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기의 고향 경북 문경에서 가업으로 200여년간 조선 백자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백산 김정옥 선생이 자신이 만든 작품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다. 김진홍 기자 solmin@idaegu.com
지극히 밋밋한 항아리가 있다. 딱히 생각할 거리도, 기억할 그림도 없이 몸뚱어리는 여백만을 강조한다. 너무도 밋밋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지루하기까지 한 백자 앞에 서 있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웅장한 아우라에 빠져들게 된다.
물레 앞에 앉은 장인은 사뭇 말이 없었다. 그가 걸쳐 입은 순백의 저고리가 백자의 색과 맞닿아있음을 직감했을 때, 이미 그의
눈빛은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깊고도 긴 내면을 빚어가고 있었다. 하얗다 못해 끝없이 맑고 투명한 빛깔을 짚어가며 고집스런
외길을 걸어왔다. 백자항아리는 한 사람의 도공인생을 품고 하얀 산(白山)을 이루었다.
백산 김정옥(75) 선생은 민속 백 사기장 중 뼈대 있는 가문의 후손이다. 영남요 김정옥 명장의 가문을 살펴보면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800년대 초반, 초대 김취정 선생은 문경 주흘산 아래에 위치한 관음리에 도예의 터를 닦았다. 5대 김운희 선생에 이르러
서는 조선 최고의 사기장들만 출입했다던 경기도 광주 관요(官窯)인 분원(分院)에서 왕실 도자기를 빚으며 이름을 떨쳤다. 조선시
대 사료인 하재일기(1891년~1911ㆍ조선말 분원에서 만든 그릇을 궁궐에 납품하던 공인 하재 지규식이 쓴 일기ㆍ현재 규장각에
보관)에도 기록 될 만큼 국내 유일한 조선 왕실 도자 혈통이다.
◆조선시대 도공의 외골수 ‘쟁이’정신
백산은 어려서 부친 김교수 장인으로부터 도예를 배웠다. 가난한 사기장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중학교를 중퇴하고 부친의 물레를
이어받았다. 막내아들을 점놈(사기장을 낮추어 이르는 말)을 시키고야 말았다며 부친은 속상해 했지만 백산은 취정으로부터 이어
지는 경주김씨 조선도자 전승계보의 7대 계승자임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의 부친 김교수 장인은 하루 최고 840여점에 이르는 막사발을 빚어 낼 만큼 명공이었다.
백산의 작품 대부분은 아무 무늬가 없거나 붓질 몇 번으로 마무리를 짓는 지극히 추상적인 것이 특징이다. 채우지 않음으로써 얻어
지는 절제의 미가 흙으로 빚은 돌덩어리의 예술적 가치를 올려놓았다.
마구 갈겨쓴 글씨인 듯, 하면서도 그림으로 연결되는 붓질을 그는 가문의 내력 ‘포도그림’이라 말한다. 아무리 보아도 포도로 보여
지지 않지만 그림의 내면에는 포도 알도, 넝쿨도, 잎사귀도 분명히 존재한다. 화공을 빌리지 않고 직접 밑그림을 그림으로써 그의
도예기법은 한층 높이 평가받는다. 그의 작품이 다른 도공의 작품과 비교되는 것도 어쩌면, 여백에서 풍겨나는 밋밋하면서도 넉넉
한 느낌이 비법 중 비법일는지도 모른다.
백산은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발물레 작업을 아직도 고집한다. 혼연일체의 집념은 끊어질 것 같았던 정통성을 현대에까지 잇는 계기
가 되었다.
1991년에는 일본 국보로 지정된 조선의 막사발, 정호다완을 재현해 내는 데 성공하여 도예부문 초대 명장이 되었다. 1996년 그는
국내 처음이자 유일한 중요무형문화재(인간문화재)에 이름을 올렸다. “문경도자기는 전통재료인 사토의 앙금을 걸러, 전통적인
기법인 발 물레를 사용해 그릇을 빚어, 가장 전통적인 망뎅이 가마에서 질 좋은 소나무로 구워낸다”며 가장 한국적인 가치가 살아
숨 쉬는 문경도자기만의 문화재적 가치를 강조한다.
“하도 가난해서, 먹고살려고 했던 거라, 지금이야 세상이 변해 장인으로 예우도 해주지만 옛날에는 ‘쟁이’, ‘점놈’이라 부르면서
천직 취급 했지”
시대가 붙인 ‘쟁이’라는 말 뒤에는 어떠한 가치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조졸한 감각과 무심한 마음으로 빚어낸 사발들은
서민의 소박한 삶을 닮아 투박하면서 소담스러울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시 태어나도 도공으로 살거야, 조상대대로 흘러온 끼는 내가 억지로 거부하려 해도 거부할 수 없는 것이 답이지.”
일흔의 중반에 접어든 노장의 팔뚝이지만, 물레 앞에 서면 여전히 끝을 가늠할 수 없는 굵고도 긴 혈관들이 툭툭 튀어 오른다.
물레를 돌려대는 발길소리를 따라 흙은 그의 손에서 체온을 머금고 조막만한 찻사발로, 때로는 목이 긴 술병으로, 때로는 품 체를
자랑하는 백자항아리로 모양을 달리했다.
