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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인물 스크랩 무인열전(5) 김문노
天風道人 추천 0 조회 18 13.08.21 02:1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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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통일 토대 닦은 화랑의 대부



??김문노(金文弩)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원동력의 하나였던 화랑도의 대부(代父)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는 유명한 화랑 김사다함(金斯多含)의 스승이었고, 역시 젊은 시절 화랑이었던 김춘추(金春秋)와 김유신(金庾信)의 대선배이기도 했다. 또 그는 화랑 중의 화랑인 국선(國仙)과 풍월주(風月主)를 역임하기도 했다. 김유신은 삼국통일 뒤 김문노를 가리켜 ‘사기(士氣)의 종주(宗主)’라고 찬양했고, 조정에서는 각간 벼슬을 추증했으며, 사당에 화상을 모시고, 신궁(神宮)에서 제사를 베풀기도 했다.

??그러면 이렇게 대단한 인물이 어찌하여 그 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을까. 그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삼국사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딱 한 군데서 그의 이름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열전’ 김흠운(金歆運) 편에 그의 스승으로 나온다. 그런 이유로 김문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근래 김대문(金大問)의 <화랑세기> 필사본이 세상에 나타남에 따라 화랑 중의 화랑, 화랑도의 대부였던 김문노의 자취가 보다 더 상세히 밝혀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김문노의 이름이 ‘文努’로, <화랑세기>에는 ‘文弩’로 글자가 틀리지만, 필자는 신라 사람의 기록인 <화랑세기>에 따르기로 했다. 김문노의 일생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화랑의 역사부터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먼저 <삼국사기>에 그의 이름이 유일하게 나오는 ‘열전’ 김흠운편을 보자.

??-김흠운은 내밀왕(奈密王)의 8세손이요, 아비는 잡찬 달복(達福)이다. 흠운이 소년시절에 화랑 문노의 문하에 다녔는데, 당시 화랑의 무리가 “아무개는 전사하여 지금까지 이름을 남기고 있다”는 말을 하니, 흠운이 감개 깊은 기색으로 눈물을 흘리며 이에 격동되어 자기도 그와 같이 하겠다는 뜻을 보였다…. -

??김흠운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2년(655년)에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칠 때 낭당대감(郎幢大監)으로 출전했다가 전사하여 일길찬 벼슬이 추서된 인물이다. 김부식은 이 열전 김흠운편 뒷부분에 저자의 평으로 화랑 설치의 유래에 대해 이렇게 덧붙였다.

??-신라에서는 인재를 놓칠까 염려하여 동류끼리 모여서 함께 놀도록 한 것은 거기에서 그들의 행동과 지향하는 바를 관찰한 뒤에 등용하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얼굴이 잘난 사내를 뽑아 화려한 옷을 입혀 화랑이라고 부름으로써 그를 받들게 했다. 여러 낭도가 사방에서 모여들어 도리와 의기로써 서로 충고하기도 하고, 노래와 음악으로써 서로 즐겁게 놀기도 하여 좋은 산수들을 유람하는데, 아무리 멀리 떨어진 곳이라도 못 가는 데가 없었다. 이런 것으로써 그들의 성품이 정직하고 간사함을 알아내며, 또 그들을 골라서 조정에 추천했다. 그러므로 김대문이 ‘어진 재상과 충신이 여기에서 나오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군사가 여기에서 양성된다’고 한 말이 바로 이것이다.

??태종무열왕까지 3대 왕조의 화랑이 무려 200여 명이나 되었으며, 그들의 빛나는 이름과 아름다운 사적들은 전기(傳記)에 기재된 바와 같다. 흠운과 같은 이도 역시 화랑 무리의 한 사람으로서 그가 능히 나라 일에 목숨을 바쳤으니 화랑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고 이를 만하다. -

