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로드 | 밀리의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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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운명
그녀는 너무 어이가 없었지만 일단 그 자리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모두 어려운 가정형편과 어린 두 여동생 때문이었다.
가난한 집안의 장녀로 태어난 숙명적인 결과였다.
하지만 베르베르에게 이미 돌아선 마음을 도로 되돌리기는 쉽지 않았다.
한때 그를 사랑했지만,
어제 일로 그녀는 베르베르에게 완전히 마음이 떠났다.
그때, 엄마가 말을 이었다.
“베르베르의 삼촌을 만나야겠어. 그가 삼촌 집에 머무는 게 맞지?”
“엄마!”
“얘! 이런 일은 어서 서둘러야 하는 거야. 영주님 마음이 변하기 전에. 그런 사람들은 언제든 마음이 변할 수 있거든.”
사정을 모르는 엄마는 베르베르의 삼촌을 만나겠다며 그길로 집을 나섰다.
그녀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에서 엄마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그게 그녀의 운명이었다.
그날 이후, 로테는 몇 날 며칠을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침대에서 울고 또 울었다.
그동안 평소와 다름없이 창밖으로 베르베르의 세레나데는 계속되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별다른 감흥이 생기지 않았다.
멍청한 그는 엄마, 아빠의 느닷없는 결혼 승낙에 입이 쩍 벌어져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로테가 조금 아파. 그러니 결혼식 때까지 만남을 자제해 줘.”
엄마의 이 말만 믿고 베르베르는 돌아갔다.
찌질한 놈!
드디어 베르베르와 결혼 날짜가 잡혔다.
그 말은 그녀가 영주와 초야(初夜)를 보내는 날짜가 다가왔다는 말이었다.
* * *
결혼식 전날, 그녀는 집에서 예쁘게 꾸민 후 영주가 보내 준 마차에 올랐다.
영주의 성은 화려했다.
밤이었지만 성 전체와 내부에 불이 켜져 있었다.
마차가 도착하자 집사가 마중 나와 있었다.
“오! 새 신부, 로테여!”
그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
욱!
구역질이 났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의 안내로 성안으로 들어가자 화려한 정원이 나왔다.
정원 둘레에도 불이 켜져 있었다.
집 안은 더 어리어리했다.
벽면에는 그림이 걸려있었고 곳곳에 장식한 꽃이 꽂혀 있었다.
“로테! 이리 꾸미니 정말 예쁘구먼. 잘 왔어. 영주님이 무척 좋아하실 거야.”
집사는 그녀를 식당으로 안내했다.
“우선 맛있는 음식부터 먹도록 해. 밥을 먹고 난 후 시녀들이 목욕 시중을 들 거야. 그 후엔 머리 단장과 몸단장이 있을 거고.”
집사는 기다란 탁자 정면 쪽에 그녀를 안내하곤 의자를 빼주었다.
평소에 얼마나 많이 한 행동인지, 매우 능숙했다.
“고마워요. 그런데 식사는 나 혼자 하나요?”
“그래, 영주님은 손님이 와서 따로 하셔. 그러니 천천히 들도록 해요.”
긴 테이블에 홀로 앉아 저녁밥을 먹는다 생각하니 한편으로 잘 되었다 싶었다.
영주와 마주 앉아 밥을 먹는다면 그게 목구멍으로 넘어갈 턱이 없었다.
집사는 연방 시녀들에게 잔소리하며 그녀의 곁을 지켰다.
“앙드레! 음식 빨리 내어 와. 로테 아가씨가 시장하시잖아.”
그녀는 집사가 그녀더러 아가씨, 라고 지칭한 것에 새삼 놀랐다.
‘뭐, 어쨌든 기분 나쁘진 않네.’
잠시 후 음식이 나왔는데 그녀는 까무러칠 뻔하였다.
수프와 샐러드, 그리고 갓 구운 빵과 각종 과일을 나왔다.
놀라운 것은 후추가 식탁 중앙에 있다는 것이다.
헉!
후추는 당시에 무척 비싼 향신료였다.
그래서 귀족이 아니면 일반 평민은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거였다.
로테는 이 아무것도 아닌 사치품에, 자신의 마음이 흔들리는 게 불편할 따름이었다.
휴우~.
8. 영주의 성
집사가 의아한 듯 물었다.
