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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돌이 까치’ ‘공포의 외인구단’ ‘남벌’ ‘천국의 신화’….
젊은 시절 이 만화를 안읽어 본 40대는 거의 없다. 그의 만화는 전국 만화방에 깔렸다. 1980~1990년대 한국 만화계의 최고 인기작가로 ‘노래는 이문세, 만화는 이현세’라는 말도 생겼다. 지금은 대학 교수로 후학을 가르친다. 여전히 만화도 그리고 웹툰도 시도한다. 그의 이름 앞에는 ‘한국 만화의 거장’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바로 까치의 아버지 이현세(65) 작가다.
“한 직업으로 65살까지 올 수 있는 것은 큰 행운이었다. 덕분에 대학 교수도 했다. 젊은 청춘이 바꿔가는 세상을 옆에서 바라보면서 공감할 수 있다는 것만큼 행운이 있을까.” 서울 개포동 화실에서 만화가 이현세 작가를 만났다.
“혼자 책을 보거나 만화 같은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외로움을 즐기는 아이였다. 다락방에서 김유신 장군묘가 있는 서산에 해지는 것을 보며 공상에 빠지기도 했다. 낮에 있던 괴로운 기억도 내 세상 속에서 모두 사라졌다”
자기 세계에 빠져 살던 꼬마 이현세는 국어와 같이 좋아하는 과목만 잘하는 조용한 청소년으로 자랐다. 여전히 책을 보고 만화를 그리는 것은 좋아했다. 이현세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일이 터졌다.
◇빨갱이 집안 원죄 “세상은 내편 아니다”
하루는 저녁에 집에 들어왔는데 할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무언가를 태우고 있었다. 다락에 숨겨놓은 돈다발이었다. “할머니 뭐 태우는 거에요?” “니는 몰라도 된다.” 이현세는 그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할머니가 다락에 숨겨놓은 돈이었다. 북한에 살고 있는 작은 삼촌이 한국전쟁 때 고향에 내려와 북한 돈을 한자루 주고 갔다고 한다. 다시 삼촌은 북한으로 올라갔고, 집안은 빨갱이 집안으로 낙인찍혔다. 큰 삼촌도 포항 수용소로 끌려갔다 사망했다.
그 돈은 할머니에게는 옆에 없는 자식을 생각나게 해주는 유일한 연결고리였다. 옛날 돈이나 유물로 보이는 깨진 기왓장 같은 걸 가져다 주면 요즘 돈으로 바꿔주는 학교 선생님이 있었다. 동생이 북한 돈 몇 장을 몰래 꺼내 그 선생님께 바꿔달라고 했다. 선생님은 ‘어디서 난 것이냐’고 동생을 다그쳤다. 무언가 잘못한 것 같다고 직감한 동생은 길에서 주었다 말하고 돌아와 할머니께 사실을 털어놨다. 할머니는 동생의 말을 듣고 체념한 듯 돈을 꺼내 태우고 있었다.
“할머니가 아끼던 것을 태우는 모습도 충격이었지만, 이 나라가 나에게 안전하지 않은 곳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그 뒤로 공부에도 뜻을 잃고 삐딱선을 탔다.”
대입을 앞둔 시기에 유도에 빠졌다. 남을 던지는 것도 좋았고, 상대방이 자기를 던지는 것도 좋았다. 답답함을 창으로 쑤시는 것처럼 좋았다고 했다. 수업을 마치고 유도를 하고 나면 피곤해 공부를 할 수 없었다. 유도부 친구랑 불량 서클에도 들어갔다. 술과 담배를 배웠고 여자를 만났다. 그래도 시와 소설, 그림은 놓치 않았다.
“시와 소설, 그림을 사랑하는 불량소년이었다. 서클 가입이 탄로나 정학을 맞기도 했다. 그래도 미대는 들어갈 수 있을 정도 성적은 나왔다. 그런데 미대 입학을 위해 신체검사를 하는 데 적녹색약이라고 했다. 적녹색약은 미대 입학 자격이 없었다. 한 달 동안 모든 걸 포기하고 술만 마시고 살았다.”
