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끝났나 했더니, 또 시작이네요.”
“......”
“한 손에 스무 병 전후니, 양손이면 마흔 병은 될 텐데, 저걸 또 다 마셔댈 저 물건을 어찌하면 좋을까요?”
“......”
“하루 다섯 병씩 또박또박 비운 빈 병이 벌써 백여 병이 넘으니, 곡차(穀茶) 삼매경(三昧境)에 빠진 지 스무날이나 지났는데, 끼니는커녕 맹물만 마시면서요.”
“......”
“그런데 또 마흔 병씩이나 들고 들어가면, 이번엔 방문을 열고 나올 수 있을까도 싶지 않거든요.”
“......”
“저러다 큰일 치르기 전에 방 한 칸이나 얻어주어 절에서 내쫓든가, 알코올 중독센터로 강제 입원하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스님?”
“......”
“이건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동안 쉬었다 하면 또 시작하고 또 시작하니, 수행승들이나 신도님들까지 물들겠다 싶어서요.”
“......”
“......”
“그가 술을 마시고 절 안팎의 물건을 부수거나, 사람들을 해친 적이 있더냐?”
“......”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한다던가 갈지자로 걸은 적이 있더냐?”
“......”
“특히 말을 함부로 하여 사람들을 괴롭힌다든가 마음에 상처를 준 적이 있었냔 말이여?”
“그런 적이 있었을 수가 없죠. 일단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방문을 걸어 잠근 채 쥐 죽은 듯 꼼짝도 하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뭔 걱정이야. 그 또한 그 나름의 깨달음으로 가려는 방편이라고 여겨 주면 되지.”
“......”
“그대 눈에는 그가 술 마시는 걸로 보이더냐? 술에 취해 희희낙락 하드냔 말이여.”
“?”
“사람들과 함께 술과 안주를 곁들인 채 노닥거리면서 마시는 술이 술이지, 안주도 없이 홀로 마시는 술은 술이 아니라 독약일 수도 있거든, 하루도 아니고 열흘도 아닌, 한 달에 가깝도록 물만으로 배를 채우며 마시는 술이 즐기기 위해 마시는 술이겠느냐 말이여.”
“......”
“밥 한 톨 입에 넣지 않고 그 긴 나날을 강술과 물로 속을 채우며 견딘다는 것이 얼마나 힘겹고 고통스럽다는 것은 왜 또 몰라? 그래서 그가 마시는 술은 한 소식 얻기 위해 죽기를 무릅쓰고 하는 수행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그 이윤즉슨 잠시도 쉬지 않고 ‘이거 하자, 저거 하자’ ‘이거 달라, 저걸 달라’면서 괴롭게 하는 몸과 마음을 술로 잠재우면 깨달음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리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그런 고통스러운 짓거릴 한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런 이유를 조금이라도 알면, 신도들을 망치니 어쩌니 라는 소리나 뇌까리며 그렇게 무작정 비난만 하진 않을 텐데 말이여.”
“......”
“알아들었는가?”
“......”
“그가 강술에 고통을 겪던, 강술에 취해서 깨닫든 뭐가 문제냔 말이여? 그로 인한 그 어떤 사고도 없이 절 안팎이 고요하기만 한데, 뭘 그렇게 호들갑을 떠느냔 말이거든.”
“......”
“한평생 술에 빠져 살았다시피 한 ‘천상병’ 시인이 죽기 전에 그랬지 아마, ‘소풍 한번 잘했네!’라고, 그리고 걸레 ‘중광스님’도 그랬지 아마, ‘괜히 왔다 가네!’라고.”
“......”
“그런 시인이나 승려 등등의 사람들이란 이미 이 세상과 이 세상 속의 삶이 덧없다는 것을 알아 세상과 섞여 살지 못했다거나 또는 섞여 살지 않으면서, 이런저런 방법을 다하며 이 세상 너머의 더 나은 삶으로 살자고 했어도, 그 너머로 가는 길이나 목표를 확인하지 못하여 결국 술독에 빠져 살았으되, 사는 동안 아는 것만큼 말이나 글로써 사람들을 위했음은 물론 죽는 그 순간엔 ‘삶은 한바탕 소풍’이라든가 ‘삶은 괜히 왔다 가는 것’이라는 말 한마디로 그나마 사람들을 깨쳐주었던 것을 사람들이 고마워하는 것처럼, 간간이 술독에 빠져 허우적대는 듯이 보여도 그 누구에게도 불편을 끼치기는커녕, 항상 웃음으로 대하는 저 녀석 역시 그 누구도 힘겹게 하거나 해치지 않으니, 녀석이 행하는 그 어떤 행동이든 깨달음에 들기 위한 일종의 방편이라고 여겨 줄 수도 있단 말이거든.”
“......”
“물론 그의 그런 자학하는 자세가 그의 정신과 몸이 술에 짓이겨져 망쳐지지 않을까, 또는 그를 보는 사람들의 정신과 몸을 망치지 않을까 걱정도 되겠지만, 그로 인해 가질 수 있는 결과 역시 사람이 죽을 땐 몸과 마음마저도 버리고 이생에 공부한 것만 가지고 홀로 가는 것처럼 그들 각각의 몫이라, 그대 역시 그에게 신경을 쓰면서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지 말고 그대의 좋은 죽음을 위한 깨달음을 이루고자 노력하는 자세가 그대와 그는 물론 많은 사람을 위할 수 있는 지혜로운 자세일 것이야.”
“......”
“다만 그가 하루빨리 깨달음을 이뤄 자기 자신은 물론 많은 사람을 위할 수 있기를 발원하면서 말이지.”
