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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납달리에 관하여 - 부활과 풍성(창49:21)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이라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도다
아셀에 이어서 납달리인데 이것은 갓으로 인한 연합적인 승리, 형제와 함께 하는 승리의 완성이다.
놓인 암사슴이다 이렇게 표현을 했는데 이 말은 부활을 상징하는 말이다. 시편 22편은 부활을 예언하는 시인데 그 시의 제목이 아침의 암사슴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사랑스럽고 신비가 있고 활발하고, 산꼭대기에서 마음대로 뛰노는 그런 모습이다.
여자는 집안에서 일하는 경우가 보통이다. 개도 보니까 암캐들은 집 안에서만 돈다.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그것은 새끼를 키워야 하고 출산을 해야 하고 이런 여러 가지 복잡한 임무가 있다. 여자와 암 것들은 집 안에 있는 임무가 있다.
놓인 암사슴은 그 모든 일로부터 해방된 사슴을 말한다. 새끼 낳고 키우고 집안 돌보고 집을 지키고 하는 억매인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해지는, 풀어지는 그런 사슴이니까 이것은 세상과 육신과 기타의 모든 일들,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한 전쟁이나 이런 것에서까지도 완전히 자유 하는, 승리하는 그런 자유를 말한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는 암사슴처럼 살았다. 씨를 뿌려야 하고 가꿔야 하는 여러 가지 과정들이 있고 그 과정들이 결국은 십자가로 이어져 가게 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자유로운 모습이 아니다. 예수님이 땅에 계실 때는 상당한 제한 가운데 사신 것이다. 육신을 가졌기 때문에 여러 가지 제한 안에 있었다. 그리고 우리를 구속하고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서 또 많은 일을 하셨다. 그것이 마지막에는 십자가로 연결이 된 것이다. 씨 뿌리는 자가 눈물로 씨를 뿌린다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수고를 하는 그런 과정이다.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는 이 모든 것이 끝이 나고 완전하게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오르셔서 그분이 보혜사로 사람들에게 오심으로서 완전한 자유를 행사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놓인 암사슴의 형상이다. 모든 일을 다 완성하고, 마치고 이제는 생명 주는 영으로, 모든 사람들 속에 분배될 수 있는 분이 되었다.
육신으로 계실 때는 팔레스타인, 그 중에도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에 이르는 그 극히 제한된 지역 안에서 활동할 수밖에 없었고 또 그분을 아는 사람도 그 지역 이외 사람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부활하신 후에는 만인에게 생명의 공급이 될 수 있게 되고 만인의 주가 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놓인 암사슴이다.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이라 아름다운 말을 발한다. 성경에서 아름다운 말은 복음이다.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의 발이여 함과 같다. 좋은 소식, 그것은 아름다운 소식이다.
부활 후에 비로소 좋은 소식, 복음이 전파되게 되었다.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아름다운 소리가 발하여져서 사도 베드로를 위시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각처에 나가서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게 되었다. 그것은 곧 예수님께서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 것과 마찬가지고 제자들에게 오셨을 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는 짧은 말은 아주 아름다운 말이었다.
평강을 줄 수 있는 분이었기 때문에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했고 생명 자체가 평강의 생명이었기 때문에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했다. 모든 수고가 끝났다. 모든 전쟁이 다 끝났으니까 평화가 올 것은 당연하다. 전쟁이 끝나면 평화가 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완전하게 전쟁을 치루고 승리를 하셨기 때문에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렇게 말씀했다.
살아 계실 때는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렇게 말하지 않았는데 부활하신 후에 비로소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전투가 끝나서 이제는 평화가 왔다 이런 말이다.
놓인 암사슴을 통해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는 아름다운 복음을 듣게 되었고 이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으로 오게 되었다. 만일 그분이 아직도 전쟁을 하고 있다, 아직도 승리를 못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그분에게로 올 수가 없다.