그렇게 이현세의 10대가 끝났다.
“나라와 사회, 자신의 재능과 운명 어느 쪽에도 내 편은 없었고 편한 것도 없었습니다.”
◇세상에서 도망치려 만화가 문하생으로
만화를 좋아했지만 만화가를 할 생각은 없었다. 그의 어린 시절은 만화는 불온했다. 어린이 신문에 어린이 날에 불량만화 화형식을 했다는 기사가 나올 정도였다. 만화를 그리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만화는 이현세가 생각한 유일한 탈출구였다.
“미대 입시도 못보는 빨갱이 집안 자식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숨고 싶었다.”
서울에 살고 있는 친구가 만화를 그리고 싶다고 하니 서울과 경기도에서 활동하는 만화가 화실 주소를 알려줬다. 이작가를 끌고 만화가를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하지만 이작가에게 일감을 준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버스만 타면 멀미를 심하게 했다. 지친 얼굴로 세상에서 도피를 하려는 사람을 누가 문하생으로 쓰겠나. 만화가들도 본능적으로 알았을 거다.”
그렇게 4일을 만화가를 찾아다녔다. 서대문구 모래내에 있는 만화가 나하나 작가가 일을 배워보라고 했다. 나하나 작가는 큰 인기가 없는 순정만화 작가였다. 낮에는 만화를 그리고 밤에는 밤무대 가수로 일했지만 벌이는 둘다 시원치 않았다.
결국 6개월을 못버티고 다시 경주로 내려갔다. 마침 할머니가 울진에서 문중 제사가 있다고 해 할머니를 모시고 울진에 갔다. 친척들과 어울리다 충격적인 사실을 알았다. 자신이 양자로 입양한 아이였고, 지금까지 자기를 키워준 어머니가 숙모였다는 사실이다. 숙모로 알고 지낸 사람이 바로 어머니였다.
“다른 친척들은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데 너무 큰 배신감이 들었다. 또 그걸 눈치 채지 못한 자신의 둔함에 더 화가 났다. 더 이상 고향에서 살 수 없었다. 도망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 만화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서울로 다시 올랐다.”
이번에는 명랑만화가로 제법 인기가 많은 이정민(작가명 하아미) 작가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합숙여건도 좋았고 식사도 훌륭했다. 아무 생각 없이 만화만 그릴 수 있는 시간이었다.
“만화를 그리다 돈이 모이면 명동에 가서 외국 만화책을 사서 봤다. 우리나라 만화는 조악한 인쇄에 단조로운 내용이 대다수였다. 그런데 외국 만화는 세계관도 넓고 그림도 일반 회화에 비해 떨어지지 않았다. 책은 또 어찌나 고급스러웠는지 모른다.”
이작가는 외국만화를 보며 한국만화의 미래를 봤다. 하지만 자신이 하는 일은 쓰레기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년잡지사에 취직해 일본만화를 베껴 그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만화를 베끼면서 연출과 캐릭터 설정은 유심히 봤다. 자기 만화를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아직 이야기를 잘 풀어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이작가는 1978년 월남전 패망을 다룬 ‘저 강은 알고있다’로 데뷰했다. 그때는 10만원(현재가치 70만원 수준)도 못받았다. 푼돈을 받으면서 자신도 왜 만화를 그리는 지 모르면서 계속 만화를 그렸다.
“대부분 어린 시절 기억과 영화를 짬뽕한 것들이거나, 당시에 인기있다 싶은 것을 따라 그린 것이었다. ‘저 강은 알고 있다’도 월남전이라는 시대상황을 빼면 밋밋한 이야기일 뿐이다. 즉흥적이고 충동적으로 만화를 그렸지만 ‘왜 그렸는지’에 대한 답을 주지는 못했다. 그런데 그런 쓰레기들 속에서도 건질게 나왔다.”
