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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23. 묵상글 들 (부활 6주 토요일-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청한다는 것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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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23.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청하지 않았다.(요한 16, 24)
긴 코로나 19
바이러스 강(江)을
건너가고 있는
우리들 시간입니다.
아무리 용을 써도
하느님께서
도와주지 않으시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우리들
생명입니다.
단 한순간도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져나갈 수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우리들에게
청하는 기도를
말씀하십니다.
삶의 본질은
기도의 관계입니다.
주고받는 것이
기도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살아야 할지를
기도로
가르쳐주십니다.
분명 우리를
도와주시는
생명의
기도입니다.
이기심만 있고
기도가 없는
우리들에게
주님과 함께
손 잡고 가야할
기도를
일깨워주십니다.
주님, 제발
코로나 19를
종식시켜 주소서!
라고 간절히
기도로 청합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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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23. 부활 제6주간 토요일 /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오늘의 묵상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많은 것을 청하고 누립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름’은 존재 자체를 가리키는 표징이었습니다.
상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 상대를 나의 삶에 대하여 함께 고민하고, 삶을 나눌 친구이자 가족으로 여기는 초대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인가 청하는 것도 그분의 존재에 나의 존재를 살며시 포개어 놓고 서로를 생각하고 나누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먼저 예수님의 삶을 좇고, 그 삶이 지향하는 가치를 되새기며,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셨는지 되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 하느님과 온전히 하나 되어 말씀하셨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힘이 있었던 이유는 하느님 아버지의 권위가 예수님을 통하여 확연히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친교는 이 세상에 구원의 소식이 널리 퍼져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뜻이 곧 우리 신앙인의 뜻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이심전심’이라고 할까요?
내 마음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너의 마음 안에 함께할 내 마음이 가장 아름답고 고귀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돌아가시듯, 우리의 삶이 오롯이 하느님을 향할 때,
우리는 우리만의 청이 아니라 이 세상과 그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받들고 실천하는 것으로 우리의 청을 가꾸어 나갈 것입니다.
-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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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23. 부활 제6주간 토요일/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도연명은 귀거래사(歸去來辭)라는 시(詩)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를 돌아 나오고, 날기에 지친 새들은 둥지로 돌아올 줄 안다. 저녁 빛이 어두워지며 서산에 해가 지려 하는데, 나는 외로운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서성이고 있다. 동쪽 언덕에 올라 조용히 읊조리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는다. 잠시 조화의 수레를 탔다가 이 생명 다하는 대로 돌아가니, 주어진 천명을 즐길 뿐 무엇을 의심하고 망설이랴.” 새는 하늘을 날지만 결국 둥지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구름은 흘러가지만 결국 비가 되어 땅으로 돌아온다고 합니다. 참 아름다운 시입니다. 노자도 도덕경(道德經)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뿌리로 돌아간다. 소박함으로 돌아간다. 어린아이로 돌아간다. 만물의 구별이 없는 상태로 돌아간다. 무극으로 돌아간다.” 직선적인 서양의 사상으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순환하는 동양의 사상으로는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성장과 발전을 축으로 이루어지는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입니다. 자비와 연민으로 이루어지는 신앙의 세상에서는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살았던 천상병은 귀천(歸天)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그는 행복(幸福)에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나는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다. 아내가 찻집을 경영해서 생활의 걱정이 없고 대학을 다녔으니 배움의 부족도 없고 시인이니 명예욕도 충분하고 이쁜 아내니 여자 생각도 없고 아이가 없으니 뒤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집도 있으니 얼마나 편안한가. 막걸리를 좋아하는데 아내가 다 사주니 무슨 불평이 있겠는가. 더구나 하느님을 굳게 믿으니 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분이 나의 빽이시니 무슨 불행이 온단 말인가!” 성공, 명예,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운 시입니다. 그러나 부끄러움을 알고, 연민을 느끼고, 겸손하게 물러날 자리를 아는 사람은 공감할 수 있는 시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는 사도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도들은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고, 그들의 삶을 통해서 신앙을 증거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도들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놀라운 축복을 주셨습니다. 황무지에서 아름다운 꽃이 피듯이, 믿음의 결실들이 아시아의 각 지방에서 맺어졌습니다. 사도들은 돌아갈 곳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한국 교회의 복자와 성인들 역시 신앙을 증거한 사도였습니다. 그분들의 이야기는 바로 한국 교회의 ‘사도행전’입니다. 그분들도 돌아갈 곳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피를 흘려야 하는 박해의 시기를 지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 어느 박해의 시대보다 더 커다란 배교의 유혹에 직면해 있습니다. ‘물질 만능주의와 자본주의’는 하느님의 자리를 넘보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자발적으로 물질과 자본의 노예가 되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다원주의와 이성 중심의 생각’은 유일하신 하느님을 상대화하기도 합니다. 우리들은 이 시대에 새로운 ‘사도행전’을 만들어 가야 할 것입니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돌아갑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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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23. 새벽을 열며. 부활 제6주간 토요일. 빠다킹신부님.
