 파레데스 부인이 말한다. “난 몇몇 경찰들과 대화를 나눴다.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아는 게 없다.” 2012년 12월 16일, 학살 현장에 투입됐던 사람들과 캄포스 모롬비 사의 경비원들에 대해 증언하겠다고 발표했던 마리나 쿠의 농민 지도자 중 한 명인 비달 베가는 암살됐다. 게다가 사건을 상시 정찰하던 경찰 헬기가 촬영한 영상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당시 마을에 여성과 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농민들이 경찰을 상대로 매복했었다는 가설은 전혀 신빙성이 없다. 한편 2012년 6월 22일, 루고 대통령은 대지주들에 대한 폭력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기소돼-헌법 제225조에 의해 자신을 방어할 5일간의 여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24시간 만에 “정치적 판단”을 근거로 탄핵됐다. 이것은 궤변을 넘어 “쿠데타”였다. 이윽고 프랑코가 정권을 잡자, 그의 정부는 미주기구(OAS)의 도움으로 마리나 쿠의 사건을 조사하도록 명령했던 독립위원회의 활동을 즉각 중단시켰다. 그리고 아무런 절차도 없이 1주일 만에 유전자 변형 목화의 유입을 허가했다. 이후, 몇 개월 동안 옥수수와 콩의 7가지 유전자 변형 품종이 추가로 유입됐다.
2013년 4월 22일 파라과이 대선 때 내건 슬로건은 “쿠데타” 이후, 남미공동시장(Mercosur)과 남미국가연합(UNASUR) 그리고 카리브국가공동체(CELAC)로부터 배제되었던 파라과이의 정상적인 복귀였다. 전 칠레 대통령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대변인과 전 칠레 장관 프란체스코 쿠아드아의 핵심 자문위원 출신인 대통령에 당선된 파라과이 최고 갑부, 오라시오 카르테스는 8월 15일 취임식 날 스트로에스네르가 집권 당시 몰던 흰색 시보레 카프리스 컨버터블을 타고 대통령궁에서 취임식이 있는 대성당으로 이동했다. 그가 자신의 임기 동안의 포부를 밝히기 위해 개최한 업무 오찬엔 그를 열렬히 지지하는 200명(라나시온 추정 숫자) 또는 300~400명(에이비씨 컬러 추정 숫자)의 국내외 기업 대표들이 참가했다. 그는 이날 “투자자들이 공무원들에 의해 학대당하는 것을” 간과하지 않겠다고 천명했다.
지구 종말 분위기의 마을 공동체
이틀 후, 언론 매체들을 분노로 들끓게 하는 사건이 터졌다. 군대라기보다는 소규모 게릴라 집단에 가까운 정체 모를 속칭 파라과이 민중군대(EPP)가 에스탄시아 라구니타 농장(10)의 사설 경비원 5명을 처형한 것이다. 사람들은 EPP가 2006년부터 접근이 어려운 파라과이 최대 빈민 지역, 콘셉시온과 산페드로에서 31건의 납치와 암살을 자행했다고 믿고 있다. 조사 과정에서 희생자 중 한 명인 경찰 하급간부, 펠리치아노 코로넬 아길라는 쉬는 날엔 에스탄시아 농장의 경비를 책임진 산호르헤 보안 회사(11)를 맡아 운영한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EPP는 페이스북에 자신들의 과녁은 “20여명의 농민을 죽인 유사경찰(사설경비원)들”이라고 밝혔다. 콜로라도당의 전직 국회의원 마그달레노 실바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산호르헤 보안 회사가 수행하는 진짜 업무가 무엇인지 조사해야 한다.” 한편, 콘셉시온 교구의 신부 파블로 카세레스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사람들은 처형당한 사람들이 가난한 농민들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보안회사의 경비원들이었다.”(12)
2010년 4월, 끊임없이 EPP와의 연루설에 시달리던 루고 대통령은 4개 지역에서 EPP를 소탕하기 위해 한 달간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하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얻지 못했다. 지난 8월 22일, 의회는 카르테스 대통령이 비상사태를 선포하지 않고도 군사작전을 명령할 수 있는 법안을 부랴부랴 서둘러 통과시켰다. 국가 경찰은 헬기와 장갑차를 동원해 산페드로, 콘셉시온, 아맘바이 지역에서의 EPP 군사 소탕작전에 배치되어 군의 통제를 받고 있다. 물론 게릴라가 무장은 했다지만 다해봐야 축구팀 2개 정도의 숫자에 불과한 병력을 소탕하는 데 헬기와 장갑차를 동원해야 했을까?
