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사 명장면] 35. 헤이안(平安) 시대의 불교
천태.진언종 열어 실천적 구제종교로 一新
고대 전반기의 국가 및 문화의 형성에 밑거름이 됨과 동시에 불교연구의 학단(學團)인 남도육종(南都六宗)의 전통을 형성했던 일본의 불교는 고대 후반기인 헤이안기(794~1192)로 접어들면서 실천적인 구제종교로서의 면모로 일신하게 된다. 이러한 헤이안 불교의 두 기둥으로서 사이쵸(最澄, 767~822)와 쿠카이(空海, 774~835)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사진설명> 일본 천태종의 총본산인 히에산 엔략쿠지(延曆寺)는 사이쵸가 세운 이치죠시칸인이다. 사진은 엔략쿠지 근본중당.
국가가 보호하는 관사(官寺)를 중심으로 권력과 밀착하고 세속화되어가던 나라(奈良)시대 불교의 스님들과 달리 지계와 수행을 중시했던 산림수행승 출신이라는 기반을 지녔던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같은 해의 견당사(遣唐使) 일행과 함께 중국을 견문하게 된다. 그러나 그 후의 역할은 현격하게도 일본에 천태와 진언이라고 하는 두 축을 세우게 되었다.
먼저 사이쵸는 9개월 간 중국의 천태산 등을 역방하며 원선계밀(圓禪戒密)이라고 하는 소위 4종상승을 받고 귀국 후 수도 교토(京都)의 동편인 히에산(比叡山)에 천태법화종을 세우게 된다. 지금의 일본 천태종의 총본산인 엔략쿠지(延曆寺)는 그 때 사이쵸가 세운 이치죠시칸인(一乘止觀院)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보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 시련은 남도육종의 대표주자였던 법상종의 토쿠이치(德一)와의 논쟁으로 시작되었다. 인간의 능력이 태어날 때부터 결정되어 있는 바 삼승으로 구별되고, 누구라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법화경>의 방편일 뿐이라는 5성각별설에 바탕한 토쿠이치의 공격에 대해, 그는 <조권실경(照權實鏡)> <수호국계장(守護國界章)> <법화수구(法華秀句)> 등의 저술을 통해 법화경의 삼승의 구별은 방편이며 오히려 누구나가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는 일승을 설하고 있다고 반론하였다.
사이초 천태종 개종…국가의 戒壇통제 반대
제사상 총망라하는 법화일승 통일불교 완성
법상교학을 혁파한 그가 다음으로 부딪힌 장애는 계단(戒壇)설립에 관한 문제였다. 당시에 정식으로 계를 받아 승려가 되기 위해서는 나라에 설립된 계단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산가학생식(山家學生式)>을 조정에 제출하여 독립된 계단의 획득과 더불어 그것도 기존의 소승계가 아니고 대승계를 수여함을 목표로 교리와 실천의 양면에 있어 대승불교의 실질적인 확립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현계론(顯戒論)>을 통해 승관을 두어 승려를 국왕이 통제하는 것은 정도에 어긋난다고 하는 반론을 제기하기까지 하였다. 독립계단의 숙원은 그의 생애에 이루어지지 못하였으나 사후 7일이 되어 칙허를 받아 다음 해에 새 수계제도가 시작되고, 5년 뒤에 마침내 히에산에 천태계단원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사이쵸의 활동은 대승불교의 최고봉인 천태, 선, 화엄, 정토, 밀교 등의 제사상을 총망라하는 법화일승의 통일불교를 일본에 완성시켰다는 데에 커다란 의의가 있다. 또한 기존의 국가중심의 왕법불법 상자론(相資論)을 실질적인 독립교파의 입장인 성속2원론의 체제 속에서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이리하여 헤이안 불교를 특징짓는 남도북령(南都北嶺), 즉 구체제 아래의 남도의 불교들과 히에산을 중심으로 한 북령의 천태가 대립하는 형세를 갖추게 되었다.
다음으로 쿠카이인데 그는 입당 전부터 유불도 삼교의 우열을 논한 <삼교지귀(三敎指歸)>를 찬술할 정도로 불교에 해박한 지식을 소유했다. 중국에서는 2년 동안 여러 사원에서 가르침을 받고, 불공(不空)과 선무외(善無畏)의 제자인 현초(玄超)로부터 각각 금강계와 태장계의 밀교를 배운 청룡사의 혜과(惠果)로부터 진언밀교를 전수받는다. 귀국 후에는 왕실과의 관계가 깊어지고 이로 인해 나라 동대사에 관정(灌頂)도량을 만들고 고야산(高野山)에 진언종의 총본산인 콘고부지(金剛峰寺)를 건립한다. 더불어 교토에 토지(東寺)를 부여받고 이를 진언밀교의 전문도량으로 만든다. 여기에 서민을 위한 종합교육학교인 슈게슈치인(綜藝種智院)을 세웠다.
<사진설명> 일본 시코쿠 금강봉사에 봉안된 쿠카이스님의 상(像).
그는 많은 수의 저서를 남겼는데 그 중 <비밀만다라 십주심론(秘密曼茶羅十住心論)>과 이의 요약본인 <비장보약(秘藏寶)>은 보살심 발현의 과정을 인간 성장의 단계와 비교하여 십종의 단계로 분류하여 현교(顯敎)와 제종의 각각을 단계별로 두고 최상위에 밀교가 위치하고 있음을 설한 종합교리서이다. 이 외에도 <변현밀이교론(辨顯密二敎論)> <즉신성불의(卽身成佛義)> <성자실상의(聲字實相義)> 등을 통해 즉신성불 사상은 물론 진언종의 교학을 밝혔다.
