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씨(鄭氏)는 신라 6촌장 가운데 자산진부 촌장 지백호(智白虎)의 후손으로 여겨진다. 동래 정씨의 시조는 신라때[신라라고 확증 못함; 화지산 설단비에는 득관대조고려안일호장휘회문임] 안일호장(安逸戶長)을 지낸 정회문(鄭繪文)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선계에 대한 문헌기록이 없기 때문에[안일호장을 지냈다는 기록은 1655년 을미보임. 을미보 기록이 맞다고 가정하더라도 신라인지 고려인지 고증자료가 없음] 그의 후손으로 고려 때 보윤호장을 지낸 정지원을 1세로 하고 안일호장을 지낸 정문도(鄭文道)는 2세이다. [고증자료1: 1928년 발현한 복야공 정목의 묘지, 고증자료 2: 1655년 을미보 간행 이전에 발현한 문안공 정항의 묘지;화지산 묘갈명에 정문도공을 시조라고 표현한 것은 문안공의 지석이 발현하기 전 정문도공을 앞서는 선조를 몰랐기 때문에 한동안 정문도공을 시조로 받들어 오던 흔적임] 정문도공의 장자 정목(鄭穆)공이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올랐으며, 정목(鄭穆)공의 아들 4형제 정제(鄭濟)ㆍ정점(鄭漸)ㆍ정택(鄭澤)ㆍ정항(鄭沆)이 문과(文科)에 급제하면서 세거지(世居地)인 동래를 관향으로 삼았다.
The 동래정씨 alive now is Jamie YoonSung Chung.
정묘(鄭墓) 전설[편집]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지원의 아들 문도가 고려에서 안일호장을 지냈으며 그의 묘(墓)가 부산 화지산에 있는데 묘에 관한 재미난 전설이 지금껏 전해진다. 그가 죽어 아들이 지금의 묘터에 아버지의 시신을 묻고 돌아오자. 그날밤 도깨비들이 나타나 "대인(大人)이 들어올 자리에 다른사람이 들어왔다" 하며 묘를 파헤쳐 버려 이튿날 이를 본 아들이 영문도 모른체 아버지의 시신을 다시 모셨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였다. 이렇게 묻고 파헤치는 실랑이가 몇차례 계속되던 끝에 이를 수상히 여긴 아들이 해박한 노인을 찾아가 기묘한 사실을 이야기하자, 노인은 그 자리는 임금이나 정승이 묻힐 자리이기 때문이기라며 황금으로 관을 만들어 묻으면 되나 그럴수 없으니 관을 황금빛을 가진 보리짚에 싸서 묻으면 도깨비들이 속아넘어 갈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노인이 시키는데로 하고 몰래 숨어서 봤더니 도깨비들이 다시 나타나서 "과연 주인이 들어왔구나." 하며 되돌아 갔다는 이야기이다.
동래정씨 문익공파[편집]
정태화(鄭太和 1602~1673)의 자는 유춘(捧春), 호는 양파(陽坡).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1628(인조 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로 벼슬살이를 시작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다. 1673(현종 14)년 심한 중풍 증세로 사직이 허락되기까지 20여 년 동안 5차례나 영의정을 지내면서 효종과 현종을 보필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난 지 6개월 후 나이 72세로 죽으니, 현종은 3년 동안 늠록(鹿祿)과 제수를 내리도록 특명하였고, 그 뒤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시?문을 모아 엮은 "양파유고(陽坡遺稿)"와, 1656(효종7)년까지의 일기인 "양파연기"가 있으며, 시조 1수가 전한다.
