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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진 시집 '빈 교실' 난중일기처럼 교단 일기 써가는 선생님 함께 기대하며
2019.12.17.(화) 장승진 교장선생님께서 보내주신 시집을 마주 대한듯 반갑고 고맙게 받았다. 그는 강원교육자선교회 춘천지역회장으로도 섬김의 본을 보여주고 계신다. 시인의 말에서 청년 교사 시절 썼던 시들에 최근 틈틈이 써온 글들을 합하여 정년퇴임 이후 한 데 묶어 내놓는다 했다. 난중일기처럼 교단 일기를 써가는 선생님이 늘어나는 것이 작은 바람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교단이 교단다워지는 것! 장교장선생님의 반성문, 성찰, 평생 교육계에 몸담았던 삶의 기록들이 교육 현장에서 맡은 한구석 밝혀가고 있는 선생님들께 '포기하지 않은 꿈 너머 꿈' 희망의 밑거름되길 기원한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장승진 교육테마시집] 빈 교실
출처 : 다음카페 '시와소금'
***장승진 교육테마시집 <빈 교실> 발간***
(소금북 시인선 04)
장승진(張承鎭)
• 강원홍천 출생으로 강원사대영어교육과와 교육대학원을 마치고 인문대 영문학박사과정을 수료했다.
• 영어교사로 근무하며《심상》(1990.12)《시문학》(1991.2)신인상으로 등단했고,강원도평창교육청과 강원도교육청에서 장학사로, 도국제교육담당장학관으로 일했다.
• 시집으로「한계령 정상까지 난 바다를 끌고갈 수 없다」(1997),「환한사람」(2017)이 있으며 중고등학교 교감을 거쳐 홍천여고, 춘천여고교장을 역임했다.
• 교육부장관,대통령표창,홍조근정훈장을 받았으며 2019년2월 정년퇴임하여 속초〈갈뫼〉춘천〈A4〉〈삼악시〉동인으로,수향시,춘천문협,한국문협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전자주소 : sjjang33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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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청년 교사 시절 썼던 시들을 버리지 못하고 최근 틈틈이 써온 글 들과 합하여 정년퇴임 이후 한 데 묶는다. 세월의 간극이 너무 넓고 시 형식과 어울리지 못하는 나름의 주장이 낯선 모습인 걸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삶의 흔적이니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 같아 부끄럼 무릅쓰고 용기를 내 본다. 부디 생각이 다른 이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기를. 이런 고민을 이렇게 하는 사람도 있었구나 하고 너그럽게 봐주길.
교육은 너무 크다.
교육은 너무 중요하다.
하지만 교육은 너무 친근해 보여 너도나도 전문가라 생각한다.
이 글들은 아이들이 돌아간 빈 교실에서 잠깐씩 나를 돌아본 반성문이자 바쁜 일들의 틈새에서도 성찰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던 평생 교육계에 몸담았던 내 삶의 기록들이다.
작은 바람이 있다면 난중일기처럼 교단 일기를 써가는 선생님이 늘어나는 것, 그리하여 교단이 교단다워지는 것!
2019년 늦가을 강물처럼 장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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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문跋文|
시로 표현된 교육일기, 고난의 발걸음
―장승진 시집, 『빈 교실』
장인수
(시인, 교사)
● 시로 표현된 뜨거운 교육일기이며 참회록
장승진 선생님의 시집『빈 교실』은 시로 표현된 교육 시론(時論), 교육 칼럼, 교단 일기, 참회록, 자서전, 평전입니다. 시의 형식을 빌어왔지만, 표현기법과 진술 방법에서 시의 형식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저는 서울의 일반계 고등학교에서 국어과목을 가르치고 있는 교사입니다. 그저 부장 근무를 하고 있는 평교사입니다. 그런 저에게 장승진 선생님께서 시집해설을 부탁했습니다.
장승진 선생님은 너무 겸손하신 거 아닌가요? 교육계에 수없이 많은 훌륭한 분들과 교류를 하셨을 텐데 저처럼 미천한 평교사에게 해설을 부탁하다니! 그 속마음을 모르겠습니다. 겉사람과 속사람이 모두 겸손하신 분이기에 그렇겠지요. 글을 쓰고 있는 제가 더 부끄러워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평교사, 장학사, 교감, 장학관, 교장의 길을 걸어오신 장승진 선생님에게 누가 되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까마득한 후배 교사이며 시인으로서 장승진 선생님께 누가 되지 않는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저는 도도한 글쟁이입니다. 저는 언어의 결벽증과 염결성을 지닌 글쟁이입니다. 국어 교사로서 언어의 해방을 추구하는 삐딱하고 엉뚱한 교사입니다. 격식과 품격을 갖춘 언어와 문장을 잘 구사하지 못합니다. 칭찬의 글에는 인색한 글쟁이입니다. 이런 저의 성향을 알고 저에게 부탁한 것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제 해설을 읽고 약간은 당황하실 것 같습니다. 널리 해량을 바랄 뿐입니다.
턱없이 부족한 평교사인 제가 장승진 선생님의 시집 『빈 교실』은 너무나 감당하기 힘들고 벅찼습니다. 차근차근 끝까지 읽으면서 마음이 숙연해졌습니다. 고개를 푹 떨구었습니다. 문학적으로는 숭고함, 비장감이라는 미학적인 감정마저 들었습니다. 이렇게 절실하고 절절하게 교육자로서 삶을 살아온 사람이 있을까 싶었습니다. 저는 교육이 크고 중요하더라도 아주 작은 영역의 몫만이 저에게 주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뭐냐 하면 그냥 즐기면서 수업을 하자, 그냥 즐기면서 학교 생활을 하자는 신조로 살아왔습니다. 저의 교육 철학은 ‘웃으면 해결이 된다, 명랑하면 해결이 된다, 그래도 해결이 안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교실에서 웃기자, 웃음이 터지는 수업을 하자, 즐거움이 샘솟는 수업을 하자는 것이 저의 작은 신조였습니다. 그런데 『빈 교실』은 그런 저를 대충대충 살아온 교사가 아닌지를 깊이 성찰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빈 교실』에 이토록 깊은 눈빛과 날카로운 사도의 음성이 숨어 있었습니다.