굳이 하나만 예를 들자면, 타쿠아티 포티 공동체는 지구 종말 분위기를 연상케 한다. 콩으로 둘러싸인 700가구의 농장 사람들은 농지를 위해 그리고 보건소, 초등학교, 중학교, 식수, 길 등을 위해 수도 없이 투쟁했다. 2008년 7월과 9월 사이, 대지주인 루이스 린드스트롬이 이곳에서 8km 떨어진 곳에서 EPP에 의해 납치되었다가 13만 달러의 몸값을 치르고 풀려났지만, “EPP 게릴라” 소속으로 추정되는 저격수에 의해 2013년 5월 31일 살해됐다. 반군 기지의 하나로 지목되는 타쿠아티 포티 공동체는 두건을 쓴 군인들이 영장도 없이 야간 압수수색을 펼치며 겁박하고, 경찰이 혐의가 있다고 단정한 거주민에 대한 거짓 증거를 유포하는 바람에 지옥 같은 생활을 경험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이레네오 발레호스, 마마시오 미란다, 구스타보 카르도소의 경우 6살짜리의 지적 능력에 불과한 정신이상자 부부의 허무맹랑한 진술만으로 감금됐다.
빅토리아 사나브리아 부인이 경각심을 높인다. “사람들은 겁을 먹었고 우리의 권리를 보호해야 할 사법부나 국가 기관을 신뢰하지 않는다. 기소된 농민 운동가들은 새벽 5시에 일어나 일터로 나가던 가장들이다. 또, 바로 이런 사람들이 공교롭게도 농민 지도자로 일했다. 우리는 근본 문제가 토지라 생각한다. 이것이 우리 같은 무지렁이가 깨달은 것이다. 농민 지도자들을 제거함으로써, 저들(군경)은 우리를 와해시킬 심산인 것이다.” 요컨대 이것은 라틴 아메리카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치료하지 않은 상처는 결국 곪기 마련이다. 집단들은-크건 작건, 비난 받을 짓을 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과격해진다. 이른바 ‘민주주의’ 정권이 범죄 용의자에 대한 체포명령을 하달하며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면서도 가장 먼저 형사재판에 회부하는 것은 사회단체들이다. 파라과이의 경우, 가장 이득을 보는 집단은 대두 농장 지주들이다.
조롱받거나 환영받는 브라시구아요스
파라과이 영토의 대략 19%, 즉 770만 헥타르(경작 가능한 전체 토지의 32%)는 해외 소유주의 손에 들어갔다. 그리고 국경지역의 대략 480만 헥타르, 특히 알토파라나, 아맘바이, 카닌데유, 이타푸아 지역은 브라질인들이 차지하고 있다. 사회기반기구에서 일하는 마르코스 글라우세르와 농지개발을 위한 전반적인 법률서비스기관에서 일하는 알베르토 알데레테가 2007~08년도의 토지 조사를 바탕으로 쓴 논문 내용이 이를 방증한다.
사람들이 이른바 브라시구아요스(브라질과 파라과이의 혈통을 반씩 이어받았거나 또는 이들 나라 중 어느 한쪽 혈통 또는 두 나라의 혈통을 동시에 이어받은 이주민)들의 유입을 반기던 기간이 있었다. 첫 번째는 파라과이가 3국 동맹(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과 전쟁(1864년 11월~1870년 3월)을 치른 이후, 공지매각 허락 법안을 도입함으로써 끔찍한 결과를 초래했을 때였고, 두 번째는 토지가격이 저렴했던 1970년대, 무자비한 산림벌채가 훨씬 용이해지며 독재자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인근 국가의 독재자들에게 산림벌채를 허가했을 때였다. 1989년, (스트로에스네르의) 독재체제가 “유연한 독재체제”로 전환되었을 때도 이 같은 프로세스(무자비한 산림벌채)는 지속되었다. 농업기계화로 무장한 브라질 지주들은 콩 도입에 앞장서며, 최대 농산물 기업들을 세웠다. 이들은 또한 현지 (파라과이) 농민들과 직접적인 마찰을 빚었다.
