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질문들
김미월
죽일까, 말까. 이도 저도 탐탁지 않았다. 죽인다면 모든 갈등이 끝나겠지만 결말이 작위적으로 흐를 위험이 있고, 죽이지 않는다면 열린 결말을 제시할 수 있겠지만 인물들의 갈등을 어떻게 봉합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아, 진짜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주인공의 운명 앞에서 고민하는 내 속도 모르고 오빠는 내 앞에 앉자마자 대뜸 시비부터 걸었다.
“근데 넌 왜 조용한 집 놔두고 이런 카페에서 글을 써?”
그가 이해할 턱이 없었다. 아무리 조용하다고 해도, 혹은 혼자 산다고 해도, 원래 집에서는 글이 안 쓰인다는 것을. 세상에 어째서 그토록 많은 도서관과 독서실이 존재하겠는가. 다 집에서는 공부가 안 되는 학생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 아니겠는가.
나는 동네 카페에서 이번 신춘문예에 응모할 단편소설을 쓰고 있던 참이었다. 원고 마감일까지는 무려 일곱 달이 남아 있었지만 신문사 세 곳에 응모하려면 적어도 소설 세 편이 필요했고 한 편 완성하는 데 보통 두세 달이 걸리는 내 작업 속도를 감안하면 일곱 달은 결코 넉넉한 시간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꼭 당선이 되어야 했다. 나이 서른에 언제까지 아르바이트나 하며 기약 없는 등단에 목을 매고 있을 수는 없었다. 다행히 지금 쓰고 있는 소설은 예감이 좋았다. 결말만 남겨놓은 상태인데 주인공을 죽일지 살릴지 그것만 결정하면 사나흘 안으로 탈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기, 뭐 좀 물어보려고.”
안다. 오빠는 뭐 좀 물어볼 게 있을 때만 나를 찾으니까.
“너 지금 사는 원룸 보증금이 얼마야?”
“그건 왜 묻는데?”
신혼집으로 아파트를 얻으려고 하는데 전세금이 모자란다고 오빠는 말했다. 그는 석 달 후에 결혼할 예정이었다. 나의 올케가 될 여자는 오빠에게 과분하다고 느껴질 만큼 참하고 다정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었다. 특히 상대방이 말할 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체를 앞으로 약간 숙여 그의 말에 귀 기울이는 모습이나 오빠의 시답잖은 농담에도 희고 조그만 치아를 드러내며 활짝 웃는 모습은 여자인 내 눈에도 대단히 사랑스러워 보였다.
“너는 직장에 다니는 것도 아니잖아.”
어차피 집에서 글을 쓰는 거라면 꼭 서울이 아니어도 되지 않느냐, 그러니 고향집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고 너의 원룸 보증금은 나에게 빌려 달라, 그것이 오빠가 오늘 나를 만나자고 한 목적이었다. 맞는 말이었다. 소설을 쓰기 위해서라면 굳이 서울 한 귀퉁이 보증금 이천만 원에 월세 20만 원짜리 성냥갑만 한 방에서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며 살 필요가 없었다. 그렇긴 하지만…….
나는 10년 전에 상경하면서 중고로 샀던 구닥다리 노트북의 화면을 노려보았다. 30분에 한 번씩 전원이 나가버려서 소설 쓰다 말고 29분에 한 번씩 저장을 해줘야 하는 애물인데도, 원룸 보증금을 모으느라 내년에 사야지 내년에는 꼭 사야지 하며 새 노트북 구입을 미뤄온 것이 벌써 9년째였다.
“내 형편에 월세는 어렵고, 그렇다고 이제 와서 결혼을 연기할 수도 없고.”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결혼은 새 노트북이 아니었다. 오빠에게는 미룰 수 없는 일이고 평생 한 번 있는 거사였다. 오빠가 올케 앞에서 기 죽는 것은 나도 싫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좋아했다. 두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랐다. 게다가 이 청을 거절한다면 오빠는 나를 평생 원망할 것이고 나는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살아야 할 것이다. 결국 임대 계약 만료까지 두어 달 남긴 했지만 집주인에게 사정을 해서 최대한 빨리 방을 빼보겠다며 나는 그가 원하는 답을 주었다.
거기서 대화를 끝냈으면 좋았을 것이다. 오빠는 그저 고마워서, 내게 미안해서, 그래서 제 딴에는 자리를 뜨기 전에 무슨 말인가 더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격상 미안하다거나 고맙다는 말을 할 수 없었으므로 다른 말을 찾았을 것이다.