◇반항아 까치에 내 모습 투사했다
왜 만화를 그리는지 이유를 찾지 못했던 이작가는 결혼 혼수로 마련한 TV에 빠져있었다. 하루는 주말의 명화에서 존 웨인 주연의 ‘지상 최대의 서커스’를 방영했다. 어린 시절 아련하게 들었던 곡예단이 추억이 떠올라 미친듯이 원고를 썼다. 어린 시절의 기억과 영화가 뒤섞여 있는 글이었다. 다 쓰고 읽어 보니 역시 쓰레기 같았다. 분한 마음에 원고지를 구겨버리고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원고지가 책상 위에 곱게 펴져 있었다. 부인이 밤새 원고지를 다리미로 펴 놓은 것이다. 자기가 읽어보니 너무 재미있다고 그림을 그려보라 권했다. 애니메이터였던 부인의 조언에 힘입어 작품을 완성했다. 원고를 가지고 신생출판사에 갔다. 사장이 원고를 읽더니 너무 재밌다며 현금으로 120만원(현재가치 730만원 수준)을 줬다.
“당시 잠실 아파트 한채가 1000만원 정도로 기억한다. 정말 큰 돈이었다. 사장이 위험하니 ‘집에 돈을 잘 보관하고 술마시러 나가라’고 했다.”
이작가는 여전히 그 때 원고는 쓰레기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만화가 이현세의 지금을 존재하게 만든 작품이다. 바로 까치가 처음 등장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바로 ‘시모노세키의 까치’(1979년)다. 이작가는 이후 다른 만화가와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세상과 타협하고 체제에 순응하는 캐릭터가 아니라 반항하고 뒤엎는 까치를 내세웠다. 자기 이야기를 작품에 담기 위해서다.
“시모노세키 시리즈 2개를 내고나서 까치를 내세워 ‘까치의 5계절’이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로 내 첫 작품이다. 주인공 까치에게 내 모습을 많이 반영했다.”
◇화실 문 닫고 1년 간 휴가 떠날 것
이작가에게 요즘 웹툰 지망생은 옛날과 비교하면 천국 같은 환경에서 만화를 시작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작가가 강의하는 만화애니메이션학과에 들어가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학원에서 만화 수업을 듣는 아이들도 있다. 예전 만화는 정권을 홍보하는 수단이거나, 저급문화로 취급 받았지만 이제는 당당한 문화콘텐츠로 자리잡았다.
“만화를 그리겠다고 서울로 갔더니 할머니가 한달을 앓아 누우셨다. 예전에 만화가는 어두운 골목길을 걷는 사람이었다면 지금 웹툰작가는 대중의 선망을 받는 인기인이다. TV에도 나오지 않는가.” 그래도 웹툰에 도전하는 젊은이들, 아니 모든 청춘은 불안하다. 불안한 청춘에게 이작가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하나 밖에 없다. 고생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나를 믿고 가야 한다. 오지 않을 미래를 두려워하면 만화를 그릴 수 없다. 이제 만화가는 비전도 있고 재밌는 직업이다. 많은 아이들이 인기작가가 될 수 있을까 물어본다. 내 대답은 ‘자신을 믿어라’다.”
이제 이작가는 역사 4부작을 마치고 1년 정도 휴가를 다녀올 생각이다. 휴가 중에도 강의는 계속 하지만 만화는 그리지 않을 것이라 했다. “이제 1년 정도 화실 문을 닫을 생각이다. 데뷰 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제대로 놀아보지 못했다. 70부터 무엇을 하고 살 지 진지하게 생각하려고 한다. 화실 문을 닫고 강의만 하면서 1년을 보내고 싶다. 새롭게 부활해 혁명을 꿈꾸던 지, 아니면 자연인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즐거운 삶을 사는 노인일 수도 있고, 동화작가를 하면서 아이들에게 내 이야기를 들려줄 수도 있을 것 같다. 어떤 결정을 내릴지 모르지만 마침내 휴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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