??한편, 화랑제도 설치에 관한 기사는 ‘신라본기’ 진흥왕(眞興王) 37년(576년) 조에도 나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봄에 비로소 원화(源花)를 받들었다. 처음에 임금이나 신하들이 인재를 알아볼 수 없는 것을 걱정하여 무리지어 놀도록 하고, 그들의 행동거지를 살펴본 뒤에 이를 천거하여 쓰기로 했다. 그리하여 드디어 어여쁜 여자 두 명을 골랐는데 하나는 남모(南毛)요, 하나는 준정(俊貞)이었다. 무리 300여 명을 모았더니 두 여자가 미모를 다투어 서로 질투하다가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으로 유인하여 억지로 술을 먹여 취하게 하고 강물에 던져 죽였으므로 준정은 사형을 당하고 그 무리는 화목이 깨어져 흩어지고 말았다.

??그 뒤에 다시 얼굴이 어여쁘게 생긴 남자를 택해 곱게 단장시키고 이름을 화랑이라고 불러 이를 받들었다. 그런 뒤 무리가 구름처럼 모여들어 혹은 서로 연마하고 혹은 음악으로써 서로 즐기며 산수를 즐겨 찾아다니며 유람하되 그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해 그 인품의 바르고 바르지 못한 것을 알게 되어 그 가운데 선량한 인물을 택해 조정에 추천했다. 그러므로 김대문이 <화랑세기>에서 말하기를,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여기에서 나오고 좋은 장수와 날랜 군사가 이로부터 나온다’고 했다.

??최치원(崔致遠)이 ‘난랑비 서문(鸞郞碑序文)’에서 이렇게 일렀다.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風流)라 한다. 이 교를 창설한 내력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밝혀져 있으니 실상인즉 세 가지 교(유?불?선)를 포함해 인간을 교화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집에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가면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노사구(魯司寇:공자)의 뜻이요,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이 말없는 교훈을 실천하는 것은 주주사(周柱史:노자)의 종지요, 모든 악행을 하지 않고 선행을 실천하는 것은 축건태자(竺乾太子:석가)의 교화이니 즉 이와 같은 것들이다.’

??당나라 영호징(令狐澄)은 <신라국기>에서 이렇게 썼다. ‘귀인자제 가운데 고운 자를 택해 분을 발라 화장시키고 이름을 화랑이라고 불렀으니 나라사람이 모두 떠받들어 섬겼다.’-

??그러나 화랑의 설치시기가 <삼국사기>보다 앞서 나온 <화랑세기>나 그 뒤에 나온 <삼국사절요>?<동국통감>?<동사강목> 등에는 모두 진흥왕 1년(540년)의 일로 나온다. 특히 진흥왕 즉위시 지소태후(只召太后)가 섭정을 했고, 당시 지소태후가 원화를 폐지하고 화랑을 설치했다는 <화랑세기>의 기록이 정황상 신빙성이 높다. 그러면 이번에는 김부식이 인용한 <화랑세기>의 서문을 보자.

??-화랑은 선도(仙道)다. 우리나라(신라)에서 신궁(神宮)을 받들고 하늘에 대제(大祭)를 행하는 것은 마치 연(燕)의 동산(桐山)이나 노(魯)의 태산(泰山)과 같다. 옛날 연부인(燕夫人)이 선도를 좋아하여 미인을 많이 모아 국화(國花)라 이름했다. 그 풍습이 동쪽으로 흘러들어 우리나라에서도 여자로써 원화를 삼게 되었는데, 지소태후가 원화를 폐지하고 화랑을 설치하여 국인들로 하여금 받들게 했다. 이에 앞서 법흥대왕(法興大王)이 위화랑(魏花郞)을 사랑해 ‘화랑’이라고 불렀다. 화랑이란 이름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옛날에 선도는 단지 봉신(奉神)을 주로 했는데, 국공(國公)들이 봉신을 베풀어 행한 뒤 선도는 도의를 닦기에 서로 힘썼다. 이에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이로부터 빼어났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이 이로부터 나왔다. 화랑의 역사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기록을 보면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화랑세기>를 참조하여 ‘신라본기’와 ‘열전’ 두 군데에 인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면 <화랑세기>는 어떤 책인가. <삼국사기> ‘열전’ 설총(薛聰) 편을 보면 설총의 전기 뒤에 최승우(崔承祐)?최언위(崔彦?)와 함께 김대문에 관한 이야기가 간략히 나온다. 거기에 이르기를, ‘김대문은 신라 귀족의 자제로서 성덕왕(聖德王) 3년(704년)에 한산주 도독을 지냈다. 그가 전기 몇 권을 지었는데, 그 가운데 <고승전>?<화랑세기>?<악보>?<한산기> 등은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고 했다.