전쟁하는 모습, 최후의 결전을 하는 모습을 보고 결국 베드로는 모른다고 하고 갔던 것이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 사탄과의 전쟁이었다. 세상과 육과 사탄과의 전쟁이었는데 이 전쟁을 보고 모든 사람이 다 가버리고 말았다. 졌다고 생각했다. 따르던 군중들도 고개를 흔들면서 하나님의 아들이면 뛰어내려보지 이렇게 하였고, 남은 구원하였지만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였구나 이렇게 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은 조롱을 하고 군병들까지도 조롱을 하고, 심지어는 같이 십자가에 못 달린 강도들까지도 너와 우리를 구원해라 이렇게 조롱을 했다. 그것이 마지막 결전인데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완전히 패배하는 자리였다. 이제는 끝이구나 하는 것이다.
베드로도 마지막까지 최후를 주목해 보려고 봤지만 결국 졌다 이렇게 생각한 것이다. 완전히 실패했다. 그래서 그는 모르겠다 하고 가게 되었다. 모든 제자들도 다 마찬가지였다.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주님이 패배하는 것을 보고 우리가 저분을 잘못 알았구나, 우리가 아는 사람이 아니구나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실패자다, 패배자다 그렇게 들리게 되면 예수를 따를 수 없다. 그는 참 우주적인 승리자다, 완전한 신랑이고 완전한 승리자구나 이렇게 알 때 비로소 따르게 된다. 그러니까 이것은 부활 후의 문제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는 그분을 만났을 때 제자들은 다시 용기가 나서 그를 따르게 되었다. 죽었던 분이 살아났구나, 패배 한 줄 알았더니 승리했구나, 굴욕을 당한 줄 알았더니 영광을 얻었구나,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그러면 우리의 시각도 다 바꾸어지는 것이다. 진 줄로 알았던 것이 이기는 것이 되었으니까 우리가 보는 것과 생각하는 것과 판단하는 것이 다 달라지게 된다.
검다고 생각한 것이 희더라, 희다고 생각한 것이 검더라 그것이다. 세상을 보고 영화롭다고 생각했던 것이 영화로운 것이 아니고 욕된 것이더라, 예수를 보고 욕 되구나 했는데 영광스럽더라, 그러면 인생이 바꿔지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바꿔지는 것이다. 내가 노력을 해서 내 인생이 바꿔지는 것이 아니고 나의 대표자고 나의 운명이신 그리스도가 실패자냐 아니면 성공한 사람이냐 이것을 봄으로 내가 바꿔지게 된다. 예수를 아는 것이 나를 바꾸는 것이지 내가 나를 고치는 것이 나를 바꾸는 길이 아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인간은 지어지기를 그렇게 지어졌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씨를 받아야 농사를 짓는 밭과 같이 사람은 그리스도를 봐야만 인생이 바꿔지지 그리스도를 보지 않고는 인생이 바꿔지지 않는다.
세상이 화려하게 보이고 영광스럽게 보이고 권세 있게 보이는데 누가 예수를 따르겠는가? 아무도 예수를 따를 사람이 없다. 그것을 쫓아가고 그것을 흉내내려고 하고 그것을 사모하고 그렇게 할 것이다.
국회의원에 나가겠다고 논밭을 팔고 이웃 사람의 것을 다 끌어 모으고 거짓말을 하고 이렇게 하는 이유는 그것이 너무나 영화롭게 보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것이 망하는 길이다 이렇게 보이면 아무도 안 갈 것이다. 거기 가면 돈도 많이 생기고 권력도 많이 생기고 명예도 많이 생긴다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갈려고 하는 것이지 국회의원 하면 망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갈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 인생이 바꿔지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달려 있다. 그분이 어떻게 보이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놓인 암사슴으로 보이느냐 아니면 수고만 하고 있는 암사슴으로 보이느냐 여기에 따라서 다르고 물론 수고하는 암사슴을 보고 따르는 사람도 있다. 새끼를 낳는 것을 보고 따를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고달픈 일이다 이렇게 보이는 사람은 못 따르는 것이다.
여자가 집안에서 일하는 것을 보고 여자는 왜 저런 운명으로 태어났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시집을 안 간다. 혼자 살기를 원한다. 왜 저렇게 고생스럽게 짐을 지고 일생동안 저렇게 살아야 되나? 나는 자유롭게 살고 싶다. 이것은 나는 그런 억매임에서 해방되고 싶다 그런 말이다.
인생이 어디서 완전한 해방을 받게 되고 어디서 완전한 그리스도를 따르게 되는가? 놓인 암사슴이신 그리스도를 보게 될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완전하게 세상과 육으로부터 자유하게 된다.
