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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권에 들어와 생긴 기이 현상 가운데 하나는 이승만이 뜬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승만처럼 무능한 독재자도 없다. 그런데 그가 훌륭한 정치인이라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그 까닭이 노상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민주화 세력에 의해서 옹립된 노무현 정권이 "코드정치"라는 언어유희로 인민을 현혹시키고 독재정권으로 둔갑하여 실정을 거듭하니, 그런 어처구니없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 탓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이승만이 사월혁명으로 쫓겨난지도 어언 반세기가 되어간다. 이제 그때 일을 보고 들어 기억하는 사람들은 소수에 속한다. 이승만의 독재를 겪은 사람들이 다수일 동안에는, 이승만을 찬양하는 소리 해보아야 먹혀들지를 않았으므로, 굳이 반박하고 자시고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어 이승만이 얼마나 나쁜 자였는지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다수가 된 마당에, 이승만을 찬양하는 거짓 주장이 활개를 치게되면 이야기가 좀 달라지지 않을 수 없다. 젊은 세대가 그릇된 역사 인식의 피해를 입지 않도록 사실을 제대로 밝혀야 한다.
이승만 찬양자들이 주로 내세우는 이승만의 업적이란 주로 다음 세 가지이다.
첫째,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
둘째, 단독정부를 세워 오늘의 번영의 주춧돌을 놓았다는 것.
셋째, 반공정책으로써 공산화를 막았다는 것.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나, 내가 보기에는 이 세 가지 가운데 어느 한 가지도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우선 이승만이 독립운동을 하였다는 주장부터 살펴보자. 내 기준으로는 무장투쟁을 결여한 독립운동은 의미가 없다.
인류역사에 무력으로 저항하지도 않는 자들에게 독립의 혜택이 돌아간 사례는 없다. 그런데, 이승만은 독립운동에서 무장투쟁을 배격하고, 시종일관 외교적 노력을 통한 독립을 고집하였다. 그 이른바 강대국의 자비에 호소하는 것도 독립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것은 쥐가 이웃집 고양이에게 우리 집 고양이 때문에 못살겠으니 제발 좀 도와달라고 비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국민의 정부 시절 우리나라는 동 티몰의 독립을 돕기 위해서 평화유지군을 파병한 일이 있다. 그 이른바 "평화유지군"이란 무력분쟁이 있는 지역에 파견하는 군대이다. 무력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구태여 "평화유지"니 뭐니 하는 소리를 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그리고 동 티몰에서 무력분쟁이란 다름 아닌 동 티몰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무력항쟁에서 비롯된 것이다.
만약 동 티몰 사람들이 무력항쟁을 하지 않고, 외교적 노력을 통해서 독립을 얻으려고 시도했다면, 과연 동 티몰의 독립이 있었을까. 인도네시아 정부는 동 티몰에 자국민들을 대거 이주시키는 정책을 계속 추진하여, 동 티몰 독립의 물질적 근거를 없애버렸을 것이다. 우리 민족이 일제치하에서 이승만의 주장대로 무력항쟁을 그만두고 외교적 노력만으로 독립을 얻으려고 했다면, 그와 똑같은 결과를 불렀을 것이다. 일본인들은 한반도로 부지런히 이주하는 일방, 조선인들을 만주로 내몰아, 한반도 내에서 조선인의 수보다는 일본인의 수가 더 많게 만들었을 것이다. 만주와 중국에서 무력항쟁을 하는 독립투사들이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의 정세가 항상 불안하여, 일본인들이 본격적인 한반도 이주를 망설이지 않을 수 없어서, 한민족 독립의 물질적 근거가 유지되었던 것이다.
이승만의 독립노선이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조선총독부의 일관된 정책 ― 한반도의 내지화(內地化)(한반도를 일본열도와 똑같이 직할령으로 만드는 것)를 돕는 지름길이었을 뿐이다. 물론, 이승만이 친일파였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무조건 친일파로 몰아세우는 따위 비이성적인 짓은 하지 않는다. 여기서 내가 강조하는 것은 이승만의 독립노선이 아주 잘못된 것이었고, 따라서 독립운동을 했다고 내세울 만한 가치가 없다는 사실이다.