“그리고 말이야, 그만큼 했는데도 안 되는 건 그냥 안 되는 거야.”
그는 등단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대꾸 없이 노트북 화면 속의 쓰다 만 문장들을 들여다보았다.
“이게 다 너를 걱정해서 하는 소리야.”
주인공의 이름 뒤에서 커서가 무심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죽일까, 말까.
“고향 내려가면 이참에 그냥 취직을 하든가 해.”
카페를 나서는 그를 배웅하면서 나는 주인공을 죽이기로 했다.
홍대입구역 일대는 늘 그렇듯이 소란스럽고 활기차고 인파로 북적거렸다. 얼굴 반반한 여자들과 옷맵시 빼어난 남자들, 그리고 그렇게 보이고 싶거나 스스로 그렇게 보인다고 믿는 이들을 한곳에 모아놓은 것 같다고 할까. 그 거리 한쪽에 나는 접이식 플라스틱 탁자를 펴놓고 보경과 둘이 나란히 서 있었다. 5번 출구 옆에 정차한 대한적십자사 헌혈 버스의 차창에 ‘A형 급구’ 종이가 나붙은 것이 보였다. KFC 건물 앞에서는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청년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다른 금발 청년이 모자를 들고 청중 사이를 돌아다녔다. 주차장 길 입구에서는 주홍색 핫팬츠를 입고 짙은 화장을 한 여자가 1인 시위라도 하듯이 피켓을 높이 들고 서 있었다. 거기에 그려진 것은 커다란 물음표 달랑 하나. 행사 도우미가 특정 회사의 신상품 프로모션을 하고 있을 확률이 높겠지만 그래도 궁금했다. 저것은 과연 무엇에 대한 물음표일까.
내가 사회에 나와 깨달은 것들 중 하나는 이 세상에는 정말로 많은 질문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질문해야 하고 또 질문 받아야 한다.
면접을 보러 가면 왜 이 회사를 지원했느냐는 질문을 받아야 하고, 식당에서는 이 쇠고기가 미국산인지 아닌지 질문해야 하고, 번화가를 혼자 걷노라면 도를 믿으시냐는 질문을 받아야 하며, 소개팅을 할 때는 그 여자가 예쁜지 그 남자의 ‘스펙’이 좋은지 주선자에게 미리 질문해야 하는 것이다. 하기야 쪽지시험을 포함해 중간고사니 기말고사니 학창 시절에 우리가 치른 모든 시험에는 아예 질문밖에 없었으니, 사회에 나오기 전에도 이 세상이 수많은 질문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영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능수능란하게 받아치던 친구들이 사회에 나가서도 주눅 들지 않고 무엇이든 잘 받아친다는 것을 목격했으니 삶에서 질문에 대처하는 능력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을 것이다.
가끔은 이 세상이 아직 무너지지 않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질문들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묻고 답하고 다시 묻는 그 과정에 필요한 에너지가 사람을 살아가게 하고 세상을 지탱해주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예컨대 중세 유럽에서는 학자들이 ‘하나의 바늘 위에서 몇 명의 천사가 춤출 수 있는가’ 같은 맹랑한 질문의 답을 찾느라 밤잠을 설치며 격론을 벌였다는데, 반짇고리 속의 바늘도 숨을 죽이고 천국에 있는 천사들도 날개를 접은 채 인간세상을 향해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을 그 밤들을 상상하노라면 나는 괜히 흐뭇해지는 것이다. 당장은 쓸모없어 보이는 질문일지라도 누군가 그것을 쓸모 있게 만들어줄 답을 찾기 위해 애쓴다면, 그 곡진한 기운들이 모여 결국은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고 시대의 얼굴을 바꾸고 나아가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것 아니겠는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신은 존재하는가, 우주는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이런 질문들에서부터 저 나무 이름이 뭐예요, 너 휘파람 불 줄 아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이런 질문들에 이르기까지.
어쨌거나 나의 상황에 대입시켜 말한다면 질문이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지도 모른다는 표현은 은유가 아니었다. 그것은 실제로 나에게 밥과 옷과 방과 약간의 기호품을 제공해주고 있었다. 질문들을 상대하는 것이 바로 내가 하고 있는 아르바이트였기 때문이다.
“설문지를 작성해주시면 선물을 드립니다!”
