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朋友相愛之道, 只在責善,
惟以向學以誠, 律身以敬
* 친구 사이에 서로 사랑하는 길은 다만 '착하기를 추구함'에 있다.
생각하건대 학문은 '정성'으로 해야 하고, 몸은 '공경'으로 다스려야 한다.
- 정여창 {일두유집}꾸짖어주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맹자는 선으로 책망해 주는 것이 친구의 도리(責善, 朋友之道也)라고
했던 것입니다. 학자는 싸우지 않으면 친구가 될 수 없다는 말도
이와 관련하여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공부를 하는 것은 정성(誠)으로 할 일이며,
몸가짐을 바르게 하는 것은 공경(敬)으로 할 일입니다.
'성'과 '경'이야 말로 대자적 자유와 대타적 화해를 획득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여창 [鄭汝昌]조선 문신 | 브리태니커
태어난 때 | 1450(세종 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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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때 | 1504(연산군 10). |
소속 국가 | 한국 |
소속 국가 부속정보 | 조선 |
직업 | 문신 |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조선 전기 사림파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훈구파가 일으킨 사화(士禍)로 죽었다.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백욱(伯勗), 호는 일두(一蠹).
아버지는 함길도병마우후 육을(六乙)이다. 김굉필(金宏弼)·김일손(金馹孫) 등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에게서 배웠다. 일찍이 지리산에 들어가 5경(五經)과 성리학을 연구했다.
1490년(성종 21) 효행과 학식으로 천거되어 소격서참봉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다.
같은 해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간 후 예문관검열·세자시강원설서·안음현감 등을 역임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경성으로 유배되어 죽었다.
1504년 죽은 뒤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그는 유학적인 이상사회, 즉 인정(仁政)이 보편화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먼저 치자(治者)의 도덕적 의지가 확립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주자학적 세계관을 우주론적으로 해명하는 이기론(理氣論)과 함께
개인의 도덕성 확립을 위한 심성론(心性論)을 본격적으로 탐구했다.
이기론의 경우 이(理)와 기(氣)는 현상적으로 구별되지 않지만,
궁극적으로 이는 지선(至善)하며 영위(營爲)하는 바가 없는 반면에 기는 유위(有爲)하며
청탁(淸濁)이 있으므로 구별된다고 보았다. 이와 함께 학문의 목적은 성인이 되는 데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물욕(物欲)과 공리(功利)를 배제할 수 있는 입지(立志)가 가장 중요하다고 인식했다. 이러한 그의 성리학은 정몽주(鄭夢周)·김숙자(金叔滋)·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조선 전기 사림파의 주자학적 학문을 계승한 것이었다.
사림파는 인(仁)을 보편적 가치의 정점으로 삼아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할 것을 요구했고,
이를 바탕으로 당시의 집권세력이었던 훈구파를 공격했다.
정여창 역시 스스로 성인을 공언하여 이러한 사명의 담지자로 자처했고
결국은 사화에 연루되어 죽었다. 저서는 무오사화 때 소각되어 대부분이 없어지고
정구(鄭逑)가 엮은 〈문헌공실기 文獻公實記〉에 일부가 전하며,
1920년 후손이 유문을 엮어 만든 〈일두유집〉이 있다. 중종대에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1610년(광해군 10) 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과 함께
5현(五賢)의 한 사람으로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나주 경현서원(景賢書院),
함양 남계서원(藍溪書院), 상주 도남서원(道南書院), 합천 이연서원(伊淵書院),
거창 도산서원(道山書院), 종성 종산서원(鍾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일두유집 [一蠹遺集]정여창 시문집 | 브리태니커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인 정여창(鄭汝昌 : 1450~1504)의 시문집.