설사, 백보를 양하여 잘못되었을지언정 독립운동은 독립운동이라고 쳐준다고 하자. 이승만은 그런 독립노선을 통하여 무엇을 얻어냈는가. 이승만은 삼십 년이 넘게 미국에서 활동하면서 재미 동포들이 기부한 독립자금을 독식했다.
상해임시정부가 그토록 그 자금 중 일부를 나누어달라고 애걸했건만, 못들은 척 혼자 다 쓰고 다녔다. 그렇다면 미국정부로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 정도는 얻어냈어야 한다. 그러나, 미국의 어느 정부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았다. 도대체, 이승만은 민족독립을 위해서 무엇을 했다는 말인가.
그것만이 아니다. 그는 독립운동을 위한 조직마저도 꾸리지 못했다. 그 많은 자금을 썼으면, 미국정부의 승인은 못 얻더라도 독립운동을 하는 조직은 가졌어야 한다. 일본의 감시와 자금난에 허덕이던 상해임시정부가 비록 장교가 절반일망정 오백 명이 넘는 독립군을 조직하였던 것과 비교하면, 감시도 없고 자금도 넉넉했던 이승만의 경우에는 조직도 실로 방대한 조직을 꾸렸어야 한다. 그러나, 그가 미국에서 꾸렸다는 그 이른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위원부"라는 것은 1919년에 설립되었다가 10년도 못 가서 1928년에 해체되고 말았다.
구미위원부가 해체된 원인은 표면상 재정난이었지만, 실제로는 이승만의 독단적 성격이었다.
이승만은 분열의 명수였다. 그는 조금만 의견이 다르면 동지를 적으로 돌리기를 예사로 했다. 독립협회를 함께 했던 서재필도 구미위원부를 함께 했던 김규식도 모두 그에게 등을 돌렸다. 그가 가기만 하면 내내 화목하고 평화롭던 교포사회가 갈래갈래 갈라져 싸움을 벌였다.
이승만은 심지어 폭력배까지 동원하여 반대파를 억눌렀다. 그 결과 지지자들이 하나둘 떨어져나가 모금이 되지 않으니, 구미위원부를 해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뒤 1945년 해방을 맞을 때까지, 20년 가까이 이승만은 미국 교포사회에서도 외톨이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으로서 명성은 높았지만 어느 누구도 그와 함께 일하려 하지 않았다. 당연히 워싱턴 정가에서도 인정받지 못했다. 워싱턴 정가에서 그에 대한 평판은 속된 표현으로 "독립을 내세워 껄렁거리고 다니는 건달 비슷한 존재"였다. 그러다가 일본이 패망하고 해방이 되자 그는 홀로 귀국했다.
이것은 김구와 아주 대조적이다. 김구는 일본의 추적을 피하여 상해 프랑스조계에서 끼니를 굶어가며 숨어사는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상해임시정부 조직을 유지하였으며, 조국의 해방을 맞아서는 당당히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귀국하려고 시도했다. 그것으로 미루어 볼 때, 아무 제재도 받지 않는 미국에서 그 많은 독립자금을 쓰면서도 조직원 하나 없이 단독으로 귀국했던 이승만이 과연 독립운동을 했다고 볼 수가 있겠는가.
이승만의 독립운동은 노선부터가 잘못되었으며, 그나마 아무 업적도 없고 조직도 거느리지 못했다. 그런 이승만을 두고 "항일독립운동의 불사신이 어쩌구 . . . ." 하는 것은 참으로 잘못된 파악이다.