보경이 외치는 소리가 제법 컸다. 몇몇 행인들이 그녀와 내게 눈길을 주었다가 곧 거두며 제 갈 길을 갔다. 숫기 없고 인상도 무뚝뚝한 나와 달리 보경은 20대 초반 특유의 생기 있는 얼굴에다 타고난 싹싹함과 서글서글함으로 누구에게나 쉽게 말을 걸었고 누구하고나 쉽게 어울렸다. 그것은 웃을 때마다 그녀의 왼쪽 뺨에 파이는 보조개처럼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것이어서 나는 보경과 한 팀이 된 지 15분 만에 그녀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데 주력하고 나는 그들에게 설문 작성 요령을 일러주는 일을 전담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역할 분담을 할 수 있었다.
이름 하여 앙케트 조사 요원. 소설을 쓰지 않는 날이면 나는 이 아르바이트를 하곤 했다. 아니, 정확히는 이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는 날이면 소설을 쓰곤 했다고 말해야겠지만. 회사를 그만둔 후로 줄곧 홍대입구나 압구정이나 명동, 광화문 등 유동 인구가 많은 곳에서 행인들을 상대로 설문 조사를 하는 아르바이트를 해왔다. 최근 들어서는 온라인 앙케트가 각광받는 추세라 오프라인 앙케트의 경우 일주일에 한두 건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예전에 비해 일감이 현저히 줄었지만, 대신 상대적으로 단가가 높아져서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수입과 소설 집필에 필요한 최대한의 시간적 여유를 원했던 내게는 오히려 더 나은 조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설문 조사에 참여해주세요! 5분이면 됩니다!”
마침 한 쌍의 남녀가 우리 탁자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선물로 아주 예쁜 순면 100퍼센트 고급 타월을 드려요!”
보경이 때를 놓칠세라 그들의 눈앞에 설문지를 흔들어 보였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세수수건이 예쁘면 얼마나 예쁠 것이며 고급이면 얼마나 고급이겠는가. 하지만 나는 요행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는 그들 남녀에게 자못 진지한 얼굴로 설문의 내용과 목적을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설문을 끝내기를 기다리며 바닥에 부려놓았던 라면박스에서 수건 두 장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언니!”
“……”
“언니! 안 들리냐니까?”
보경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퍼뜩 정신이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언제 가버렸는지 예의 두 남녀가 보이지 않았다. 탁자 위에 있던 아주 예쁜 순면 100퍼센트 고급 타월 2장도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세 번이나 불렀는데. 12시야. 점심 먹자고.”
“아, 미안해. 못 들었어.”
“언니도 참. 무슨 생각이 그렇게 많아?”
그랬나. 그랬다. 실로 생각이 너무 많았다.
며칠 전 집주인은 고맙게도 보증금 2천만 원을 돌려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다만 방을 빼지 말고 월세로 계속 사는 것은 어떨지 내 의향을 물었다. 저와 내가 임대인과 임차인으로서 그간 쌓아온 정리가 있으니 보증금 없이 대신 월세를 30만 원 올려 받는 조건으로, 다시 말해 월세만 50만 원씩 내며 살 수 있도록 배려해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게 정말 ‘배려’라면 말이다. 나는 하루만 더 생각해볼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 하루 동안 마음은 수차례 귀성열차를 탔다가 고향에 도착하기도 전에 도로 귀경열차로 갈아타고는 했다. 그것은 소설의 주인공을 죽이느냐 살리느냐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어렵고 복잡한 문제였다. 내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였으니까. 처음 오빠에게 돈을 보내주기로 마음먹었을 때는 그의 말마따나 고향에 내려가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상경한 지 10년이 지났는데 이대로 패잔병처럼 터덜터덜 고향에 내려가는 것은 남부끄러운 일이었다. 귀향과 낙향은 엄연히 다르지 않은가. 금의환향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명분은 있는 귀향이어야 했다.
