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혁재 시인 시 작품론/ 이승희(시인)
역사와 삶의 불화 속을 걷는 시
이승희
익숙한 것은 지나간 것인가? 그렇다면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일 뿐인가? 삶에서 지나간 것이라는 게 있을 수 있는가? 익숙한 것은 새로운 것이 될 수 있는가? 물론 익숙하다는 이 표현조차 시를 읽는 개인에 따라 그 편차가 아주 큰 것이어서 그것이 정말 익숙한 것인가에 대해서도 의문이 남는다. 다만 최근의 우리시의 전반적인 경향에 비추어 볼 때 권혁재 시인의 시를 읽으며 이와 같은 질문을 해보는 것은 그의 시를 읽는 또 다른 재미와 의미가 된다.
권혁재 시인의 시는 총 3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1부에서는 제주 4∙3의 역사적인 사건을 재구성하고 있으며, 2, 3부는 외국인 노동자의 삶을 비롯하여 소외된 사회적 약자와 타자들을 향한 시선이 특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익숙하다고 했던 것은 이러한 시인의 사회적 시선을 우리는 80년대에 이미 극단적으로 겪으며 지나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욱 혼란스러운 것은 현재의 우리 시의 경향에서 젊은 시인들의 자아와 해체의 분열, 그에 따른 실존적 불안의 유희적 극대화 혹은 이에 따른 자기 유희의 과잉도 없지 않다고 볼 때, 자아의 또 다른 얼굴이 될 수 있는 역사와 사회를 구성하는 타자성에의 응시와 인정, 불화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태도는 오히려 낯설게 보인다는 것이다. 즉, 분명히 겪어왔던 익숙함이 왜 이렇게 낯설게 보이는가라는 점이다.
이미 익숙한 것이 다시 낯설게 보이는 것은 그것이 지나간 것이냐의 문제보다는 지금 현재 시의 경향에 비추어 그렇다고 보아야 할 것인데, 이런 낯섦은 우선 시인의 시선에서 찾을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이러한 역사적 사회적 불화가 아직 끝나지 않은 문제이며, 이러한 시선을 통해 시인은 그것들과의 적극적인 대화와 응시하기를 시의 동력으로 삼고 있다는 데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1990년대 이후 문학의 탈정치화가 거짓말처럼 이루어졌다. 물론 완전히 사라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 색깔을 달리할 뿐 어쩌면 단 한 번도 멈춤 없이 나아가고 있는 흐름이라 해야 할 것이다. 여전히 세계는 불완전하며, 부조리하고 이는 앞으로도 거의 영원히 그러할 것이고, 우리 사회로 줄여본다 하더라도 여전히 억압과 차별의 문제는 사라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촛불’에 이르기까지 정치적이지 않은 문제는 사실상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 시에서 이러한 문제에 대한 시선과 응시는 잘 보이지 않는가. 오히려 이런 문제들은 더욱 내재화되고 일상화되어 그것의 본래적 위험과 공포를 완전히 잊고 지내는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도 가능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의문과 질문에 답을 내놓을만한 역량이 되지 않으므로 더 이상 논의를 진행시켜나갈 수는 없지만 권혁재 시인의 시를 읽으며 이러한 생각을 다시금 해볼 수 있다면 그 또한 시인의 시가 던지는 아주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한다.
현실의 부정성 적발과 비판에 열심이었던 1980년대로부터 지금의 시의 경향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흐름에 비하자면 권혁재 시인의 시는 경향상 분명히 ‘지금’적인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때문에 익숙하다고 할 것인지, 낯설다고 할 것인지,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해야 할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문학적 역량이 크지 않은 사람으로서 여기서는 권혁재 시인이 향하고 있는 타자와 사회적인 시선의 의미에 대해서 개별적인 의견만을 더할 수 있을 뿐이다.