그러면, 이승만의 명성이 그토록 높았던 까닭은 무엇인가. 맨 먼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이었던 점을 들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그가 해방정국에서 비록 남한지역에 한했지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보적 명성과 권위를 누린 원인은 따로 있다. 그것은 그가 미국에서 활동했다는 사실과 외톨이였다는 사실 두 가지이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해방정국에서 명성이 높았다. 누구나 아다싶이 당시 삼팔 이남은 미군이 점령하였다. 이것은 곧 삼팔 이남의 운명은 미국의 손에 매였음을 뜻한다. 이것을 잘 아는 삼팔 이남의 제 정치세력은 미국에서 오래 활동한 이승만을 주목하고 떠받들게 된 것이다. 이승만이 워싱턴 정가에서 건달취급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이승만이 워싱턴 정계에서 발이 넓을 것으로 기대했다.
이승만이 거느린 조직이 없이 홀로 귀국했다는 사실이 국내 제 정치세력으로 하여금 군침을 삼키게 하였다. 잘만 하면 이승만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허수아비로 내세워놓고 정국의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부터 마신 격이었지만, 당시 제 정파는 각자 그런 심산으로 단단히 들떠 있었다. 그래서 심지어 박헌영이 이끄는 공산주의자들까지도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내정했던 것이다.
바로 이렇게 추종세력 없이 홀로 귀국했다는 사실이 뒷날 이승만이 친일파를 등용하게 된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그 이른바 독립에 공이 있다고 내세우는 세력과 손을 잡으면 허수아비가 될 것이 뻔하니까, 독립에 공이 있다고 내세울 수가 전혀 없는 친일파를 자기편으로 삼은 것이다. 매국의 원죄를 짊어지고 있는 친일파들은 감지덕지 이승만의 수족이 되어 그의 권력을 강화시키는 일에 충성을 다했다. 이에 답하고 친일파를 등용한 죄악을 캄플라치하기 위해서, 이승만은 공산당을 때려잡는다는 명목으로 정치적 라이벌들을 공산당 또는 용공세력으로 몰아서 탄압한 것이다.
이승만의 라이벌은 다름 아닌 독립운동가들이었다.
친일파를 수족으로 삼았으니 그의 정적은 당연히 독립유공세력이 될 수밖에. 친일파를 수족으로 삼았다는 것은 쉽게 말해서 친일파의 괴수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가 아무 추총세력이 없이 귀국하여 친일파를 수족으로 삼았으니, 그의 추종세력은 친일파 뿐이요, 따라서 그는 당연히 친일파 괴수가 된 것이다. 어제의 독립운동 건달이 오늘의 친일파 괴수로 변신한 것이다. 알아먹기 어렵게 친일파를 등용했다는 따위로 언어유희를 할 것이 없다. "친일파의 괴수가 되었다"고 말하면 모든 것이 이렇게 간단하고 분명해진다. 친일파의 괴수가 되었으니, 독립운동가들과는 적대시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리의 당연한 결과였다. 독립에 유공한 애국자들을 그냥 탄압할 수는 없으므로, 마침 미국이 반공국가인 것을 기화로 삼아, 그들을 공산당 내지 용공세력으로 몰아 탄압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승만은 독립운동이라는 것을 했다고 볼 수 없다. 독립운동을 한답시고 동지들 사이에 분열만 일으키고 다니며, 독립을 염원하는 동포들에게 좌절과 절망만 안겼으니, 독립운동을 방해했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타당하다. 그리고 해방 이후 그가 한 짓은 친일파의 괴수가 되어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독립운동가라기 보다는 독립운동에 백해무익한 인물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음에는 단독정부수립이 과연 이승만의 공로인가를 논하겠다.
2006년 3월 29일 21시 30분
백면서생 남성훈
출처: http://www.netsarang.org/technote/read.cgi?board=PLAZA&y_number=1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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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승만은 자기를 하와이로 초청한 의형재 박용만씨를 하와이에서 무장훈련을 시킨다고 미국에 고발한 사람이다. 무장훈련을 시켜 일본을 공격하면 미국과 일본의 사이가 나빠진다는 것이 이승만의 논리였다. 하와이 한인사회는 이승만이 오기전까지는 아주 단결된 사회였는데 이승만이 한인사회를 분열시킨 장본인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 코드정치햇다고 비판한 사람들 요즈음 이명박이의 행태를 보고 아무 말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현재의 이 명박이의 코드 정치는 이승만, 박정희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