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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 선교사의 “보이지 않는 조선의 마음”이라는 기도문 중 일부를 보면, “주여!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은 옮겨와 앉았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 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 곳,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사람 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 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질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질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라고 합니다. 이후로, 1919년 3. 1운동 당시, 전체 인구가 약 1600만 명인 가운데, 불과 1. 25%밖에 되지 않는 20만 명 정도만 기독교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민족의 희망이었고, 시대의 빛이었습니다. 이것은,교회가, 하나님이 부르신 그 시대적 소명을 잘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미국의 노스캐롤라이나에 있는, 써밋교회에서 목회하는, 그리어 목사님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건강한 성경적인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그 교회는 바로, 세상 속에서 선교하는 교회다”라고 합니다. 이는, 건강한 교회에게, 선교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이라는 겁니다. 곧, 성도 개개인이, 세상 속에서, 복음으로 살고, 말하도록 훈련받고, 교회 담장을 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를 가리켜, “문화의 변혁”이라고 하는 데, 이러한 변혁의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L.A 뉴호프채플에서 목회하는 이현수 목사님은, “목회자는 문화의 설계자로서, 성도들을 기독교로 개종된 종교인이 아니라, 문화의 변화를 주도하는 온전한 크리스천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에, 우선순위를 둠으로, 교회를 바꾸려 하지 말고, 성도들의 문화를 바꿔나가야 한다”라고 합니다. 이는, 현대교회가, 머리와 귀는 크고, 눈은 안보이며, 입은 얼굴의 반이 될 정도이지만, 팔 다리는 거의 사라진 상태, 즉, 지식은 가득차 있으나, 말이 많은 대신, 십자가의 고난과 영적 통찰력이나, 행동이 없음을 지적한 겁니다. 이러한 형태가 만들어 낸 것이, 2013년의 외침이었습니다. 이 외침은, 종교와 사상의 자유를 외치는, 대학생 자유사상가들의 모임인, 무신론 동아리 “프리 싱커스”가 종교전도 거부카드를 만들어서 화제를 일으킨 외침입니다. 그들은, 전도를 목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에게, 거부의사를 밝히려는 목적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카이스트”에서 먼저 시작된 이 동아리는, 각 대학으로 전파되어, 다른 학교에서도 결성되었습니다. 종교전도 거부카드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저희는 종교가 없습니다. 세뇌로 얼룩진 울타리를 깨고 나와, 세상을 둘러보면,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종교를 만들었다는 것을 더 감동적으로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조용히 어떤 믿음을 갖고 사는 것까지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 저희를 괴롭히지 말아 주세요”입니다. 전도에 대한, 거부감을 갖는 것을 넘어, 단호하고도, 공격적으로 그들의 의사를 표출한 겁니다. 이를 통해, 사회가, 교회를 향해, 얼마나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에 대해, 시애틀 형제교회의 권준 목사님은, 그 분의 저서, “교회만 다니지 말고, 교회가 되라”에서,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인 도요타의 리콜 사태를 예로 들며, 교회도 리콜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곧, 사람들에게 교회란, 성도들의 거룩한 공동체이기 전, 하나의 건물로 인식되어, 주변 사람들에게 교회를 소개할 때에도, “어느 지역에 있는 어떤 교회”라거나 성도의 수나 건물 규모, 혹은 행사 등에 관심을 가진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는 겁니다. 권준 목사님의 “교회만 다니지 말고, 교회가 되라”는 것은, 교회가 세상으로 나가지 않으면, 본질을 잃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본질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데서 찾을 수 있고, 세상의 변혁자로서의 사명을 이룰 때 찾을 수 있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본문 16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교회가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세상을 변혁시켜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 성도들을 위한 것이라는 한계에서 멈춥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러한 담장을 넘어, 하나님이 주신 진정한 복음적 사명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교회의 담장을 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전 인류에게 보여 주신 그 사랑을 품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문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분의 가장 큰 사랑, 고귀한 사랑, 영원한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이루셨습니다. 이 사랑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성자이신 예수님의 생명과 맞바꿀 만큼의 귀한 가치임을 보여줍니다. 부산의 수안교회에서 목회하시다 옥중 순교하신, 최상림 목사님은, 8형제를 키웠습니다. 그런데, 생활이 너무 어려워 잘 키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웃 교회의 장로님이, 목사님의 아들 중, 하나를 양자로 주면, 잘 키워주겠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목사님은 일단 허락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날 사모님과 밤새도록 상의하다가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상의한 것이, “큰 아들은, 명색이 장자이니 줄 수 없고, 둘째는, 몸이 건강한 것이 장래 큰 인물이 될 것 같아 줄 수 없고, 셋째는, 재간이 특출하고 똑똑하여, 공부만 시키면 성공할 것 같고, 넷째, 미남이라 크기만 하면, 저마다 사위를 삼으려 하니 아깝고, 다섯째는, 마음이 좋은 복동이라, 아까워서 못 주고, 여섯째는, 말을 잘하는 것에 매혹되어, 주기 싫고, 일곱째는, 몸이 너무 쇠약하여, 측은하고, 불쌍해서 못 주며, 여덟째는, 그래도 막내이니 어떻게 주겠냐?”