자연스레 몸으로 받아들이며, 감내해온 도공인생은 차가운 듯 뜨거웠고, 요란한 듯 고요했다. 그는 모든 집념을 오로지 도자의 길
에 매달렸다. 내면은 고독했으나 외롭지 않았다. 백자와 사발의 모습도 세월을 따라 조금씩 안정감 있게 변화했다.
백자의 선은 섬세하면서도 지극히 자연스러워졌고, 막사발의 질감은 흙의 투박함을 숨김없이 표현해 더욱 솔직해졌다. 자기들은
자연스럽게, 당연하게 백산의 손에서 그렇게 탄생했다.
탁한 듯, 하면서도 맑은 빛깔에서 뿜어져 나오는 사발의 느낌은 한국의 소박하고도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청초함 같은 것이 묻어
있다. 빛에 반사되어 동공을 찌르며 강렬하게 뇌리에 와 박히는 맑은 빛깔에는 혼신을 다해 빚어낸 백산의 결이 무심에 다다라있음
을 보여준다.
백산의 정호다완은 일본에서 최고로 추앙받고 있다. 일본 도자기의 시발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건너갔던 도공들의 손에 의해서
였다. 도기기술이 없던 일본은 조선의 도공들을 데려가 기술을 전수받기에 이른다.
자연스러우면서도 추하지 않은 아름다움, 그들은 조선의 다완 속에서 쓸쓸하면서도 소박한 정신세계를 닮고 싶었을 게다. 명맥이
끊길 듯했던 정호다완을 백산은 거침없이 재현해 냈고, 일본인들의 발길은 영남요로 이어졌다. 그들의 다도문화에 정점을 찍을
만큼 백산의 다완은 미적, 내면적 구미를 충족시키며 새로운 생명력을 싹 틔웠다.
◆‘점놈’, ‘장인’으로 세계를 평정하다
망댕이 가마는 장작을 이용해 도자기를 굽는다. 가마안에는 불에 구워지는 도자기(오른쪽)의 모습이 보인다.
가마안에 장작을 넣고 불을 지핀 후 화기의 외부 유출을 막기 위해 진흙으로 가마를 막고 있다. 맨 밑의 사진은 도자기의 종류별 구경을 재는(겨냥대)잣대.
2달에 한 번 영남요는 불을 품는다. 망뎅이 가마다. 우리나라 특유의 칸 가마로 20~25㎝ 굵기의 사람 장딴지 모양과 비슷한
진흙덩이(망뎅이)와 흙벽돌을 사용해 만든 가마다. 불은 5칸의 가마에 차례로 올라탄다. 14시간의 초벌을 끝낸 작품에 무늬를
넣고 다시 재벌을 한다. 재벌은 1000여점의 작품을 품고 꼬박 18시간여의 오랜 시간동안 1200도를 웃도는 불과 사투를 벌인다.
공을 들이지 않을 수 없는 중요한 작업이기에 선생은 아직도 가마 앞에서 기나긴 불 때기작업을 손수 고집한다.
그는 한평생 고집스런 삶으로 장인의 길을 걸어왔다. 쓸쓸하고도 외로운 길, 그러했기에 집착할 수 있었고, 현재 ‘명장’이라는
수식어를 부여받았는지도 모른다. 그의 작품 앞에 서면 한없이 편안해진다. 볼수록 정겹고 따스하다. 애써 꾸며대지 않은 소박함
속에 백자는 그를 닮아갔고, 그는 백자를 닮아갔다. 도자의 길, 그것은 어쩌면 사기의 명장 김정옥 선생 자신의 자화상을 빚는
과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철저한 장인정신으로 탄생한 그의 다예는 해외에도 전해져 일본과 미국 캐나다, 독일 등에 영구 전시되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
백산의 명성이 일본에도 전해져 일본 79대 총리 호소가와 모리히로에게 청화백자 도자기법을 직접 전수하기도 했다.
처음부터 남이 알아주기를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있는 그대로, 마음가는대로 빚었다. 그것이 도공의 삶과 심성을 담는 길이었다.
오직 한 길만 걸어온 외곬의 삶은 그를 세계에 우뚝 세워 놓았다. 그는 명장이 되었고, 그의 작품은 명품이 되었다. 자신을 드러
내지 않음으로써 수수한 멋을 작품에 심었고,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발에 조선도예의 깊은 전통성을 심었다. 그는 작품
으로 말한다. 꾸밈없이, 순수하고 담백하게 살라고.
“나의 그릇들은 가마 속에서 태어나 사람들의 친구가 된다. 시름에 젖은 자에게는 술사발로, 아픈 자에게는 약사발로, 마음을
닦는 자에게는 찻사발로, 그들의 생을 채워주고 보듬어 주었다.”고 백산은 말한다.
평이한 백자와 투박한 다완이 왜 이토록 아름다운가. 무(無)의 경지에서 오는 욕심 없는 손길의 결정체가 오늘날 우리의 허술한
삶을 투영해 낸다. 천 년의 ‘쟁이’ 고집이 우직하게 조선의 혼을 빚어 현대에 내어놓고 있다.
박시윤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