오늘날에도 잘 알려져 있는 일본의 대사신앙의 대상은 바로 이 쿠카이인데 민중신앙의 한줄기 큰 맥을 형성하고 있다. 이는 쿠카이의 밀교가 전하는 신비성과 대중성, 보편종합성에서 발현된 것으로 중국에서 배워 온 토목사업과 민중교육교화 활동이 이 시대로부터 널리 전해져 온 것에 기인한다.
이처럼 사이쵸와 쿠카이는 헤이안 불교의 중핵이자 양대 산맥인 셈이다. 둘의 관계에 있어서는 사이쵸가 연장자임에도 불구하고 밀교의 부족한 면을 메우고자 제자의 예를 갖추고 쿠카이로부터 관정을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제자들을 보내 가르침을 배워오도록 하기도 했다. 그런데 타이한(泰範)이라는 제자가 쿠카이 문중에 귀의한 것이 빌미가 되어 둘의 교류는 끊어져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업적은 혁혁하여 사이쵸는 법화일승의 묘법을 통해 대승의 불법을 총섭하려고 시도하였으며, 쿠카이는 진언밀교의 비의를 통해 제사상과 철학을 체계적으로 종합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개유불성과 즉신성불의 정신으로 현실에 대한 구제종교로서의 대승적인 처방전을 비로소 일본에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론 한반도와의 불교관계가 중국을 중심으로 한 불교의 거래로 옮겨지고 일본국내에서 부르는 삼국의 불법은 인도, 중국, 일본을 뜻하게 되었다.
쿠카이 진언종 개종…대사신앙으로 숭앙받아
밀교 비의 통해 제사상과 철학 ‘체계적 종합’
이 둘의 사후, 천태종은 밀교의 영향을 받아 불이(不二)와 현실긍정의 천태본각사상으로 발전하여 이후 일본의 문화 및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는 한편 천태정토사상을 발현시켜 중세 토착정토교의 발흥에 커다란 사상적 배경을 마련한다. 더욱이 히에산은 인재를 길러내는 학당으로서의 역할도 수행하여 이후 중세불교를 수놓을 에사이(榮西), 호넨(法然), 신란(親鸞), 도겐(道元), 니치렌(日蓮) 등의 카마쿠라(鎌倉) 신불교의 제조사들을 배출한다. 진언종은 쿠카이의 사상이 완결되는 바람에 교상(敎相)보다는 사상(事相)의 신비체험을 중시하게 된다. 이를 통해 왕실과 민중의 밀교화를 촉진하였다.
전후 일본 불교학계의 논쟁의 전환점이자 1970년대에 제기된, 역사학자 쿠로다 토시오(黑田俊雄)의 현밀체제론의 기반은 사이쵸와 쿠카이로부터 기원한다. 즉 오늘날 대다수 종파의 원형인 중세의 카마쿠라 신불교가 그 시대의 정통이라는 종래의 설을 뒤집고 오히려 밀교우위의 천태와 진언을 중심으로 한 현밀체제가 10세기에 이르러 교학적으로나 교단적으로 완성된 후, 이러한 체제가 오히려 중세의 정통으로 자리잡았으며 신불교는 이단이자 개혁불교로써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는 설이다.
이러한 론은 일본의 종파불교를 새롭게 조명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고대와 중세불교 연구자들에게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이는 장원제로 이행하는 중세에 대한 사회경제사 연구와 연동되어 있어 불교와 역사학의 조우가 만들어낸 연구의 풍요로움이라고 하겠다. 이렇듯 헤이안 불교의 위치는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권의 종합불교 연구에 보다 넓은 영역을 제공해 줄 것으로 본다.
헤이안 불교와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엔닌(圓仁, 794~864)이다. 그는 사이쵸로부터 사사받고 입당하여 오대산에서 5회염불, 즉 인성(引聲)염불을 도입하여 천태정토교 발생의 계기를 만드는 한편 밀교를 배워 천태종의 소위 태밀(台密)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특히 그의 9년간의 중국 여행기인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는 신라의 장보고가 세운 적산 법화원과 관련된 기사를 비롯 당시 중국불교의 상황이 기술되어 있어 높은 사료적 가치를 얻고 있다.
헤이안 불교는 중기로 접어들어 일종의 섭정정치인 셋칸(攝關)정치의 시대로 이행하면서 귀족불교의 경향을 띠게 된다. 특히 왕실과 귀족의 천태종과의 관계는 깊어지며 동시에 현세구복을 위한 밀교의 수법이 발달하여 진언종의 영향력도 확대되어 간다. 이러한 가운데 쿠야(空也)의 칭명염불 포교, 겐신(源信)에 의한 관상염불과 제행왕생을 기원하는 정토사상의 출현, 이후 보고문학격인 왕생전의 출현은 대륙과 한반도의 정서와는 다른 일본 특유의 정토계통의 불교가 왕성해지는 토대를 형성하게 된다.
이와 함께 말법도래의 위기감이 확산되는 가운데 헤이안 후기에 이르러서는 각종 천재지변과 정쟁의 난무, 고대국가의 기반이었던 율령제의 해체 등으로 전통교단과 교학에 대한 의문이 확산되고 이를 이탈하여 지경자(持經者), 히지리(聖), 쇼닌(上人) 등으로 불리는 포교자 혹은 개인 수행자들과 특정한 장소를 중심으로 한 염불집단 등도 등장하기 시작한다. 불교의 민중화를 재촉하는 가운데 이들은 중세불교의 여명을 알리는 나팔수로서의 신실(信實)한 불교인들의 모습을 띠었고 이들 가운데서 중세 신불교의 조사들이 배출되기도 하였다.
원 영 상/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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