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착민들이 오스트레일리아에 첫 발을 내딛고 서로 당을 사고팔거나, 정부에서 땅을 임차하거나
아예 사들일 때 땅값은 영국의 가치관에 따라 결정되었다.
달리 말하면 영국의 비옥한 토양에서 얻을 수 있는 수확량을 기준으로 땅값이 결정되었다.
요컨대 오스트레일리아의 땅이 과대평가되었다는 뜻이다.
즉 땅을 농지로 사용해서 회수할 수 있는 경제적 가치보다 더 높게 팔리고 임차되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농부가 땅을 사거나 빌려서 저당잡힐 때 땅의 가치가 과대 평가되어 이자율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자의 압력 때문에 농부는 짧은 시간에 땅에서 최대한의 수확을 끌어내야 했다.
지속적인 영농응 고려될 여지가 없었다.
이런 '땅의 학대'는 에이커당 양을 최대한 방목하거나, 더 많은 땅에 밀을 심은 형태로 발전했다.
게다가 영국의 문화적 가치관, 즉 금전 중시주의와 종교관으로 인한 땅의 과대평가로
오스트레일리아 정착 자들은 양을 최대한 방목했고,
그 결과로 표토가 드러날 정도로 풀이 뜯겨나가면서 토양 침식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따라서 파산하거나 목양을 포기하는 농가들이 속출했다.
땅의 과대평가는 농업을 중시하는 영국의 전통적 가치곤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
하지만 생산성이 낮은 오스트레일리아의 땅에는 적합하지 않은 가치관이었다.
하지만 농업을 중시하는 가치관은 지금도 여전해서,
오스트레일리아의 뿌리 깊은 정치적 문제 중 하나를 해결하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즉 오스트레일리아의 헌법은 시골 지역에 더 많은 의결권을 보장하고 있다.
유럽이나 미국에 비해서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시골 사람은 정직한 사람이고 ,
도시 거주자들은 부정직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따라서 농부가 파산하면 가뭄 들과 같이 불가항력적인 힘으로 인해 착한 사람에게 불행이 닥였다고 생각하는 반면에,
도시 거주자가 파산하면 부정직한 행태로 인한 인고응보라고 생가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이처럼 시골 사람은 무작정 착한 사람이라 여기고 시골 지역에 더 많은 의결권을 할애하는 현상은
오스트레일리아가 고도로 도시화된 국가라는 현실을 도외시한 면이 멊지 않다.
오스트레일리아 정부가 환경을 유지하는 정책보다,
경제적인 면을 고려하지 않고 농지 개간과 같은 '채굴'에 왜곡된 지원을 오햇동안 계속하며서
시골 지역을 간접적으로 보조한 이유도 여기서 찾아진다.
50년 전깢, 오스트레일리아에 이주한 사람들은주로 영국인이거나 아일랜드인이었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대다수의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이 영국의 유산과 끈끈한 연을 맺고 있다,
그런 정을 조금이라도 떼어내라고 조언하면 화를 벌컥내면서 단호히 거부한다.
물론 이런 유산 덕분에 그들이 자랑스레 생각하는 일을 해낼 수 있었지만
외부인의 입장에서 냉정하게 판단하면 영국의 유산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이익에 부적절하고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모두에서, 영국이 독일에 전쟁을 선포하자마자
오스트레일리아도 덩달어 독일에 전쟁을 선포했다.
하지만 오스트레일리아가 독일의 뉴기니 식민지를 정복하는 필곗거리를 제외하면
제1차 세계대전은 오스트레일라리의 이익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영국과 독일이 전쟁을 시작하고 2년이 지난 후 일본과 전쟁을 시작할 때까지
오스트레일리아는 제2차 세계대전에 개입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뉴질랜드도 그렇지만 오스트레일리아의 주요 국경일은 4월 25일, 국군의 날(Anzac Day)이다.
멀리 터키의 겔리불루 반도에서 1915년 4월 25일에
영국을 위해 산화한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군인들을 추념하는 날이다.
영국군을 지원하러 멀리까지 달려갔지만
영국군 지휘부의 무능함 때문에 터키군을 제대로 공격하지 못하고 참혹하게 죽어갔는 데도 말이다.
어쨌든 게리불루에서의 대참사는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에게
모국 영국을 지원함으로써 여섯 명의 총독이 관할하는 여섯 개 식민지가 아니라
영 연방에 속한 하나의 국가로서 지위를 확보하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상징하는 사건이 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인에게 겔리불루 참사가 있었다면,
내 세대의 미국인들에게는 1941년 12월7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이 있었다.
그날을 계기로 미국인들은 하나가 되었고, 고립이라는 외교 정책의 틀을 벗어버렸다.
그러나 오스트레일리아 밖의 사람들에게는
오스트레일리아의 국경일이 겔리불루 반도의 사건에서 정해진 이유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지리적 조건에서도 오스트레일이아의 이익과 아무런 관계를 찾을 수 없는데 말이다.
지구 반대편에 있고, 지구의 3분의 1바퀴나 떨어진 곳이지 않은가!
영국과의 이런 감정적 연대는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내가 1961년 오스트레일리아를 처음 방문했을 때이다.
그전에 영국에서 4년을 지낸 탓에 나는 그곳의 건축물과 그들의 정신에서
현대 영국인보다 더 영국인 같다는 느낌을 지을 수 없었다.
1973년까지 오스트레이리아 정부는 매년 기사 작위를 받을 오스트레일리아인의 명단을 영국에 보냈고,
기사라는 작위는 오스트레일리아인들에게 최고의 명예로 여겨졌다.
지금도 영국은 오스트레일리아에 한 명의 총독을 임명한다.
그 총독은 오스트레일리아 수상을 해임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갖고 있다.
실제로 총독이 1975년에 그 권한을 행사한 적도 있었다.
1970년대 초까지 오스트레일리아는 '백호주의(Whete Australia policy)'를 견지하며
아사아인의 이민을 실질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연히 이웃한 아시아 국가들이 그런 정책을 비난하고 나섰다.
결국 뒤늦게야, 정확히 말해서 25년 전부터,오스트레일리아는 아시아의 일원이라는사실을 인정하고
아시아 국가들과 어울리며 무역을 활성화하면서 아시아인의 이민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제 영국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수출 시장에서
일본, 중국, 한국, 싱가포르 타이완 등의 뒤를 를 잇는 여덟번째 나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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