10년 세월은 금방이었다. 서울에 위치한 2년제 대학의 문예창작과에 진학할 때만 해도 나는 졸업하면 겨우 스물두 살이니 서른이면 이미 소설가가 되어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등록금만으로도 등골이 휠 텐데 생활비까지 부모에게 전가할 수는 없어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휴학을 일삼았더니 졸업할 때 이미 스물네 살이었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몇 년 이내에 등단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대학 재학 내내 교수들로부터 소설가는 소설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니라 소설을 꾸준히 쓰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어오지 않았던가. 꾸준히 쓰는 걸로 말하면 나만 한 사람도 드물 터였다. 하여 졸업 후에도 계속 아르바이트를 하며 짬짬이 소설을 썼다. 두 편을 완성했고 두 곳에 응모했다. 두 번을 낙선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희망을 버리지는 않았다. 문제는 사글셋방을 전전하다 보니 수입보다 지출이 많아 늘 돈에 쪼들리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과연 사그라지는 돈이라 사글세라 한다던가. 전세 보증금을 모으기로 작심하고 취직을 한 것은 스물다섯 살. 4년 동안 야근에 주말 근무까지 불사하며 돈을 모았다. 회사가 자금난으로 문을 닫은 것은 지난해의 일이었다. 내가 아직도 희망이 있을지 회의하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스물아홉 나이에 다시 취직을 하기도 쉽지 않을 테고 이참에 당분간 아르바이트나 하며 소설에 전념해볼까 하고 등 떠밀리듯 결심하게 된 것도 그래서였다. 그것이 불과 1년 안쪽의 일이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고향에 내려간다니. 남들 눈에 우세스러운 것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당장 내가 소설을 쓸 수 없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진종일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볼륨을 최대치로 높인 채 고함을 지르듯 대화하는 귀먹은 부모와 한 집에 살면서, 얼른 시집이나 가라는 그들의 잔소리에 시달려가면서, 무엇을 어떻게 쓸 수 있겠는가. 하다못해 그 동네에는 변변한 카페 하나 없지 않던가. 지금은 귀향할 때가 아니었다. 일단 서울에 남아야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뭔가를 선택하고 있다고 믿었다. 고향이냐, 서울이냐. 그중에서 서울을 택한 것이었다. 그러나 풀어야 할 문제는 또 있었다. 월세를 50만 원씩 낸다는 것이 가능할까. 다행히도 그것은 묻는 순간 답을 알 수 있는 종류의 질문이었다. 도시가스 요금에 전기세, 수도세, 건물 관리비까지 합하면 실질적으로 통장에서 다달이 빠져나가는 돈은 60만 원 안팎이 될 터였다. 아무데도 안 가고 우산꽂이처럼 얌전히 집구석에만 처박혀 있어도 한 달에 60만 원인 것이다. 거기에다 건강보험료와 통신비와 식비와 교통비 등 생활비를 다 합하면…… 숨이 턱 막혔다.
내가 지금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게 다 누구 때문인가. 오빠 때문 아닌가. 그의 신혼집 전세금이 모자라는데 왜 내가 그걸 메워주어야 하나. 여윳돈이 있어서라면 또 모를까, 내 방 보증금을 빼가면서까지 그래야 할 까닭은 없지 않은가. 오빠만 아니면 서울이냐 고향이냐 월세 50만 원을 내느냐 못 내느냐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내가 예전처럼 마음 편히 소설에만 전념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새삼 오빠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하기 전까지 내가 누렸던 그 보잘것없다 생각했던 시간들이 실은 얼마나 안온하고 평화롭고 소중한 것이었는지를 뒤늦게 실감하고 있었다.
그 하루의 끝에 나는 결심했다. 그리고 거울을 보며 목소리를 한 옥타브 낮춰서 말하는 연습을 해보았다.
오빠, 정말 미안한데…… 엊그제 돈 빌려주기로 했던 거 말이야…… 그거 없었던 일로 해야 할 것 같아. 정말 미안해…….
핸드폰의 폴더를 열었다. 마땅히 해야 할 말을 하려는 것뿐인데 스타트 라인에서 출발 신호를 기다리는 육상 선수처럼 긴장이 되었다. 심호흡을 했다. 오빠의 전화번호를 누르려는 찰나였다. 때마침 새로운 문자 메시지가 수신되었음을 알리는 초록색 불빛이 손바닥 안에서 조급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오빠한테 뒤늦게 얘기 들었어요. 정말 너무 고마워요.’
발신인 칸에 찍혀 있는 것은 올케의 전화번호였다.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나를 아가씨라 부르곤 하던 그녀의 상냥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부정출발을 했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육상 선수처럼 허탈해하며 나는 폴더를 닫았다.
그래, 까짓것, 싼 방으로 이사 가면 된다. 방이야 얼마든지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겨우 1년이다. 오빠는 1년 이내에 돈을 갚겠다고 했다. 그 정도 버티는 것이야 일도 아니잖은가. 10년 세월도 금방 지나가는데.