갑곶성지 초창기에 난방을 고민하다가 어렸을 때의 꿈을 떠올리며 화덕 난로를 설치했습니다. 어렸을 때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장작을 때는 벽난로가 얼마나 멋져 보였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벽난로는 설치비가 만만치가 않아서 근처 철공소에서 제작한 화덕 난로를 사서 설치했습니다. 무엇보다 성지 뒤에 산이 있어서 나무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나중에 그 산이 우리 산이 아니기에 함부로 나무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 정도로 무식했던 저였습니다).
설치 후에 할 일이 생겼습니다. 난로에 넣을 수 있는 크기로 나무를 잘라야 했습니다. 창고를 보니 손도끼가 있어서, 열심히 이 손도끼로 장작을 팼습니다. 손에 물집이 잡힐 정도로 힘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애쓰는 모습을 본 순례를 오신 형제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부님, 무겁고 큰 도끼를 써야 편합니다.”
내 손에 딱 맞는 손도끼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데, 크고 무거운 도끼를 어떻게 다룰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형제님은 “장작은 도끼가 패는 것이지, 사람이 패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그저 거들 뿐이지요.”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철물점에서 큰 도끼를 사온 뒤에 이 말씀의 뜻을 알 수 있었습니다. 장작은 도끼가 패는 것인데, 제가 패는 것이라는 생각에 그 고생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 삶도 그렇지 않을까요? 나는 그저 거들 뿐인데,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면서 쓰지 않아도 될 힘을 쓰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것을 다하십니다. 우리는 그저 옆에서 그분을 거들 뿐입니다. 이러한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교만의 길에서 벗어나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이 겸손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래서일까요?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것을 중심으로 기도합니다.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청하는 것’은 우리의 복된 삶과 구원에 관계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의 주인으로 주님께 모든 주도권을 맡기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기도를 바친다면 주님께서는 분명히 들어주십니다.
우리가 청하는 것을 주신다는 주님의 말씀은 아버지와 아들의 동등함을 드러내는 것을 암시합니다. 청하는 이들의 기도를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리스도는 사람이시기에 우리를 위해 중재하신다고 할 수 있으며, 한편으로 아버지와 본질이 같으시므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 주도권을 맡기는 기도를 바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역할은 주님을 거들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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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달리게 하는 것은 들판이 아니라 들판에 대한 상상(이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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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식으로든 진실로 하든…. 나는 그 일로 기뻐합니다.
아프면 아프다 했지/ 슬프면 슬프다 했지/ 화나면 화를 냈지.
나 그렇게 살았었지,/ 내 본능이/ 원하는 대로/ ...
힘들면 미소짓지/ 서러우면 허허 웃지/ 수틀리면 하하하 호탕하게
점점 가식이 늘어갔지./ 내 안의 그리스도/ 바라시는 대로/ ...
기쁨이 넘쳐 눈물짓고/ 은혜에 겨워 흐느끼고/ 감사에 벅차 통곡하고
이런 날도 오더라./ 본능과 가식과 꿈이/ 한통속이 되는 때가 오더라/ ...
차동엽 신부님의 유고시집에서 뽑은 시입니다. 병세가 깊어지면서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그런데도 그토록 열정적으로 사셨습니다. 많은 글을 쓰시고, 당신을 부르는 곳이라면 마다하지 않으시면서 강의하셨습니다. 신부님의 이 열정에 부끄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 시를 읽으며 신부님 힘의 근원은 주님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주님이 있기에 희망이 있고, 그 희망으로 기적 같은 삶을 사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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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23.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부활 6주 토요일-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청한다는 것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한다는 것.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이 아버지께로 돌아가심을 분명히 하십니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이 말씀을 요한 바오로 2세 칙서 <Vita Consecrata축성생활>에서는
'A Patre, Ad Patrem'라는 한마디 말로 요약을 합니다.