시집『빈 교실』의 1부는 정말 교실 이야기입니다. 평교사 시절 교실에서 학생들과 함께했던 실체험이 담겨 있습니다. 제2부는 부장교사와 장학사 시절의 교육에 대한 문제의식이 주로 담겨 있습니다. 제3부는 장학, 교감, 장학관 시절의 교육에 대한 문제의식이 주로 담겨 있습니다. 제4부는 장학관, 학교장 시절의 교육에 대한 문제의식이 주로 담겨 있습니다. 제1부와 제2부는 저와 같은 평교사의 위치에서도 생생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교육 현장의 목소리입니다. 반면에 제3부와 제4부는 저의 식견을 흘쩍 넘어서는 목소리입니다. 우리학교 교감 선생님을 보더라도 아침 7시 30분에 출근해서 저녁 7시 이전에 퇴근하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하루 12시간을 근무합니다. 그렇다고 초과근무수당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그런 과다업무에 시달리는 교감이라는 직책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잃은 것을 말해 보라면
몇 가지 떠오르긴 하지만
이제와 생각하니 얻은 것이 되기도 한다
교육청에서 주당 90여 시간씩 일할 때
난방 꺼진 야근으로 종아리 동상을 얻었고
가족과의 대화시간을 못 가진 것이 아쉽다
예상 못한 학교폭력사건 처리 때문에
다음날 떠나는 해외여행을 취소한 일도 있지만
경험을 얻었고 능력이 커졌다
―「빈 교실 –교직 정산보고서」 중에서
주당 90여 시간씩을 했답니다. 하루에 15시간 정도 업무를 봤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장학사의 업무량인가요? 미친 짓입니다. 저 같으면 절대 안 합니다. 초과근무수당을 듬뿍 주어도 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저는 노는 교사입니다. 저는 업무에 치이는 교사는 싫습니다. 혹사당하는 업무 풍토가 정말 싫습니다. 이 시를 읽으면서 저는 숨이 턱 막히고, 이것이 정말 교육 공무원의 근무여건으로서 타당한 것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3부와 4부의 내용은 제가 감히 엄두를 낼 수 없는 시야와 예리한 비판 정신과 교육자로서의 열정과 고도의 전문성이 느껴집니다. 학생들에 대한 생각, 교사에 대한 생각, 학부모에 대한 생각, 지역사회에 대한 생각, 사회적 분위기에 대한 생각, 교육정책에 대한 생각, 교육청이나 교육부의 교육 관료에 대한 생각, 교육을 바라보는 일반 시민이나 사회 분위기에 대한 생각이 예리한 시론이나 칼럼처럼 나타나 있습니다. 이것이 시인지 교육 시론(時論)인지 교육의 향기가 풍기는 교육 칼럼인지 구분이 가지 않습니다. 이렇게나 폭넓은 식견과 촌철살인의 교육적 안목을 일목요연하게 시적인 언어로 쓴 글을 저는 지금껏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습니다. 『빈 교실』은 그동안의 교육시집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교육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와 식견이 명징하게 드러나 있는 시론(時論) 같은 시집, 칼럼 같은 시집, 교단일기 같은 시집입니다. 시집의 형식을 빌린, 시어의 형태를 빌려 쓴 자서전이며, 교육자로서의 삶의 회고록이며, 자기가 쓴 자신의 평전이며, 참회록이며, 교단일기입니다.
● 40여 년 기나긴 고난의 여정과 숭고한 발걸음
장승진 선생님의 삶은 고스란히 갈등과 충돌과 고충의 연속이었습니다. 교육은 갈등, 충돌, 고충의 현장 오늘날은 갈등의 시대입니다. 사회의 축소판인 교육 현장은 다양한 갈등이 끝없이 존재하는 곳입니다. 갈등은 충돌로 이어집니다. 학부모와 학생의 갈등과 충돌, 학교 교칙과 학생의 갈등과 충돌, 교사와 교사의 갈등과 충돌, 교장과 평교사의 갈등과 충돌, 수업 개방의 갈등과 충돌, 교권과 학생 인권의 갈등과 충돌 등등, 심지어 갈등 관리방법이나 갈등 해결방법의 갈등과 충돌 사례도 부지기수입니다.
교육은 ‘갈등’이면서, 갈등을 해결하려고 노력해야만 하는 ‘고충’입니다. 갈등을 외면해서는 안 되는 곳이 학교입니다. 교육이 고충이 된지 오래입니다. 교육 현장이 고충 현장이 된지 오래입니다. 장승진 선생님의 시집 『빈 교실』은 교육 현장의 갈등, 충돌, 고충의 진열장입니다.
진열장! 마치 홍대용, 이덕무, 박지원 등이 청나라 때 중국 북경의 30만 개 이상의 점포가 줄지어 선 유리창(琉璃廠) 시장 골목을 누비면서 신학문, 새문물, 고서적, 골동품, 서화작품, 문방사우 등의 진열된 모습에 경이로움을 표시했던 그 풍경이 떠오릅니다.
그렇습니다.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홍대용은 연경의 유리창을 통해 세계 각지의 놀라운 문물을 접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보화(寶貨)가 쌓여 있는 유리창. 선진문물과 희귀한 도서들이 산처럼 쌓여있는 유리창. 세계의 여러 학자와 관리들을 유리창에서 만난 필담을 나누고 자신들의 시나 문집을 전달한 곳. 장승진 선생님의 『빈 교실』은 우리나라 교육 현장의 모습을 중국 청나라 연경의 유리창처럼 보여줍니다.
