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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이사야(7)/자충수
제목 : 예루살렘과 유다의 자충수
성경 : 사 3:1~12
찬송 : 383장
저자 : 이삼규 목사
출처 : 20220202 낙양교회 수요예배
사 3:1 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가 의뢰하며 의지하는 것을 제하여 버리시되 곧 그가 의지하는 모든 양식과 그가 의지하는 모든 물과
사 3:2 용사와 전사와 재판관과 선지자와 복술자와 장로와
사 3:3 오십부장과 귀인과 모사와 정교한 장인과 능란한 요술자를 그리하실 것이며
사 3:4 그가 또 소년들을 그들의 고관으로 삼으시며 아이들이 그들을 다스리게 하시리니
사 3:5 백성이 서로 학대하며 각기 이웃을 잔해하며 아이가 노인에게, 비천한 자가 존귀한 자에게 교만할 것이며
사 3:6 혹시 사람이 자기 아버지 집에서 자기의 형제를 붙잡고 말하기를 네게는 겉옷이 있으니 너는 우리의 통치자가 되어 이 폐허를 네 손아래에 두라 할 것이면
사 3:7 그 날에 그가 소리를 높여 이르기를 나는 고치는 자가 되지 아니하겠노라 내 집에는 양식도 없고 의복도 없으니 너희는 나를 백성의 통치자로 삼지 말라 하리라
사 3:8 예루살렘이 멸망하였고 유다가 엎드러졌음은 그들의 언어와 행위가 여호와를 거역하여 그의 영광의 눈을 범하였음이라
사 3:9 그들의 안색이 불리하게 증거하며 그들의 죄를 말해 주고 숨기지 못함이 소돔과 같으니 그들의 영혼에 화가 있을진저 그들이 재앙을 자취하였도다
사 3:10 너희는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그들은 그들의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임이요
사 3:11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이는 그의 손으로 행한 대로 그가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
사 3:12 내 백성을 학대하는 자는 아이요 다스리는 자는 여자들이라 내 백성이여 네 인도자들이 너를 유혹하여 네가 다닐 길을 어지럽히느니라
바둑에는 ‘자충수’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길을 메우는 가장 좋지 않는 수입니다. 충분히 살 수 있는 돌이 자충수를 두게 되면 꼼짝없이 죽고 맙니다. 지금 예루살렘과 유다 역시 자충수를 연달아 두고 있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다의 자충수가 무엇인지 살펴보며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도록 합시다.
예루살렘과 유다의 자충수
자충수1 : 양식과 물을 의지한 것입니다.
사 3:1 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가 의뢰하며 의지하는 것을 제하여 버리시되 곧 그가 의지하는 모든 양식과 그가 의지하는 모든 물과
예루살렘과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 대신 다른 것을 의지하고 살았습니다. 그들이 첫 번째로 의지한 것은 양식과 물이었습니다. 유다는 늘 가난하게 살다가 웃시야 왕 시대를 지나면서 경제 사정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유다 왕들과 귀족들과 백성은 자기들의 부를 사용해 스스로 의지할 수 있는 것들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양식’이었습니다. 아마도 예루살렘이나 여러 성에는 큰 곡물 창고를 지어서 양식을 사서 보관했던 것 같습니다. 마치 애굽에 풍년이 들었을 때 많은 창고를 짓고 양식을 가득 쌓아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그것을 의지하고 마음이 든든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처럼 말입니다. 먹지 않아도 배불렀을 것입니다. 이것이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이입니다. 부자는 안 먹어도 그다지 배고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자들은 마냥 배가 고픕니다. 먹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예루살렘의 고질적인 어려움은 물 문제였습니다. 예루살렘에는 풍부한 물을 공급해 주는 강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사람들은 성 안에 대대적인 수도 공사를 하고 인공 연못을 만들어서 당장 전쟁이 나더라도 어느 정도 견딜 수 있도록 물을 확보했습니다. 나중에 히스기야 시대에는 바위를 뚫어 대 수로를 완성하였는데, 아마 이것도 그 이전부터 공사를 시작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이것을 ‘히스기야 터널(수로)’이라고 부릅니다. 기혼 샘물로부터 실로암까지 지하 터널을 파서 물을 끌어 들인 것입니다. 사실 그 당시 기술로는 불가 사이한 공사를 한 것입니다.
