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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론 52
마태복음 9:9-13
세리 마태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고치심으로 죄를 사하여 주시는 가장 독특한 권세를 나타내 보이셨다. 이는 십자가로 이루어지는 것을 미리 보여 주신 것이다.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생각하였기에 심각한 도전이 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서 더 나아가 죄 문제에 대하여 마태를 부르시는 것을 통해 한층 더 심도 있게 다루며 더 분명하게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밝히신다. 마가복음 2:13-17과 누가복음 5:27-32이 병행 본문이다.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9절). “마태”의 ‘맛다이오스’는 ‘여호와의 선물’이라는 뜻이다. 마태는 자신을 마태라고 밝히지만 마가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막 2:14)라고 하였고, 누가는 “레위라 하는 세리”(눅 5:27)라고 언급하였는데 레위(연합)라는 이름은 마태가 본래 가졌던 이름인 것 같다. 아무튼 세리를 제자로 삼았다는 것은 오늘 우리의 입장에서는 별로 큰 느낌이 없지만 당시 유대적 상황에서 랍비가 세리를 제자로 삼는다 것은 기이한 일이었다.
“앉아 있는 것”의 ‘카데마이’는 주로 재판관이나 왕이 권력의 상징인 보좌에 앉아 있음을 표현하는 말이다. 즉 마태는 권력의 자리에서 세금을 거둬들이는 자라는 뜻이다. 본문만 보면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신 후 길을 지나시다가 우연히 마태를 보고 그를 부르신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마가복음 본문을 보면 중풍병자를 고치신 후 바닷가에 나가 무리에게 가르치신 후 마태를 부르시는 것을 통해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밝히신다. 마태나 마가, 누가는 다 동일하게 중풍병자를 고치심으로 죄를 사하시는 예수님과 마태를 부르신 사건을 연결하여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중요한 목적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런 점에서 마태는 ‘카데마이’를 중수디포태로 표현하여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기 위해 하나님께서 거기 두셨다는 의미로 표현하였다.
11:19에서는 “세리와 죄인”, 18:17에서는 “이방인과 세리”, 또한 21:31에서는 “세리들과 창기들”이라고 언제나 이방인들이나 죄인들과 같이 동일시되어 결코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자로 인식되었다. 5:46에서도 예수님께서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라고 죄인들의 수준을 세리로 예를 들어서 말씀하셨다. 세례를 받으러 온 세리들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요한은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눅 3:13)라고 한 것을 보면 정한 것보다 항상 더 거두어 착복을 하는 것이 공공연한 것이었기에 사람들은 세리들에 대해 거부감이 있었고 죄인의 대표상으로 표현하였다.
“나를 따르라”의 ‘아콜루데오’는 ‘따르다, 함께 가다, 동의하다, 동반하다’라는 뜻인데 연합을 나타내는 불변사로서 문자적으로 ‘함께 같은 길에 있다’라는 의미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십자가의 길에 있다는 의미이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아콜루데오)(마 16:24)
마태가 즉시 따른 것으로 보이지만 누가복음에 보면 마태가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였다고 기록한 것을 보면 마태가 예수님에 대해 이미 많은 이야기를 들었으며 또한 예수님을 따르기로 한 후에 잔치를 열만큼 시간적인 간격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부르셨을 때 즉시 따른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를 나타낸다. 즉 “일어나 따르니라”라는 표현은 말씀이 선포되면 그 말씀대로 반드시 이루어지는 말씀의 권세를 보여 준다. 말씀이 마태를 사로잡아 따르게 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10절). “앉아”의 ‘아나케이마이’는 ‘식사의 자세로 기대어 눕다’라는 뜻이다. 세관이라는 권세의 자리에서 내려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리에 앉아 언약의 식사를 하게 되었다. 즉 마태의 집을 하나님의 집이 되게 하셨다는 뜻이다. 따라서 말씀이 죄인을 불러서 하나님의 의와 거룩에 참여하게 만드시는 것이지 죄인이 예수님을 선택하여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일이란 결코 있을 수 없다. 이것을 알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스스로 선지자로 나타내면서 어떻게 죄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인지 이는 율법을 어기는 행위라고 비난하였다.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11절). “바리새인들”은 식사에 초대된 자들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과 마태의 식사를 비난하고 있다는 것은 언제나 진리를 조롱하며 거부하는 자들이 있다는 뜻이다. 진리는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길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교회는 사람의 계명과 교훈을 가지고 언제나 율법 행함을 믿음이라고 제시한다. 이것이 다른 길, 다른 복음, 다른 예수를 좇는 자들의 실체이다.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후 11:4)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12절). “건강한 자”라는 말의 ‘이스퀴오’는 ‘힘을 갖는다, 능력이 있다, 강하다, 완전하다’라는 뜻이다. 반대로 “병든 자”라는 말의 ‘카코스’는 ‘악한 자, 능력 없고 실패한 자, 무기력하게 누워 있는 자’를 의미하는 말이다. 