6권 2책. 목판본. 1920년 16세손 근상(根相)이 정구(鄭逑)와 장현광(張顯光)이 편집·간행한 〈문헌공실기 文獻公實記〉를 유집으로 하고, 여기에 수록되지 않은 시문과 사우록(師友錄)을 속집으로 간행했다. 속집 끝에는 전우(田愚)의 발문이 있다. 저자는 1498년 무오사화로 처형되었는데 그의 저술 대부분이 이때 없어졌다고 한다. 여기에는 시와 소(疏)·편지·잡저 등의 유문과 반교문(頒敎文)·문묘봉안시고유문(文廟奉安時告由文) 등 그에 관련된 글들이 실려 있다. 잡저 중 〈용학주소 庸學註疏〉·〈주객문답 主客問答〉·〈진수잡저 進修雜著〉 등 주요한 글들은 제목만 실려 있다. 속집에 실린 〈이기설 理氣說〉에서는 이(理)와 기(氣)의 관계를 '하나이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一而二二而一)인 것으로 이해하고 만물의 생성과 발전을 이와 기로서 설명했다. 〈선악천리론 善惡天理論〉에서는 인간은 기로 인하여 선악을 가지고 있으며 선악도 성(性), 곧 천리(天理)라고 파악했다. 〈입지론 立志論〉은 학문의 목적이 성인(聖人)이 되는 것에 있음을 논하여, 성인이 되려면 입지가 필요하고 입지에는 강의(剛毅)한 덕이 있어야 하는데, 강의하지 못하면 물욕(物慾) 때문에 이를 성취할 수 없다고 했다. 이밖에 주요한 글로는 성현(聖賢)의 자질을 설명한 글을 인용하여 이기설을 정리한 〈답혹서 答或書〉가 있다. 조선 전기 성리학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이다. 규장각·국립중앙도서관·국회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정여창 (조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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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450년 음력 5월 5일 조선 경상남도 함양군 |
사망 | 1504년 조선 함경북도 종성군 |
사인 | 병사 |
거주지 | 조선 경상남도 함양군→한성부→함경북도 종성군 |
국적 | 조선 |
별칭 | 자는 백욱(伯勗), 호는 일두(一蠹), 수옹(睡翁), 시호는 문헌(文獻) |
학력 | 1490년 별시문과 급제 |
직업 | 문신, 성리학자, 철학자, 사상가, 작가, 정치인 |
종교 | 유교(성리학) |
배우자 | 완산이씨 |
부모 | 아버지 정육을, 어머니 경주 최씨 |
친척 | 동생 정여관, 할아버지 정복주, 외할아버지 최효손, 10촌 정인지, 11촌 정현조, 11촌 정상조, 11촌 정숭조, 인척 세조 |
정여창(鄭汝昌, 1450년 음력 5월 5일 ∼ 1504년)은 조선전기의 문신, 성리학자, 작가이다. 율정(栗亭) 이관의(李寬義)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1456년(세조 11년) 이시애의 난 으로 아버지 정육을이 전사하자 세조의 특명으로 의주판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그 뒤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1490년(성종 20년) 학행으로 관직에 나갔으나 그해의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연산군의 스승이었으나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배소에서 사망한다. 그 뒤 갑자사화로 부관참시된다.
사후 복권되고, 중종조에 이르러 동국도학(東國道學)의 종(宗)으로 숭상됨에 이르러 문묘에 종사되었다. 자는 백욱(伯勗), 호는 일두(一蠹), 수옹(睡翁), 시호는 문헌(文獻), 본관은 하동(河東)이다. 학역재 정인지, 하성위 정현조, 정숭조, 선조임금의 생모 하동부대부인은 그의 일족들이었다. 연산군의 세자 시절 스승이기도 하다. 이관의,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이다. 경상남도 출신.
일두 정여창은 1450년 음력 5월 5일에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에서 할아버지는 판전농시사 정복주(鄭復周)이고 아버지 함길도병마우후 증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정육을(鄭六乙)과, 목사 최효손(崔孝孫)의 딸인 어머니 경주 최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판종부시사 정지의(鄭之義)의 증손으로, 그의 고조부 정유는 병조판서 정익의 동생으로, 할아버지 정복주는 세조 때의 재상 정인지와 8촌으로 당내간이었다. 아버지 육을은 세조의 부마 정현조, 하남군 정숭조 등과 10촌간이었다.
고려 문하시중 정도정의 17대손으로 할아버지 복주(復周)는 조선 태종 때에 삼사(三司)를 지내고 효행이 뛰어나 효자정려문(孝子旌閭門)을 받았으며, 아버지 정육을은 이시애의 난 당시 병마우후(兵馬虞候)로 출전하여 이시애 군과 결사항전하던 중 전사하고, 사후 적개원종공신(敵愾原從功臣)의 녹훈(錄勳)을 받고 한성부좌윤에 추증된다.
8세 때 의주판관(義州判官)으로 부임한 아버지 정육을을 따라 수행하니 명나라 사신 장녕(張寧)이 그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집안을 창성하게 할 인물이라 칭송하였다. 일찍이 이관의(李寬義)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456년(세조 11년) 이시애의 난 으로 아버지 정육을이 전사하자 1달간 전장터를 떠돌며 그 시신을 찾아서 예장하자 세조가 정육을의 공을 가상히 여겨 정여창에게 아버지의 직책[1]을 제수하였으나 고사하였다.