영어로는 'From the Father to the Father'라는 뜻이고
우리말로는 '성부에게서, 성부께로'라는 뜻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여정은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대로
아버지에게서 와서 아버지께 돌아가는 여정이라는 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인생 여정을 마치시면서,
또 우리를 위한 구원 여정을 마치시면서 제자들에 이렇게 당부합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주실 것이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제자들을 두고 떠나면서 진한 애정을 표하는 말씀이지요.
내가 비록 죽을지라도 너희와 나의 관계는 끝장이 아니니
내가 죽고 나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 나를 봐서라도 너희 청을 들어주실 거라는 얘기지요.
이는 부모가 돌아가시면서 이제 내가 없으니
내가 직접 너희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없지만
내 이름으로 청하면 너희 청이 가납될 거라는 얘기와 같은 거지요.
여기서 제가 감히 주님 말씀에 딴지 거는 것은 아니고, 정확히 짚어 본다면
진정 주님 이름으로 청하면 하느님께서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십니까?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라고 하지만
옛날에는 오늘 주님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라고
우리의 모든 청원 기도 끝에 덧붙여 기도했는데
과연 하느님께서 다 들어주셨습니까?
안 들어 주셨다고 생각하는 분이 많을 것이고 또 실제로 그렇습니다.
제가 자주 얘기했듯이 하느님께서 아무 청이나 다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저 사람 죽여주세요.'라고 청하면
아무리 주님의 이름으로 청하여도 하느님께서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면
예수님의 이름에 먹칠하는 그런 청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기주의적인 청은 안 되고 사랑의 청은 된다는 말이며,
애청은 되고 욕청은 안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욕청은 욕심부리는 청이라는 뜻으로 제가 만들어낸 말인데
그러니까 애원하는 청은 되지만 욕심부리는 청은 안 된다는 거지요.
그러므로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아예 청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는 더더욱 청하지 않겠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에 청한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청은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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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23.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부활 6주간 토요일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용기를 북돋워 주시고, 자리를 내어 주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요한 16,23).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좀 더 거리낌 없이 하느님께 다가가도록 해 주십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곧 떠나시면,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던 예수님의 행보를 이어받아 세상에 빛이 되어야 할 터이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와의 거리가 제법 좁혀진 듯 보이기는 하지만, 종교 지도층의 가르침과 율법주의의 영향으로 아직 하느님은 보통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멀고도 두려운 존재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요한 16,26-27).
완전한 신이시면서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님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로 오셨습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하느님의 백성이었으면서 여전히 하느님과 서먹하고 데면데면한 사이로 평행선을 걸으며, 하느님이 무엇을 바라시는지,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그분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여전히 무관심하고 무지한 이스라엘에게 직접 아버지의 뜻을 들려 주시고 보여 주시기 위함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서서 각각의 관계를 가로막거나 독점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희생제사로 둘 사이를 단단히 엮어 주시고는, 오히려 겸손히 물러나시지요.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느님을 저 위 하늘이나 성전 깊숙한 지성소나, 아니면 두꺼운 율법 두루마리 안에 모셔두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아버지께서 그런 곳에 밖에 계시지 않는다면 감히 법접할 수 없이 두려운 하느님과 죄투성이 인간의 거리는 영영 좁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직접 사람 냄새 나는 아버지를 보여 주셨지요. 용서와 자애가 넘치는 자비의 아버지, 함께 먹고 마시고 울고 웃는 먹보요 술꾼인 아버지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두려워하지 말고 그런 아버지께 다가가라고, 청하라고 등을 두드려 주십니다. 바로 그 아버지가 너희를 직접 사랑하시니 주저하지 말고 다가가도 된다고 하십니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요한 16,24).
이제는 예수님 당신이 굳이 나서지 않으셔도,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당신이 떠나셔도 아버지와 우리의 회복된 관계는 다시 무너지지 않을 것임을 확신시켜 주시는 겁니다. 스스로 무엇을 바라는지도 모르는 가련한 우리 안에 성령께서 일깨워 주시는 것을 우리는 청할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성령의 탄식과 함께 청하는 바를 기꺼이 들어 주실 겁니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요한 16,24).