우선, 권혁재 시인의 시는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다는 말로 시작해 본다. 이전의 참여시에서 나타나는 획일화된 정치성과는 분명히 결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한 정치성을 통해 무엇을 전달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어쩌면, 시는 무엇인가라는 아주 근본적인 질문으로도 읽을 수 있다. 시를 통해 무엇인가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재적 삶을 통한 그 이후의 것들에 대해 생각해볼 수는 있으며, 그것을 변화의 동력으로 삼아 인식의 확정을 가져옴으로써 그러한 결과가 나오기도 하는 것 역시 시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시가 개인의 삶 외에 다른 것을 말하지 않는다면 조금 슬프다. 물론 시인 개인의 삶이란 문학으로서 양식을 통해 개인화되거나 개인에 머무르지 않으며, 개인적으로 보인다 할지라도 당대의 시 정신을 반영할 수밖에 없지만 그보다는 삶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에 대한 말이다.
권혁재 시인은 자신의 여섯 번째 시집인 『안경을 흘리다』(지혜. 2018)에서 자신의 사회적 시선에 대한 자세와 믿음을 굳건하게 보인 바 있다. 시집의 작품 해설을 맡은 김병호 시인은 “삶의 양심적 비밀을 감각적으로 인지하는 시인이며 대립과 분리, 만남과 이별의 형식적 가교로서 시를 구축하고 삶의 예술이 지닌 비극과 전망을 삶 전체의 맥락에서 구축하고자 하는 시적 모험을 서슴지 않는 시인이며 이번 시집 ‘안경을 흘리다’에서 외국의 이주 노동자의 현실에 대한 일반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작품으로서의 생산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시집에서는 쌍용자동차 노사 대립 당시 노동자의 아픔 읽어내는 시를 비롯하여 현실의 구체적인 아픔과 부조리함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싸움을 걸기도 했다. 김석준 문학평론가는 그 시집에 대해 ‘시의 횡단: 사랑과 현실 사이의 경계에 서서’ 있는 시라고 단언하고 “시적 정체가 비판적 리얼리즘에 입각한 현실 문제를 취재하고 있기는 하지만 시의 횡단면을 가로지르는 말의 궁극적 주체는 이 세계에 남아있는 것으로 믿어지는 마지막 양심이다”라며 “시인이 육화 시킨 일련의 언어 지층이 세계의 아픔과 공명하는 순정한 의식을 사랑의 전언으로 응결시킨 것처럼 이 시대의 고통을 시의 가난으로 노래한 혁명에의 열망은 시가 감당해야만 하는 시대사적 소명임에 틀림없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그동안의 시인의 발걸음을 보면 시인이 바라보고자 하는 세계의 방향이 분명히 읽힌다. 그러나 조금 더 집중해야 할 것은 그러한 방향성이라기보다는, 그러한 방향성을 어떤 방식으로 끌어가고 있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끝나지 않은 문제들, 정치를 넘어
이 세계 속에서 살아있는 모든 것은 정치적이다. 다만 그것이 어떤 형태로 잠재되어 있는가 드러나는가의 문제만 있을 뿐이다. 문학이라는 예술장르가 때론 전위적이고 파격적인 것 같지만 현실 속에서 보자면 그렇게 느껴지지 않을 때가 많다. 권혁재 시인이 앞서 드러낸 이주 노동자들을 비롯하여 여전히 열악한 작금의 노동 현장은 물론이고, ‘촛불’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는 잘 맞지 않는 톱니처럼 이를 드러내고 어긋나기도 한다. 물론 그런 과정을 통해 진보하고 더 큰 의미에서 그것조차 하나의 과정이라는 인식도 가능하다. 이러한 배경에서 사회적 시선을 강하게 드러내는 시가 오히려 낯설게 느껴지는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는 좀 더 논의가 필요한 문제임에 분명하다. 그것은 지나가고 익숙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1부에 실린 시들은 시사하는 바가 자못 새롭다.
1부의 시들은 아직도 역사적으로 미완결 상태인 제주 4.3 항쟁을 역사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80년대 중반에 당시 금서였던 이산하 시인의 『한라산』을 읽었던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그래도 어느 정도 객관적 문제 해결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분명하게 밝혀야 할 역사적 사실과 그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가 새롭게 정리하고 의미를 찾아야 할 부분들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달빛이 구멍 난 신발코로 들락거릴수록
밤은 더 무기력했고
허기는 개머리판에 얹힌 손을
부르르 떨게 했다
손에서 미끄러진 총이
고사목 가지를 부러트리며
밭으로 떨어졌다
패인 밭고랑에서 불에 타지 않은 지슬이
화약 냄새를 품은 채
불안한 씨눈을 깜박거리며 까맣게 웃었다
밤이 오고 다시 찾아온 적막
사람들이 하나 둘 지슬밭으로 내려와
아린 지슬을 씹어 먹으며
내년도 농사를 걱정했다
내일을 알 수 없는 숱한 이야기들이
텅 빈 밭에서 지슬꽃으로 져버린
애기무덤들 위로 유성처럼 떨어졌다
마지막 하지 지슬이 바닥나면서
지슬밭은 마을의 공동묘지가 되었다 .