18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서 학문을 익히다가, 김굉필과 함께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제자가 되어 지리산에 들어가 3년간 오경과 성리학을 연구하여 경명수행(經明修行)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독특한 학문과 언행, 덕행 등으로 선비 사회에서 주목을 받았다. 김굉필, 송석충, 김일손, 정광필 등과 주로 친하게 지내며 교유하였다.
22세 때부터는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여 성균관 유생(儒生)이 되었다.
조정에서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지만 매번 사양하고 학문 연구와 후학 교육에 전념하다가 1490년(성종 21) 학행으로 출사하여 소격서 참봉(昭格署參奉)이 되었다.
그해 가을 문과 별시(文科別試)에 합격, 예문관 검열(檢閱)을 거쳐 세자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設書)를 지냈다. 당시 세자사부의 한사람으로 동궁이었던 연산군을 보필하였지만 곧고 강직한 성품으로 인하여 그의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성종 25년(1494년)에 외직인 경상도 안음(지금의 안의면) 현감(安陰縣監)에 임명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사림파들의 평소 폐비 윤씨 복위 반대를 못마땅히 여긴 연산군은 무오사화로 사림파를 일망타진하려 한다.
1498년(연산군 4년) 무오사화 때 김일손 등의 사초가 문제되어, 국왕 연산군의 스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종직의 문인이라는 이유로 연루되어 함경도 종성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지역의 청년들과 학동들을 데려다가 성리학을 가르치고, 지역의 유지들을 만나 한성부와 시국담론, 시문을 주고받으며 변방 지역에도 학문과 문물을 전파하였다.
1504년 종성 유배지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54세였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하자 문인들과 유림 동료 친지들은 함경도 종성에 가 두 달에 걸쳐 그의 시신을 고향 함양군까지 옮겨와 장사하였다. 장지는 남계서원뒤 승안산 기슭에 안장하였다.
경남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승안동에 안장되었다.
그 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 한훤당 김굉필이 사사될 때 부관참시되었다. 그 후 1506년(연산군 11년) 중종반정으로 복관되었다.
중종 때 정몽주(鄭夢周)·김굉필(金宏弼)과 같이 동국도학(東國道學)의 종(宗)으로 숭상됨에 이르러 1517년(중종12년) 증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우의정에 추증되고, 1568년(선조1년) 문헌공(文獻公)의 시호가 내려졌다.
이후 1610년(광해2년) 정몽주, 김굉필, 이언적, 조광조와 더불어 동방5현으로 문묘에 종사하였다.
《용학주소(庸學註疏)》, 《주객문답설 (主客問答說)》, 《진수잡저 (進修雜著)》 등의 저서가 있었으나 무오사화 때 소각되고, 지금은 정구가 엮은 《문헌공실기(文獻公實記)》가 전할 뿐이다.
1689년 3월에 신도비가 세워졌으며 글은 동계(桐溪) 정온(鄭蘊)이 지었다.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의 그의 생가는 중요민속자료 제186호로 지정되었다.
학통상으로는 정몽주의 학파였다. 학맥상으로는 백이정과 안향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백이정, 안향→이제현→이색→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정여창으로 이어진다.
→이숭인
→정몽주→권근
→권우→세종대왕
→정인지
→길재→김숙자→김종직→정여창
→김굉필→조광조
→김안국
→김정국
→주계부정 이심원
→김일손
→김전
→남곤
한편 그의 10촌 종조부 학역재 정인지 역시 정몽주의 문하생으로 정몽주→권우→정인지로 학통을 계승하였다.
그는 당시 성리학의 대가로 정몽주(鄭夢周)·김숙자(金叔滋)·김종직으로 이어지는 도통(道統)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그의 저서는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소각되어 정구(鄭逑)가 엮은 『문헌공실기(文獻公實記)』 속에 그 유집(遺集)이 전할 뿐이다.
따라서 그의 사상은 「리기설(理氣說)」·「입지론(立志論)」·「선악천리론(善惡天理論)」등 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그는 기(氣) 없는 리(理)가 없고 리 없는 기가 없기 때문에 리기가 구별이 없는 것 같지만, 리는 총괄적으로 말하여 지선(至善)하고 영위(營爲)가 없다고 할 수 있으며, 기는 청탁(淸濁)의 구별이 있으므로 리기가 구별된다는 이원론적(二元論的)인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결국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一而二 二而一]라는 입장을 버리지는 않았다. 리기의 선악(善惡)에서 정자(程子)와 주돈이(周敦)의 입장에 반대하고, 성(性) 또한 선으로 악이 생기는 것은 기의 청탁(淸濁)이 있기 때문이라며 천리(天理)가 인욕(人欲)으로 덮여 악이 된다고 하였다.
