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수행이야기]〈84〉팔자대로 살아야한다면 불교를 왜 믿겠는가
자신의 미래 업을 결정해가는 주인공
수행은 하루 윤회 벗어나는 해탈이요
1년·10년 윤회 벗어나는 지름길이라
펜실베니아대 교수인 마틴 셀리그먼(Martin Seligman)은 긍정 심리학(Positive Psychology)의 창시자이다. 마틴이 수년 전에 이런 논리를 내놓았는데, 학습된 무력감(learned helplessness)이라는 실험이다.
상자에 개를 집어넣고 바닥에 전기 충격을 가한다. 개는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을 친다. 그러나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 전기 충격을 피할 수 없음을 경험한다. 그런데 개가 위험한 상황에서 안전한 곳으로 피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도 개는 안전한 곳으로 옮겨가지 않는다. ‘아무리 발버둥치고 노력해도 안 된다’는 무력감이 학습되어진 것이다. 또 닭의 다리에 끈을 달아 말뚝에 매어두고 주위를 하얀 백색가루로 원을 그려 놓았다. 닭이 처음에는 그 원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을 친다. 수여일 뒤에 말뚝에서 끈을 풀어주었는데, 그 닭은 그 백색가루 원을 벗어나지 않는다. 닭 또한 학습된 무력감에 길들여진 것이다.
심리학자의 학습된 무력감을 대하면서 순간 뇌리에 무언가 탁! 스치었다. 과연 축생에게만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 실은 인간도 이런 학습된 무력감과 경험에 안주해 살고 있다. 과장된 억설일지 모르겠지만, 이런 학습된 무력감에서 벗어나는 그 자체가 그릇된 삶의 방식을 탈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저 실험 원리는 인간이 구태의연하게 타성에 젖어 사는, 혹 자신을 개발하지도 진보시키지 못하는 인간의 카르마(karma), 업(業)에 묶여 사는 것과 같다. 업이란 연기설에 기초하는데, 한 인간의 삶이란 시공간의 연기 속에 놓인 존재이다. 시간적으로, 한 사람의 지능이나 성격, 취미 등은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과거세부터 비롯된 현재의 존재이다. 또 공간적으로 인간은 자신이 살고 있는 국가, 부모, 교육받은 곳 등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영향을 받는다. 즉 어느 누구나 사람은 과거의 인격적, 도덕적, 정치경제적, 문화적으로 연기된 시공간 속에서 자신이 과거 경험으로 축적된 업의 총화인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업으로 축적된 존재라면 정해진 업대로 살아야 하는가? 사람들 중에는 불교를 마치 할머니들이 말하는 팔자 개념, 혹은 숙명대로 받아들이는 진리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한 마디로 불교의 업설은 전혀 그렇지 아니하다. 팔자 개념대로 살아야한다면, 불교를 왜 믿겠는가.
불교에서 말하는 업은 과거에 자신이 만든 경험의 총화이지만, 현재에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들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주체를 가지고 있는 적극적인 진리의 업설이다. 여기서 말하는 주체란 실체화된 이미지(自我)가 아니라 업을 제어할 수 있는 ‘의지’라는 뜻이다. 저 앞의 학습된 무력감과 비추어보면, 학습된 무력감에서 탈피해 진보된 존재로서 주체의식을 가지라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과거의 업은 피할 수 없다고 하였지만, 과거 업을 수용하고, 참회함으로서 현 자신을 조금이나마 개선할 수 있다고 본다. 또한 그대가 시시각각 선과 악을 선택하면서 현재를 살고 있는데, 미래는 얼마든지 선업(善業)으로 자신을 바꿀 수 있는 주체의 의지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경험에서 선한 쪽으로 자신의 미래 업을 결정해가는 주인공이다. 그러니 자신의 고정화된 관념이나 개념(frame)을 내려놓고, 집착심을 갖지 않는 것, 자신이 살아온 삶을 다른 방식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바로 이것이 앞의 학습된 무력감과 같은 카르마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현재보다 더 나은 자신을 위해 수행함은 바로 하루의 윤회에서 벗어나는 해탈이요, 더 나아가서는 1년의 윤회에서, 10년의 윤회에서 벗어나는 지름길이다.
정운스님… 서울 성심사에서 명우스님을 은사로 출가, 운문사승가대학 졸업, 동국대 선학과서 박사학위 취득. 저서 <동아시아 선의 르네상스를 찾아서> <경전숲길> 등 10여권. 현 조계종 교수아사리ㆍ동국대 선학과 강사.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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