동래 정씨는 대대로 호장이었으나 3세(三世)인 정목(鄭穆)이 고려 문종(文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정2품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오르고, 정목(鄭穆)의 아들로 그의 네 아들인 정제(鄭濟)․ 정점(鄭漸)․ 정택(鄭澤)․ 정항(鄭沆)이 모두 문과(文科)에 오름으로써 명족(名族)이 되기 시작(始作)하였다. 정선조(鄭先祚)의 후손은 계속 동래(東萊)에 남아 향리직(鄕吏職)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이중에서 정항(鄭沆)은 숙종(肅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우사간(右司諫)을 거쳐 양광도(楊廣道)와 충청도(忠淸道)의 안찰사(按察使)를 역임한 후 인종(仁宗) 때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ㆍ추밀원의 종2품 벼슬)ㆍ예부상서(禮部尙書)ㆍ한림학사(翰林學士) 등을 지냈는데, 청백(淸白)함으로 이름이 높아 "고려사(高麗史)"에 입전(入傳)된 인물(人物)이다. 그가 죽은 뒤 그의 집에는 초상(初喪)을 치를 한 섬의 곡식(穀食)조차 없었는데, 왕(王)이 그의 청빈(淸貧)함에 놀라 "30년 동안 근시(近侍)의 직(職)에 있었고, 11년 동안 승지(承旨)로 있었으면서도 가난함이 이 정도이니 가상하다" 고 하며 부미(賻米)로 쌀 100섬(一百섬)과 배 200필(二百畢)을 하사(下賜)하고, 친필(親筆)로 시호(諡號)를 문안(文安)이라 내렸다.
그의 아들 정서(鄭叙)는 임금을 그리는 노래 "정과정곡(鄭瓜亭曲)" 을 남긴 인물(人物)로 국문학사(國文學史)에 이름을 남겼다. 그는 고려(高麗) 인종(仁宗)과 동서간(同壻間)으로 내시낭중(內侍郞中) 벼슬까지 지냈으나 의종(毅宗)이 즉위(卽位)한 뒤 모함(謀陷)으로 인하여 동래(東萊)로 귀양길에 오르는데, 그때 왕(王)이 곧 다시 부르겠다고 약속(約束)했으나, 오래도록 부름이 없자 그곳에서 임금을 그리는 노래를 지어 불렀는데, 후대(後代) 사람들이 이 노래에 그의 호(號)를 붙여서 "정과정곡(鄭瓜亭曲)" 이라 불렀다.
11세(十一世)인 정양생(鄭良生)은 단성보리 찬화공신(端誠輔理贊化功臣)에 책록되고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에 봉(封)해졌다. 그 뒤 고려에 충절을 바쳤으나 공양왕 4년(1392년) 4월(--> 고려사에 보면 공의 졸기가 나옵니다. 음력 6월 29일입니다.)에 이성계일파에게 살해당하였다.(--> 믿을 만한가요? 출처가 궁금합니다.) 그의 아들 정구(鄭矩ㆍ1350~1418)는 우왕(禑王) 3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해 전교부령(典校副令)을 지내고, 조선 개국 후에 태종으로 부터 한성부 우윤(漢城府 右尹)을 제수 받았지만 거절하고 개경의 옛이름인 송악(松岳)과 같은 이름을 가진 송산(松山)에 은거하였다.
과거급제자 수[편집]
고려조(高麗朝)에 이미 대족(大族)으로 성장(成長)할 수 있었던 동래정씨(東萊鄭氏)는 조선조(朝鮮朝) 전 기간(全期間)에 걸쳐서 17명(十七名)의 상신(相臣)을 배출(輩出)하였는데, 이는 전주이씨(全州李氏) 22명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것이다.[1] 그 외에 대제학(大提學) 2명, 호당(湖堂) 6명, 공신(功臣) 4명, 판서(判書)가 20여명이 나왔고, 문과(文科) 급제자 198명을 배출하였다.
왕족(王族)인 전주이씨(全州李氏)와 세도정치(勢道政治)의 대명사(代名詞)인 안동김씨(安東金氏) 다음으로(--> 신안동김씨와 구안동김씨 합했을 때 말인데, 구안동 김씨와 신안동 김씨는 본관을 같이 사용할 뿐 다른 성씨입니다.) 많은 상신(相臣)을 배출(輩出)하면서도 외척(外戚)으로 세력(勢力)을 얻지 않았다는 점이 특징적(特徵的)이다.
분적종 및 분파[편집]
동래정씨(東萊鄭氏)의 분파(分派)는 크게 3개파로 나뉘었다. 이 중 2개파는 3세 좌복야 휘 목(穆)의 후손인데 6세 교서랑공 보파와 6세 첨사공 필파이며, 정문도(鄭文道)의 둘째 아들로 동래(東萊)에 남아 호장(戶長)을 지낸 3세 휘 선조(先祚)의 후손들은 호장공파(戶長公派)로 분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