* 지슬 - 감자의 제주도 사투리
- 「지슬밭」전문
국가가 국민을 학살한 사건을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 그리고 이에 대한 많은 부분들은 아직도 4.3을 겪고 있는 피해자와 유족들을 비롯하여 진상규명에 이르기까지 현재 진행형이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제주 4.3 평화공원에 있는 비문 없는 비석인 ‘백비’다. 제주 4.3 항쟁의 진정한 해결이 이루어지는 날 비로소 비문이 새겨질 것이며, 누워 있는 비석도 세워질 것이라고 한다.
문학은 제주 4·3사건의 역사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 가장 선도적이고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1978년 발표된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은 기념비적 작품임에 분명하다. 시의 경우도 80년대 후반에 들어 이산하 시인이나 김수열 시인 등을 통하여 4·3을 의미 있게 포착한 작품이 나오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도 대학시절 당시엔 금서였던 이산하 시인의 시집을 읽고 받았던 충격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후 이 문제에 대해 특별법이 제정되고 공식적으로는 어느 정도 명예회복이 이루어졌지만 아직 풀어야 할 과제들이 많이 남아있는 상황이다. 권혁재 시인의 이번 시집에서 제주 4.3을 중심적 배경으로 한 시는 1부에 걸쳐 모두 스무 편에 이른다. 적지 않은 분량이다. 우선 4.3을 다룬 시 작품들은 많지 않다. 그러나 이 시들이 낯설지 않은 것은 그동안 권혁재 시인의 시가 걸어온 길을 생각할 때 자연스럽게 읽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시인의 시선은 이미 오래전부터 개인적 내적 성찰이라는 부분보다는 그 시각을 역사적, 사회적으로 넓혀오는 작업을 충실히 해왔기 때문이며, 따라서 그런 시선의 연장선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오늘날 우리 시에서 삶은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개인의 성찰이나 사유 또한 사회적인 것이며 정치적이고 삶의 모습임에 분명하다. 시가 꼭 사회적 실천을 보여주거나 보증해야 한다고도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국시가 유행처럼 미적으로만 싸우려고 하는가에 대해서는 그래도 한번쯤 논의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이것을 굳이 삶의 실천적 현장이라고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오히려 지금 우리는 다양성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는 없을까 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권혁재 시인의 시는 반갑고 많은 의미와 화두를 던져주고 있다. 특히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시인의 시들은 어떤 주장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치적 개념의 정치성을 드러내지도 않으며, 무엇을 강요하거나 방향을 만들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 지점의 시선으로 4.3을 보여주고 있다. 인용한 <지슬밭> 역시 매우 서정적이다. 짧은 단편을 읽는 느낌도 있는가 하면, 한 편의 액자 그림을 보는 듯도 하다. 자신을 불필요하게 드러내지 않으며 극도로 담담하게 풍경을 그려내는 데 충실하고 있다. 1부의 시 전체를 통해서 혹은 개머리판, 총, 화약 냄새, 지슬 등을 통해 시의 배경을 알게 된다.