육신에 매여서 종노릇하는 모든 사람을 놓아주려고 그가 먼저 죽음을 맛 보셨다 이런 말이 있다. 죽음을 맛보시고 다시 승리하심으로서 우리에게 육신에 대한 소망을 준 것이 아니라 영에 대한 소망,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을 줬다. 그러니까 육신을 따라서 살지 않고 영을 따라서 살게 되고 육신을 쫓아서 가지 않고 영화로운 주님을 쫓아가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놓인 암사슴, 아름다운 소리를 발한다. 거기에서 들려오는 소식보다 아름다운 소식이 없다. 매여 있는 모든 사람에게, 세상과 육에 매여 있는 모든 사람에게 무엇이 아름다운 소식인가? 부활이 가장 아름다운 소식이다. 제자들에게 무엇이 아름다운 소식이었는가? 예수의 부활이 가장 아름다운 소식이었다.
그가 살아났다 이 말을 들었을 때 그것이 바로 아름다운 소리였다. 베드로는 막 뛰어갔다. 무덤에 막 뛰어갔다. 얼마나 흥분된 마음으로 뛰어갔겠는가? 아름다운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자들이 그 소문을 들었을 때 그 소식은 얼마나 아름다운 소식이었겠는가? 죽은 분이 살아났다, 이것은 단순히 육신이 죽었던 분이 살아났다는 그런 일 만이 아니고 세상에 대해서, 종교에 대해서, 실패했던, 패배했던, 자기들과 같이 싸웠던 그분이 죽었는데 다시 살아났다, 졌는데 이겼다 이 소식은 얼마나 놀라운 일이었겠는가?
입학 시험에 떨어졌다고 발표되었다가 후보로 합격되어도 날뛰는데 패배자가 승리를 했다는데 얼마나 기쁜 소식이겠으며 아름다운 소식이겠는가? 죽은 자가 살아났다는 것은 바로 그런 뜻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충만을 지금 놓인 암사슴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십자가는 괴로움이었다. 그러나 부활은 즐거움이었다. 그래서 초대교회 사람들은 부활의 날에, 그 주의 첫 날에 모두 모여서 축제를 한 셈이다. 주님이 부활하신 그 날을 축제일로 정하게 된 것인데 이것이 오늘 주일날이 되었다. 주일은 금요일처럼 죽는 날이 아니다.
안식교 사람들이 안식일을 지키는데 그 날은 사실은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죽은 날이다. 십자가에 죽은 날이다. 성금요일 이런 말을 한다. 십자가에 못 박힌 날이다 그런 뜻인데 금요일 해 질 때부터 토요일 해 질 때까지가 안식일인데 이 날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린 날이니까 침묵하고 괴롭고 허무한 날이었다. 그런데 주일은 아주 반갑고 기쁘고 즐거운 날이다.
교회의 잔치는 언제나 부활의 잔치이기 때문에 그것은 즐거운 잔치지 슬픈 잔치가 아니다. 엉뚱한 잔치가 아니고 어두운 잔치가 아닌 밝은 잔치다. 모두 모여서 함께 즐거워하는 그런 잔치다.
놓인 암사슴은 산꼭대기에서 뛰어다닌다. 성경에서 산 위라는 말은 세상과 구별된 곳을 가르킨다.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도 산 위에서, 예수님께서 변화하는 것을 보일 때도 산 위에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때도 산 위에서, 이것은 세상과 구별된다는 의미를 나타낼 때 산을 사용하고 있다.
산꼭대기에서 뛴다 이 말은 세상이 아닌, 세상보다 더 높은 자리에서, 더 위의 자리에서 자유를 누린다는 뜻이니까 부활을 말한다.
사슴이나 염소를 보면 참 신기하다. 산에서 노는 것을 보면 꼭 뾰족한 바위 위에서 논다. 염소의 발굽을 보면 뾰족하게 생겨서 얼른 보면 잘 미끄러질 것 같이 생겼다. 납작하지 않다. 그런데 이상하게 바위 꼭대기에서 장난을 치고 논다. 아주 신기하다. 어떻게 안 미끄러지고 바위 꼭대기에서 노는지 묘기를 부리는 것처럼 논다.