양식과 물은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적인 요소들입니다. 누구도 양식과 물을 먹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양식과 물을 제하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악조건이었던 광야에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과 물로 살아남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유다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정착해서도 양식과 물에 집착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주시고, 반석에서 생수를 공급해 주셨던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고 신뢰하지 못한 채 여전히 양식과 물을 의지한다는 것은 그들의 신앙에 큰 문제가 있음을 알게 합니다. 유다 백성들은 양식과 물을 우상처럼 여기며 의지하고 신봉했습니다. 양식과 물을 주시는 하나님을 잊고,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장차 전쟁과 기근을 통해 그들의 양식과 물을 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레 26:26 내가 너희가 의뢰하는 양식을 끊을 때에 열 여인이 한 화덕에서 너희 떡을 구워 저울에 달아 주리니 너희가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리라
시 105:16 그가 또 그 땅에 기근이 들게 하사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겔 4:16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예루살렘에서 의뢰하는 양식을 끊으리니 백성이 근심 중에 떡을 달아 먹고 두려워 떨며 물을 되어 마시다가
겔 5:16 내가 멸망하게 하는 기근의 독한 화살을 너희에게 보내되 기근을 더하여 너희가 의뢰하는 양식을 끊을 것이라
겔 14:13 인자야 가령 어떤 나라가 불법을 행하여 내게 범죄하므로 내가 손을 그 위에 펴서 그 의지하는 양식을 끊어 기근을 내려 사람과 짐승을 그 나라에서 끊는다 하자
그러므로 예루살렘과 유다가 의뢰하였던 양식과 물은 그들의 치명적인 자충수였던 것입니다. 언제 이런 일들이 일어났을까요?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멸망당할 때 일차적으로 성취되었고, 후일에 로마의 공격으로 예루살렘에 함락될 때 성취되었습니다. 얼마나 먹을 것이 없었으면 자식을 삶아 먹겠습니까?
애 2:20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주께서 누구에게 이같이 행하셨는지요 여인들이 어찌 자기 열매 곧 그들이 낳은 아이들을 먹으오며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어찌 주의 성소에서 죽임을 당하오리이까
출애굽 때 이스라엘에게 순종하면 풍요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던 하나님이 어느덧 그들의 생계를 위협하는 분이 되신 것입니다. 그것은 주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헛된 것을 의지했다는 것입니다. 양식과 물을 의지하는 자충수를 두었기 때문입니다.
자충수2 : 사람을 의지했다는 것입니다.
사 3:2 용사와 전사와 재판관과 선지자와 복술자와 장로와
사 3:3 오십부장과 귀인과 모사와 정교한 장인과 능란한 요술자를 그리하실 것이며
예루살렘과 유다가 두 번째로 의지한 것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뛰어난 재주가 있는 사람이라면 앞뒤를 가리지 않고 분별력 없이 의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회 각층을 지도하는 네 종류의 지도력 상실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1)군사적인 리더십이 사라질 것입니다.
용사, 전사, 오십부장은 모두 이스라엘 군사 제도에서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용맹스러운 용사, 전사와 지휘관들이 제거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유다의 군사력을 완전히 무능하게 만드실 것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군사적 리더십이 흔들리면 당장 외부의 침략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없는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군사적 리더십을 제거하시니 이스라엘은 자신을 방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오합지졸이 되고 만 것입니다.
2)정치적 리더십에 공백이 생깁니다.
재판관, 장로, 귀족, 모사는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사회적 리더들입니다. 재판관은 법정을, 장로는 사회적 여론과 정서를, 귀족은 이스라엘 정치를 주관하는 사람들입니다. 정치가들은 권력을 지향하고, 권력을 가진 자는 부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절대적인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끝까지 부패하지 않는 훌륭한 정치가를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인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가가 없는 공동체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정치는 우리가 사회를 형성하고 살아가는 일에 있어서 필연적 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독재가 무정부보다 낫다”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에서 정치 지도자들을 제거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과는 뻔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면 무정부 상태의 혼란이 이들을 엄습할 것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3)종교적 리더십이 없어집니다.