결국 집주인에게 배려는 감사하지만 방을 빼야겠노라 통보했다. 그리고 돌아서면서 불현듯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선택된 것이었다. 그것은 그냥 결정되었다. 거기에는 다른 결정도 없고 다른 선택도 없었다.
그 이튿날부터 어림잡아 하루에 두세 명 정도가 방을 보러 왔다. 나는 집 근처 카페에서 소설을 쓰다가 방을 좀 보여 달라는 부동산 중개인의 전화를 받으면 집으로 냅다 뛰었다. 카페에 노트북을 그대로 놔둔 채 자리를 비워도 아무도 안 훔쳐갈 것이 뻔했으므로 새 노트북 사는 것을 9년째 미뤄오길 잘했다는 생각도 했다. 나는 정말이지 참으로 긍정적인 인간이었다.
맨 처음 방을 보러 온 사람은 30대 여자 직장인이었다. 그녀는 방이며 욕실을 대충 둘러보는 시늉만 하더니 내게 물었다.
“낮에 햇볕 잘 들어와요?”
나는 창문이 북향으로 나 있어서 낮에도 불을 켜지 않으면 어두우며, 아마 그래서일 테지만 지금껏 살아서 이 방을 나간 화초가 하나도 없다고, 사실대로 이야기해주었다.
두번째로 온 이들은 신혼부부였다. 그들은 형광등을 껐다가 켜보고 창문을 열었다 닫아보고 욕실에 들어가 세면대 수도꼭지까지 틀었다 잠가본 후에 물었다.
“방음은 잘 되는 편입니까?”
옆방에 사는 사람이 컴퓨터로 메신저에 접속할 때면 로그인 사운드를 또렷하게 들을 수 있다고 나는 이번에도 사실대로 고했다. 그러나 옆방 사람이 샤워할 때 샤워기를 벽에 거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는 이야기는 쓸데없이 야릇한 오해를 살까 봐 하지 않았다.
세번째 방문객은 20대 남자 대학생이었다. 그는 집주인이 이 건물에 살고 있지 않으며 고로 세입자의 사생활을 간섭할 일도 전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더니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방을 나가기 직전에 깜빡 잊을 뻔했다는 듯 짧게 아 하고 외쳤다.
“여기 초고속 인터넷 깔려 있나요?”
나는 아무래도 이 건물은 아니고 옆 건물의 누군가가 무선 인터넷을 쓰는 것 같기는 한데, 낮에는 신호가 거의 안 잡히지만 자정부터 새벽 5시 사이에는 그럭저럭 잡히므로, 만약 그 시간대에 주로 활동한다면 공짜로 인터넷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내 대답에는 조금의 과장도 거짓도 없었다.
그들은 그렇게 왔다가 갔다. 이사 철도 아닌데 희한하게 방을 보러 오겠다는 사람은 끊이지 않았다. 따라서 나 또한 카페에서 소설 쓰다 말고 집으로 달려가는 일을 반복해야 했다. 소설에 집중하기가 어려운 것이 당연했다. 집에 있는 동안이라고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아침에 내가 늦잠을 자고 있을 때도 왔고 점심을 먹고 있는 도중에도 왔고 저녁에 샤워를 하고 있을 때도 왔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언제 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이 무엇을 질문할 것인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외풍이 있진 않나요?”
“수압은 괜찮습니까?”
“겨울에 가스비가 얼마나 나와요?”
나는 매번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대답해주었다. 그러기를 사나흘쯤 했을까. 안 그래도 낯선 사람들을 상대하는 일에 슬슬 지쳐가던 차였다. 저녁 늦게 방을 보러 온 젊은 남자가 갑자기 걸려온 전화를 받느라 밖으로 나간 사이, 그와 함께 온 부동산 중개인이 문 쪽을 힐끔거리며 낮은 목소리로 나를 다그쳤다.
“도대체 방을 뺄 생각이 있는 거요, 없는 거요?”
그는 같은 말을 해도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이라고 했다. 나처럼 이 방에 하자가 있다는 것을 곧이곧대로 말하면 누가 입주하려 하겠냐는 것이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물론 솔직한 게 제일 좋지만 경우에 따라 가끔은 거짓말도 좀 하고 그래야 사는 게 편해지고 서로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느냐는 그의 말에는 두서가 없었다. 그렇지만 악의도 없었다.
“이게 다 아가씨를 걱정해서 하는 소리예요.”