이런 모습을 봤기 때문에 시인들은 이런 것을 연상하면서 놓인 암사슴이라는 말을 쓰게 되었다. 이것은 시다. 직접적인 화법을 쓴 것이 아니고 간접적인 화법을 통해서, 여러 가지 상징물을 통해서 어떤 것을 표현하고 있다.
놓인 암사슴이다 할 때는 납달리는 아주 부활의 충만한 기쁨을 누리는 그런 지파가 될 것이다 이런 뜻이다.
신명기 33장 3절에 모세가 수 백년 후에 다시 예언할 때 납달리에 대해서는 ‘은혜가 족하고 여호와의 복이 가득한 납달리여’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야곱의 축복과 연결해서 볼 때 은혜가 족하다, 여호와의 복이 가득하다 이렇게 표현한 것은 결국 부활을 말한 것으로 해석할 수가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시작도 은혜고 끝도 은혜지만 그러나 부활 안에 와서 완전해진다. 족하다는 말이 그런 것이다. 완전해지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가득 찼다 이런 말이니까 은혜가 족하다, 완성되었다 이런 뜻이 된다. 은혜가 완성되었다면 그것은 부활이다. 우리도 은혜가 완성되었다면 부활이다. 부활 안에는 조금도 은혜의 부족이 없다. 조금이라도 모자란 것도 없고 덜 된 것도 없고 모든 것이 완성되어진 그 자리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가실 때까지는 여러 가지 일이 아직 남아 있었다. 만일에 병자를 고쳤던 그 자리에서 모든 일이 끝났다면 우리의 구속은 거기서 끝나야 한다. 그런데 아직 그것으로는 다 완성이 안 되었기 때문에 그는 또 한 걸음 가야 했고 또 한 걸음 가야 했고 이렇게 했다. 반대로 말하면 사탄의 송사가 아직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적이 아직 있다는 것이다.
병자를 고친다는 그 정도로는 적에게서 우리를 빼 올 수 없다. 다른 말로 하면 그 정도를 가지고는 우리 모든 인간이 다 예수를 따를 수는 없다 그런 뜻과 마찬가지다. 그분이 우리의 완전한 대장이 될 수 없다 이런 말이 된다. 그래서 그는 점점 어디로 가는가? 완전한 결전장으로 가게 되었다.
십자가에서는 완전하게 모든 것이 끝난다. 적들이 완전하게 섬멸되고 부정적인 모든 요소가 끝나는 것이 십자가다. 더 이상 누구도 거기서는 트집을 잡을 수 없고 누구도 거기서는 송사 할 수가 없다. 사탄도 거기에 와서는 완전히 손들고 가는 곳이 십자가다. 다른 말로 하면 사탄은 어떤 길에도 계속 따라 붙었는데 십자가에서만은 못 붙어있는 것이다. 거기는 못 따라간다. 거기서는 더 이상 거짓말 할 수 없고 더 이상 흉내낼 수 없다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병자를 고치는 능력이나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놓고 하나님을 믿어라 이렇게 하는 수가 많이 있다. 또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것은 사탄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믿는 사람들 속에는 완전하게 하나님이 승리하시지 못한다. 그 안에 속임수가 그냥 들어있고 그 안에 아직 사탄의 점령지역이 남았기 때문에 완전한 승리를 가질 수가 없다. 십자가에 와야만 비로소 사탄이 완전히 끝이 난다.
왜 예수님은 십자가까지 갔는가? 그것은 사탄을 완전히 따돌리기 위해서다. 더 이상 올 수 없는 곳으로 가게 하기 위해서다. 그러니까 우리가 십자가를 지나면 그때부터는 사탄이 없다. 아예 없다. 올 수 없는 길이다. 따라 오다가 오다가 더 이상 따라오지 못하고 흉내내다가 더 이상 흉내낼 수 없는 자리다.
예를 들어서 원숭이가 모든 것을 다 하다가도 말을 하는 곳에 오면 사람의 흉내를 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천사는 하나님 아들들이 하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이런 말이 있다. 그런데 아버지 앞에 100% 순종하는 것만은 불가능하다. 십자가는 완전한 순종이니까 거기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더 이상 거짓말을 할 수가 없다.