우리의 바람과 하느님의 바람이 일치할 때, 좀 더 정확히 말해 우리가 성령과 함께 청하는 바와 아버지의 뜻이 일치한다는 증거는 충만한 기쁨입니다. 우리의 기쁨이 곧 아버지의 기쁨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초대교회 안에 등장한 여러 인물들의 활약상이 펼쳐집니다.
"바오로는 ... 다시 길을 떠나 ... 차례로 거쳐 가면서 모든 제자들의 힘을 북돋아 주었다"(사도 18,23).
프리스킬라, 아퀼라와 함께 에페소로 간 바오로는 얼마 후 그들을 에페소에 남겨 두고 그곳을 떠나 그간 선교했던 지방들을 다니며 제자들을 격려합니다. 예수님께서 지상 생활을 마치고 떠나셨듯, 바오로도 줄곧 신생 교회의 형제들 곁에 머무를 수만은 없는 노릇이니까요. 힘을 북돋아주고 격려하며, 기대와 신뢰를 아낌없이 쏟아부어 주는 것은 홀로 뒤에 남겨질 이들을 위한 사랑입니다.
"한편 아폴로라는 어떤 유다인이 에페소에 도착했는데"(사도 18,24)
바오로의 빈 자리에 아폴로가 등장합니다. 독실한 유다인이면서 주님의 길을 배워 알고 있던 그는 달변가인 데다 성경에 정통한 담대하고 열정적인 인물입니다. 이만큼만 봐도 확실히 하느님께서 준비시킨 사람이라는 걸 알겠는데, 마침 프리스킬라와 아퀼라가 그의 빈 곳을 찾아 보완해 주니, 그는 더욱 공공연하고 확고히 주님의 말씀을 전하며 신자들을 도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오로가 떠남으로써 아폴로 역시 초대 교회의 선교와 신앙 구축에 기여하게 되었지요. 이는 어쩌면,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제자들(우리) 사이를 엮어 주시고는 떠나셔서 우리가 아버지를 더욱 긴밀히 신뢰하고 사랑할 길을 터 주신 것의 유비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아버지의 뜻은 비단 한 인물만이 아니라 여러 부족하고 뒤늦은 이들을 통해서도 움직이니까요.
승천하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기쁨 충만한 주님의 현존 상태에서뿐만 아니라 막막하고 고독한 주님의 부재 상태에서도 하느님과의 끈을 놓지 않도록 준비시켜 주시는 겁니다.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사랑하는 벗님,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동요하지도 말고 주님 현존과 부재의 리듬 속에서 묵묵히 신앙과 사랑의 길을 걸읍시다. 그분이 곧 떠나실 것이고, 그리고 또 다시 오실 겁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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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23.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부활 제6주간 토요일>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요한16,28)
'떠나감!'
내일은 '주님승천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계시면서 아버지의 일을 완수하시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신 것을 기억하는 큰 날입니다.
예수님의 고향은 아버지의 품이고,
이 세상에서의 삶은 아버지의 품인 영원한 삶으로 넘어가는 하나의 지나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모든 일을 완수하시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느낄 수 있는 예수님의 마음을 바라봅니다.
얼마나 기쁘고 마음 뿌뜻하셨을까?
비록 한없이 부족한 제자들과 우리를 놓고 떠나가시니 마음 한편 안쓰러움도 가지고 계셨겠지만, 십자가 죽음이라는 본질사명을 완수하시고 떠나가시니...
우리도 때가 되면 언젠가 예수님처럼 이 세상을 떠나 하느님 아버지께로 갑니다.
누구나 예외없이 모두가.
떠날 때가 기쁘고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천상병 시인이 '귀천'(歸天)이라는 시(詩)에서 노래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도 떠나갈 때 소풍 같은 이 세상에서의 삶이 참으로 아름다웠더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귀천'이라는 시입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이 세상에서의 모든 것은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그 좋은 돈도 지나가고,
권력과 명예도 지나가고,
건강도 지나가고,
기쁨과 고통도 지나가고,
행복과 불행도 지나갑니다.
사람과의 관계도 지나가고, 사랑도 지나갑니다.