는 겁니다. 어느 부모가 세상에서, 자식의 생명과 맞바꿀 수 있는 것이 있겠습니까? 도저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성도된 우리나, 세상의 모든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성자이신 예수님의 생명과 맞바꾸는, 이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를 보면,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커다란 요단강 줄기가 있습니다. 이 줄기의 중간에는, 베드로가 어부생활을 하던, 갈릴리 바다가 있고, 끝자락에는 사해가 있습니다. 같은 줄기에 있는 두 바다이지만, 여기에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갈릴리는, 위에서 받은 물을, 아래로 흘려보내기에, 물이 맑아, 많은 물고기들이 산다는 겁니다. 그런데, 반대로, 사해는, 위에서 받기는 하는데, 아래로 흘려보내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갇힌 물이 되어, 물고기들이 살 수 없는, 죽은 바다가 되었습니다.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에서 만족하지 말고, 그것을 세상으로 흘려보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본문을 다시 보시면,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에서, “그”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변혁시킨다는 것은, 세상에서의 성스러움이나 세속을 떠나, 모든 것을 예수님께로, 하나님께로 연결시키는 겁니다. 옆에 있는 피아노를 보면, 매 예배시간마다 반주자가 건반을 두드릴 때, 아름다운 소리를 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 건반에 연결된 해머가, 팽팽하게 연결된 현을 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피아노가 아무리 비싸고, 화려해도, 모든 현과 헤머가,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피아노의 원리를 보면, 그 속에서, 우리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이, 이처럼, 예수님과의 관계성을 유지해야 함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와 예수님과의 관계성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고,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예수님을 나의 목자로, 예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겁니다. 그것을 가리켜, 본문에서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요 12: 47을 보면,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고 합니다. 새 해를 맞아, 우리와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이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사랑을, 세상으로 전하는 줄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있는 이 곳 송파지역 뿐 아니라, 우리가 있는 그 곳이 어디든, 그 곳에서, 세상의 변혁자로서의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7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교회가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세상을 변혁시켜야 하는 것은, 세상으로 보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마 28: 19 – 20을 보시면,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합니다. 또, 행 1: 8을 보시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요 17: 18을 보시면,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제, 성도들을 세상으로 보냅니다. 세상으로 가는 길이, 쉬운 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세상으로 보냅니다. 성도들을 세상으로 보내는 것에 대해, 예수님은,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다고 합니다. 또, 성도들을 향해,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합니다. 올 해, 우리 교회의 표어는, “거룩한 교회, 다시 세상 속으로”라는 총회의 표어를 따랐습니다. 이 표어의 중심에 있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다시”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파송한 그 자리로 우리는 가야합니다. 본문의 16 – 17을 보시면, “세상”이라는 단어가 4번 나옵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예수님이 대제사장의 기도를 하신, 요 17장을 보면, 17번 나옵니다. 이것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매우 간절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 분이 간절하게 사랑하며, 아끼는 세상을, 성도인 우리에게 맡겼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눅 10장과 막 6장을 보시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만 하지 않고, 제자들에게 전도에 필요한 권능을 이미 주심으로, 변치않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리라”입니다. 본문 속의 “세상”이란,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님의 창조세계”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하게 창조하신 세상이, 첫 사람의 범죄로 타락하자, 심판과 저주의 대상으로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대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성자이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우리가 세상으로 가야 합니다. 