완전하고 만족한 것이기 때문에 네 은혜가 족하다 그렇게 말했다.
바울도 그런 말을 들었다.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 이런 말을 들었다. 이것은 더 이상 불만스러울 것이 없고 더 이상 해결되지 않을 문제가 없다 이런 뜻이다.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
바울은 그렇게 간구했다. 이 눈이 좀 성하게 되었으면 좋겠다. 기왕이면 내 눈이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내가 왜 이런 일에 신경을 써야 되겠습니까? 남들이 말하기를 바울은 남들은 구원하면서 자기는 구원하지 못한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그때 하신 말씀이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 그렇게 말씀했다. 그것은 너에게는 부족함이 전혀 없다. 눈이 아픈 것이 너에게 부족한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여호와의 복이 가득한 납달리다. 은혜가 족하니까 복이 가득한 것이다. 은혜와 복이 가득한 것이 부활 세계다.
서방과 남방을 얻으리라 이렇게 말했는데 이스라엘 나라에서 서방이라는 것은 바다의 지붕이고 남방이라는 것은 본토를 말한다. 그러니까 땅과 바다를 얻을 것이다 이런 뜻이다. 땅에서 이스라엘 왕국이 세워지고 바다를 통해서 복음이 전파되었다. 온 세계를 향하게 된 것이 바다다. 사도 바울이 배를 타고 항해를 해서 로마까지 가게 되고 로마에서 전 세계로 퍼지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것을 서방과 남방이라는 간단한 말로 표현했다. 바다와 육지를 말한다.
인간에게는 바다와 육지면 전부다. 전부를 다 얻은 것이다. 우리가 하늘의 승리를 가질 경우에 바다와 육지가 다 우리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영역이 다 우리 영역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땅에 살아도 땅이 없는 인간이 있고 바다에 있어도 바다를 얻지 못하는 인간이 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요 그러면 화평케 하지 못하는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땅에 살기는 사는데 자기 기업이 아니다. 가시 덤풀이 되고 엉겅퀴가 되니까 가시 방석에 앉은 것과 똑 같다. 그러니까 자기 기업이 될 수 없다. 그런데 화평케 하는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 했다.
바다와 남방을 다 얻는다는 것은 전 세계를 지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식민지 정책을 썼던 나라들이 결국은 육지와 바다를 다 장악했다.
미국도 태평양을 장악하고 있다. 태평양 함대 이런 것이 있다. 그러니까 태평양에서는 미국이 패권을 가지고 있다 그런 의미고 태평양에 속해 있는, 태평 연안의 모든 것이 미국의 방위권에 들어있다. 각처에 기지가 있다. 동양 같으면 필리핀이나 대만이나 일본의 오끼나와 같은 곳에 전부 태평양 방어를 위해서 기지를 세우고 있다. 바다라는 것이 엄청나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바다를 통해서 모든 것이 교통이 되고 유통이 되니까 바다가 막히면 아무것도 못한다.
일본이 2차 세계 대전의 마지막에 결국 바다를 잃어버렸다. 공군력도 잃고 바다도 잃고 그래서 완전히 패배하게 되었다. 동양 최대의 항공 모함을 건조했는데 그 항공 모함을 사용해 보지도 못하고 침몰 당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때 미군 잠수함이 일본열도를 완전히 포위하고 있는 상태였다. 동경만에서 건조되어 해군 기지로 출발하다가 중간에 어뢰에 맞아서 박살이 나고 말았다. 바다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공군을 잃고 바다를 잃었으니까 무슨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결국 손을 들게 되었다.
원자 폭탄이 떨어져서 항복을 했지만 만일 원자 폭탄이 떨어지지 않았으면 그들은 더 많은 희생을 당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계속 목을 조이고 있었으니까, 각처의 보급로가 끊겨서 남태평양 쪽에서는 심지어는 사람을 잡아먹고 사는 병사들이 생길 정도로 그렇게 고립이 되었다. 중국에 나가 있던 관동군도 완전히 길이 막혔다. 그러니까 그들은 원자 폭탄 때문에 오히려 덕을 본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지 않았으면 더 많은 피해를 받았을 것이다.