고교학점제의 난맥상 비판(「미래 청사진」), 학교건축공사적폐 비판(「식목행사」), 경쟁을 부추기는 교육비판(「공부의 방법」), 전문가의 변질된 의미 비판(「전문성이라는 것」), 오냐오냐 교육 비판(「오냐오냐 교육」), 납새의무와 책임을 외면하는 무상교육의 큰 병폐 비판(「공짜는 없다는데」), 시대의 가치변화에 춤을 추는 근시안적인 교육정책 비판(「소에게 묻다」), 행복이라는 용어를 남발하는 교육 비판(「행복 교육」), 국제화 시대에 국수적인 한글 전용 교육(「외국어 교육」), 편 가르기에 앞장서는 대중과 언론과 정치인들의 교육관 비판(「그 바람에」), 학생 수 감소에 대한 우려와 걱정(「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데」), SW교육 실현의 어려움 비판(「미래인재 육성」), 계층 이동 사다리가 끊인 불공정한 교육 시스템 비판(「기울어진 운동장」), 극단적인 자기 자녀중심 이기주의에 빠진 학부모의 의식구조 비판(「학부모교육」), 형식적인 잡다하고 편협한 단편적인 행사에 치중하는 자유학기제 비판(「자유학기제」), 정체성 부재의 암기 위주 교육이 된 역사교육 비판(「역사 교육」), 희생과 헌신과 책임의식이 결여된 지도자 비판(「지도자의 모습」), 부장교사와 담임교사를 회피하는 책임감이 결여된 교사들 비판(「2월」), 권력도 금력도 없이 오직 민원과 책임에 시달리는 학교장 자율경영 비판(「학교장 자율 경영」, 눈치와 줄서기가 은연중 작동하는 인사발령 비판(「인사가 만사」), 정치적 입지로 생각하고 사고하는 학교운영위원회 비판(「학교운영위원회」), 낭만과 존경이 사라지고 성착취의 공간이 된 섬마을 민심 비판(「섬마을 선생님」), 보여주기식 행사가 되어버린 학교장연찬회의 토크콘서트 비판(「토크콘서트」), 극구 사양하는 학생부장 뽑기의 천태만상 비판(「학생부장 뽑기」), 현장체험학습을 공식적인 결석 인정으로 오용하고 악용하는 학생과 학부모 비판(「체험학습」) 등등 교육계의 구석구석에 비판의 칼날을 들이댑니다. 시집 『빈 교실』은 쓴소리로 가득합니다. 쓴소리를 퍼붓습니다. 이보다 더 깊은 혜안과 예리한 목소리로 교육계의 병폐와 문제점을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교육에 대한 애정과 철학이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교감, 장학사, 장학관, 교장으로서 교육현장의 최전선에서 생생하게 체험하고 느낀 날카로운 교육관이고 충정일 것입니다. 마치 성경에 나오는 사도와 성자들의 수많은 외침과 기도처럼 들립니다.
비판의 강도가 세고 일침의 목소리가 너무 분명하고 또렷해서 제 낯이 화끈 달아오릅니다. 왜냐하면 저도 성찰하고 반성하고 뉘우쳐야 할 부분들을 날카롭게 건드려주었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 몇 가지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대의 빠른 변화, 노작교육과 노동착취
옛날에는 노작교육이 교육의 일부로서 강조되었습니다. 책을 통해서 배우는 지식 뿐만이 아니라 몸을 움직여 일하고 땀을 흘리며 몸으로 체득한 활동이야말로 진정한 교육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인간으로 살 수 있도록 실험실 교육, 공작실 교육, 직물작업 교육, 노동현장 교육 등이 중시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인지적 발달 뿐만 아니라 실용적 재능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도덕교육을 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요? 시대가 엄청 변했습니다.
내 어릴 때 다니던 시골 초등학교엔/ 토끼가 몇 마리 살고 있었네/염소도 두어 마리 함께 있어/ 먹이 당번 하는 날은 신나고 즐거웠지/ 아카시아 나뭇잎 따다주면 오물오물 잘도 먹던 토끼들/ 커다란 눈과 보스스한 털이 귀여워/ 많이 먹어라 어서 커라 사랑을 듬뿍 주었었지/ 운 좋은 날 염소 젖 얻어먹은 날/ 일기장에 적어놓기도 했는데// 요즘에 아이들 그런 일 시켰다간/ 미성년자 노동착취 혐의로 쇠고랑 찬다네/ 운동장 풀 뽑기는 일도 아니었고/ 등교 때 돌멩이 하나씩 주워와 학교 짓기/ 방학숙제로 퇴비용 풀 10Kg 베어 제출하기/ 솔방울 솔옹이 주워 난로 땔감하기 / 쥐 잡아 쥐꼬리 학교에 가져오기 / 뽕나무 심어 거름 주고 뽕잎 따 누에치기// 학생들 쓰는 화장실 청소도 교실 청소도/ 용역회사에 맡겨 달라하고 / 교무실 청소를 왜 학생들에게 시키느냐고 따지는 / 학부모들에게 이런 얘기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믿지 못할 코미디일 거야/ 따져보면 아주 오래된 역사도 아닌데/ 가난했던 시절 얘긴 해서 뭣하나/ 먹고 살만해졌다는 게지 위안을 하면서도/ 노동착취라는 말이 섬뜩하게 가슴에 와 박히는 건/ 단지 내가 나이 먹은 탓일까
―「빈 교실 –미성년자 노동착취」 전문
미성년자 노동착위 혐의로 쇠고랑을 차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교사는 함부로 노작교육을 시킬 수 없습니다. 오늘날 노작교육은 일부 대안학교와 가정교육에서만 실시할 수 있습니다. 일반계 고등학교와 일반적인 공교육 범주 안에서는 사라졌습니다. 그만큼 교육철학도 변했고, 교육환경도 변했습니다. 잃은 것도 많습니다. 인간미가 사라졌고, 땀방울 냄새가 사라졌고, 교육과 삶의 현장이 분리되었습니다. 비록 노작교육 뿐만 아니라,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교사가 학생들의 육체를 접촉하거나 육체 노동을 시키는 일을 비교육적이라고 지탄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스킨십의 교육도 중요시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칭찬의 행동으로 쓰다듬거나, 체육대회 때 어깨동무를 하거나 무등을 태우거니 팔씨름을 하는 신체 접촉이 교육적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스킨십은 이유를 불문하고 성희롱의 직간접적인 대상이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신체가 대상화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철저하게 신체의 대상화가 이루어졌습니다. 학생과 너무 가까이 하지 말 것을 주문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대상화, 타자화는 급속도로 빠르게 진행되고 그것이 선악을 판단하는 법적인 효력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급변한 교육환경의 갈등 상황과 고충이 『빈 교실』에는 촘촘히 생생하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행복 교육에 대한 고민과 성찰
‘행복’이라는 어휘가 유행처럼 쓰이고 있습니다. 행복학교, 행복교육, 행복수업, 행복은행, 행복강의, 행복연주회, 행복가게, 행복경제, 행복거리, 행복마케팅 등등 온 천지가 행복으로 도배되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와 교육 현장이 행복하지 않다는 반증이 아닐까요? 불행하기 때문에 행복을 희망하는 것은 아닐까요? 행복이 교육과 조합을 이룰 수 있을까요?
