갇혔다.
사면이 시멘트 벽이고 남쪽 아파트 틈새로 바깥 풍경을 조금은 바라볼 수 있다.
틈새로 강남구 대모산이 살짝 보인다.
답답하다. 베란다에 나가서 고개를 숙이고는 유리창 너머로 땅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단지 안의 정원수 꼭대기의 모습이 시골에서 나무를 올려다보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23층 아파트에서 내려다보는 나무 꼭대기의 모습은 똑같다. 높낮이가 없는 퍼런 나뭇잎 색깔만 보이고...
갇혔다.
답답하다.
서울 송파구 잠실아파트에서는.
나흘 전인 6월 8일 오전까지 시골집에 있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산골마을이다.
남향받이 앞뜰은 일반산업단지 부지 조성사업으로 함석 칸막이로 둘러막았으며, 앞산의 나무들은 오래 전에 잘려서 흔적없이 사라졌고, 산을 깎아내리는 굴착기 장비 소리만 들렸다. 산업단지가 들어설 산은 자꾸만 깎아내려서 산 높이가 낮아졌다.
지금껏 보이지 않았던 산이 멀리서 나타났다. 소나무 숲과 앞산으로 가려졌던 다른 마을의 뒷산 꼭대기가 보이기 시작하다니 천지개벽 따로 없다.
2017년 6월 1일, 오후 6시 넘어서야 오랫동안 비워 둔 시골집 대문을 땄다.
어둬지는 저녁무렵인데도 잡업복으로 갈아입고, 장화를 신고, 목장갑을 끼고서는 윗밭, 아랫밭을 둘러보았다.
텃밭 세 곳이며, 집주변의 마을 안길이며, 모든 곳이 풀로 가득 차있었다.
일거리가 산더미처럼 몰렸다.
지나치게 익어서 땅에 숱하게 떨어진 물앵두을 따야 하며, 잡초로 뒤덮인 텃밭이며를 정리하자면 나오는 게 한숨이며, 탄성이며, 비명일 터.
헛광에서 쇠스랑, 삽, 낫, 호미 등을 꺼내서 삼태미에 담고는 윗밭으로 갔다.
5월 17일 시골 5일장에서 모종을 사서 심었던 고구마, 아삭이고추, 상추, 방울토마토 모종을 둘러보았다.
감자 두둑, 고구마 두둑, 배초향 두둑, 부추(졸, 정구지) 두둑도 둘러보고, 포기를 나눈 들국화, 사철채송화, 쑥부쟁이 등의 화초류도 내려다보았다.
부쩍 큰 호박 모종도 내려다보았다.
어린 호박 떡잎 위에서 각충이 벌레가 날아들고, 뜯어 먹고...
다음날부터 예순다섯 살의 아내는 아랫밭 앵두나무 가지를 잡아당기며 앵두 알을 따기 시작했다.
열 그루도 훌쩍 넘는 물앵두나무. 앵두가 지나치게 익어서 손만 대면, 나뭇가지가 조금만 흔들려도 지나치게 익은 앵두는 후두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키가 두 자쯤이나 큰 풀 위로 마구 떨어졌다.
앵두 딸 시기가 벌써 지났다는 것을 서울에 있으면서도 예상했다.
해마다 5월 29일 전후로 절정기에 달하는데 올해에는 더위가 일찍 시작되었기에 5월 27일을 적기로 보았다.
물앵두는 지나치게 과숙해서 곰팡이까지 슬었다.
상황이 이런 데도 나는 딸 여가가 없었다.
다른 일, 힘든 일을 먼저 해야 했기에.
아내는 손끝이 무딘탓으로 한 알씩 정성들였다.
그렇게 따면 일이 무척이나 마디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아뭇소리도 하지 않았다.
일 간섭한다고 지청구를 얻어 먹을 것 같기에.
내가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함석지붕에서 흘러내린 물이 큰 물통에 가득 찼다.
비가 내린 지가 오래 되었을까? 물 속에는 모기의 애벌레가 헤엄치고 있었다.
모기 장구벌레가 성충이 되기 전에 얼른 다 퍼내야 했다.
나는 물조루를 들고는 윗밭으로 날라서 채소 모종에 붓기 시작했다.