지나가는 것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영원한 것에 더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지혜로운 자(者)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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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23. 이영근 신부님. 청하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에 충만해질 것이다.”(요한 16,23-24)
오늘 <복음>인 고별담화의 마지막 부분들은 이미 하신 말씀들을 다시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만큼 중요하기에 다시 강조하여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기도’에 대한 말씀과 ‘예수님의 기원과 목적지’에 대한 말씀은 그만큼 중요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기도’에 대한 말씀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청하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에 충만해질 것이다.”(요한 16,23-24)
이 말씀에서 우리는 기도의 네 가지 요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곧 “아버지께 구하는 것”이란 말씀은 기도의 본질을,
“내 이름으로”라는 말씀은 기도의 조건을,
“무엇이든지 들어주실 것이다”라는 말씀은 기도의 특권을,
“기쁨에 넘칠 것이다”라는 말씀은 기도에 대한 약속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를 좀 더 보면, 첫째, “아버지께 구하는 것”이란 말씀은 기도의 본질이 ‘아버지 하느님과의 친교’임을 말해줍니다. 궁극적으로 기도는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를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는 이렇게 규명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성령과 하나 되어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와 이루는 사랑의 친교이다.”(2615항)
둘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씀은
기도의 조건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기도함이요,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함이요,
예수님의 의화에 힘입은 아버지의 자녀로서 기도임을 말해줍니다.
곧 기도는 본질적으로 예수님과 함께 아들로서 드리는 ‘자녀의 기도’임을 밝혀줍니다.
셋째, “무엇이든지 주실 것이다”라는 말씀은 기도의 특권이 구하면 받을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주겠다.”(요한 14,14)는 말씀입니다.
넷째, “기쁨에 넘칠 것이다”라는 말씀은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호의로 우리에게 기쁨이 선사된다는 기도에 대한 약속입니다.
곧 당신을 만나 뵙게 되어,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되고, 기쁨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또한 우리의 기도를 점검하게 해 줍니다. 특히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해본 적이 없다.”(요한 16,24)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기도를 비춰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예수님과 일치하여’ 기도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또한 무엇보다도 우선,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기도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것도 온갖 것을 다 장만하시고 하염없는 사랑으로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요한 16,24)
주님!
이제야 겨우 알아듣습니다.
제 힘으로 살아 온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뜨거운 기도가 위태로운 나를 이끌어 왔다는 것을!
그 애틋한 기도가 있어, 휘청거리면서도 살아있다는 것을!
그 기도를 들어주시는 주님의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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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23. 부활 6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믿고 바라고, 믿고 감사하고, 믿고 기뻐하고, 믿고 사랑하자! 그냥 입으로 하는 기도가 아니라 믿음으로 ‘되는 기도’, ‘열매를 맺는 기도’를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요한16,2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이들의 기도는 다 받아들여지고 그래서 기쁨이 충만해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믿는 이들의 기도라는 말에는 주님의 뜻에 맞는 청원이라는 뜻이 전제되고 있습니다. 주님의 뜻에 맞기만 하면 다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헛된 기도를 하지 않기 바랍니다. 많은 경우 주님께 매달린다고 하면서도 내가 원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청하고 있음을 부끄러워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통하여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합니다. 그 때 기쁨이 충만해질 것입니다.
토마스 아 겜피스는
“주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는다면 무슨 좋은 일이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면 문제될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과 함께하면서 가난할지언정
주님을 떠나 부요해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이 세상에서 순례자의 길을 걸을지언정
주님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곳이 천국이요,
주님을 떠난 그 자리가 죽음이며 지옥입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바라는 모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부르짖으며 마음으로부터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외에 저를 도와줄 이 아무도 없습니다.
믿고 의지할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우리도 간절한 기도를 하되 믿음으로 열매 맺는 기도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이는 "기도는 오아시스 없는 사막을 가로지르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주님과 함께하면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하여!’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구하는 곳에 그 이름이 사용되어야 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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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23.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예닮의 여정
-청할 것은 단 하나 ‘사랑’뿐이다-
지난 토요일부터 내일 주님 승천 대축일 주일까지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찬미받으소서”회칙 반포 5주년 기념 주간입니다. 교황님의 홈페이지를 여는 순간, “창조물의 복음은 그의 의미를 여는 열쇠다”라는 제하의 “찬미받으소서”회칙의 골자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1.창조의 복음, 2.생태학의 크리스천 열쇠, 3.경배와의 연결, 4.지구는 현재와 미래, 모두에게 속해있다, 5,관상에로 인도하는 창조물, 6.하느님의 현존을 계시하는 창조물, 7.창조물의 형제자매들”로 요약되었습니다.
