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참된 사귐이 있습니까
요한일서 1: 5- 10
거짓된 진리 - 영지주의자
요한일서 1장에는 두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사귐’이라는 단어와 또 하나는 ‘만일’이라는 단어입니다.
사귐이라는 단어는 3절에 두 번, 6절에 한번, 7절에 한번 등 총 4번 나옵니다.
‘사귄다’는 말은 성경 원어는 ‘코이노니아’라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교제라고 합니다.
요한일서가 말하는 사귐은 우선적으로 성부의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의 신비적 연합을 말
합니다.
성부의 하나님과 성자의 하나님은 신비한 연합을 이루고 신비한 교제를 나누고 계십니다.
3절에서 사도 요한은 성부와 성자와 신비적 교제를 나누는 것처럼 자신들도 성부의 하나님
과 성자의 하나님이신 예수님과 신비적 교제와 사귐을 나누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절 후반 절을 볼까요.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그래서 성도를 가리켜 하나님과 사귀는 자,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이라는 단어도 4번 등장합니다. 6절, 8절, 9절, 10절입니다. 조건문입니다.
이 구절들은 조건문과 귀결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요한일서 1장에는 왜 사귐이라는 단어와 만일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해서 말씀하느냐 하면
그 때 당시에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어두운 가운데 행한 사람들이 있었고, 하나님
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죄가 없다고 하고, 죄가 없기 때문에 자백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
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누구였습니까? 바로 그 당시 이단들이었던 영지주의자들이었습니다.
사도요한은 사도들 가운데 유일하게 자연사를 했던 사도였습니다.
에베소에서 목회를 했습니다. 그 때 다시 에베소 지역 여러 교회에 영지주의라는 이단이 침
투하여 순진한 성도들을 미혹했습니다.
사도요한은 이런 거짓된 가르침에 유혹되지 않도록 편지를 써보낼 필요를 느꼈던 것입니다.
영지주의는 그 근원이 헬라철학의 이원론입니다.
물질의 세계는 악하고 영적 세계는 선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일부는 금욕주의로 흐르고, 대부분은 도덕무용론으로 발전했습니다.
영지주의는 눈에 보이는 육체는 악하고, 깨달음을 얻은 영혼은 선하다는 것입니다.
구원도 영적인 지식으로 구원을 얻기 때문에 악한 육체는 어떻게 살든지 상관이 없다는 것
입니다.
특별한 영적 지식으로 구원을 얻은 사람은 이제 죄와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었고, 더 이상
죄의식을 갖고 살 필요가 없고, 죄를 고백함으로 더 이상 죄 용서함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육체는 악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이 아니라 영으로만
오셨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본 예수님의 모습은 환영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사도요한은 조건문을 가지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
니다.
수 년 전에 우리나라에서도 구원파라는 이단이 사회적 물의 일으킨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활동하고 있습니다만, 이 구원파들은 구원받은 날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몇 년 몇 월 몇 시에 구원 받은 시간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럴 수도 있지만 거의 많은 성도들은 알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우리를 찾아오실 때 불같이 찾아오신 사람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은 알지
못하도록 찾아오십니다.
또 이들은 구원 받고 나면 이제 죄를 지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죄의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구원을 받으면 천사처럼 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사람,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갈까요?
죄성을 깊이 깨닫음
하나님과 깊은 사귐이 있는 사람은 무엇보다 자신의 죄성을 깊이 깨닫습니다.
1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씀하
고 있습니다.
왜요? 하나님은 예레미아 17장 9절에서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 만일 우리가 죄없다고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것이요”
우리가 죄가 없다고 하면 나를 스스로 속이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할지라도 아직 우리의 구원이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완성은 우리가 천국에 이를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는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 완전한 구원이 남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미’와 ‘아직’이라는 중간 상태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늘 법정에서는 이미 ‘너는 의인이다’라고 선언을 했지만 현실적으로 우리가 죄성(罪性)을
갖고 살아갑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으로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과 상대적인 평가를 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변에 보면 정말 인간같이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나는 참 좋은 사람 아닙니까?
그러기 때문에 자신의 죄성을 잘 모릅니다.
오늘 성경은 5절에서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빛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빛은 모든 것을 노출시킵니다.