??따라서 <화랑세기>는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한 고려 인종(仁宗) 23년(1145년)까지도 존재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그 뒤 언제 어디로 사라졌는지 나타나지 않다가 그로부터 844년이 지난 1989년 2월에 부산에서 32쪽 분량의 <화랑세기> 발췌본이 나타났다. 이어서 1995년 4월에는 서울대학교 노태돈 교수가 162쪽 분량의 <화랑세기> 필사본을 공개했다. 이 필사본은 1933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 궁내성 도서료의 촉탁으로 일했던 박창화씨가 필사한 것이라고 한다. 그는 1965년에 죽었는데, <화랑세기> 필사본이 갑자기 출현하자 곧 치열한 진위논쟁이 벌어졌다. 양측의 주장은 아직도 팽팽히 맞서고 있지만, 최근에는 진본 쪽에 좀더 기울고 있다. 이 문제는 지면관계상 더 이상 자세히 소개할 수 없고, 다만 필자 역시 여러 가지 정황증거로 보아 <화랑세기> 필사본이 진본이란 신빙성이 높다고 보기에 이를 바탕으로 하여 김문노의 일생을 재구성해보는 것이다.

??<화랑세기>에는 진흥왕 1년부터 신문왕(神文王) 1년(681년)까지 존재했던 제1세 풍월주 위화랑부터 제32세 풍월주 신공(信功)에 이르는 풍월주 32명의 전기와 가계, 그리고 화랑의 조직과 피벌 등이 실려 있다. 김문노는 이 가운데 제8세 풍월주로 나온다. 문노 편의 뒷부분에 그의 가계에 관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는 비조부(比助夫)이고, 할아버지는 호조(好助)이며, 증조부는 비지(比知)이다. 호조의 어머니는 곧 등흔공(登欣公)의 누이인 조리(助里)이다. 또한…. 비조부는 호조공의 첩 문화공주(文華公主)와 통하여 공(문노)을 낳았다. 문화공주는 북국왕(北國王)의 딸이다. 또는 야국왕(野國王)의 딸이라고도 한다.-

??여기에서 김문노의 증조부로 나오는 비지는 제1세 풍월주 위화랑편에 따르면 비량(比梁)의 아버지로 나오고, 부인은 묘양(妙陽)이라고 했으니, 이 기록을 그대로 따라 가계를 살펴본다면 김문노의 증조부 김비지는 조리라는 또 다른 여인에게서 문노의 조부 김호조를 낳았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화랑세기>를 분석해보면 김문노와 김사다함은 사제관계이기도 하지만, 또한 같은 내물왕의 7세손으로서 조부는 다르고 증조부는 같은 김비지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김비태(金比太)의 아들 비지가 묘양과 혼인하여 비량을 낳고, 조리와 혼인하여 호조를 낳았는데, 비량은 벽화부인(碧花夫人)과 관계하여 구리지(仇利知)를 낳고, 구리지는 금진(金珍)과 관계하여 토함(吐含)?사다함?새달(塞達) 등 2남 1녀를 낳았던 것이다. 한편, 호조는 비조부를 낳고, 비조부는 아버지 호조의 첩이었던 문화공주와 몰래 상통하여 문노를 낳았던 것이다.

??우리는 신라와 고려 왕실이 근친혼으로 혈통을 보존한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화랑세기>에 나오는 당시 신라 왕족과 귀족 집단의 혈연관계, 성관계는 오늘의 윤리도덕관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기 그지없다. 가계도를 제대로 만들 수 도 없을 정도다. 오죽하면 ‘신라의 후예’를 자처했던 김부식마저 자신의 조상들이기도 한 신라 왕족?귀족들의 자유분방한 연애관과 성관계에 대해 이렇게 개탄했겠는가. 그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물이사금 즉위조에서 이렇게 썼다.