요즘엔 사방에 행복이 지천이다/ 은행에도 옷 가게에도 백화점 입구에도/ 거리마다 걸려 있는 연주회 현수막에도// 그런 행복이 드디어 교육과도 만났다/ 교육이 행복하다는 건지/ 마땅히 행복의 방법론을 가르쳐야 한다는 건지/ 배움의 지향점은 행복이어야 한다는 건지/ 그 뜻은 모호하기만 한데// 행복의 개념은 사람마다 다르고
행복에도 차원이 있다는데/ 똑같은 것이 없는 행복을/ 수준별로 개별화하여 어찌 알게 해야 할지/ 행복과 교육의 조합이 가당하기나 한 건지// 달달한 말로 달래고 위로하여/ 취하고 싶은 이득이 있는 걸까/ 아무튼 요즘엔 행복 포장지가 유행이다/ 쓸쓸한 거리에 쓰다버린 것들이/ 검은 비닐봉지처럼/ 이따금 바람에 쓸려 다닌다.
―「빈 교실 –행복 교육」 전문
행복이 지천입니다. 행복 포장지가 유행입니다. 드디어 행복이 교육과 만났습니다. 진짜 행복한 교육일까요? 예를 들어봅시다. 미용사가 힘겹게 자격증을 땄습니다. 자격증을 받을 때의 행복은 삼일이 지나면 미용실을 개업해야 하는 새로운 계획으로 꿈같이 사라지고 천신만고 끝에 미용실을 개업하여 얻은 행복의 순간은 또 다시 미용실을 경영하면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힘든 일로 둔감합니다. 행복은 그저 순간일 뿐입니다. 한 순간에 잊어 버리고 끝나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행복이 우리의 일상에 있거나, 또는 거대한 산 너머에 있다고 생각할 때 그것은 한 순간입니다. 요즘 뜨는 유행어 ‘소확행(小確幸,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란 말을 보며 작은 것에서부터 행복이란 감정을 느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아이스 카페 라테를 마시며 좋아하는 책을 보는 아침 시간, 그리고 얼굴만 봐도 내 마음 상태를 기가 막히게 알아보는 진짜 친구들… 생각해보니 이런 사소한 것들이 진짜 행복이구나 싶기도 합니다.
학교 현장에서 선생님들이 추구하는 행복수업, 행복교실, 행복교육의 행복은 무슨 의미일까요? 행복의 기준을 너무 높게 잡은 것은 아니지요? 명문대 입학이 행복은 아닐까요? 나이에 맞는 적절한 성공, 결혼, 서울에서의 내집 한 채를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행복은 아니었을까요? 행복의 조건은 각자 다르기 마련인데 학교 현장은 일반화된 조건을 갖추기 위해 지나치게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은 아닐까요? 무언가를 성취하고 소유한다는 것은 분명 우리를 만족시키지만 그것이 행복으로 향하는 유일한 길은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도 ‘성취하자. 노력하자. 실력을 쌓자. 등급을 올리자. 성적을 향상시키자. 명문대에 진학하자.’에 행복의 조건을 은연중에 강요하는 것은 아닌지요? 그럴 수밖에 없다고요? 학교는 공부하는 곳이고 지식을 쌓아서 상급 학교에 진학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하는 곳이니까. 아, 이것이 교육의 딜레마입니다. 장승진 선생님의 시집에는 이런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교육자의 고민이 깊게 담겨 있습니다.
● 기다림의 교육과 낙서의 교육
아이들 가르치는 일을
길 안내하는 차량용 내비게이션처럼 하자
실수로 잘못된 길로 들어서도 절대로
절대로 화내거나 소리 지르지 말고
있는 지점에서 다시 경로 탐색하여
친절하게 안내하면 될 일이다
몇 번이고 실수한 횟수 세지 말고
오로지 목표지점을 향하여 참을성 있게
감정 섞지 말고 사근사근하게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끈기 있게 기다려주면 될 일이다.
