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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적정(涅槃寂靜)
앎의 교리 삶의 교리 〈4〉
2002-02-02
생사로부터 자유로운 경계 부처님은 모든 번뇌 불길 다 불어 끈 평정상태 보여줘 얼마 전에 조계종의 혜암 종정이 원적(圓寂)에 들었습니다. 자기와의 싸움인 오랜 수행을 거쳐 완전한 멸도(滅度), 즉 적멸(寂滅)로 돌아간 것이죠. 모두들 혜암 종정의 입적(入寂)을 기쁨으로 맞이했는지 슬픔으로 맞이했는지 궁금합니다. 다시는 윤회하지 않는 세계, 부처의 세계에 들었을 때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열반은 욕망에 지배 받는 세계와 물질에 지배 받는 세계, 그리고 정신적인 끄달림의 세계를 넘어서서 ‘생사로부터 자유로운 경계’입니다. ‘원’은 수행을 완성하여 일체의 공덕을 원만히 한 것을 의미합니다. ‘적’은 번뇌의 장애를 멸한 것을 말합니다. 부처님과 고승들의 임종을 원적이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무상’과 ‘무아’와 ‘열반’을 부처님의 근본 교의라고 하는 것은 이들 세 기호가 불변하는 진리를 드러내는 인증(印證)이기 때문입니다. ‘변화하고’ ‘내가 없기’ 때문에 ‘열반 적정’을 지향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이들 세 진리의 도장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불교와 비불교가 변별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열반을 죽음 이후의 세계로만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열반은 살아서도 성취할 수 있는 경계이기도 합니다. 부처님이 보여준 깨달음의 경계는 모든 번뇌의 불길을 다 불어 끈(吹滅) 평정의 상태입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섰으므로 그는 살아서도 열반이 가능함을 온몸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 때문에 부처님의 열반을 ‘완전한 열반’(槃涅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생사의 괴로움을 여읜 진여(眞如) 그대로며, 번뇌의 장애를 끊고 얻은 경계입니다. 무수한 세월동안 다른(異) 형태로 업종자를 성숙(熟)시켜오면서 받아왔던 괴로움의 결과인 현재의 신체까지 멸해버린 것입니다. 때문에 더 이상 남아서 의지할 무엇이 없으므로 무여의(無餘依) 열반이라고 합니다. 자기의 수행으로 고통 세계의 원인인 번뇌는 끊었지만 아직도 과거의 업보로 받은 신체를 멸하지 못한 유여의(有餘依) 열반과는 다릅니다. 사복 어머니의 장사를 지내던 원효는 “나지 말지어다 죽는 것이 괴롭다. 죽지 말지어다 나는 것이 괴롭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사복이 “말이 번거롭소”라고 했습니다. 원효는 다시 “죽고 사는 것이 괴롭다”고 했습니다. ‘죽고 사는 것’, 즉 생사의 문제는 불교의 최대 화두입니다. 어떻게 하면 생(노병)사의 문제를 해결하느냐가 부처님 필생의 화두였습니다. 부처님은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생사의 굴레로부터 벗어났습니다. 그래서 열반(적정)을 성취했습니다. 나고 죽는 경계를 넘어서면 자유롭게 나고 죽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중생들에 대한 자비심으로 역사 속에 다시 났습니다. 그 때문에 일본의 어느 불교학자는 “인류사에서 유일하게 죽은 분은 석가모니 한 분 뿐”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모두들 끊임없이 윤회 환생하지만 그는 유일하게 삶과 죽음에서 자유자재했기 때문이죠. <열반경>에서는 “만들어진 것은 모두 무상하니(諸行無常)/ 이는 생하고 멸하는 법이네(是生滅法)/ 생하고 멸함이 다 멸하고 나면(生滅滅已)/ 적멸이 즐거움이 되네”(寂滅爲樂)라고 했습니다. 전생의 수행자 호명(석가)보살은 앞의 반 게송을 듣고 환희심을 일으켰습니다. 나머지 반 게송을 마저 듣기 위하여 굶주린 식인귀(나찰)의 요구대로 목숨을 던졌습니다. 말 그대로 “진리를 (구하기) 위하여 몸을 버린 것”(爲法亡軀)이죠. 그는 물리의 몸을 버렸기 때문에 진리의 몸을 얻었습니다. 그 때문에 ‘적멸이 즐거움이 된다’는 통찰은 바로 불교가 지향하는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경주 토함산 석불사 대불의 정체성에 관한 담론이 아직도 분분합니다. 종래의 통설인 보신(아미타불)에서 역사적 부처님인 색신(석가모니불)으로 옮겨가는 듯 해 보입니다. ‘열반은 적정’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색신과 법신을 아우르고 역사적 부처님과 비역사적 부처님(법신)을 통섭한 아미타불이 불교가 지향하는 가치에 더 적절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열반을 죽음 이후의 경계로만 한정하지 않아야 생사를 초월해서 불생불멸하는 법신의 진제(眞際)를 얻을 수 있는 길을 열어두는 것입니다. 고영섭/동국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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