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상지 : 영주 소백산 죽계구곡
● 일시 : 2021. 07. 03(토)
강사인 박기성 회원의 리딩으로 비가 내리는 가운데 소백산 자락의 죽계구곡을 탐방했습니다.
"영주는 ‘한국 성리학의 시발지’다. 도산서원이 있는 이웃의 안동은 일찍이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로 굳건히 자리 잡았지만, 영주 주민들 역시 영주가 ‘유교 문화 1번지’요, ‘선비의 고장’이요, ‘양반의 고장’이라는 자부심이 안동 주민들 못지않게 가득하다.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처음 받아들인 안향이 영주의 순흥 출신이고,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순흥의 소수서원은 조선시대에 4300명의 인재를 배출해 명실상부한 조선 성리학자 양성의 요람으로 자리 잡았던 것이다.
지리적으로 영주는 백두대간의 큰 산인 소백산 정기를 흠뻑 받고 있다. 백두산에서 흘러온 영롱한 정기가 동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다 강원도에 이르러 금강·설악 명산들을 빚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와 하늘에 제사 지내는 태백을 빚어 놓는다. 여기서 남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영주 서쪽에 소백산(小白山)의 국망봉(國望峰, 1421m)~비로봉(毘盧峰, 1440m)~연화봉(蓮花峰, 1394m)을 빚은 뒤 죽령을 거쳐 도솔봉(兜率峰·1314m)으로 뻗어 내린다.
이 소백산의 최고봉인 비로봉과 그 동쪽의 국망봉은 둘이 사이좋게 그윽하고 깊은 옥빛 계류를 빚는데, 이것이 죽계천(竹溪川)이다. 죽계천은 국망봉 서쪽 아래 석륜암계곡에서 발원한 물과 비로봉 동쪽 월전계곡을 흐른 물이 중봉(中峰) 아래에서 만나 소수서원의 순흥 땅을 적신 뒤 영주를 지나며 서천이란 이름으로 내성천으로 흘러드는 하천이다.
고려 후기의 명현이자 문장가인 근재(謹齋) 안축(安軸, 1287~1348)은 일찍이 <죽계별곡>에서 죽계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바 있다. 조선시대 들어서 순흥에 소수서원이 들어서자 유학자들은 서원을 기준으로 죽계천 일대에 죽계구곡을 경영했다.
죽계구곡을 최초로 설정한 이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이라는 설과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이라는 두 설은 조선 후기의 유학자들뿐만 아니라 일반에게도 널리 퍼졌다. 그렇지만 신재의 《죽계지》와 퇴계의 <유소백산록(遊小白山錄)>에서는 죽계 일대의 지명에 얽힌 글은 있으나, 죽계구곡을 설정하고 경영했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연구자들은 신재나 퇴계가 죽계구곡을 설정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1728년(영조 4) 순흥부사로 부임한 신필하(申弼夏)가 초암사 앞 금당반석에서 삼괴정(三塊亭) 앞 이화동까지 2km 물길을 내려오며 다시 구곡을 정할 때 바위에 각자까지 새겨 놓았다. 이 때문에 이후 유학자들에게 신필하가 정한 구곡이 마치 신재나 퇴계가 정한 것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을 뿐 아니라, 바위에 새겨진 각자도 신재나 퇴계의 글씨로 와전되기도 했다. 죽계구곡의 제1곡인 취한대의 ‘경(敬)자’ 바위.
그러나 《순흥지》 편찬자는 신필하 부사의 구곡을 소개하면서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소수서원부터 거슬러 올라가는 아홉 굽이를 소개하고 있다. 이후 《순흥지》의 설정이 대세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미 돌에 새겨진 글씨 때문에 여전히 혼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퇴계의 후손인 광뢰(廣瀨) 이야순(李野淳, 1755〜1831)은 퇴계의 자취를 따라 소백산 유람을 할 때 죽계구곡을 지나면서 돌에 새겨진 글씨를 보곤 “퇴계가 적은 것이 아니다.”고 밝히고 있다. 만년을 순흥에서 머물면서 죽계구곡도 유람하고 퇴계의 자취를 따라 <소백산구곡>도 설정한 이야순이었으나 죽계구곡을 언급하지 않았다. 이는 이야순이 신필하의 죽계구곡을 인정치 않았다는 것이 된다.
최근 대부분의 구곡 연구자들도 ‘신필하 구곡’이 아니라 ‘《순흥지》 구곡’을 대표적인 구곡으로 여기고 있다. 그렇지만 죽계구곡 현장에는 신필하가 설정한 굽이마다 바위글씨가 새겨져 있고, 소백산국립공원에서 설치한 안내판에도 신필하의 죽계구곡을 설명하고 있어 탐방객들은 헷갈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이 글에서는 《순흥지》의 구곡을 따라 죽계 유람에 나서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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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상반기 인문산행 기록
회차 | 날짜 | 대상지 | 강사 | 참석자 |
41 | 3/6(토) | 북한산 백운대 | 박기성 | 류백현, 박기성, 조장빈, 허재을, 이가경 |
42 | 4/3(토) | 인천 문학산성 | 박기성 | 박동욱, 류백현, 박기성, 허재을, 이가경 |
4/7(수) | 인천 문학산성 | 박기성 | 류백현, 박기성 외 1명 |
43 | 5/1(토) | 연인산 옥계구곡 | 조장빈 | 류백현, 박기성, 조장빈, 허재을, 이가경, 한복헌 |
5/8(토) | 행주산성 | 박기성 | 류백현, 박기성, 조장빈, 허재을, 이가경 |
44 | 6/5(토) | 아차산성 | 박기성 | 류백현, 박기성, 이가경 |
45 | 7/3(토) | 영주 소백산 죽계구곡 | 박기성 | 류백현, 박기성, 김장욱, 이가경 |
*42회 4월 7일 산행은 4월 3일 우천으로 산성 탐방과 사진 촬영 등을 위한 추가 산행이다.
*43회 인문산행은 옥계구곡과 행주산성 두 곳을 시행하였고 「사람과 산」 후기는 행주산성 탐방기를 실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
1457년 금성대군, 이보흠의 단종 복위 운동 거사가 실패하면서 세조에 의해 순흥부 주민이 학살된 정축지변(丁丑之變) 때 한 달 넘게 계속된 관련자들 심문 과정에서 피살된 사람들의 피로 죽계천이 온통 피로 물들어 십여 리까지 핏물이 넘쳐나 지금의 동촌1리에 이르러서야 핏물이 끝났다고 하여 이 마을을 피끝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네요.
인문산행팀~
43회 용추계곡서 이후서 부터 회차가 잘못 적시되고 있어요,
정리 부탁드립니다.
행주산성이 44회가 되어야는데,
지난 "(급)"이라며 43차 옥계구곡 산행 후 이를 대신해 행주산성으로 다시 산행을 했고 정식 인문산행은 43차는 행주산성으로 후기를 작성했습니다.
이에 따른 혼란이었습니다.
낼 따로 정리해서 본 글 하단에 표기토록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덕분에 앉아서 즐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