오빠가 나에게 했던 말을 그도 똑같이 하고 있었다. 왜 다들 그렇게 나를 걱정하는 것일까. 그들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면 나는 소설 쓰기를 포기해야 하고 방을 보러 온 사람들 앞에서 이 방의 문제점들을 은폐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자연히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바로 어제의 일이었다.
보경과 나는 설문지가 수북이 쌓인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편의점 샌드위치와 테이크아웃 커피로 점심을 때웠다. 오전에만 설문 40여 건을 해치웠으니 그만하면 중간 성적이 나쁘지 않은 셈이었다. 그럼에도 바지런한 보경은 쉬지 않았다.
“너는 이성을 볼 때 어디를 제일 먼저 봐?”
그녀는 커피를 홀짝거리며 남자 친구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1번 얼굴, 2번 몸매, 3번 성격, 4번…….”
그에게 전화로 설문 조사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번 건은 항목별로 답을 체크한 후 마지막에 응답자의 전화번호만 기재하면 되는 양식이라 남이 대신 작성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설문지 한 건당 따로 수당이 떨어지기 때문에 보경은 이런 식으로 가끔 제 지인들을 동원하고는 했다.
“데이트 비용은 어떻게 부담해? 1번 남자가 다 낸다, 2번…….”
신생 결혼 정보 업체에서 실시하는 설문 조사였다. 그들의 진짜 목적은 설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론사에 그것의 결과를 보도해 달라고 요청하는 방식으로 회사의 이름을 대중에게 노출하려는 데 있다고 봐야겠지만, 우리 아르바이트생들이야 시키는 대로 하고 돈만 받으면 그만이니 그런 데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이 일을 시작하고 나서 나는 수많은 질문들을 상대해왔다. 요즘 청소년의 독서 경향에 대해, 우리나라 커피전문점의 커피 가격에 대해, 분리수거의 실효성에 대해, 성범죄자의 적절한 처벌 방안에 대해, 시판되는 유기농 식품의 신뢰도에 대해, 독도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핸드폰 기기를 교체하는 이유에 대해, 그것들은 항목도 다양했고 목적도 다양했고 대상도 다양했다. 다양하지 않은 것은 아르바이트생에게 지급되는 건당 수당뿐이었다. 또한 질문들은 낮이 가면 밤이 오고 밀물이 들면 썰물이 지고 사람들이 서로 만나면 헤어지고 또 만나듯 끝없이 이어졌다. 앙케트 대행 회사가 망한다 해도, 내가 아르바이트를 그만둔다 해도, 세상의 질문들은 끝없이 생산되고 유포되고 소비될 것이었다. 내가 죽은 후에도 물론. 그런 생각이 가끔 나를 막막하게 하곤 했다.
“애인의 생일 선물 가격은 얼마가 적당한가? 이건 주관식이야.”
나는 보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얼른 탁자 위의 설문지를 살폈다. 내 기억대로 거기에 주관식 항목은 없었다. 보경의 질문 자체가 아예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내 의아한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질문을 이어갔다. 그러면서 뭐가 그리 우스운지 이따금 손으로 제 입을 가리고 웃었다.
“뭐가 그렇게 물어볼 게 많아?”
그러고 보니 내가 생각이 많다면 보경은 질문이 많았다.
“왜? 난 누가 나한테 뭐 물어보면 기분 좋던데. 언닌 안 그래?”
전화를 끊은 후에도 그녀의 왼쪽 뺨에는 여전히 보조개가 파여 있었다.
“글쎄, 그런가. 난 잘 모르겠는데.”
“뭘 물어본다는 건 그만큼 나한테 관심이 있다는 거잖아.”
그래서 보경은 저부터 관심이 가는 사람이 있으면 항상 먼저 말을 건다고 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뭔가를 물어봐주고 말을 걸어주는 이를 좋아한다, 그가 자신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응당 고마움을 느끼게 되고 친절하게 대답하게 된다, 그러면 처음에 말을 걸었던 이는 자신의 시도가 성공했다는 사실에 용기를 얻게 되고 남에게 점점 더 잘 물어보게 된다, 당연히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의 호감을 사게 된다, 이것이 그녀의 주장이었다. 말하자면 일종의 선(善)순환이라고 할까.
듣고 보니 그럴듯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내가 남에게 뭔가를 먼저 물어본 적이 있던가. 아니, 내게도 먼저 뭔가를 물어봐준 사람이 있었나. 기억을 더듬어보고 있는데 핸드폰 벨이 울렸다. 부동산에서 온 전화였다. 방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죄송하지만 제가 지금 밖이라서 방을 보여드릴 수가 없어요.”