선지자, 복술자, 능란한 요술자 등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시대가 옵니다. 여기에서 선지자를 제외하면 성경이 금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이 이스라엘 사회에서 버젓이 활동하고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을 거역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사회가 종교적인 다원주의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종교적 리더십을 심판하셔서 제거하신다는 것입니다.
4)경제적인 리더십도 사라집니다.
‘정교한 장인’이 사라진다는 것은 경제적인 타격이 임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벨론 군대가 침공하여 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 갔는데 그 가운데 특히 장인들이 많이 잡혀갔습니다.
왕하 24:14 그가 또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과 모든 지도자와 모든 용사 만 명과 모든 장인과 대장장이를 사로잡아 가매 비천한 자 외에는 그 땅에 남은 자가 없었더라
렘 24:1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냐와 유다 고관들과 목공들과 철공들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옮긴 후에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성전 앞에 놓인 무화과 두 광주리를 내게 보이셨는데
경제적으로 가장 큰 타격은 ‘양식과 물’을 제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정교한 장인’이 제거된다는 것은 그 사회가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파탄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2:22절에서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라고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과 유다의 두 번째 자충수는 사람을 의지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통치 받는 것을 거부한 것이고, 사람의 뜻과 재주를 따라 나라를 이끌어 가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입니다. 유다는 더 이상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가 되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에 유다가 의지하는 사람들을 다 제거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충수3 : 의지할 것을 찾아 헤맨 것입니다.
하나님이 양식과 물, 지도자들을 제거해 버리시면 유다 백성들은 큰 혼란에 빠질 것이고 결국 또 다른 의지할 대상을 찾아 헤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선택하는 대상은 최악의 자충수가 될 것입니다.
능숙하고 유능한 지도자들이 제거되어 공백이 생기자 생각이 짧고 경험 없는 자들이 그 자리를 채워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됩니다(4절).
사 3:4 그가 또 소년들을 그들의 고관으로 삼으시며 아이들이 그들을 다스리게 하시리니
‘내가 철부지들을 그들의 지배자로 세우고, 어린 것들이 그들을 다스리게 하겠다.’ 이런 사람들이 다스리는 세상은 어떠할까요? 이런 곳에서 산다는 생각만 해도 두렵습니다. 옛적에 솔로몬이 죽고 난 후에 르호보암이 지혜롭고 경험 많은 노인들의 충고를 듣지 않고 어리석고 경험이 부족한 젊은 사람들의 조언을 따르다가 나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남북으로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유능한 리더들을 대신해서 철이 없고 경험 없는 철부지들이 나라를 다스리니 사회가 분열하고 몰락하게 됩니다.
사 3:5 백성이 서로 학대하며 각기 이웃을 잔해하며 아이가 노인에게, 비천한 자가 존귀한 자에게 교만할 것이며
1)사람들이 서로 학대하며 억압하는 사회가 됩니다.
2)이웃끼리 서로 싸우는 사회가 됩니다.
3)세대 간의 갈등이 심화됩니다.
4)가치관의 질서가 무너집니다.
더 비극적인 것은 이처럼 몰락해 가는 사회를 개혁하고 회복시킬 만한 사람이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 3:6 혹시 사람이 자기 아버지 집에서 자기의 형제를 붙잡고 말하기를 네게는 겉옷이 있으니 너는 우리의 통치자가 되어 이 폐허를 네 손아래에 두라 할 것이면
사 3:7 그 날에 그가 소리를 높여 이르기를 나는 고치는 자가 되지 아니하겠노라 내 집에는 양식도 없고 의복도 없으니 너희는 나를 백성의 통치자로 삼지 말라 하리라
하나님이 양식과 물, 지도자들을 제거하시면 사회적 질서가 붕괴될 뿐만 아니라 경제도 파산합니다. 단지 겉옷만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에게 통치자가 되어 달라고 할 정도로 백성의 삶은 궁핍해질 것입니다. ‘손’은 권세와 능력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폐허를 네 손 아래 두라”는 말은 권세를 위임하며 자신들의 황폐한 현실 상황을 해결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청받은 사람 역시 양식이나 의복이 없다며 통치자 되기를 거부합니다. 그들이 의지할 만한 모든 것을 하나님이 제거하셨으므로 어느 누구도 백성을 진노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하신 것입니다.