사랑의 관상입니다. 우리가 사는 삶의 터전 자연 역시 사랑받아야 할 관상의 대상입니다. 참으로 주님께 청할 것이 더 하나 생겼습니다. 내 살고 있는 환경을, 자연환경을, ‘공동의 집’인 지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특히 정주서원을 한 분도 수도자들에게 장소에 대한 사랑은 본능적입니다.
참으로 주님께 무엇을 청하느냐, 청원기도가 그 사람을 드러냅니다. 참으로 주님의 이름에 걸맞는, 정말 주님의 뜻에 따라 청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런 간절하고 절실한 기도가 고귀하고 존엄한 인품의 사람을 만듭니다. 믿는 이들에게 우연은 없습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께 불림받은 자들이자 하느님의 선물인 존재들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예수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인데 아무 것이나 청할 수는 없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뜻에 맞는 것을 청할 때 우리는 아버지께 받을 것이고 예수님을 닮아가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다시 청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그 날에 너희는 내 이름으로 청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는 매일이 오늘입니다. 영원한 오늘입니다. 오늘 제대로 예수님의 뜻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청합니까? 사랑 하나를 청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하느님을, 예수님을, 이웃을, 자연을, 일상의 삶을, 모든 수행을 사랑하게 해달라고 청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사랑하게 해달라는 청원이야 말로 주님 뜻에, 주님의 이름에 맞는 기도입니다. 이런 순수한 사랑의 청원에 대한 응답이 충만한 기쁨의 선물입니다. 주님은 방금 복음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이 기쁨입니다. 참으로 제대로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하게 해 주십사 청할 때 주어지는 충만한 기쁨의 선물입니다. 주님 자체가 충만한 기쁨입니다. 그러니 삶의 허무를 기쁨의 충만으로 바꾸는 것은 사랑뿐임을 깨닫습니다. 텅 빈 허무를 충만한 기쁨으로 바꾸는 사랑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의 여정은 사랑의 여정이라 할 수 있고 그의 모범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을 닮아가는 우리 사랑의 삶의 여정은 그대로 예닮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면서 무지로부터 해방되어 참 자유로운 참 나의 실현입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우리 삶 역시 예수님과 똑같이 아버지에게서 나와 아버지께로의 여정임을 깨닫게 합니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간다.”
영원히 머물 세상이 아니라 ‘여정의 길손’인 우리들입니다. 쏜살같은, 흐르는 강물같은 세월입니다. 과연 살아갈수록, 아버지의 집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주님을 닮아가고 있는지요. 요즘 보니 대부분 80-90세 사이에 세상을 떠납니다. 그러니 사랑하며 깨어 잘 준비하며 잘 살다가 잘 떠날 수 있도록 청하는 것입니다.
길은 듯 하나 참 짧은 인생입니다. 일일일생, 삶의 여정을 하루로 압축하면, 일년사계, 삶의 여정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로 압축하면 어느 지점을 통과중인지 담박 드러납니다. 30년이상 수도원에 정주하다 보니 젊었던 수도형제들의 변하는 외모가 눈에 밟힙니다. 그러니 참으로 청할 것은 사랑으로 잘 살다가 잘 떠나는 죽음, 하나뿐일 것입니다. 그러면 그대로 받을 것이요, 기쁨이 충만해질 것입니다.
바로 사도행전의 바오로와 아폴로가 그 모범입니다. 3차 선교여정에 오른 사랑의 여정 중의 바오로 사도요, 예수님께 사로잡혀 혜성같이 등장한 아폴로는 담대히 회당에서 또 제자들에게 예수님에 관한 일들을, 예수님은 메시아임을 열정을 가지고 가르칩니다. 그가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짐작이 갑니다.
문득 토마스 아퀴나스의 일화가 생각납니다. 동료 수도형제가 경당 안에 있는 십자가의 주님과 토마스가 나누는 대화를 들었다는 것입니다.