??-아내를 얻을 적에 같은 성씨를 얻지 않는 것은 인륜의 분별을 두터이 하기 때문이다. (중략) 신라에서는 같은 성씨끼리 혼인을 하는데 그치지 않고 형제의 자식이나 고모?이모?사촌자매까지 아내로 맞았으니, 비록 외국으로서 각기 풍속이 다르다고 할지라도 중국의 예속(禮俗)으로서 이를 따진다면 큰 잘못이라고 하겠다. 흉노가 그 어미와 상관하고, 자식과 상관함은 또 이보다 더 심한 경우라고 하겠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문노의 증조부 비지의 이름이 나온다. ‘신라본기’ 소지마립간 15년조에 이렇게 나온다. ‘봄 3월에 백제왕 모대(牟大 : 東城王)가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므로 왕이 이벌찬 비지(比智)의 딸을 보냈다.’ 이 기록은 또 ‘백제본기’ 동성왕 15년조에도 있는데, 비지의 이름이 <화랑세기>에는 ‘比知’, <삼국사기>에는 ‘比智’로 다를뿐이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김문노는 진평왕 28년(606년)에 69세로 죽었다고 했으니, 이를 역산해보면 그는 법흥왕 24년(547년)에 태어난 셈이 된다. 문노가 태어난 해는 신라가 처음으로 건원(建元)이란 연호를 세운 다음 해였고,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로 불교가 공인된 지 10년이 흘러 불교가 신라의 국교가 되다시피 하여 융성해질 무렵이었다. 또한 문노가 태어나기 5년 전인 법흥왕 19년에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임금 구형왕(仇衡王 : 金仇亥)이 왕비와 세 아들 노종(奴宗)?무덕(武德)?무력(武力)을 데리고 신라에 항복, 신라의 국세와 국력이 급신장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화랑세기> 제8세 풍월주 문노편을 보면 그의 어머니 문화공주는 가야국 공주라고 했고, 또는 야국왕이 바친 공녀(貢女)라고 했다. 여기에서 말한 야국이 왜국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당시 왜가 신라에 공녀를 바쳤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또는 북국왕의 공주라고도 했는데, 북국이란 법흥왕이 가야를 남?북 두 나라로 나눈 그 북가야를 가리킨다. 당시 신라는 금관가야의 세력약화에 따라 붕괴된 가야연맹을 남북으로 나누어 이뇌(異腦)를 북국(북가야) 왕으로 삼고, 양화공주(兩花公主)를 그의 부인으로 삼았으며, 청명(靑明)을 남국왕으로 삼았다고 했다.

??그 뒤 이뇌왕의 숙부 찬실(贊失)이 이뇌를 내쫓고 왕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그때 김문노의 조부 김호조가 북가야에 사신으로 가서 이를 책망했다는 것이다. 이에 앞서 찬실은 야국왕의 사위가 되었고, 문노의 어머니 문화공주는 찬실의 딸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문화공주는 처음에 호조의 첩이 되었는데, 호조의 아들 비조와 몰래 상관하여 문노를 낳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태어난 김문노는 어려서부터 검술을 배워 달인이 되었고, 의로운 일에 남보다 앞장서는 협객으로 성장했다. 뒷날 진흥왕 22년(561년)에 제자인 사다함이 이사부의 부장으로서 가야정벌전에 출전할 때 문노에게 함께 가기를 청하자 문노는, “가야는 나의 외가의 나라다. 어찌 어머니의 아들된 도리로서 외조부의 백성들을 칠 수 있겠는가?”하고 거절했다. 그러자 사다함의 낭도 가운데 문노를 비난하는 자들이 있었다. 사다함은 이런 말로 그들을 꾸짖었다. “나의 스승 문노는 의로운 사람이다. 어찌 그를 비난할 수 있으랴!” 그리고 가야정벌시 부하들에게 사람들을 함부로 죽이지 못 하게 해 스승의 뜻에 보답했다고 한다.