예루살렘과 유다가 자충수를 둔 이유와 결과
사 3:8 예루살렘이 멸망하였고 유다가 엎드러졌음은 그들의 언어와 행위가 여호와를 거역하여 그의 영광의 눈을 범하였음이라
사 3:9 그들의 안색이 불리하게 증거하며 그들의 죄를 말해 주고 숨기지 못함이 소돔과 같으니 그들의 영혼에 화가 있을진저 그들이 재앙을 자취하였도다
극심한 재난이 일어나는 이유와 결과를 언급합니다. 이사야의 초점은 여전히 예루살렘과 유다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이름을 두시려고 이스라엘 가운데 택하신 거룩한 성읍입니다. 유다는 하나님이 다윗과 세우신 언약을 위해 남겨 두신 한 지파입니다. 그런데 그런 예루살렘과 유다의 주민들이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언어와 행위로 여호와를 거역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영광의 눈을 범했다’로 번역된 동사 ‘마라’는 ‘반역적이다’, ‘도전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백성은 하나님의 영광 앞에 겸손하게 부복하지 않고 반역적으로 그 눈에 거스르게 말하고 행동한 것입니다. 그들의 죄악 된 본성은 얼굴에도 분명하게 드러나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였습니다.
사 3:10 너희는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그들은 그들의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임이요
사 3:11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이는 그의 손으로 행한 대로 그가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
비록 유다 백성이 죄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지만, 하나님은 무차별적으로 그들을 다 멸망시키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의인에게 복이 있음을 선언하라며 그들이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8절에서 선지자는 예루살렘과 유다의 멸망이 그들의 행위와 언어가 하나님의 눈을 범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의인의 의로운 행위는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이에 하나님은 선하게 보상하실 것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악인의 행위에 대해서도 그들이 행위대로 보응을 받아 화가 미칠 것이라고 선어하십니다. 이것은 행위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심판에 따른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순종하면 복을,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을 것임을 선고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므로 선지자를 통해 순종에 따른 복과 불순종에 따른 저주를 다시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사 3:12 내 백성을 학대하는 자는 아이요 다스리는 자는 여자들이라 내 백성이여 네 인도자들이 너를 유혹하여 네가 다닐 길을 어지럽히느니라
유다 백성이 악한 길로 가서 심판을 받게 된 데는 지도자들의 책임이 큽니다. ‘학대하다’(나가쉬)는 문자적으로 ‘누르다’ 또는 상징적으로 ‘압박하다’라는 뜻입니다. 백성을 압제할 만큼 힘을 가진 자들이 ‘아이들’이라고 하는 것은 4절에서 언급된 것과 마찬가지로, 지도자의 자질과 능력이 없는 어리석은 자들이 힘을 가지고 학대를 일삼고 있음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여자들이 다스린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남존여비 사상이나 성차별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시대적 통념을 반영한 것입니다.
‘인도자’(메이쉐르)는 ‘반듯하게 가다’ 혹은 ‘(반듯하게 가도록) 인도하다’라는 뜻의 동사인 ‘아사르’에서 파생된 분사형입니다. ‘미혹하다’(타아)는 문자적으로 ‘방랑하게 하다’, ‘벗어나게 하다’라는 의미로 ‘아사르’의 반대말입니다. 지도자들의 역할은 백성이 하나님의 길로 반듯하게 가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악한지도자들이 백성을 바른 길에서 벗어나게 하여 타락하게 하는 것을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유다의 반복되는 자충수는 하나님 대신 다른 것을 의지하는 악수(惡手)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이렇게 악수와 자충수를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형통하지 못한 이유가 하나님을 찾지 않음에 있는데도, 많은 신앙인이 여전히 사람과 물질에 의지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의 영광의 눈을 촉범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뢰하고 의지할 때 풍요한 형통한 삶을 누릴 수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만 사랑하고 의지하는 것이 우리가 인생에서 둘 수 있는 최고의 한 수, 즉 신의 한수라는 것을 기억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