-“토마스야, 너는 나를 사랑하여 참 많은 좋은 글을 남겼다. 보답하고 싶다. 무엇을 주면 좋을까?”
-“당신 하나만 원합니다. 당신을 제외한 어느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본질적인 것, 꼭 필요한 하나 주님을 청원請願하는 토마스입니다. 참으로 사랑받으실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저절로 하느님도 이웃도, 자연도 사랑하고, 무엇보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거룩한 미사중 청할 것은 참으로 모두를 사랑하게 해달라는 청원 하나뿐입니다. 무엇보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처럼 사랑의 주님을 청할 때 충만한 기쁨이신 주님을, 주님의 성체를 선물로 받습니다. 주님은 바로 충만한 기쁨 자체입니다.
제가 주님께 청하는 것은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다 기도와 더불어 ‘행복기도’ 대로 되게 해달라는 청원請願 뿐입니다. 일명 예닮기도, 행복기도를 다시 나누며 강론을 마칩니다. 이런 청원은 예수님 뜻이나 이름에도 어울릴 것이고 분명 예수님도 기분 좋아 하실 것입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 은총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삶중에 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말씀으로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이제 당신을 닮아
온유와 겸손, 인내의 사람이 되는 것이
제 소망이오니 간절히 청하는 제 기도를 들어주소서
당신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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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23.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사도행전 18,23-28
요한 16,23ㄴ-28
작은 것을 청할 것이 아니라 큰 것을 청해야겠습니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요한 복음 16장 24절)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남기신 말씀,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묵상다가
불현듯 든 생각 한 가지!
청하는 것에도 우선 순위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최종적으로 청할 것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청원의 시작, 청원의 최종 목표는 다름 아닌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을 청한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영을 청한다는 것, 예수님의 운명이 내 운명이 되도록 해주십시고 청한다는 것, 결국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영광스런 부활이 내것이 되기를 청한다는 것입니다.
지상의 것이나 지극히 유치하거나 이기적인 청원이 아니라 성령을 청했을 때,
그런 우리를 보시고 하느님께서는 흐뭇해하실 것입니다.
‘드디어 네 신앙이 이토록 성장하고 성숙해졌구나.
다른 것도 아니고 성령을 청하다니!’하고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성령을 청하는 우리에게 하느님께서는 무척이나 흡족해하시며, 우리가 청하는 성령을 찔끔찔끔이 아니라, 마치 폭포수처럼 콸콸 우리 위에 보내주실 것입니다.
청원기도 때 늘 염두에 둬야겠습니다.
작은 것을 청할 것이 아니라 큰 것을 청해야겠습니다.
세월 흐르면 다 지나갈 별것 아닌 것을 청할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대상인 성령을 청해야겠습니다.
성령께서 내게 임하시도록, 내 안에 머무시도록, 내 안에서 역동적으로 활동하시도록 간절히 청하는 나를 보시고 하느님께서는 흘러넘치도록 성령을 보내주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흘러넘치도록 우리에게 오실 때면 좋은 점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주실 것입니다.
안갯속 같았던 우리의 시야를 환하게 밝혀주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느님과 세상만사를 제대로 볼 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꽃이 피는 시절에도 기뻐하지만, 꽃이 지는 시절도 기꺼이 받아들일 것입니다.
막 출고된 신차처럼 건강미 철철 넘치는 젊은 시절에도 감사하지만, 노후된 중고차 처럼 여기 저기 아프고 골골할 때도 감사의 기도를 바칠 것입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 우리는 한없이 부족하고 나약한 한 인간 존재지만 대자연의 순환주기와 생로병사를 큰 마음으로 수용할 것입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활동하실 때 인생사 안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사고들,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현실을 인생의 한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간절한 기도의 댓가로 성령을 충만히 받은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은총이 뒤따를 것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우리 마음의 문을 여시고,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정착하실 것입니다.
우리 안에 굳건히 현존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눈으로 세상만사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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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23. 전삼용 요셉 신부님.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사도행전 18,23-28
요한 16,23ㄴ-28
중간을 배제하는 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
임금이 한 신하를 불러 이상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우물물을 길어 저기 밑 빠진 독에 가득히 채우시오.”
밑 빠진 독에 물이 채워질 리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충성스러운 신하는 오직 임금의 명령만 생각하면서 밤을 낮 삼아 물을 길어 날랐습니다.