―「빈 교실 –내비게이션(Navigation)처럼」 전문
저는 이 시가 무척 좋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추구하는 교육이 모습이지만 제가 가장 추구하기 힘든 교육이기 때문입니다. 친절하게, 화내지 말고, 참을성 있게, 끈기 있게 기다려주는 일이 교사의 길이라는 말씀! 그런데 저는 욱하는 성질이 있습니다. 뒤끝은 없습니다. 한 번 확 불끈 화를 내고 그 자리에서 끝장을 보고 다음 날에는 머릿속에서 모두 지워진 듯 까맣게 잊습니다. 평상심을 회복합니다. 기다림이나 친절함이 저에게는 부족합니다. 느긋함과 나긋함이 저에게는 정말 부족합니다. 부끄러울 뿐입니다.
교단 위에 서서 보면 너희들은
인도의 소들처럼 앉아 있다
내려서 힘을 빼고 바라보면
길 잃은 양들처럼 측은해 보인다
너희들 눈들이 애타게 찾을 때 나는
그 자리에 없었다
언제나 어쩌지 못하는
내 삶의 무게를 어찌하랴
눈동자들 지우며 지우며
난 어두워지는 들판의 또 다른 어둠이었다
미안하다
얼굴 없는 불안에 인이 박히고
단호한 목소리에 단죄되는
너희들 책상 위 늘어가는 낙서들
무수히 벗어놓은 껍질의 말들이
자석 되어 발목을 잡아 끈다.
―「빈 교실 -책상 위 낙서들」 전문
교실에 들어서면 학생들이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소떼나 양떼들이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슬픈 눈동자를 한 양떼들, 길 잃은 양떼들, 벗겨진 껍질이나 털처럼 책상에 널려져 있는 낙서들. 안타까운 교실 풍경입니다. 저의 부끄러운 시집『교실 소리질러!』를 보니 교실 풍경을 대초원으로 설정한 시가 실려 있었습니다. 그 시에서 저는 ‘지금 서로 의견이 갈려서 토론 수업을 하고 있는 교실이 하느님께서 지으신 자유롭고 광활한 대초원이 아니라면 과연 어디겠는가?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풀이 저토록 끈질기게 교실 가득 푸르딩딩 자라나고 있겠는가? 울부짖고, 뿔질을 하고, 저녁을 끌고 야초를 뜯는 산양이 가득하겠는가? 공자와 세종대왕과 김일성과 박정희와 이순신이 느닷없이 교실로 들어와서는 광대와 광녀와 목동과 유목민과 화가를 만나고 있다. 그들을 마유주를 함께 마시고 있다.’라고 노래했습니다. 저는 교실에서 미래의 이순신도 나올 것이고, 미래의 세종대왕도 나올 것이고, 미래의 목동과 광대와 광녀와 화가도 나올 것이라고 매우 긍정적으로 바라보았죠. 교실에 들어설 때마다 대초원의 싱그러움과 야성과 생명력을 억지로라도 발견하자는 제 자신에 대한 맹세였습니다. 장승진 선생님의 『빈 교실』에는 이런 생명력이 넘치지는 않습니다. 대신 참교육을 향한 비판의 목소리와 학생들을 향한 애정어린 연민의식과 안타까움과 걱정과 잔잔한 사랑이 넘칩니다.
● 오냐오냐 교육의 병폐에 대한 신랄한 진단
어느 새부터인가 이 나라엔/ 오냐오냐가 교육철학이 되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을/ 너무 과신해서일까 확대 해석해서일까/ 고3 수험생 있는 집에선/ 온 식구들 숨소리도 죽여야 하는 게/ 상식이 되었다 그저 공부만 해라/ 모든 거 참아주마 오냐오냐/ 대학입학이 지상목표가 되었다// 학교 선생님들은 / 잘못한 아이 크게 야단도 못 친다/ 학생인권 존중하느라 속앓이가 늘었다/ 아이들 기죽이지 말라는 / 새로운 교육사조 때문에/ 선생님 기는 죽고 아이들 기는 살아/ 폭력 신고 용의선상에 오른 교사들이/ 오냐오냐 잘 한다 경쟁이라도 해야 하는지// 공연장에서 뛰어다니는 아이/ 제지 않는 부모들/ 그 아이들 기죽지 않고 자라나/ 졸업식 애국가 부를 때도 대책 없이 떠드는 / 교육은 있되 철학은 없고/ 행정이나 정치적 고려는 있되/ 교육적 원칙이나 판단은 뒤로 밀리는/ 우리에겐 어떤 미래가 올까?
―「빈 교실 -오냐오냐 교육」 전문
‘오냐오냐’는 어린아이의 투정이나 응석, 떼쓰는 행동, 어리광 등을 받아주면서 말하는 감탄사이고, ‘오냐오냐하다’는 이러한 행동을 한다는 뜻의 동사입니다. 어린아이가 버릇없이 굴 때, 혹은 평소에 용인해 왔던 다른 사람의 행동이나 어떠한 현상이 너무 지나쳐서 선을 넘어갈 때 "오냐오냐 “ 그냥 봐 주었더니 어린아이가 어른에게 ”그러냐?“라고 반말을 하더랍니다. 별 생각없이 오냐오냐 하는 행위는 훗날 후폭풍이 만만치 않습니다.