4.3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1부의 시들은 이러한 시인의 시선과 태도를 끝까지 유지하고 있는데, 이러한 진술 방식은 실제 배경이 되는 지명과 역사적 사실을 통해 한 편의 시로써 높은 완성도와 함께 깊은 울림을 전해준다. 절제한 서정적 진술이 오히려 더 큰 울림을 만들어 주는 힘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고나면 오름 같은 무덤이/ 촘촘히 더 늘어나는 안개의 섬/ 제삿날이 한날이고/ 한 마을이 무덤 더미로 변한 채/ 곡성을 타고 휘돌아 다니는/ 안개의 섬이 남쪽에 있었다.”(<안개의 섬> 부분)든가, “억새가 타는 냄새가/ 모슬포 쪽에서 부는 바람에 섞여/ 대평리까지 날아들었다/ 겁먹은 화순해변이 검게 변해/ 연기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소개疏開가 되지 않은 외딴집에서/ 몇 발의 총성이 마른번개처럼/ 하늘을 가로지르며 들려왔다/ 진압대가 지나간 마을 어귀마다/ 전향을 알리는 삐라가 부고장처럼/ 정낭에 얹혀 있었다”(<삐라> 부분) 등 역사적 사실을 구체적이면서 건조하게 진술하고 있다. 또한 <잠복 학살터>, <연좌제에 걸리다>, <삐라>처럼 제목만으로도 4.3의 역사를 극적으로 드러내는 부분도 있다. 이를 통해 권혁재 시인은 자신만의 시선과 방법으로 제주 4.3을 오늘의 현실로 소환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4.3이 그저 이미 지나간 역사의 한 부분으로 인식되거나 혹은 박물화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거듭 확인하고, 아직 밝혀지지 않은 역사적 사실과 의미를 더욱 고찰해야 한다. 그것이 최소한 역사에 빚진자의 자세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각 경계의 접속 면에서 4.3문학의 새로운 지평은 구두선(口頭禪)이 아니라 문학적 실천으로 구체화 되어야 할 것이다.
삶의 현실성에 대한 아름다운 연대감
2부와 3부의 시 역시 그동안 권혁재 시인의 시작 방향과 같은 궤를 보여준다. 삶과 현실의 불화 속을 살아야 하는 것은 시인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들이 겪고 있는 문제이다. 그러니까 삶의 소외문제는 어느 한 집단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적 가치로 획일화된 세계에서 아예 삶의 바깥으로 내몰린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언제나 주변으로 살아가는 듯 보이고, 그렇게 취급받는다. 그렇지만 권혁재 시인의 시에서는 다르다. 시인의 시 속에서 그들은 주체적으로 등장하며, 주체가 될 수 있는 건강성을 보여준다. 작금의 자본주의적 가치가 아닌 삶으로서의 건강함, 그것을 보여주는 주체적인 존재인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매우 귀하고 아름답다. 정치적인 시각과 의미를 모두 배제한다 하더라도 그렇다. 삶의 불화를 건너가는 일에 대하여 분노하고 충실했던 80년대가 아니라 하더라도 이런 문제는 언제나 우리 삶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시가, 시인이 어떻게 우리 삶의 현실에 무감각할 수 있는가. 이는 고전적인 문제제기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는 문학이 존재하는 한 끝까지 함께 남아있는 과제임에 분명하다. 이 세계가, 이 사회가 완벽하게 정의롭지 못하다면 말이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권혁재 시인이 보여주는 시의 미학은 오히려 새롭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궁리항 방파제에 쪼그려 앉아/ 물새소리로 우는 여자”, “회항한 배에서 새로운 물고기가/ 먼 바다의 냄새로 부려질 때마다/ 매번 다시 바빠지는”(<사연>)모습이나, “아저씨 나에게 마사지를 받아주세요/ 아버지의 손목을 자른/ 한국 사람에게는 원망이 없어요/ 아버지가 벌지 못한 돈을/ 이제는 내가 벌어야”(<뚜이 부분>)하는 뚜이, “이 년을 더 불법 이주노동자로 떠돌거나/ 숨어서 견뎌야 해요/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마사지 손님을 받”(<라니 1>)는 이주노동자의 삶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석문방조제에 늘어선 포장마차
철조망에 널린 우럭의 아가미에
낮 시간을 삼킨 도마질 소리와
바다를 먹은 흔적이 붉게 걸려 있다
방파제 사이로 사리 때의 파도가
매끈한 하얀 다리를 내밀었다 거둬가는 사이
달이, 서치라이트처럼 떠올라
그녀를 검게 비춘다
썰물 때를 맞춰 밀려드는 갈매기떼처럼
끝없이 들락거리는 단골들
한번쯤은 수족관을 뛰쳐 넘어
바닥에서 펄떡이는 광어처럼 한 마장 쉬며
지느러미를 은빛물결에 출렁이고 싶은 것이,
횟감을 저밀 때마다 팔 끝을 타고 찌릿찌릿하게
온몸으로 흐르기도 하는 것이,
오래전 당나라로 사신가는 낭군을
눈물도 없이 배웅한 당찬 여인네이기도 한 것이,
회항한 배에서 새로운 물고기가
먼 바다의 냄새로 부려질 때마다
매번 다시 바빠지는 그녀의 손
바다에 잘 절여진 그녀의 작은 손이
도마를 친다, 바다를 친다
일찍 나온 낮달이 홍조가 진 볼에
제집처럼 얹히는 당진 여자.