서방과 남방을 얻을 것이다. 이것은 놀라운 확산을 말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국력이 커지려면 동해 바다도 우리 거다 하고 동해 함대를 설치하고 서해 바다도 우리 거다 하고 서해 함대도 설치하고 이렇게 할 것이다. 그런데 국력이 약하니까 금을 그어놓고, 라인을 정해 놓고 그 안에만 우리 것이다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 같은 나라에서 서해는 우리 거다 하면 꼼짝을 못한다. 일본이 동해는 우리 거다 하면 전쟁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우리가 전쟁에서 이길 수 있겠는가?
바다와 땅을 차지한다는 것은 온 세상을 점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활하신 이후에 예수님은 온 세상을 점령하게 되었다. 우리의 생명도 부활의 생명 안에 있을 때 장애물이 없어지게 된다. 복음도 부활의 복음일 때 장애물이 없어지게 된다. 우리의 승리가 부활의 승리일 때 장애물이 없어지게 된다. 그전까지는 무엇인가 장애물이 많고 육신의 제한 안에 있을 때 장애물이 많듯이 장애물이 많은데 부활 안에는 장애물이 전혀 없다.
갓으로부터 출발한 승리가 얼마나 넓어졌는가를 보게 된다. 단의 변절과 갓의 회복, 아셀의 넉넉함, 납달리의 부활로 인한 완성, 이것이 한 그룹을 이루고 있는데 이것은 주로 교회 생활과 관계가 있다.
첫 번째 그룹과 두 번째 그룹은 죄악 안에서 있었던 인생의 승리, 그리고 그 승리의 확산인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세 번째 그룹은 단체적인 것을 의미한다. 단이 변절하고 배반하는 것도 단체적으로 배반하고 갓이 회복할 때도 단체적으로 회복된다. 아셀의 넉넉함이나 납달리의 완성도 역시 단체적인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경륜의 마지막은 단체적인 것이다. 한 사람을 창조해서 한 사회를 건설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다.
아담을 창조해서 갈빗대로 하와를 지어서 둘이 한 몸을 이룰지어다 이것이 영원한 계시였듯이 한 사람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의 신부를 얻어서 완전한 사회를 이루게 되는 이것이 완성이다.
기독교는 안타깝게도 이 사실에 대해서는 패배주의다. 땅에서는 하나님의 왕국이 불가능하다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카톨릭은 아직도 카톨릭의 왕국을 꿈꾸고 있지만 기독교는 지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왕국을 꿈꾸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종말론적인 왕국을 기대하고 있다.
어느 날 역사가 갑자기 하늘로부터 내려올 것이다.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온다는 것과 같이 주님이 하늘에서 재림하게 되고 그렇게 되어서 이 세상은 달라질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땅 위에서 하나님의 왕국은 불가능하다 여기에 도달했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분명하게 사람을 땅에 지었고 그 땅에 지어진 사람을 통해서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갖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다. 그러니까 땅 위에서 교회가 반드시 승리해야 하고 교회는 땅 위에서 반드시 왕국을 준비해야 한다. 그것만이 하나님이 바라는 길이다.
우리가 하늘로 올라가서 천당에 올라가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땅 위에서 그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 이것이 바로 목표다.
서방과 남방을 얻을 것이다. 여기서 완성을 보게 된다.
기도)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다 아담 안에서 절망이고 인류 전체가 갈 곳을 잃고 방황할 수밖에 없는 이런 자리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심으로 말미암아 부활의 승리 안으로 이끄시고 우리를 새로운 하나님의 경륜 안으로 이끄셔서 당신의 영원한 목적지 안에 우리를 두신 것을 감사합니다. 한 사람을 지어서 한 사회를 이루는 것, 한 사람으로 시작해서 한 나라를 갖는 것이 아버지의 영원한 목표라면 오늘 이 땅위에서 당신의 교회가 왕국을 준비해야 하고 그 왕국은 새 예루살렘을 준비하는 자리에서 완성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 교회 안으로 부르셔서 왕국을 준비하도록 인도하여 주신 것을 감사하고 이런 축복 안에 우리를 이끄신 것을 감사합니다. 넉넉하고도 완성된 아셀과 납달리 안에서 우리 교회 생활을 갖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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