??가야정벌전 당시 문노는 24세, 사다함은 불과 16세였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사다함이 가야정벌전에서 개선한 뒤 친구 무관랑(武官郞)의 죽음에 상심하여 죽은 것이 진흥왕 23년(562년)의 일로 나온다.

??그러면 같은 내물이사금의 7세손으로서 나이어린 사다함은 화랑 중의 화랑인 풍월주에 오르고 귀당비장(貴幢裨將)으로 가야정벌군의 부사령관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승인 문노는 어찌하여 아무 벼슬도 하지 못한 채 초야의 협객으로 머물고 있었을까. 그 까닭은 부계보다 모계를 더 중시했던 당시 어머니 문화공주가 첩의 신분으로 아무 골품(骨品)이 없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어머니가 본래 할아버지의 첩이었는데 그 아들과 밀통하여 문노를 낳았다는 사실도 신분상승에 불리하게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또 중요한 사실은 그의 아버지 비조가 요즘 식으로 말하면 줄을 잘못 섰기에 출세를 못한 점도 있었다. 즉, 비조는 아버지 호조의 뒤를 이어 가야에 자주 사신으로 가서 분쟁을 해결하는 등 능력을 발휘하여 법흥왕의 신임을 받았다. 그 공으로 청화공주(靑華公主)의 딸 청진공주(靑珍公主)에게 장가들었다.

??청진공주가 법흥왕의 총애를 받자 그 덕분에 비조는 요직에 발탁될 수 있었다. 법흥왕 24년(537년)에 왕이 박영실(朴英失)을 부군(副君)으로 삼아 장차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는데, 다른 왕족들의 반발을 두려워해 비조를 병부령으로 삼고 군권을 장악하게 했다. 이에 앞서 비조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어서 법흥왕이 영실을 총애하는 것을 보고 그의 충복이 되어 극진하게 섬겼던 것이다. 그런데 영실은 지소태후의 계부(繼夫)였다. 지소태후는 법흥왕의 딸로서 친삼촌인 김입종(金立宗)에게 시집가서 진흥왕을 낳았다. 입종이 죽자 법흥왕의 명령에 따라 영실을 계부로 삼았으나 그녀는 영실을 좋아하지 않고 이사부를 사랑하여 둘 사이에서 아들 세종(世宗)과 딸 셋을 낳았다는 이야기는 앞서 이사부편에서 자세히 밝힌 바와 같다. 그러다가 뒷날 진흥왕이 불과 7세에 등극하고 지소태후가 섭정을 맡자 영실과 비조는 실각하여 바둑이나 두면서 처량하게 여생을 보냈다.

??김문노가 제4세 풍월주 이화랑의 부탁을 받아 사다함의 스승이 되었을 때 그는 이미 500여 명의 낭도를 거느리고 있었다. 사다함의 형 토함이 이화랑의 부제(副弟)로 있을 때 사다함은 불과 15세에 1천여 낭도를 거느렸다고 한다. 그때 무관랑도 인망이 있어 따르는 낭도가 많았다. 사다함이 나이는 비록 어리나 의기가 빼어나다는 말을 들은 무관랑이 사다함을 만나보고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공자는 실로 훌륭한 사람이니 앞으로 기꺼이 섬기고자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사다함이, “나이어린 제가 어찌 감히 거느리겠습니까?”하고 사양하다가 마침내 사신(私臣)으로 받아들였다. 이화랑이 이 말을 듣고 지소태후에게 아뢰기를, “토함의 아우 사다함은 나이 아직 어리나 많은 낭도를 거느렸으니 자못 국선이라고 할 만합니다”라고 했다. 이에 지소태후가 사다함을 궁중으로 불러들여 음식을 내리고 사람을 거느리는 방법을 묻자 사다함이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 사랑하기를 제 몸 같이 할 따름입니다. 그 사람의 좋은 점을 좋다고 하는 것뿐입니다.”