“왜 음식이 마음에 안 들어?”
“아뇨. 너무 훌륭해서.”
그녀는 갓 구운 빵을 입에 넣다 그만 눈물이 나올 뻔했다.
중세 시대 농민들은 대다수가 허름한 오두막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녀의 집만 예외로 오두막이지만 이층집이었다.
가축들도 집 안에 들어와서 살았는데, 그렇게 하면 집이 좀 더 따뜻했다.
가축의 체온 때문이었다.
로테의 집처럼 일반적인 농민의 아내는 하루에 두 번 정도 식사를 준비했다.
오두막집에는 작은 구멍이 뚫려 있어서, 그 구멍으로 연기가 나갔다.
연기가 잘 빠져나가지 않기 때문에 집 안의 공기는 늘 탁했다.
빵은 보통 밀에 메밀을 섞어서 만들고 수프는 물처럼 멀겋게 끓여서 자주 먹었다. 곡식이 없을 때는 나무껍질을 먹거나 씨앗을 구워서 먹었다.
고기는 생선을 주로 먹었다.
사냥은 귀족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야생 동물을 먹을 수는 없었다.
가끔은 참새나 개구리를 잡아먹었고, 고양이도 먹었다.
농민들은 잘 먹지 못해서 몸이 약했고, 전염병이 돌면 가장 먼저 죽곤 했다.
‘그런데 다 이게 뭐람? 난 또 여기서 뭘 하고 있고 ….’
로테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에라, 모르겠다. 여기, 포도주 없어요?”
그녀는 이왕 이렇게 된 것, 술도 한잔 곁들이고 싶었다.
그녀의 요구에 집사가 깜짝 놀란 모양이었다.
“와인? 그래, 그래. 뭐로 줄까. 레드? 화이트?”
그녀는 집사의 말에 의아했다.
포도주는 모두 레드이지, 화이트란 게 뭐란 말인가.
그러자 집사는 알았다는 듯 빙긋 웃었다.
“화이트로 줄게. 하긴 농민이 화이트를 안다는 건 희귀한 일이지.”
그때 그녀는 포도주의 종류 중 화이트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맛있지?”
“네, 목에 척, 하고 감기네요. 부드럽고 달콤하면서 혀끝이 타는 것 같아요.”
“그래. 오늘 밤 영주님만 잘 모신다면야 내가 내일 아침에 한 궤짝 줄 수도 있어. 그러니 오늘 잘하라고.”
“알았어요.”
그렇게 대답하면서 좋은 음식과 포도주를 마셨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들과 농민들의 삶의 엄청난 괴리 때문에 너무 괴로웠다.
오마르 공화국의 귀족, 즉 영주와 기사들은 성에서 살았다.
낮에는 일반적인 생활을 했고, 밤에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성을 환하게 밝히려면 돈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귀족 여성들은 머리를 단장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처녀들은 치렁거리는 긴 머리를 리본으로 묶었다.
결혼한 여성들은 두건을 쓰고 그 위에 관을 썼다.
식사는 아침에 예배를 드리고 나서 한 번, 늦은 오후에 한 번 했다.
기사는 싸움터에 나가지 않을 때는 고기와 포도주를 곁들인 식사를 했다.
하지만 싸움터에 나갈 때는 빵으로 끼니를 때웠다.
오후에는 이야기를 나누며 긴 식사를 했는데 주로 수프와 샐러드, 그리고 빵과 과일을 먹었다.
음식에는 후추를 뿌렸다.
자기가 부자임을 자랑하고 싶은 영주들은 포도주에까지 후추를 뿌려 먹기도 했다.
후식으로는 케이크나 과자, 치즈 같은 단 음식을 먹었다.
“벌써 다 먹었어? 왜? 더 먹지 않고.”
집사는 그녀가 의외로 많이 먹지 않자 놀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 불평등한 신분 구조를 생각하느라 입맛이 없었다.
“많이 먹었어요.”
“좋아. 그러면 일단 목욕부터 해. 앙드레! 얼른 욕조 대기해.”
‘목욕? 그런데 욕조가 뭐람?’
집안에 따로 욕조가 없던 로테는 살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9.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역겹다
‘뭐야?’
놀랍게도 옆 방에 혼자 쓰고도 남을 욕조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시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호사를 누렸다.