사랑하는 내 아이를 위해 부모님이 놓치는 것은 없을까요? 옛날에는 풍습이나 범절. 가품(家品)이 있었고 타인에게 피해주지 않는 행동과 사고를 하라는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핵가족 시대이면서 이기주의 시대인 오늘날은 ‘오냐오냐’, 혹은 ‘크면 저절로 다 알아서…’라는 가정 교육을 합니다. 그래서 버릇없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거리, 식당, 차 안이나 경기장, 극장 등에서 마구 떠들고 떼를 쓰는 행위는 언제 어디서나 목격되는 장면입니다. 공공장소에서 우리 아이들이 함부로 낙서하거나 소란을 피우거나 장난을 쳐도 이를 엄하게 나무라지 않는다면 그 부모는 오냐오냐 자식을 키우는 것입니다. 미국은 아이가 걸어 다닐 나이만 되면 회초리를 들면서 엄격하게 예절을 가르칩니다. 일본의 어린이도 '남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면서 자랍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부모들이 아이들의 '기(氣) 살리기'와 아이들을 통한 ‘보상 심리’가 크게 작용하여 공공장소에서의 무례한 행동을 너그럽고 관대하게 오냐오냐 합니다. 야단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30대 부모들은 유형무형의 치열한 경쟁을 거쳐 온 탓에 자녀에게 '지면 안된다'는 식으로 가르칩니다. 남을 이겨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또 상대적으로 열악했던 자신의 과거에 대한 보상으로 '무조건 잘 해주기'에 빠져 더불어 사는 데 필요한 절제와 예절교육을 등한시합니다. 공부하는 것이 대견해서, 조금 더 좋은 대학을 들어가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이라는 생각 때문에 공부, 경쟁에서 이기기를 최상위 가치로 여깁니다. 생활예절은 그 아래입니다. 최상위 가치를 위해 생활 예절을 방치하거나 무시합니다. 예절교육은 남을 배려하며 더불어 살아갈 사회인으로 키우는 기초이자 바탕인데 ‘내 아들딸만 잘 되면 돼’라는 이기적인 심리와 잘못된 부성애와 모성애가 작동합니다. '감사합니다, 실례합니다, 미안합니다'라는 언어예절은 가장 기본적으로 반복해서 언어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하지 않습니다. 미안할 일도 없고, 감사할 일도 없는 삶이 더 값진 삶이라고 생각하나 봅니다. 내가 잘 났기 때문에 내가 공부를 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나 비정하고, 이기적이고, 무례한 생활이지만 이미 가정에서부터 부모님이 은연중에 부추깁니다. 선생님들은 무기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빈 교실』에는 오냐오냐 교육을 비판하는 시편들이 몇 편 지속적으로 나옵니다. 그만큼 심각한 문제 의식으로 오냐오냐의 병폐를 신랄하게 진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은 제자는 있어도 스승은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은사가 없는 것을 오히려 다행으로 여깁니다. 자기 스스로 컸다고 생각하거나 내 자신이 스승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시대가 변했습니다. 어른이 되고 보니 은사가 없었다는 것, 좋아하는 선생님이 없었다는 것을 무슨 자랑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많다고 합니다. 감사하고 고마워할 줄 모릅니다. ‘오냐오냐 내가 잘났다. 오냐오냐 내 자식만 잘났다.’는 철없는 생각이 가정에 만연해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저의 교직관이 크게 바뀐 것이 하나 있습니다. “내 자신의 교육 철학을 강하게 주입하지 않는 교사가 되자. 방임주의 교사가 되자. 학생을 방치하는 교사가 되자. 학생들의 개별적인 특성과 개성을 존중하고 칭찬하는 교사가 되자. 내 가치관을 별 볼일 없는 것으로 생각하자. 오히려 학생들의 개별적인 엉뚱한 생각이나 논리적인 의견들이 모여서 그들의 시대적 인식을 결정할 것이기 때문에 인생 선배의 가치관을 절대로 강요하지 말자.”입니다. 어떤가요? 약간 자조섞인 목소리처럼 들리나요? 아닙니다. 정말 제 교육관이 이렇게 변했답니다. 교사들도 발 빠르게 변해야 적응할 수 있으니까요. 오냐오냐 교육에 대한 저 자신의 대처 방법입니다.
● 학생부장이 기피 보직이 된 슬픈 현실
학교마다 2월이면 홍역을 앓는다/ 예전엔 몸살 정도 앓으면 되었는데/ 지금은 까딱하면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까지도 간다/ 어려운 일을 피하려는 교사들과/ 보직을 맡겨야하는 관리자들의 줄다리기/ 그중에 으뜸은 중학교 학생부장 / 생활부장 학생안전부장 학생문화부장/ 이름이 바뀌어도 누구나 피하고 싶은// 생활지도와 학생문화를 선도하고 책임지는/ 막중한 자리임에도 학교폭력 사안 많고/ 학부모와 갈등사례 빈번하여 극구 사양하는/ 그 심정 이해는 하지만 비워 둘 수는 없으니/ 어떤 학교에선 신규 딱지 겨우 뗀 교사에게/ 떠맡기기도 하고 기간제 교사에게 돌리거나/ 새로 전입한 사람에게 뒤집어 씌우는/ 치사하고 비겁한 일까지 있다니 / 설마 러시안 룰렛처럼 뽑는 날이 오진 않겠지?// 하긴 요즘엔 아예 학생부장 보직을 없애고/ 각 부서 담당자가 알아서 개별 처리하는/ 말하자면 각개전투식으로 맡겨놓은/ 넘치는 학생 사안으로 오래 고민했던/ 이 분야의 선진 학교도 생겨났다 하니/ 곧 새로운 유행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빈 교실 -학생부장 뽑기」 전문
『빈 교실』에는 인성생활지도와 관련된 시편들이 꽤 있습니다. 교사들이 매년 가장 집중적으로 받아야 하는 직무연수 중에는 교권, 학생인권, 성폭력예방, 응급구조대처법 등이 있습니다. 기본권 최대 보장의 생활지도, 교원의 인권 감수성 증진 방안, 인권 친화적인 학생 지도, 처벌과 신체의 자유, 양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 교내 민주주의와 학교 규칙, 교권 경시현상에 대한 대처, 교권과 학생 인권의 갈등에 대한 대처방안, 청탁금지법의 이해, 학교 안전사고의 합리적인 책임, 학생 학부모의 수업 방해 대처방안, 성추행 성희롱 성폭력 대처 방안, 교원에 대한 폭행, 협박, 사생활 침해 대처 방안 등의 연수를 지속적으로 받습니다. 옛날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내용들입니다. 그만큼 교육 현장은 끊임없이 선도적으로 시대의 변화에 대응해야만 합니다.