??태후가 매우 기특하게 여겨 진흥왕으로 하여금 귀당비장을 삼아 궁문을 관장토록 했다. 또 이화랑은 문노에게 부탁하여 사다함의 스승이 되어 검술을 가르쳐주도록 했다. 문노가 처음에 이렇게 말하며 사양했다. “검은 곧 한 사람을 대적하는 것인데, 어찌 고귀한 사람이 배울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러자 이화랑이 말했다. “한 사람을 대적하지 못 하는 자가 어찌 만인을 대적할 수 있겠는가? 이 아이는 호협을 좋아하여 비록 따르는 무리는 많다고 하지만, 그 적이 없다고 할 수도 없으니 그대가 보호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에 문노가 응락하여 자신의 낭도 500명을 데리고 사다함의 무리와 합치고 그의 사부가 되었다.

??김문노가 처음으로 전쟁터에 나간 것은 진흥왕 15년(554년). 그의 나이 17세 때였다. 김유신의 조부 김무력을 따라 백제와 싸울 때 출전했던 것이다. <삼국사기>에도 당시의 전쟁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가을 7월에 명활성을 수축했다. 백제왕 명농(明? : 聖王)이 가야와 함께 와서 관산성을 쳤다. 군주요 각간인 우덕(于德)과 이찬 탐지(眈知) 등이 이를 맞아 싸우다가 불리하여 신주의 군주 김무력이 주의 병력을 이끌고 달려와 교전하게 되었다. 그이 비장인 삼년산군의 고간도도(高干都刀)가 급격히 몰아쳐 백제왕을 죽였다. 이때야 모든 군사가 승세를 타 싸워 크게 이기고, 좌평 4명과 장병 2만 9천 600명을 목 베니 말 한 필도 돌아가지 못 했다.-

??<화랑세기>에는 문노가 이 싸움에서 전공을 세웠음에도 아무 상을 받지 못 했으나 개의치 않았다고 전한다. 또 진흥왕 16년에는 북한산주에 출전해 고구려군과 싸웠고, 다시 2년 뒤에는 국원성에 나가 북가야를 쳐서 역시 전공을 세웠으나 아무 상도 받지 못 했다. 그의 낭도들이 불평하자 문노는 이렇게 타일렀다. “대체로 상벌이라는 것은 소인들의 일이다. 너희들이 이미 나를 우두머리로 삼아 따르고 있는데, 어찌 내 뜻으로 너희들의 뜻을 삼지 않는가?”

??사다함이 죽고 이사부와 지소태후의 아들인 김세종이 제6세 풍월주가 되어 도움을 청하자고자 문노의 집으로 찾아와 말했다. “나는 감히 그대를 신하로 삼을 수는 없소. 청컨대 나의 형이 되어서 도와주시오.” 문노가 세종의 청이 하도 간절하기에 마침내 그의 수하에 들어가 섬기기로 작정했다. 감격한 세종이 아비는 다르고 어미는 같은 진흥왕에게 아뢰기를, “비조부의 아들 문노는 고구려와 백제를 치는데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으나 어미의 신분이 무품(無品)인 까닭에 벼슬길에 오르지 못 했습니다. 이 같은 인재를 썩히는 것은 아까운 일입니다.” 했더니 진흥왕이 문노에게 급찬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문노는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화랑세기>는 이어서 이런 이야기를 전한다.

??문노의 수하에 금천(金闡)이란 낭도가 있었는데 친구 백운(白雲)과 제후(除厚)를 위해 사사로이 살인을 했다. 조정에서 이를 알고 처벌하려고 하자 세종이 나서서 방패막이가 되어 이렇게 말했다. “이는 의리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 상을 주지는 못 할지언정 벌을 주어서는 안 된다.” 이에 조정에서 상을 주자 세종을 따르는 낭도가 더욱 늘어났다고 한다.