식물 및 종자의 품질과 건강을 위한 국가서비스기관(SENAVE)의 소장, 미구엘 로베라는 본국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고 파라과이로 이주한 새로운 이주민들(브라질 지주)이 국민 길들이기에 나섰다고 했다. “쉽게 돈을 벌 목적으로 ‘국경선 정신(이중국적)’으로 무장한 채, 파라과이를 찾은 대다수는 (파라과이의) 관습, 사회규범, 환경 규칙을 비롯한 노동법까지 뒤흔들며 폭력을 행사했다.” 지주들은 ‘콩의 제왕’이라 불리는 브라질 그룹, 트랑킬로 파베로의 농지를 100에서 14만 헥타르까지 일구고 있지만, 농업을 기계화해 인력을 거의 고용하지 않고 고용한 일꾼들은 종종 노예처럼 부린다. 페르난도 루고 전 대통령 재임 시절, 외무부 장관을 지낸 바 있는 호르헤 라라 카스트로가 말한다. “이들은 사설 경호원을 두고 있다. 하지만 종종 푼돈을 주고 현지 농민들을 경호원으로 고용해 쓰기도 한다.” 현장에서 농민 운동가의 목소리를 직접 경청하는 국가 토지수호투쟁조직(OLT)의 국가 조정위원 에스더 레이바는 좀 더 생생한 증언을 한다. “만약 당신이 저들의 토지에 접근하면, 저들이 당신에게 총을 쏠 수 있다.” 경제학자 루이스 로하스는 말한다. “저들의 혈통은 각양각색이다. 순수 브라질인, 귀화한 브라질인, 브라질인 2~3세대 등. 하지만 이들은 파라과이 국적 취득 여부와 무관하게 본국과 아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들 거주지역의 모든 라디오와 텔레비전은 포르투갈어로 방송을 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만의 학교와 성당을 갖춘 채 모국어를 쓰며 생활하고 경제적으로도 본국 기업들과 아주 밀접한 유대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카사아파 지역의 한 농장에서 일하고 있는 농민, 이세비아노 디아즈는 자신이 속한 농장과 다른 농장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우리는 이 같은 현실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브라질인들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이상한 생각을 집어넣고 있다.” 외국인에 대한 혐오증일까? 로하스는 “외국인에 대한 거부감을 인정하면서도, 농민들이 방치되는 가운데, 브라시구아요스들이 대다수의 재계를 점령한 채 약탈하고 있어 사안이 아주 복잡하다”고 말한다.
실제로, 브라질 공동체는 평상시엔 정치계에 거의 관여를 하지 않다가도, 자신들의 이익에 해가 되거나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는 정책 앞에선 적극적인 압력 행사에 나선다. 요컨대 이들은 이너서클 지도자들의 무조건적인 강력한 지지를 등에 업고,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고 있는 것이다. 알데레테는 다음과 같은 진단을 했다. “중장기적인 면에서 볼 때, 브라질인들이 소유한 농장들은 파라과이 영토 내의 브라질 식민지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미 그렇게 되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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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4년, 파라과이 정부는 자발적으로 유전자 변형된 콩의 유입을 ‘기정사실화’하며 합법화했다.
(2) 카길 사는 콜롬비아에서 국가가 가난한 농민들에게 불하한 5만 2천 헥타르의 땅을 불법 점유한 죄로 기소되어 현재 스캔들의 중심에 있다.
(3) Luis Rojas Villagra, <Actores del agronegocio en Paraguay>, BASE Investigaciones sociales, Asuncion, 2012.
(4) E’a, Asuncion, 2013.09.19.
(5) <Informe de derechos humanos sobre el caso Marina Kue>, Coordinadora Derechos humanos Paraguay, Asuncion, 2012.
(6) 유럽(특히 독일)에서 탄생된 종교단체로, 1920년대 파라과이에 유입되었다. 대략 3만 명에 달하는 이들은 주로 80% 이상이 낙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7) 일간 <에이비씨 컬러>의 소유주, 알도 주콜리오는 파라과이 카길 사의 주요 동업자이다.
(8) Renaud Lambert, <파라과이 엘리트들은 또한 좌파에 투표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8.06.
(9) Antigua et Barbuda, <볼리비아, 쿠바, 에콰도르, 온두라스(2009년의 쿠데타까지), 니카라과, 도미니카 공화국,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 베네수엘라.
(10) 소를 기르는 목장.
(11) E’a, 2013.08.21.
(12) Radio Nanduti, Asuncion, 2013.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