그래서, 성자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내려오신 성육신 사건이, 교회에서 일어나게 하며, 또, 우리가 있는 세상 속에서 일어나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세상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 사랑의 실천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우리교회도 복음을 들고, 지역 사회로 들어가야 합니다. 지금까지 행한 노방전도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들과 함께 소통하는 길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 길은, 교회의 게시판을 통해, 언어 이야기, 여행 이야기, 삶의 이야기등 우리의 이야기를 나누는 겁니다. 또, 우리 교회에는, 음악전공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과 함께, 근처에 있는 물안개공원에서, 송파구청으로부터 협조를 받아, 지역주민을 위한 음악회도 할 수 있습니다. 전도지만 들고, 길거리로 나서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이야기를 가지고, 삶 속에서 만나 전하며, 문화를 통해, 지역주민들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으로 파송한 “문화의 변혁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문화가 어떤 모양이든, 그 문화를,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 문화로 이끌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행하신 사역을 보면, 가르치고, 복음을 전파하고, 치유하셨습니다. 그 속에서, 예수님이 계시는 곳곳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습니다. 이는, 그 지역을, 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킨 겁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이들은, 우리와 똑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올 해는, 그들과 더불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세상의 변혁자”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8절을 보시면,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합니다. 교회가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세상을 변혁시켜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한 밤 중, 모든 사람들의 왕래가 뜸한 시각에, 예수님께 조용히 나온, 니고데모와 예수님이 대화를 나눈 내용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세상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은혜이며, 또,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이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지 않게 하려 함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지도자였고, 선생이었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거듭남의 의”에 대해서 알지 못했습니다. 이 “거듭남의 의”는,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한 겁니다. 창 15: 6을 보시면,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무조건적으로 의롭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합 2: 4을 보시면,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거듭남의 의”는, 율법과 선지자들로부터 이미 증거되었고, 온 성경이 일관되게 증언하기에, 니고데모가 놀랍게 여길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음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고, 의롭다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 않는 자에 대해, 본문에서 뭐라고 합니까? 본문을 다시 보시면,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합니다. 그럼, 구원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 예수님을 믿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요 14: 6을 보시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고서는, 아무도 하나님께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행 4: 12을 보시면,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고 합니다. 주기도문을 보면,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신비의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나라”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왕으로 세우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성도입니다. 왜? 성도입니까? 내 자신보다 하나님을 앞세우고, 하나님의 말씀에 먼저 순종하고, 그 말씀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성도라면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내 뜻을 먼저 따른다면, 성도가 되겠습니까?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이나 제사장들, 율법사들이 예수님께 칭찬을 받았습니까? 하지만, 로마 사람인 백부장에게는,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고 칭찬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철학적인 “유토피아”가 아니라, 눈부시게 발전하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 없이도, 사람이 주체가 되어, 사람을 구원하고, 과학기술이 완전한 행복을 가져다 줄 것으로 착각하며, 생활의 편리와 풍요 속에서 탐욕스러워 가는 것을 막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하여, 하나님을 의지토록 변혁시키는 가운데 임합니다.
여러분, 지금의 우리가, 당장에 할 수 없다하여, 흰구름을 보듯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살며, 우리가 있는 그 곳의 문화를 변혁시키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 성도인 우리의 과제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 우리는 성경을 읽고 알아야 하며, 이를 위해서, 우리는 전도해야 합니다. 올 한 해를 지내는 가운데, 우리 모두가, 우리 주변의 문화를 하나님의 나라로 변혁시키는, “문화의 변혁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