??문노가 이처럼 화랑의 대부로서 신망이 높고 따르는 낭도가 많자 권력층의 관심도 차츰 높아져갔다. 먼저 진흥왕의 부인 사도왕후(思道王后)가 문노를 몰래 도와 호의를 사려고 했다. 그런데 문노는 사도왕후의 조카요 세종의 부인인 미실(美室)을 좋아하지 않았다. 세종의 출전도 사실은 미실이 반강제적으로 권한 것에 따른 것이었다. 미실은 그때 진흥왕의 총애를 업고 정주인 설원(薛原)을 풍월주로 삼으니 문노의 낭도들이 이에 불복하여 문파를 따로 세웠던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가야파다. 화랑도가 문노파와 설원파(미실파)로 나뉘자 문노파는 청의(淸議), 즉 정신적 정통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했고, 설원파는 법적 정통성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하여 대립했다. <화랑세기> 제7세 풍월주 설원랑조는 당시의 사정을 이렇게 전한다.

??-설원랑의 낭도들은 향가를 잘 하고 속세를 떠난 청유를 즐겼다. 그러므로 국인들이 문노파를 가리켜 ‘호국선(護國仙)’이라 했고, 설원파를 가리켜 ‘운상인(雲上人)’이라고 불렀다. 골품이 있는 자들은 설원을 많이 따랐고, 초야의 사람들은 문노를 많이 따랐다.-

??서기 576년 43세의 진흥왕이 죽고 금륜태자(金輪太子)가 즉위했으니 그가 진지왕(眞智王)이다. 그런데 진지왕은 방탕하여 사도태후와 미실궁주 등에 의해 579년에 폐위당하고 일찍 죽은 동륜태자(銅輪太子)의 아들인 김백정(金白淨)을 왕위에 앉히니 그가 진평왕이다. 진지왕 폐위와 진평왕 즉위의 전후 사정을 <화랑세기>를 통해 살펴본다.

??신라 중흥기의 영주 진흥왕이 불과 45세 한찬 나이로 죽은 이유는 미실을 후궁으로 삼아 지나치게 색사를 밝혔기 때문이었다. 정기가 고갈되어 중풍에 걸렸던 것이다. 진흥왕이 죽자 사도?미실?세종?설원 등은 이를 비밀로 하고 사도태후가 미실로 하여금 금륜태자와 정을 통하게 하여 왕후 자리를 보장받게 한 다음 즉위토록 했다는 것이다. 진지왕은 진흥왕과 그의 후궁 숙명궁주 소생인데, 숙명궁주는 또한 이사부와 지소태후 사이의 소생이다. 따라서 숙명궁주는 진흥왕과는 씨다른 남매간이었다.

??사도태후와 미실궁주는 혹시 있을지 모르는 신민들의 불만을 우려해 명망 높은 중신인 거칠부(居柒夫)를 상대등으로 임명했으나 거칠부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사양하므로 사도태후의 오라비인 노리부(弩里夫)로 하여금 상대등을 맡게 했다. 이렇게 미실의 힘으로 제위에 올랏지만 진지왕은 미실을 황후로 삼겠다는 약속을 저버린 채 정사도 돌보지 않고 엽색행각에만 여념이 없었다. 이에 사도태후와 미실은 진지왕을 폐위시키기로 작정했다. 두 여자는 풍월주 세종에게 그런 내용의 밀조를 내렸다. 하지만 당시 화랑도가 문노파와 미실파로 갈라져 있었으므로 세종이 그의 낭도들만 거느리고 정변을 일으킨다면 강직한 문노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자칫 잘못하다가는 내전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그래서 원화제도를 부활시키기로 하고 미실이 원화를 맡았다. 세종은 문노를 찾아가 태후의 밀조를 보여주고 협조를 당부했다. 문노가 보기에 이 뒤에는 틀림없이 미실이 있을 것이지만 진지왕이 하는 골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나라가 망할 것 같기에 어쩔 수 없이 협력을 약속했다. 원화로 복귀한 미실은 세종은 상선(上仙), 문노를 아선(亞仙), 설원과 비보(秘寶)는 각각 좌?우 봉사화랑, 자신의 남동생 미생을 전방 봉사화랑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거사가 성공한 뒤 문노는 세종과 미실의 부탁을 받아들여 제8세 풍월주를 맡는다.