학문의 목적은 성인(聖人)이 되는 것이라 하여, 학(學)이란 성인을 배우는 것이며, 지(志)란 그 학문을 완성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자면 뜻을 굳게 세우고 그것을 관철하려는 강인한 의지가 필요하므로 물욕(物欲)에 이끌리고 공리(功利)를 추구해서는 목적을 이룰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먼저 굳건히 뜻을 세우는 일[立志]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학문하는 목적을 성인되는 데 있다고 하여 성학(聖學)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는 송유(宋儒)들의 주장과 맥을 같이하여 붕우간의 책선(責善)을 강조했으며, 학문은 성(誠)으로 하고, 율신(律身)은 경(敬)으로 해야 한다고 하였다. 즉 성으로써 궁리(窮理)하고 거경(居敬)으로써 수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서 독서에 힘쓰다 이천에서 이관의 선생에게 배우고 김굉필과 함께 김종직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구하였다.
논어에 밝았고 성리학의 근원을 탐구하여 체용의 학(體用의 學)을 깊이 연구하였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도학자인 동시에 성리학자로서 이기론(理氣論) . 심성론(心性論) . 선악천리론(善惡天理論) 등의 사상을 기초로 소학과 가례의 실천적 효행에 모범을 보였는데 특히 부모에 대한 효행은 삶의 전부였다.
정치에 있어서는 사림정치를 근본으로 하는 우주관과 인간관에 기반을 둔 왕도정치(위민정치)를 실현한 실천유학자였다.
또한 오경(五經)에 밝아서 그 깊은 뜻을 철저히 다 구명하여, 본체와 응용이 근원은 같고 분수가 다름을 알았으며, 선악(善惡)이 분수는 같고 기(氣)가 다름을 알았으며, 유교와 불교가 본래의 길은 같고 거쳐 가는 길이 다름을 알았다.
성종 25년 안음현감에 부임되어 5년간 고을을 다스릴 때 정사를 공평정대하게 처리하고 고을백성을 다스리는데 잘잘못을 너그럽게 받아들여 인자한 마음으로 용서 할 줄알았다.
또 문교(학교)를 일어켜 친히 글을 읽히고 가르치며 백성들의 일을 먼저 돌보니 고을백성들은 한결같이 정여창의 박식함과 인자함을 우러러 존경했다.
백성을 다스리는 법 십제조문을 후임자들도 모범으로 삼고 준수하였다.
일찍이 태학(太學)에 가서 공부하다가 어머니를 뵈러 집에 갔더니, 집안에 전염병이 바야흐로 크게 펴졌는데, 들어가서 그 어머니를 뵈고 얼마 안 지나서 어머니가 이질(痢疾)을 얻어 매우 위독하니, 공이 향을 태우고 기도하였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자 이윽고 분을 맛보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소리치며 울어서 피를 토하였으며, 염습빈전(殮襲殯奠)을 한결같이 예문(禮文)에 따랐다.
장사 지내려 할 적에 감사(監司)가 군(郡)으로 하여금 곽판(槨板 관을 짜는 판자)을 마련해 주게 하였는데, 이를 사양하고 받지 않으며, “백성을 번거롭게 하고 곽판을 얻으면 원망이 반드시 어머니에게 돌아간다.” 하고, 이에 자기 집의 재물을 내서 바꾸어 사서 썼다.
3년 동안 여묘살이하는 동리에서 나가지 않았고, 하루도 베옷을 벗지 않았으며, 아버지의 묘를 같은 묘자리에 옮겼다.
수리에 능했는데 '한훤(寒暄=김굉필(金宏弼))은 이(理)에 밝고, 일두(一蠹=정여창(鄭汝昌))는 수(數)에 밝다.'는 평도 있다.
평생에 시 짓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일찍이 두류산(頭流山)에 복축(卜築 터를 골라서 집을 짓는 것)할 적에 지은 시 한 편만이 있어 세상에 전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바람에 부들이 휘날리어 가볍고 부드럽게 희롱하는데 / 風蒲獵獵弄輕柔
사월에 화개(땅 이름)에는 보리가 벌써 가을일세 / 四月花開麥已秋
두류산 천만 골짜기 다 구경하고서 / 觀盡頭流千萬疊
조각배로 또다시 큰 강 흐름에 내려가네 / 扁舟又下大江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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