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사회의 회복을 지원하다 - 「핵사곤 프로젝트」 후기
전채훈
1.
당사자의 불행과 문제를 막아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당사자가 잘되기 바라는 마음, 응원하는 마음으로 다시 실패하더라도
옆에 있어주는 그것이 사회복지사 역할 아닐까요?
당사자가 맞닥뜨린 불행을 나의 손바닥으로 가려 덜 외롭다고 느끼신다면 조금은 위로가 될까요?
102쪽
일요일 저녁이었다. 지인과 함께 쌀국수 한 그릇을 비우고 있는 사이,
문씨 아저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조문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이라고 하셨다.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힘이 없었다. 슬픔에 젖어 축 늘어진 듯한 목소리였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친구였는데, 이렇게 떠나버렸네요.
나는 죽어도 고기값은 하고(흔적은 남기고) 죽지 그냥은 안 죽을 거예요.
고기값 할 때 선생님 이름 석자는 내가 꼭 기억할게요.”
친구의 자살 앞에 마음이 무너져내린 듯했다.
근래에 문씨 아저씨를 괴롭히는 일들이 연거푸 일어났다.
고시원에서 한 달 만에 퇴거를 통보했다. 만성적인 재정난과 건강 문제는 이즈음 더 심해졌다.
이제는 소중한 친구의 죽음이라니. 켜켜이 쌓인 고통이 그를 무겁게 짓눌렀다.
무어라 드릴 말씀이 없었다. 죽음을 암시하는 듯한 말씀을 들으며 그를 돌이켜 세울 자신이 없었다.
그저 헤아릴 길 없는 슬픔 앞에 겸허히 서는 수밖에 없었다.
“너무 힘드시겠어요...”
그러자 문씨 아저씨가 꾹꾹 참아내던 울음을 터뜨리셨다.
서럽게 토해내는 슬픔이 수화기 너머로 전해졌다.
“내가...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친구였어요... 알겠습니다, 선생님. 전화 끊겠습니다.”
“내일 뵈어요, 내일 아침에 또 연락드릴게요. 내일 찾아뵐게요.”
전화를 끊었다. 문씨 아저씨를 뒤덮은 어둠이 잠시 내 마음을 드리웠다. 잠시였다.
나는 다시 쌀국수에 젓가락을 넣었고 지인의 실없는 위로에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문득 이 모든 일이 너무 기괴하게 느껴졌다.
사회복지사로서 무능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첫째는, 내 실천으로서는 당사자의 삶을 조금도 나아지게 도울 수 없다고 생각할 때다.
하지만 이보다 더 근본적인 무능감이 있다.
당사자가 토로하는 슬픔과 고통에 도무지 연결되지 못할 것 같다는 공감의 무능이다.
마음 같아서는 가슴을 활짝 펼쳐 당사자의 슬픔에 뛰어들고 싶다.
그만이 알 수 있는 눈물의 강에 온몸을 적시고 싶다. 그렇게라도 덜 외로우시게 돕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괴롭게 한다.
그의 고통과 내 안온한 일상 사이에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있다는 사실이 나를 몸서리치게 만든다.
저자의 말처럼 당사자의 불행을 막아주지는 못할지라도, 그 옆에 서서 덜 외롭다고 느끼시게 돕고 싶다.
‘불행이 길도 없이 달려올 때 서로의 눈을 가려주는’ 사람. 그렇게라도 당사자와 함께하고 싶다.
2.
책모임에 돌아온 정 선생님을 회원들이 크게 반겼다.
식사를 안 하시니 더욱 수척해지고 목소리도 힘이 없었지만 정 선생님이 돌아왔다는 의미가 컸다.
회원들은 복귀를 축하하며 진심으로 위로하고 격려했다. 이 일로 서로에게 더 관심 가지고,
서로를 더 알게 하는 계기가 됐다.
127쪽
“민들레는 요즘 어떻게 지내나?”
책모임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바이올렛 님이 물으셨다.
민들레 님은 책모임에 한 번 참여하신 분이다.
그 한 번의 참여가 다른 회원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던 것 같다.
“술에 취해 있지만 않으면 저렇게 좋은 사람이었네.”
민들레 님이 동네에 오래 머무는 때는 대개 술을 드시고 뻗어 있을 때다.