어두컴컴한 데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더러운지, 먼지가 있는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빛이 비치면 모든 것이 다 노출됩니다.
화장대에, 농 위에 먼지가 뿌옇게 쌓여 있어도 빛이 없으면 모릅니다.
빛이 들어오면 먼지가 뿌옇게 쌓이는 것이 다 보입니다.
그래서 청소 안하고 사는 가정은 커튼 치기를 좋아합니다.
잘 안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빛 되신 하나님을 경험하기 전에는 우리 자신이 굉장히 의로울 수 있습니다.
괜찮은 사람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빛 되신 하나님을 만나면 나 자신이 얼마 더럽고 추한 존재인지 다 드러나고 다 보
이게 됩니다.
그래서 빛 되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마다 자신의 죄성을 철저하게 인정합니다.
이사야 6장을 보면 환상 중에 이사야가 하나님의 보좌를 목격합니다.
하나님을 수종을 드는 천사들이 있는데, 천사들에게 여섯 날개가 있습니다.
그런데 두 날개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두 날개는 발을 가리고, 두 날개로 납니다.
그러면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라고 찬양을 합니다.
그 거룩하신 하나님을 목격을 하고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바울도 주님을 만나기 전에 의로운 사람으로 착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런 바울도 주님을 만나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자신의 죄 성 때문에 탄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깊은 사귐, 교제가 있는 사람은 자신의 죄성을 발견합니다.
자신의 죄 성을 발견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를 발견하더라도 그 사람을 정죄하기 전에 자
기 자신 안에도 그런 죄성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다른 사람을 정 죄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정죄합니다.
죄를 자백함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깨닫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만 머문다면 우리는 죄책감 때문에 평안도 없고 기쁨도 없고
행복도 없을 것입니다. 죄책감이 긍정적인 역할도 합니다.
겸손하게 하고 주님을 영접하게 하는 긍정적인 역할도 합니다.
그러나 죄책감은 긍정적인 역할보다 훨씬 부정적인 역할을 많이 합니다.
여러분! 죄책감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신가요?
죄책감은 사람을 황폐화시키고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자존감을 상실하게 하고 자괴감과 자멸감을 갖게 합니다.
어떤 자매가 있었습니다. 그 자매는 엄마와 남동생을 심하게 미워했습니다.
왜냐하면 두 사람만이 너무 친했기 때문입니다. 엄마의 사랑을 받고 싶었지만 엄마는 남동
생에게만 애정을 쏟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자매는 엄마와 남동생을 저주하기에 이릅니다.
차라리 동생이 죽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까지 한 것입니다.
그런데 남동생이 어느 날 교통사고로 죽은 것입니다.
그 이후로 이 자매는 자기 동생이 자기 때문에 죽었다고 그런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죄책감에 시달리다 보니까 밤에 동생이 나타나고, 동생의 관이 보이고 환청이 들립니다.
‘이젠 네 차례야! 이젠 네 차례야 ’ 동생에게 아무리 미안하다고 해도 동생이 떠나지 않고
밤마다 보이는 것입니다.
이 자매는 몸이 급속이 쇄약해지기 시작했고 결국 정신병자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책감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자책감은 삶을 황폐화시키고, 무기력하게 만들고,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하고, 포기
하게 합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가 자책감 때문에 목매어 자살합니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사람은 죄를 하나님께 자백합니다.
죄를 은폐 시키거나, 합리화 하거나, 남에게 전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자백을 합니다.
아담이 죄를 짓고 나서 은폐시키려고 하고, 남에게 전가하려고 합니다.
만일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고백을 했더라면 인류의 역사를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과 사울의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사울은 죄를 짓고 나서도 변명하려고 합니다. 합리화 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죄를 지적 받고 솔직하게 인정하고 고백합니다.
여러분! 독일과 일본이 다른 점이 무엇인가요?
독일은 이차세계대전을 일으키고 난 다음에 솔직하게 인류 앞에 자신의 과오요, 큰 잘못이
었다고 인정을 합니다. 그래서 독일은 똑같은 범죄를 저지르고도 모든 나라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존경을 받습니다.