결국, 우물 바닥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우물 바닥에 무엇인가 번쩍이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것은 엄청나게 큰 금덩어리였습니다.
신하는 임금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임금님, 용서하소서. 독에 물을 채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물 바닥에서 이 금덩이를 건졌나이다.”
임금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우겠다고 우물이 바닥나도록 수고했구려.
그대는 참으로 충성스러운 신하요.
그 금덩이는 그렇게 순종하는 신하를 위해 준비된 것이라오.”
임금이 한 명령을 수행하지 않는 상태에서 임금에게서 오는 기쁨을 얻을 수 있을까요?
자신의 말을 잘 따라주는 이에게 복을 줄 것은 당연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외시키고 아버지께 은총을 받는 것이 가능할까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오늘 아침에 돈벌레라고 불리는 그리마가 또 한 마리 집에 들어왔습니다.
처음엔 징그러워서 휴지로 집어 변기통에 내렸는데,
이것이 해충을 잡아먹는 좋은 벌레라고 하기에 그다음부터는 고이 잡아 창문 밖으로
놓아주었습니다.
돈벌레란 이름도 한몫을 한 것 같습니다.
그동안엔 책 표지 위에 그놈이 올라오게 만들어서 밖으로 내보내 주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몸집이 큰 놈이라 귀찮아서 손으로 집어 내보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돈벌레는 저에게 잡힌 자신의 다리들을 자르고 달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역시 손으로는 안 될 것 같아서 다리 몇 개 잃은 벌레를 책표지 위에 얹어서 내보내 주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인간의 관계는 마치 사람과 돈벌레와 같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너무 이해할 수 없어서 책 표지 위에 올라오는 조금의 부자유스러움도
참아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조금이나마 순종하는 것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가 이용한 책 표지와 같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하며 아버지께 청을 드려 무엇을 받아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이름으로 무엇이든 아버지께 청하라고 하십니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당신이 대신 청해주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우리가 직접 청할 수 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름’은 ‘본성’을 말합니다. 본성은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면서 아버지께 청하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상태에서 아버지께 청하면 예수님은 소외당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면 아버지께 보화를 얻게 됩니다.
그 보화가 성령이십니다.
본당 신부를 잠깐 하며 보았더니 본당에서 수녀님의 위치가 매우 애매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신자의 생각이 옳다고 하여도 그것을 들어주면 수녀님 처지가 난처해지는 청이라면 들어줄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분은 신부님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며 울상이 되어 돌아갑니다.
이런 일들은 본당 신자들과 주교님 사이에서도 일어납니다.
본당에 발령받아 온 사제가 마음에 안 든다고 임기도 안 끝났는데 바꿔 달라고 투서를 하면
주교님으로서는 난처할 수밖에 없습니다.
단기적으로는 조금 나은 신부님이 새로 부임할 수는 있어도 장기적으로는 그렇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주교님과 그 이전 신부님과의 사이를 안 좋게 만든 본당으로 낙인찍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아버지가 아내와 사이가 안 좋아지면서 자녀의 청을 모두 들어주겠습니까?
이는 마치 죄를 용서해주라고 교회를 파견하였는데 교회는 소외시키고 직접 예수님께 죄의 용서를 받겠다고 성당에 나와 고해성사를 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파견한 이를 먼저 소외시키지 않는 한에서 주님께 무엇을 청해야 합니다.
그 청하는 것이 중간에 있는 이의 뜻과 어긋나지 않는다면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들어주실 것이고 그러면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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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마르코 복음 1장 21-34절 - 예수님의 하루
박다미아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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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
오늘의 복음 나눔. 윤여원 요아킴 신부님. 부활 제6주간 토요일 - 겸손한 청원 (2020년 5/23)
https://youtu.be/Fu0NaGdPdDc (10:07)
•2020. 5. 23.
프란치스칸 사제의 묵상 나눔
그 날의 복음 묵상은 "생명의 양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무엇이든지 겸손하게 당신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면 우리에게 무엇이든지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사랑이 충만하고 자비로운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무한히 사랑 하시기에 우리가 그 이름으로 아버지께 겸손하게 청한다면 모든 것을 주십니다.
#작은형제회 #윤여원요아킴신부 #평일미사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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