“아이고, 그럼 집주인한테 열쇠를 맡겨놓고 나갔어야지.”
중개인은 혀를 차더니 다시 한 번 내게 방을 뺄 생각이 있기는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결국 그에게 현관문 디지털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알려주었다. 어쩌면 방의 하자를 시시콜콜 고하는 내가 없는 편이 방을 빼는 데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곧이어 오빠에게서도 전화가 왔다. 그는 내가 집주인에게 보증금을 돌려받았는지 알고 싶어 했다.
“아직 못 받았어. 방이 안 나갔거든.”
“그럼 언제쯤 받을 수 있을까? 내가 좀 급해서 말이야.”
나는 종이컵 속의 식은 커피를 마저 들이켰다. 사람들은 내게 무엇인가를 묻고 있었으나 기실 그것들은 질문이라기보다 명령이나 권유에 가까웠다. 컵 바닥에 채 녹지 않은 설탕이 남아 있었나. 마지막 커피 한 모금이 몹시 달았다.
긴 오후였다. 보경은 오전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나 역시 그들에게 설문 작성 요령을 설명해주고 수건을 나눠 주느라 분주했다. 탁자에 엉거주춤 엎드려서 설문지를 들여다보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헌혈 버스 앞 대한적십자사에서 파견 나온 여자들이 외치는 ‘헌혈하고 가세요’ 소리가 어지럽게 떠돌다 흩어졌다. KFC 건물 앞에서 기타 치며 노래를 부르던 금발 청년은 오늘의 공연 일정을 끝냈는지 모자를 들고 청중 사이를 누비던 다른 금발 동료와 함께 앰프며 스피커 등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들이 영어로 소리 지르듯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나는 용케 ‘too late’ 한 마디를 알아들었다. 너무 늦었다니, 무엇이 너무 늦었다는 것일까.
사람들은 금세 설문을 마쳤고 금세 자리를 떴다. 질문 20항목의 답을 표기하는 데 평균 5~6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문제가 모두 객관식이었으니까.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질문이 아니었으니까. 다시 말해 심사숙고하거나 정성을 기울일 필요 없이 그저 세수수건 한 장만큼의 성의만 보이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아침부터 주차장 길 입구에서 주홍색 핫팬츠 차림으로 혼자 피켓을 들고 서 있던 여자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끝내지 못한 나의 소설을 생각했다. 주인공을 죽일지 살릴지 결정하고 나면 나머지는 일사천리로 진행되리라 믿었는데 실상은 그렇지가 않았다. 방을 내놓은 후로 더 이상의 진척이 없었던 것이다. 썼다 지웠다 반복하고 나면 늘 제자리였다. 따라서 일찍이 죽이기로 마음먹었던 주인공도 아직 살아 있는 상태였다.
쓰다 만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주인공은 고민하고 있었다. 죽을 것인가, 말 것인가. 그는 고민 끝에 자신이 죽어야 할 이유와 살아야 할 이유를 각각 종이에 적어보았다. 그 과정을 통해 그가 깨달은 사실은 딱히 죽어야 할 이유도 없고 마땅히 살아야 할 이유도 없다는 것이었다. 주인공은 서른 살이었다. 서른 해 이후의 생사를 결정적으로 결정할 만큼의 절대적이고도 필연적인 이유가 없다는 것에 그는 충격을 받았다. 거기에서 소설은 멈춰 있었다.
이 소심하고 나약한 인물을 어떻게 처치하는 것이 좋을까. 다섯 리 안개 속에 갇혀 있는 것 같은 소설의 결말을 떠올리자 나는 마음이 착잡해지면서 6천 마디 힘줄이 다 느슨해지는 기분이었다. 하기야 남의 인생을 결정하는 일이 그렇게 호락호락할 리가 없었다.
부동산 중개인에게 다시 전화가 걸려온 것은 내가 일없이 주홍색 핫팬츠 여자의 행방이 궁금하여 목을 빼고 주차장 길 쪽을 기웃거릴 때였다. 중개인은 내가 가르쳐준 방법대로 도어록을 조작해보았지만 문이 열리지 않는다고 했다.
“우물 정 다음에 공이일일 그리고 다시 우물 정 누르면 돼요.”