생전 처음 우유로 거품 목욕을 하고, 몸 구석구석에 올리브기름을 발랐다.
“로테 아가씨! 이제 끝났어요. 이 옷으로 갈아입으세요.”
시녀가 가지고 온 것은 잠옷이었다.
레이스가 여러 개 달리고 장미가 그려진 예쁜 잠옷이었다.
“와우! 너무 예뻐요.”
시녀는 탄성을 자아냈지만, 그녀는 그리 기쁘지 않았다.
“이젠 어디로?”
“영주님의 침실이죠. 따라오세요.”
시녀는 타올을 팔에 걸친 채 그녀를 영주의 침실로 안내했다.
그녀의 가슴은 이때부터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영주의 방이었다.
똑똑.
시녀가 문을 두드리자 즉시 문이 열렸다.
그런데 실내는 밖보다 훨씬 어둡고 침침했다.
시녀는 돌아가고 그녀는 혼자 입구에 어색하게 서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훅, 하고 불이 들어왔다.
그러면서 실내가 훤해졌다.
“오! 로테! 잘 왔소. 하하.”
그놈의 영주였다.
그 역시 앞가슴이 드러나 보이는 잠옷을 입고 있었다.
보나 마나 놈은 속옷을 입지 않았을 것이다.
뚱뚱한 몸에 콧수염을 기른 그를 보니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다.
그는 전주가 있었는지 약간 횡설수설했다.
“내가 그대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그대는 모를 것이오. 그래, 처음엔 나를 거부했다는데 이유가 뭐지?”
그녀는 역겨웠지만, 일단 참기로 했다.
“그럴 리가요. 제가 감히 영주님을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 그렇다면 집사 놈이 날 더욱 애타게 하려고 선의의 거짓말을 한 건가?”
“그런 모양이어요.”
“좋아. 아주 좋아. 그건 그렇고 술은 뭐로 할 텐가? 우리의 황홀한 하룻밤을 위해 축배를 들어야지.”
‘황홀한 하룻밤? 미친 거 아임?’
그런데도 그녀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고분고분했다.
“영주님 마시는 거로 하겠습니다.”
“알았네. 우선 이리 앉지.”
그는 그녀를 위해 손수 중앙에 있는 테이블 의자를 빼주었다.
잠시 뒤 그는 위스키 두 잔을 가져왔다.
그녀는 그가 독한 술을 가져온 게 다행이라 여겼다.
“건배!”
영주가 축배사를 건네자, 로테도 살짝 기분을 맞추어 주었다.
“좋아요! 먹고 죽어요!”
“O.K. 우리의 밤을 위하여!”
잠시 후에 있을 황홀한 밤을 기대했는지 그는 흥분하여 위스키 한 잔을 입에 다 털어 넣었다.
하지만 그녀는 입술만 축였다.
거기에다 아부도 곁들였다.
“멋져요. 전 술 잘 마시는 남자가 좋아요.”
“그~으래?”
영주의 입가엔 벌써 침이 흘렀다.
“그럼요. 박진감 넘치고 남자다워 보이잖아요.”
“그럼, 내가 한 잔 더 할까?”
“물론이죠.”
그는 어리석게도 더 큰 잔으로 위스키를 가득 가져왔다.
이어 나중에는 아예 병을 테이블에 가져왔다.
술에 취한 놈은 가관이었다.
자신이 어떻게 해서 오마르 왕국을 지배하는 영주가 되었는지 자화자찬하는 데만 무려 한 시간을 보냈다.
‘어떻게 되긴? 제 아비가 영주라서 그리된 거지.’
로테는 그의 시시껄렁한 말에 속으로 비웃었다.
어쨌든 그 한 시간 동안 그가 마신 위스키는 큰 잔으로 8잔이 되었다.
그녀는 묵묵히 그의 말을 들어주면서 기회만 기다렸다.
‘그래, 많이 처먹어라, 이놈아.’
하지만 그는 의외로 술이 셌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2단계 작전에 돌입했다.
그건 퀴즈 게임이었다.
놈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뭐? 그러니까 퀴즈를 내서 답변을 못 하면 벌주를 마신다? 나는 큰 잔, 그대는 술 대신에 한 꺼풀 옷을 벗고?”
“네.”
갑자기 놈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