??이에 앞서 문노는 진지왕에 의해 국선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를 선화라고도 불렀다. 미실이 원화를 내놓고 다시 풍월주를 부활하여 문노에게 그 자리를 맡기자 처음에 문노는 이렇게 말하며 거절했다. “국선은 풍월주보다 아래가 아니고, 나는 설원의 스승인데 어찌 그 직위를 물려받을 수 있겠는가?” 그러자 설원 등이, “국선은 전 임금이 설치한 것이지 풍월주의 전통은 아닙니다. 또 전에 세종이 왕자의 몸으로 사다함의 뒤를 이은 경우도 있지 않았습니까?”라고 설득을 했다. 그런 사연 끝에 결국 문노는 풍월주에 취임하게 되었던 것이다. 썩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어디까지나 한 번 섬기기로 한 세종의 체면을 위해서였다.

??가야 출신이 대부분인 문노의 낭도들이 국선 문노가 미실과 설원 등에게 설득당해 풍월주가 된 것이 못마땅하여 불평하자 문노가 이들을 꾸짖고 달랬다. 문노는 진지왕 즉위 직후 지도왕후가 임금에게 말해 문노에게 일길찬 벼슬을 내렸으나 받지 않았는데, 진지왕 폐위사건에 개입한 뒤 진평왕 즉위에 공이 있다고 하여 내린 아찬 벼슬은 받았다고 한다. 이로써 그는 공식적으로 신라 귀족의 일원으로 편입된 것이다.

??풍월주가 된 문노는 낭도의 조직을 개편했다. 좌?우 봉사화랑은 좌?우 대화랑, 전방 봉사화랑은 전방 대화랑으로 개칭하여 각각 3부의 낭도를 거느리게 했다. 또 진골화랑?귀방화랑?별방화랑?별문화랑을 두고, 좌화랑 2명, 우화랑 2명을 두어 각각 소화랑 3명, 묘화랑 7명을 거느리게 했다.

??문노가 결혼을 한 것은 세종을 모시고 출전했다가 돌아와 국선이 된 다음이었다. 부인은 윤궁(允宮)으로 거칠부와 미진부의 누이동생 사이에서 낳은 딸이었다. 윤궁은 문노의 부인이 되기 전에 동륜태자를 섬겨 윤실(允室)을 낳은 뒤, 동륜태자가 죽자 과부로 지낸지 5년째였다. 윤궁은 처음에 문노가 자신과 같은 진골이 아닌 무품이므로 혼인하기를 꺼려했으나 한 번 만나본 뒤 서로 마음에 들어 혼인하여 대강(大剛)?충강(充剛)?금강(金剛) 3남과 윤강(允剛)?현강(玄剛)?신강(信剛) 3녀를 두었다. 이 가운데 셋째아들 금강은 태종무열왕 2년(655년) 정월에 이찬으로서 상대등이 되었고, 무열왕 7년 정월에 죽었는데, 그 뒤를 이어 상대등이 된 사람이 이찬 김유신이었다.

??문노는 평소 주색을 즐기지 않았는데 아내의 권유로 술도 조금씩 마시고, 첩도 한 명 두었다고 전한다. 그는 풍월주 자리를 제자인 비보랑에게 물려준 뒤 아내 윤궁과 수레를 타고 야외로 놀러다니며 풍류를 즐겼다. 그렇게 여생을 보내다가 606년에 세상을 떠나니 당시 나이 69세였다. <화랑세기>는 김문노를 이런 찬사로 기렸다.

??-공은 용맹을 좋아하고 문장에도 능했으며, 아랫사람 사랑하기를 자기를 사랑하는 듯했다. 청탁에 구애되지 않고 자기에게 귀의하는 사람은 모두 포용했다. 그래서 명성이 크게 떨쳤고, 낭도들이 목숨을 걸고 충성을 바쳤다. 삼국통일 대업이 공의 사풍(士風)에서 비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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