- 「당진 여자」전문
<당진 여자> 속의 주인공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주목받을 것 없는 평범한 우리 이웃의 모습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어쩌면 가장 특별한 모습을 발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구체적인 삶의 현장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을 바라보는 시인의 애정이 느껴지는 때문이다. 서정적 혹은 ‘서정’을 마치 낡은 것처럼 보는 경향도 없지 않지만 오히려 서정은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다. 그리고 그 서정이 우리 삶의 현실을 바탕으로 하면서 미학적 형상화를 이루어간다면 그것은 감정의 과잉이 아니라 삶의 건강성을 드러내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권혁재의 시에서 보이는 건강성도 그렇다. 조금은 쓸쓸함의 정서를 담고 있지만 곤궁함이나 아픔에 대한 비애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시인 자신이 연대하는 마음을 담아냄으로써 그의 시가 건강성을 획득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궁극적으로는 이는 비애와 섣부른 낙관을 넘어서는 삶의 건강함을 담아내는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아저씨 나에게 마사지를 받아주세요
아버지의 손목을 자른
한국 사람에게는 원망이 없어요
아버지가 벌지 못한 돈을
이제는 내가 벌어야 해요
다달이 들어가는 어머니의 약값에
어려운 생활비도 내가 보태야 해요
내가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손에 힘이 저절로 들어가요
고향 호아빈에 남아 있는
동생들의 얼굴도 또렷이 떠올라요
성치 않은 아버지의 몸을
시퍼런 지폐로 가득 덮을 수 있게
착한 아저씨, 팁 많이 주세요
아버지가 제대로 받지 못한
빳빳한 한국 돈 많이 주세요
집에서 순대국밥을 기다리는 아버지가
빨리 오라고 잘린 손을 흔들어요
아저씨 이왕에 마사지를 받을 거면
나, 뚜이에게 받아주세요.
- 「뚜이」부분
이주노동자의 시각을 빌려 말함으로써 보다 현실의 구체적 상황을 극대화하고 있다. 더불어 가장 현실적인 문제를 가감 없이 드러냄으로써 이주노동자의 현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이는 물론 시인의 시각을 빌려서 나온 것이지만 이들의 삶이 품고 있는 현실과 희망, 절망의 감정들에 곧바로 다가갈 수 있게 한다. 이들의 삶이 이렇게 가장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드러난다는 것은 현재 우리 사회가 그들의 삶에 어떻게 개입되어 있는가도 드러내는 사회적 의미도 갖게 된다. 이에 대해 시인은 모든 말을 감춘 채 담담하게 드러내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가 느끼는 연대감을 말없이 보여주는 셈이다.
시와 삶과의 거리를 줄이고, 삶을 통해 시를 출발시킴으로써 자신만의 사회적 서정시라고 부를만한 작업들을 꾸준히 해나가고 있는 권혁재 시인의 시는 다시 한번 시의 역할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그의 시를 어떤 장르에 못 박을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지만 자신만의 시선으로 우리 삶의 건강성을 발견하고 호명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치열한 시인의 모습이라 할 것이다. 부조리한 삶의 현실 속에서 만나는 역사와 사회적 타인들에 대하여 스스로 평등하게 함께 묶이고 연대하고자 하는 마음이 그의 시를 이루는 시인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한 편의 시는 우리의 삶에서, 이 각박한 현실에서 어쩌면 아무것도 해줄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란스럽지 않게 그러나 당당하게 삶을 껴안고 가려는 시인의 발걸음은 그것 자체로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끝.
---------------------------------------------------------------
이승희
199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