학교는 하루라도 편할 날이 없습니다. 매일 사건 사고가 터집니다. 정해진 절차와 방법에 따라 냉정하게 합리적으로 대응해야 하고, 교육적인 차원에서 대처해야만 합니다. 사건 사고를 처리하지 않으면 학부모들이 꼬투리를 잡고 무섭게 걸고 넘어집니다. 사건 사고를 예방하거나 수습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는 학생부장(학생생활부장, 학생안전부장, 인성안전부장, 학생문화부장 등의 다양한 명칭이 있는데 업무는 비슷합니다.)은 비참한 감정노동자입니다. 온갖 궂은일을 도맡야 해야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민형사상 책임까지 져야 하는 막중한 자리이기도 합니다. 선생님들 중에 학생부장을 앞장서서 하고 싶어 하는 분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의 학교에서 학생부장은 기피 보직입니다. 학생부장을 하면 교사로서의 모든 기쁨이 사라진다고 말합니다. 서로 하기 싫어하는데, 억지로 맡게 되면, 그 사람이 열심히 할 리가 있겠습니까? 학생부장을 하면서 위궤양을 얻을 정도로 심리적인 고생도 많았고 조폭 출신을 자처하는 학부모로부터 막말 위협을 받기도 하고, 친구에게 가혹 행위를 한 죄질 나쁜 학생의 학부모로부터 한밤중에 말도 안 되는 전화 협박을 받기도 합니다. 그리고 학생부장을 하게 되면 수업에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끊임없이 일에 시달립니다. 언제 어느 때 불시에 사안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이 학생의 사안을 처리하며 학생과 상담을 하고 있는데, 또 다른 학생이 잡혀옵니다. 게다가 웬 공문은 그렇게 많은지...학생 다루는 시간보다 공문처리 시간이 더 많을 정도입니다. 학교폭력예방을 하는 시간도 벅차고, 학교폭력예방 공문을 처리하는 것도 시간이 많이 걸리고 벅찹니다. 그러니 누가 학생부장직을 하려고 하겠습니까? 옛날에는 학생부장은 힘이 세고 강단이 있는 교사가 해야 한다는 편견이 있었는데 지금은 적용되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잘 때리는 교사가 학생부장 적격이었지만 요즘은 오히려 피해 학생이 보복당하지 않게 일을 처리할 수 있는 분이라는 믿음을 학생들에게 심어 주는 영리하고도 사려깊은 선생님이 맡아야 합니다. 정말 학생들이 어려움을 호소하는 데도 무심하게 일을 처리하는 학생부장이라면 더 큰 일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는 사안이 발생했을 경우에는 사회적 이슈가 될 수 있기 때문에 학부모님들이 언론이나 SNS, 변호사, 경찰 등을 적극 이용해서 악의적으로 사건에 접근하는 경우도 매우 많습니다. 이럴 경우 고도의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업무처리 방식이 요구되기 때문에 학생부장의 고충이 오죽하겠습니까? 업무처리 절차에 문제가 생기면 사회적, 법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늘 ‘오늘도 무사히’를 염원하는 것이 학생부장의 운명이기도 합니다.
물론 어떤 학생부장은 학생들을 단속하고, 징계하는 일을 주도하면서 오히려 이상하게도 학생들에 대한 애정과 애착이 깊어지는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학교장은 학생부장에게 늘 고마움과 미안함을 갖을 것 같습니다.
● 책 읽는 소리가 아름다운 학교를 설계하신 선생님
책 읽는 소리가 아름다운 학교/ 그렇게 이름 지어준 교직의 마지막 근무지에서 / 독서교육에 열정과 전문성을 갖춘 선생님을 만난 건/ 나에게도 학교에게도 행운이었네/ 도서관으로 설계되었으나 3학년 면학실로 쓰이던 공간/ 야간이나 휴일에 이용 학생 줄어 안타까워하던 중/ 이제 그곳을 멋진 도서관으로 만들어 보자고 / 의기투합해 열정 쌓아가던 어느 날/ 느닷없이 창문 가득 학생들 스티커가 붙고 / 면학실 철폐 반대 운동이 벌어졌다네
가짜뉴스 편승한 SNS비방에 마음 다치기도 했지만/ 소통하고 설득하고 조정하는 과정 거쳐/ 교육가족들 진심으로 도와준 덕에/ 꿈 너머 꿈 이름에 원두막 정자 마음서재 까지 갖춘/ 명품 학교 도서관을 만들어 냈다네/ 행복한 학생들 북적임으로 주위의 부러움이 넘쳐났다네
잊지 못할 선물이었다네/ 아무리 좋은 비전 학교장이 지녔다 해도/ 앞장서는 선생님 없다면 이루기 힘든 일이라네/ 어떤 공치사도 흔적 남기기도 거부한/ 나랏말 가르치는 임영옥 선생님/ 꿈 너머 꿈 도서관의 품격이라네
포기하지 않은 꿈 너머 꿈/ 만들기 위해 쏟았던 뜨겁고 진지한 열정의 꽃가루/ 오랫동안 많은 이들 나눠먹고 퍼 날라서/ 크고 작은 열매들이 주렁주렁 열리기를
속초에서 처음 만났다네/ 교직의 첫 발령지 그곳에서/ 시를 좋아하는 마음이 다리 되어/ ‘시마을사람들’ 주민으로 시 합평도 열심이었네/ 세월이 두 딸의 엄마로 부장교사로 바꿔 놓았지만/ 선생님은 시마을의 영원한 이장이라네
―「빈 교실 -꿈 너머 꿈」 전문
교장 선생님이 된 후에 ‘책 읽는 소리가 아름다운 학교’, ‘문화가 살아 숨 쉬는 학교’, ‘정보가 강물처럼 흐르는 학교’를 내세웠습니다. 재임 중에 독서교육을 강조하시고 독서풍토 및 독서 교육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불철주야 최전선에서 노력하셨습니다. 독서는 학생들의 스트레스 해소에도 좋고, 청소년들의 정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칩니다. 독서는 훌륭한 사람을 만나는 행위이고, 가장 현명한 상담자와 벗을 만나는 행위입니다. 인격 형성에 독서는 지대한 영양분과 거름과 향기를 공급합니다. 저는 초밥을 무척 좋아하는데 초밥보다도 더 맛있는 것이 독서입니다. 자습실(면학실)과 독서실은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책 읽는 소리가 흐르는 학교는 가장 아름답고 거룩한 학교입니다. 장승진 선생님은 아름답고 거룩한 일을 몸소 하신 분입니다. 꿈 너머 꿈을 마음껏 꿀 수 있도록 도서관 꾸미기와 독서 교육에 헌신하셨습니다. 성자(聖者)와 같으신 분입니다. 독서라는 거름! 독서라는 걸음! 거름 중에 제일 좋은 거름은 독서라는 발걸음! 장승진 선생님은 묵묵히 교육의 발걸음을 옮기면서 독서라는 거름을 뿌려서 교육 현장을 옥토로 만드는 일에 헌신하셨습니다.