물조루 무게는 어깨쭉지가 빠질 것처럼 무거웠다. 더군다나 오른쪽 팔목은 지난번 과격하게 일한 탓인지 인대가 늘어나서 고생한 적이 있었기에 오른손으로는 물조루를 쳐들어서 나를 수가 없었다. 왼손만으로 일하려니힘이 곱절이나 더 들었다.
지난번에 관리기로 갈아둔 두둑을 쇠스랑과 삽으로 다독거린 뒤에 호박 모종을 심었다.
200포기 가까이...
햇볕에 모종 잎과 어린 뿌리가 말라죽을까 싶어서 물을 조금씩 부었다.
지난 번에 장에서 사다가 심은 고구마 순에도 물 부어주고,
지난번에 포기 나누기한 들국화에도 물 부어주고,
감자 꽃이 피는 두둑에도 물 부어주고...
6월의 일몰 시각은 19: 55 쯤이다.
밤 8시 가까이 되어서야 해가 져서 어둡기 시작한다.
나는 해가 진 뒤에도 어둑컴컴할 때까지 일했다.
오랜 만에 시골에 내려간 탓으로 텃밭에서 일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기에...
야생들국화 포기를 찾아내서 잘기 쪼개서 포기 나누기하여 심었고,
알꽈리 모종도 풀 속에서 찾아내고, 삽으로 조금스럽게 떠서 풀이 없는 곳에 이식했고,
풀속에 갇혀서 뿌리조차 녹아서 사라진 벌개미취 모종도 몇 포기 찾아내서 이식해야 했고,
나는 다시 서울로 올라와야 할 일이 있었다.
35년 전인 1982년 6월에 폐암으로 돌아간 아버지의 제사를 서울에서 지내려고.
서울로 올라가기 전까지 시골에 일을 조금이라도 더 해야 했기에.
(지난 해에는 고향집에서 제사를 지냈다. 집단 묘소 이전 작업을 해야 했기에.)
또 아내는 시골생활을 기피하는 부적격자이기에 얼른 서울로 되돌아 갈 궁량을 해야 했기에...
시골에서는 일이 잔뜩 밀렸는데도 물앵두를 비닐팩에 담아서 냉동고 안에 넣고는 세 덩어리만 서울로 가지고 왔다.
이따금 '앵두를 냉동고에서 꺼내 드릴까요?" 하고 묻는 아내.
시골에서는 밥 먹은 뒤에 후식으로 물앵두 한 식기씩이나 숟가락으로 떠먹고는 오물거리다가 씨를 뱉었던 앵두.
나뭇가지를 잡아당겨서 따는 족족 입에 넣고는 오물거리면서 씨앗을 뱉으면서 먹어야 제맛이 난다. 따는 시간이 지날수록 맛이 사뭇 없어지고, 달라지기에.
시골에서 먹던 맛이 아니다. 서울에서는 맛은 별로이다. 그래도 '안 먹는 것보다는 낫다'는 논리로 먹는다.
먹는 게 남는 장사이므로...
시골로 내려간지 불과 1주일만에 다시 서울로 올라와 어제는 아비의 제사를 지냈다.
시골로 내려가 텃밭농사 일을 다시 해야 하는데도 '시골로 내려 가자'는 말도 꺼내지 못했다.
아파트 안에 갇혀서 징열살이하기 시작한 지가 오늘로서 나흘째.
마음은 시골 텃밭에 가 있는데,
게으른 농사꾼이라도 농사 지을 시기를 자꾸만 놓치기에 마음조차 지친다.
글 안 써진다.
2017. 6. 11. 일요일.
첫댓글 앵두가 5월 말경에 익는 군요
저는 농사를 모르기에
어느때 씨를 뿌리는 것을 잘 모릅니다
베우고 갑니다
예, 물앵두는 5월 27일쯤이 절정이고, 앵앵두는 6월 중순 경이 절정이지요.
저도 농촌태생이지만 농사 절기를 제대로 이해 못합니다.
식물한테는 분명히 때가 있습니다. 싹 트고, 크고, 꽃 피우고, 과실/열매 맺고, 죽는 시기가 거의 정확합니다.
싹은 늦게 텄다고 해도 열매 맺고 죽는 시기는 거의 일치합니다.
예컨대 가을에 씨앗 뿌리는 밀, 보리는 추운 겨울을 지나야만 곡식 맺어야 6월 중순에 베겠지요.
밀과 보리를 봄철에 씨앗 뿌리면 싹은 트나 알맹이는 맺지 못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