우리는 앞에서 베드로 장모의 열병이나 중풍병자를 고치신 이적 속에서 병든 자들이란 무기력하여 전혀 활동할 수 없는 죽은 상태와 같은 의미인 것을 이미 생각했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병든 자란 죄인을 뜻하며 건강한 자란 스스로 의인이라고 여기는 자를 말한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두 사람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눅 18:10)라고 말씀하셨다. 즉 바리새인은 의인의 대표상이고 세리는 죄인의 대표상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바리새인이 진짜 의인이라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 의롭다고 믿는 자들이라고 하셨다. 바리새인은 세리를 의식하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 18:11-12)라고 하였으나 세리는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라고 기도하였다. 그리고 이 비유의 결론을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14)
이 비유의 핵심은 누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즉 자신을 의롭다고 믿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자신을 죄인으로 알고 있는 세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자는 건강한 자이며 곧 자기의 능력을 믿는 자이다. 자기의 능력을 믿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는 것을 통해 그 의로 영생을 누리려는 자이다. 그러나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자는 아무 능력이 없고 실패한 자로 무기력하여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죽은 존재라는 의미이다.
바리새인들은 자신이 의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죄인과 함께 하는 것이 율법에 어긋난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치고자 하였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하는 순간 하나님도 가르치려고 하는 건방진 존재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을 자기 말씀 안에 불러들이신 순간 이미 거룩한 상태로 만드셨다. 함께 한 식탁에서 먹고 마신다는 것은 같은 존재, 같은 동격의 상태가 되었다는 뜻이다. 즉 예수님은 세리와 그 친구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는 것을 통해 죄인들이 말씀 안에서 함께 먹고 마시는 거룩한 잔치에 참여된 증거로 보여 주셨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13절). 구약 호세아의 말씀인데 폭 넓은 문맥을 보자.
4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5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노니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7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 8 길르앗은 악을 행하는 자의 고을이라 피 발자국으로 가득 찼도다 9 강도 떼가 사람을 기다림 같이 제사장의 무리가 세겜 길에서 살인하니 그들이 사악을 행하였느니라 10 내가 이스라엘 집에서 가증한 일을 보았나니 거기서 에브라임은 음행하였고 이스라엘은 더럽혀졌느니라(호 6:4-10)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고 반역하였다고 호세아 선지자가 선포하였는데 구약에서 “인애”(히, ‘헤세드’)는 신약에서 “긍휼”(헬, ‘에레오스’)로 번역되었는데 같은 뜻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긍휼과 사랑, 자비, 은혜를 베푸셨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을 따르는 사랑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과거 호세아 선지자 때의 이스라엘만 아니라 지금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 속에도 없다고 예수님께서 선언하셨다(요 5:42).
하나님은 인애와 긍휼로 기뻐하시는 분이시라는 의미이다. 그것이 십자가이다. 예수님께서 온전한 제물이 되어 십자가 죽음으로 완전한 제사가 이루어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사를 통해 하나님의 언약으로 말미암아 베풀어지는 사랑, 자비, 긍휼이 십자가인 줄 알지 못하면 그것은 자기 공로와 의가 될 뿐이다.
사람은 스스로 하나님의 언약을 따르는 사랑을 나타낼 수 없는 병든 자이고 죽은 존재이기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의미는 예수님께서 오셔서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인애, 은혜를 주시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부르신 결과이다. 베드로가 성전 입구의 앉은뱅이를 고친 일로 인하여 공회에서 이렇게 강론하였다.
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9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8-12)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은 것이 건강하게 된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그렇다면 건강하다고 여기고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에 도전하는 공회의 모든 자들이 병든 자들이라는 의미이다. 우리 역시 이들과 같은 존재로 자기만 사랑하는 자이기에 하나님의 언약은 안중에도 없다. 우리는 죄 사함만 이루어 주시는 예수님을 좋아하지 않는다. 죄도 사해 주시고 우리가 원하는 것도 이루어 주시는 예수님을 좋아한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긍휼, 은혜가 베풀어졌다. 그러므로 세리, 창기와 같으며 병든 자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죽은 죄인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자가 교회요 성도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점점 더 거룩하게 되는 자가 아니라 십자가의 길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날마다 확인하는 자이다(20260322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