몸이 좋지 않으셔서 한 병만 드셔도 금방 쓰러지신다.
이웃들이 본 민들레는 늘 어딘가 혼이 빠진 모습이었을 거다.
그랬던 민들레가 어느 날 책모임에 나오더니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의 이야기에서 느껴진 건 삶에 대한 자괴감과 후회였다.
“내가 사람을 잘못 만났어요.”
민들레의 사연을 알고 있는 이라면 그 말에 백 번이고 공감할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무시해요.”
이 말이 얼마나 아픈 뜻을 담고 있는지도 알아챌 것이리라.
바이올렛은 그런 민들레에게 손을 내밀었다.
동화 <강아지똥>을 읽은 다음이었다. 바이올렛의 이야기가 시처럼 음악처럼 공간을 휘감았다.
“우리가 살아온 인생이 참 힘들었잖아요, 강아지똥처럼 밑바닥이잖아요.
그래도 이 책을 봐요, 강아지똥이 결국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잖아요.
우리 인생에 자부심 품고 살아요.”
이 말이 민들레에게 어떤 거름이 되었을지는 모르겠다.
다만 다음 모임에도 참여하겠다는 말로 이 모임에서 얻은 따뜻함을 표현하셨다.
책모임에는 그런 힘이 있다.
“서로에게 더 관심 가지고, 서로를 더 알게 하는” 곳.
물론 민들레 님이 정 선생님처럼 책모임에 복귀하는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매번 안내해 드리지만, 때로 그분을 위해 일정을 조정하기까지 하지만,
민들레는 모임 날만 되면 동네를 떠나 계신다.
문은선 선생님이 김 사장님을 오래도록 기다려주신 것처럼,
나도 민들레 님을 끝까지 기다리고 싶다.
우리는 언제라도 민들레가 들어와 뿌리를 뻗을 공간을 열어놓고 있다.
바이올렛 님의 깊은 바람이 민들레 님께 닿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3.
사회사업이 매력적인 이유는 한 사람을 변하게 도우면서 동시에 지역사회가 변하게 돕기 때문이다.
샘물 님을 도운 사례는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일반 복지 수단을 이용하면서 풍요로운 일상을 만드는 것이기도,
정신장애인을 배제하고 있는 사회를 바꾸는 일이기도 하다. 25쪽
진달래 님이 처음 오신 개나리 님에게 남산도서관의 재미를 소개해주셨다.
“여기 도서관 들어가면 엄청 재밌어. 우리 지난번에는 도서관에서 모임 했었어.”
진달래 님은 벌써 도서관을 ‘재밌는 공간’으로 여기고 계셨다.
사실 책모임이 아니었다면 우리 회원들이 지역의 도서관에 가볼 일이 없었을 테고,
이곳에 재미난 구경거리가 많다는 걸 알기도 어려웠을 거다.
실제로 바이올렛 님은 자주 도서관 근처를 산책하러 다니셨지만
한 번도 그 안에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고 하셨다.
그건 단지 도서관에 관심이 없어서, 혹은 언덕길을 올라갈 힘이 없어서일지도 모르지만,
은밀하게 존재하는 경계선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 맥락에서, 쪽방 주민이 지역의 여느 사람이 이용하는 공공장소에 들어가 일상을 보낸다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다양한 사람과 소통한다는 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활동 반겨을 넓힘으로써 보이지 않는 구분선을 무력화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지역사회 복귀’라 하기도 하지만 이 표현은 실재를 정확히 담아내지 못한다.
쪽방 주민이 지역사회로 ‘복귀’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원래부터 지역의 일원이었다.
차별의 선으로 구획된 지역에서 자주 배제되었을 뿐이다.
사회복지사의 일은 그렇게 갈라져 깨져버린 지역사회가 온전한 모습으로 ‘회복’하게 돕는 것이다.
https://cafe.daum.net/coolwelfare/OX67/217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덜 외로우시게 돕고 싶다. 끝까지 기다리고 싶다. 활동 반경을 넓힘으로서 보이지 않는 선을 무력화...
이 말에 공감해요.
각자 선택한 곳에서 잊지 않고, 놓지 말아야 할 것들을 잘 잡고 가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