“......”
“알아들었는가?”
“......”
......
욕심을 채우지 못해 난폭한 사람들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면, 한 편은 사람들을 학대하며 자기 자신의 욕구불만을 풀고, 또 한 편은 자학(自虐), 즉 자기 자신을 학대하며 욕구불만을 푸는 사람들인데, 상대를 학대하며 자기 욕구불만을 풀고자 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부모와 형제를 탓하고, 친척이나 주변 사람들이나 처한 환경을 탓하며 더 나아가 사회나 국가를 탓하면서 범죄자가 되는 경우가 많고, 자기 자신을 학대하며 욕구불만을 푸는 사람들 대부분이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과 원망과 불만에서 자기 자신을 자학하는 것이니, 이 역시 자기 자신을 파멸로 몰고 들어가는 범죄자들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살펴 잘 생각해 보면 상대들을 해치는 범죄자들이라든가 자기 자신을 해치는 범죄자가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있는 그대로의 능력과 환경과 성품 그리고 상대들이 있는 그대로의 능력과 환경과 성품을 무시한 채, 제 마음대로 하고자 또는 제 마음대로 갖고자 하는 옳지 않은 욕심의 결과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알게 되면 그때부터 자기 자신이 저지른 범죄의 원인이 자기 자신의 어리석어 지나친 욕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므로, 자기 자신이 있는 그대로의 능력과 환경과 성품 그리고 상대들의 있는 그대로의 능력과 환경과 성품까지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최선을 다하여 사람들은 물론 저 자연까지도 위하면서 자기 자신의 삶을 잘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지만, 자기 자신이 있는 그대로의 능력과 환경과 성품 그리고 상대들의 있는 그대로의 능력과 환경과 성품까지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 대부분은, 자기 자신의 채울 수 없는 욕심의 욕구불만으로 화를 내며 그 화를 어디에다 터뜨려야 할지를 모르는 사람이 되어, 갖가지 핑계를 대며 가까운 사람들은 물론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해치거나 죽이기까지 하면서 자기 자신의 삶을 파멸시키는 범죄자가 되는 것입니다.
광견(狂犬) 즉, 미친개는 그 어떤 감정이 있어서 아무나 물어뜯는 것이 아니라, 다만 제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아무나 물어뜯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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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미친개는 악성(惡性) 바이러스를 품고 있던 박쥐 등등에 물려 미친개가 된다고 하는데, 일단 박쥐로부터 개의 혈관에 들어간 그 악성 바이러스들은 곧장 개의 뇌 속에서 감정조절을 하는 대뇌변연계를 뜨겁게 달궈 고열로 인한 고통에 시달리게 함과 동시에 개의 목구멍까지 뜨겁게 하여 타는 듯한 갈증과 함께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게 하면서, 그 고통을 더 심하게 느끼게 하고자 개의 입과 목을 부분적으로 마비시켜 한 방울의 몰도 들이켜지 못하게 한다더군요.
그렇게 해야 그렇듯 온순하고 충성스러웠던 개가 그 어떤 상대이든 닥치는 대로 물어뜯는 포악한 맹수로 변하게 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해서 다른 동물 등등을 닥치는 대로 물어뜯게 해야 악성 바이러스들의 후손들을 새로운 동물 등등을 숙주로 하여 살 수 있게 할 수 있기에 그렇게 한다고 하더군요.
어찌 되었건 지금은 사람들이 만든 광견병 백신으로 그런 미친개들을 볼 수 없지만, 1960년대 전후에는 곳곳의 거리나 들판에서 날뛰던 광견, 즉 미친개들을 많이도 볼 수 있었는데, 그런 미친개들은 광견병의 고통으로 시뻘겋게 충혈된 눈을 부릅뜬 채 끈끈한 침을 질질 흘리며 송곳니를 드러낸 채 괴로워하다가, 사람은 물론 물어뜯을 동물이 없으면 멀쩡한 시멘트 전봇대까지도 불이 튀고 제 이가 다 빠지도록 물어뜯으며 목의 마비와 갈증의 고통을 참는 것을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위와 같은 개의 광견병은 악성 바이러스들의 침투로 일어나는 병이라고 할 수 있고, 사람들을 미치게 하는 것은 욕심들로 생기는 병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개를 미치게 하는 것은 악성 바이러스들이지만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것은 악성 욕심들이니, 개를 미치지 않게 하는 것은 사람들이 만든 백신이요, 사람들을 미치지 않게 하는 것은 사람들 스스로 욕심을 버리는 지혜라, 그 지혜야말로 사람들 스스로가 만든 백신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덧붙여 말씀드리면, 술로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을 마비시키는 등등의 방편으로 깨달음에 들어서고자 하는 자학이란, 최소한 상대나 자연을 해치고 죽이거나 파괴하는 자세가 아니기에, 그것도 날이면 날마다 퍼마시며 사는 알코올 중독자와도 같은 자학이 아니기에, 그러나 그런 자학이란 결국 얻는 것에 비해서 얻지 못하는 것이 더 많을 뿐이지만, 그래도 몇 번쯤의 그런 자학 역시 거쳐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는데, 왜냐 하시면 저 역시 술독에 빠져 죽기 직전까지 이르면서도 깨달음의 문을 열고자 할 때가 있었고, 그 과정에서 적으나마 얻은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그와 같은 방편에 관한 판단은 사람마다의 생리적인 조건과 생각과 지혜로움에 따라 다르니까, 그러함에 대한 옳고 그름은 우리 법우님들 각각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