● 시인의 길과 교육자의 길 사이에서
많은 사람이 ‘시인이면서 교사인 분은 존경을 많이 받겠다.’고 부러워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떨까요?
고등학교까지는 공동체 의식 함양이 매우 중요한 교육 활동입니다. 삐딱하고 당돌하고 엉뚱한 또래 집단을 형성할 경우 교사의 감시와 훈계의 대상이 됩니다. 또한 제대로 어울리지 못하고 또래 집단에서 따돌림을 당했을 경우에는 매우 심각한 부적응 상황으로 인식합니다.
하지만 글쟁이들의 삶은 어떤가요? 글쟁이들은 스스로 자발적 유폐, 자발적 소외를 지향하고, 홀로 단독정부를 세우며, 단독자로서 혼자의 인생을 유영하는 이상한 사람입니다. 시는 근본적으로 현실 파괴의 언어적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시는 불만의 언어이며 슬픔의 언어에 가깝기 때문에 탈규범적, 탈 영토적입니다.
교사는 학생들을 규범을 준수하는 올바르고 건강한 시민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교사 스스로 사표(師表)가 되고,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다 알다시피 시인은 삐딱한 존재입니다. 시인은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을 의심합니다. 시인은 아프고 가난한 자의 언어을 쓰며, 비판과 해체의 언어를 쓰며, 현실 너머의 이상한 인식과 상상의 언어를 사용하는 당돌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시인이면서 교사인 사람들의 딜레마입니다. 이것이 시인 교사를 이중인격자로 만듭니다. 교육 시, 청소년 시를 쓰게 되면 이런 두 가지의 충돌은 불가피합니다. 교사는 이중인격자의 모습을 노출할 수밖에 없습니다.
돌이켜보면 저는 스승의 노래 구절처럼 제자에게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주신’ 적도 거의 없습니다. 그것은 그저 노랫말일 뿐입니다. 스승은 시대의 사표이거나 삶의 전인격적인 표상이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 무척 답답하고 부담스럽습니다. 인문학적인 측면에서, 특히 시를 창작하는 시인의 측면에서 보자면 참됨과 바름을 가르치기보다는 참됨과 바름을 철저하게 의심하고 저항하면서 사는 것이 더 올바른 가치관을 지닌 민주 시민이라고 가르쳐야 한다고 봅니다. 도덕적인 인간 양성, 미래인재 양성 등은 오히려 허울이고 거짓이라고 외치면서 가치관의 분화와 균열을 내는 것이 진짜 시인이고 진짜 스승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진정한 스승이란 험난한 한 시대를 함께 견디며 함께 아파하며 함께 공유할 어떤 공통분모의 정서를 약간만 마련하는 존재이면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제자를 하늘처럼 사랑하기에는 나는 너무나도 무기력하고 너무나 인격적으로 부족한 교사임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스승과 제자가 서로의 그림자를 함께 꽉꽉 밟아주면서 나란히 걸어가는 존재이기를 바랍니다. 적어도 나는 이렇게 부족한 교사였습니다.
그런데 『빈 교실』은 저의 이런 선입견이나 생각을 깨트립니다. 시인과 교사의 길의 공통분모를 찾습니다. 참된 인간 되기, 연민 의식, 인간이란 무엇인가, 교육이란 무엇인가, 인성이란 무엇인가를 근원적으로 묻고 있습니다. 가치 있는 삶에 대한 진지한 물음과 성찰이라는 면에서 시인과 교사, 시와 교육은 서로 합치됩니다.
안목을 일목요연하게 시적인 언어로 쓴 글을 저는 지금껏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습니다. 또한『빈 교실』은 그동안의 교육시집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교육에 대한 심층적인 식견으로 교육의 모순과 아픈 신경을 예리하게 건드리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촌철살인! 당 시대의 교육의 부당한 현실에 맞서는 시론(時論) 같은 시집, 칼럼 같은 시집, 교단 일기 같은 시집입니다. 시집의 형식을 빌린, 시어의 형태를 빌려 쓴 자서전이며, 교육자로서의 삶의 회고록이며, 자기가 쓴 자신의 평전이며, 반성문이며, 교단 일기입니다. 애정이 없이는 쓸 수 없는 글입니다. 교육계의 큰 어른입니다.
장승진 선생님! 『빈 교실』을 읽으면서 후배 교사로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에게 귀감이 되는 교육시집입니다. 이 시집이 여러 교직에 계신 분들에게도 신신(新新)하고 청량(淸凉)한 자극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 : 다음카페 시와소금 http://cafe.daum.net/poemundertree/1Yyy/171?q=%EB%B9%88%EA%B5%90%EC%8B%A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