그런데 일본을 보세요. 인정하지 않습니다. 서구문명을 조선 땅에 주었다느니, 현대화 문명
은 자기들 때문이었다고 헛소리들을 하고 있습니다. 위안부 할머니에게 조차도 보상을 안
해 줍니다.
심지어는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니 누가 인정을 해줍니까?
우리는 늘 하나님 앞에 죄를 자백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왜 죄를 자백하면서 살아야 합니까?
자백하면 하나님이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
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자백하면, 하나님이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어 죽으신 것은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그 죄 값으로 죽으신 것
입니다. 우리의 죄 값을 치루기 위해였습니다.
모든 죄책감으로부터 해방을 주시기 위해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의 사랑과 십자가의 용서를 체험해야 합니다.
시편 103장 1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사 1:18절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롬 8:1절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이다.”
9절에서 “하나님은 미쁘시다”고 말씀하십니다.
미쁘시다는 말은 신실하시다는 말입니다.
신실하다는 말은 언제나 언약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용서해 주기로 약속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우리의 허물을 아십니다. 우리의 단점을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연약함, 우리의 허물, 우리의 단점들을 자백하기만 하면 용서해 주신
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신실하게 이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기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 우리의 허물과 죄악들을 자백합니다.
왜요 하나님이 용서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비록 죄를 지었지만 그 죄를 믿음으로 주님께 자백하면 우리 주님은 미쁘시
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용서한 죄를 내가 스스로 죄책감에 쌓여서 괴로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가 스스로 나를 정죄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나를 용서했다면 나도 나 자신을 용
서해야 합니다.
빛 가운데 행함
하나님과 깊은 사귐이 있는 사람은 빛 가운데 행합니다.
5-7절을 보십시오. “....................”
오늘 본문은 하나님을 바로 빛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 분에게 어두움이 전혀 없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에서 예수님도 자신이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도 세상의 빛이셨습니다.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빛이셨습니다.
빛이신 하나님과 사귀는 사람인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에 어울리는 빛 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7절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요한복음 8장 12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빛이 비추면 자동적으로 어두움은 물러갑니다.
태양이 떠오르면 어두움은 소리 없이 물러갑니다.
빛이 없는 곳에는 병균이 잘 자랍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이 집을 지을 때 방향을 남쪽으로 향하도록 집을 지었습니다.
방향을 남쪽으로 한 것은 양질의 햇빛이 집안에 많이 들어오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햇빛이 많이 들어오면 올수록 집안이 더 밝아지고 가족들의 건강에 더 유익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자살이 많고 우울증과 신경통 환자가 많은 나라는 핀란드,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등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있는 나라들입니다. 이들은 선진국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복지 때문에 혼란스러운데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복지국
가입니다.
그런데도 자살이 가장 많습니다.
그 이유는 이 나라들은 비가 자주 내리고, 안개가 많이 끼고, 겨울에는 거의 해가 없고, 여
름에는 밤이 없는 백야현상이 일어납니다.
해가 비추는 계절이나 햇볕이 비추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누구나 일광욕을 즐깁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건강을 유지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죠.
이처럼 빛은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의 영과 육에 막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여러분! 빛 되신 하나님과 깊은 사귐과 교제가 있는 사람은 빛 된 삶을 살아갑니다.
마태복음 5장 14 이하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
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주님은 우리도 빛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빛을 비추는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빛 된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거짓말 하고 있는 것
입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그 속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빛의 자녀가 빛의 삶을 사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빛이신 하나님과 사귀는 분들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십니까?
그렇다면 빛 안에 살아야 하고 어둠 속에 있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과 사귄다고 하면서 어둠 속에서나 하는 부끄러운 일들을 계속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
하는 것이요 진리를 행치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귀시는 분들은 다 어둠의 일을 벗어 던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롬 13:12-13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과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빛 가운데 살 때 진정으로 빛 되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빛 된 삶을 살지 않으면서 기도해도 깊은 기도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빛 된 삶을 살면서 기도하면 깊은 기도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로 인한 상처가 다 회복 될 수 있고 다 치유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과 깊은 사귐이 있는 사람입니까?
하나님과 참된 사귐이 있는 사람은,
1. 죄성을 깊이 깨닫는 사람입니다.
2. 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해서 죄 사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3. 빛 되신 하나님과 어울리는 빛된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