“숫자 맞게 누르셨어요? 공이일일, 영둘하나하나.”
“네? 그럴 리가요. 처음부터 다시 해보세요, 우물 정부터.”
매일 한 집에서 얼굴 맞대고 사는 현관문조차 나를 도와주지 않으니 오늘도 방이 나가기는 글렀구나 싶었다. 사실 방이 덜컥 나간다고 해도 문제였다. 그때부터는 당장 내가 앞으로 살 방을 구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보증금 없이 월세만으로 들어갈 수 있는, 그러니까 사글셋방을 말이다. 오빠가 1년 이내에 돈을 갚겠다고 했지만 1년이란 상황에 따라 ‘겨우’와도 어울리고 ‘무려’와도 어울릴 수 있는 시간이 아닌가.
불현듯 내가 지금 서울 땅에서 뭘 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 생각해 보면 죽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팡질팡하고 있는 내 소설 속의 주인공이나 나나 별다를 것이 없었다. 어쨌거나 나 역시 아직 살아 있다는 점에서도. 해가 이울어가는데 답란이 비어 있는 설문지는 여전히 탁자 위에 높다랗게 쌓여 있었다. 수건들이 든 상자를 정리하기 위해 돌아섰을 때 나는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마침내 주홍색 핫팬츠 여자가 바로 맞은편 파리바게트의 노천 탁자 앞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일을 끝냈는지 혹은 다른 사람과 교대한 것인지 이제 그녀의 손에는 피켓이 들려 있지 않았다. 그 물음표, 무엇에 대한 물음표였는지 묻고 싶었는데.
“설문 조사 참여하시고 선물 받아 가세요!”
그렇게 외친 것은 나였다. 의자에 앉아 잠시 쉬고 있던 보경이 나를 향해 웃어 보였다. 그리고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맥없는 내 목소리에 슬며시 씩씩한 제 목소리를 보탰다. 주홍색 핫팬츠 여자가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얼굴이었다. 순간 뜬금없이 나는 내 소설의 주인공을 살려두는 게 낫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도대체 앞으로 얼마나 더 갈팡질팡할 것인지 좀 더 지켜보아도 되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는 서른 살이었다. 서른이란 상황에 따라 ‘무려’와도 어울리지만 ‘겨우’와도 어울릴 수 있는 나이 아닌가. 딱히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살기에는 늦은 나이가 아니지만 마땅히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죽기에는 이른 나이였다. 물론 그런 일에 적당한 나이가 따로 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주인공을 살리기로 마음을 바꾸고 나니 나는 갑자기 사기가 충천해졌다. 이번에는 정말로 결말이 술술 잘 풀릴 것 같았다. 어서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 자판에 열 손가락을 올려놓고 싶었다. 그리고 주인공에게 무엇이든 묻고 싶었다. 다만 묻고 싶기는 하되 무엇을 묻고 싶은지 알 수가 없다는 것, 그것이 문제였다.
첫댓글 부지런한 휘짱님. 글을 쓰는 사람들은 질문을 먹고 살지 싶습니다.
왜? 때문에 글을 쓰고, 왜? 때문에 답을 얻기 위해 글을 읽으니.
또 시작하는 하루에 글에 대한 열정을 일깨워주는 휘짱님께 감사를 ^^
바오밥나무님이 가르쳐준 웹집에서 가져 왔습니다. 전에 중국어 수업(?)인가 이 작가의 작품을 읽은 기억이 나는데... 글 쓰는 사람은 늘 위와 같은 화자의 고민과 일치하리라 봅니다. 방(경제)과 작품과의 끊임없는 갈등... 그래도 사람을 죽이지 않았으니, 긍정적인 결말이라고 봅니다. 그게 실생활과 어느정도 맞먹어야겠죠? ^^
그렇네요,,,죽일까 말까 망설이다 죽이지 않기로 했다하니,,,읽는 독자도 안도가 되는 군요,,,,휘짱님도 고려해보시길요,,,,^^ 잘 읽었습니다,,,^^ 감사요~~~~ ^^
맞다 중국어 수업 뭔지 알겠어요.
그 작품 참 잘 썼다고 생각했어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대책없이 오빠에게 돈을 빌려주겠다고 해서 좀 답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화자의 성품이기도 하겠지만 그렇게 해야 캐릭터가 살고 또 갈등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지... 제가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또 다른 작품이 나오겠지요~~^^
참 잼있게 잘 썼네요.. 난 오늘에야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