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하는 회전문 외 4편
안은숙
투명한 십자가를 통과하는 사람들
저곳을 부흥이라 불러도 될까
돌고 있는 회전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튕기듯 돌아 나오는 사람들
저것을 분쇄라 불러도 될까
투명한 십자가를 중심으로
원통형의 길목을 평생 돌고 도는
저것을 종사(從事)라 불러도 될까
처음엔 천국이었다가, 천국의 입구였다가
결국엔 지옥이라고 알아차리는 사람들
아침만을 골라 빼앗아가는 전지전능한 출구
벌어진 와이셔츠, 맨살 드러낸 다리, 펄럭이는 치맛자락 모여드는 곳, 깜박 잊은 속옷, 열린 지퍼들, 뒤집힌 스타킹 총총걸음으로 모여드는 곳, 평생 바람 막아주는 문* 가끔은 불투명한 입술이 붉게 매달려 있거나 허둥지둥 꼬인 것들이 스르르 풀어지고 있죠
찬양과 반복되는 복음 말씀의 의자들
부흥을 갈망하는,
오늘도 허탕을 쳤다는 듯 힘없는 회전을 기다리는 저녁
하루라도 회전하는 입으로 폭식하지 않으면
못 견디는 부흥하는 회전문
한 권으로 묶인 유구한 종속
별과 폭음의 구약 속으로, 저녁의 자유 속으로
줄줄이 퇴근하는 행렬
신성한 휴식으로 잠기는 회전문.
*1888년 미국 벤 카넬이 발명한 회전문의 이름
꽃샘추위 목도리
이른 꽃들은 이른 추위를
목도리처럼 두르고 있다
약간의 물기로 키를 늘려가는
건조한 사막의 주민 같은 봄꽃들
겨울 동안 가장 먼저 녹아 도착한
우물을 퍼 올려 꽃을 피운다
꽃받침 같은 목도리를 두르고
벌의 풍속으로 기침을 하기도 하는 여자들
세상의 목도리들엔 보풀 같은 추위가 묻어있다
느슨한 매듭으로 묶인 쌀쌀한 외출, 목이 짧은 식물들이 마른 침을 넘기듯 핀다
꽃샘추위를 목에 두르고 외출에서 돌아온 날
몇 개의 모래 구릉이 탁탁 털리거나
한쪽에 둘둘 말려져 구겨져 있다
스르륵 목도리가 풀리듯 꽃이 지는 일도
열대성과 한대성이 서로 몸을 나누고 있는 일도
긴 직조의 날씨를 목에 두르고 합성섬유의 열기로 하는 말을 듣는
어느 강의실이 떠오르곤 한다
목을 내놓고 보낼 수 있는 봄이 많지 않지만
가늘고 파란 핏대를 세우고 있는
봄꽃들의 목
올봄, 추운 말들을 삼키고 싶지 않아요
따끔거리는 가시 두른 날씨를
따끔거리는 침으로 키우고 싶지 않아요
몇 겹의 추위를 목에 두르고
서쪽의 바람으로는 숨 쉬고 싶지 않아요.
물의 식자공
중앙공원에 펼쳐져 있는
파문이 정렬되는 한 권의 물 가득한 책
공원 인부들이 탁한 책의 내용을 갈고 있다
물때처럼 일어나는 누런 낱장들
던져진 조약돌 하나가 글자로 식자되고 있다
딱 중간쯤으로 펼쳐진 페이지에는
구름이 접혔다 흘러간다
제목으로는 노간주나무 하나 세워두고
책의 내용들이 주름으로 휙휙 넘어간다
내용 사이로 가끔 비행기가 지나갔고
그럴 때면 밑줄을 긋거나
문장의 여백에 투명을 접어놓는다
행간에 몇 마리의 새는 보이지 않는다
계절에 따라 적절하게 내용을 수정하는 책
모두 한때 책의 내용이었다는 듯 앉았다 간다
책의 내용을 알려면 나무를 흔들어야 한다
빠져서 발을 적셔야 아는 문장이다
빗방울을 모아 구두점을 찍거나
소금쟁이들을 풀어놓아 슬쩍,
내용을 바꾸기도 하는 물의 책
물때가 낀 책을 청소하는
물의 식자공들
다시 물이 채워지고 뒷장과 앞장의
내용들이 맑게 고이고 있다
흔들리는 제목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책의 페이지에 손을 넣어 씻는 일로 돌이켜 보면
세상에는 제목을 흔드는 손들이 있다.
과꽃 등기소
숫자들이 모여든다
모여든 숫자들은 다시 기록이 된다
확정의 창고
무한한 등재의 날짜들
숫자를 받는 일로 시작되는 일생
오래된 등기소에는 관습처럼 열려 있는 정문이 있다 미완의 숫자들은 이곳에 와서 날짜가 된다 엉킨 숫자와 같은 등나무가 있고 확인필 도장을 찍기 위해 과꽃은 필수다 과꽃 씨앗을 손바닥에 받으면 열 개의 숫자밖에 되지 않겠지만 후-불면 꽃밭이 되고, 대문이 달리거나 계단이 생긴 숫자마다 과꽃 같은 확정의 도장이 찍혀 있다
노란 은행의 촉탁으로 기록된 나뭇잎이 올가을도 기한이 다 되었다고 떨어진다 점심시간을 기다리는 직원들 손은 늘 과꽃 빛으로 물들어있다 손에서 눅눅해지는 대기표들은 저마다 말소되기를 기다리거나 정정될 사유를 납작하게 품고 있을지 모른다
정확한 등기 날짜도 모른 채 살아가는 날들,
공증인이 없는 저 하늘도
구름접수장만 여럿 비치해 놓고 갔다
아무 날짜에 가도 다 받아주는 죽음이 있다고
전도(前導)의 말들마다 어깨띠가 둘러있다.
가장 좁은 장례
며칠 동안 채널은 돌아가지 않았다 몇 번의 화면조정시간이 있었지만 사경은 끝내 조정되지 않았다 편성표 어디에도 끼워져 있지 않은 독거, 삼 십 촉 조등은 계속 켜져 있고 창문 밝기의 차양이 달려 있었다
문 안의 장례
어느 시간대엔 울음소리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절차의 논의가 고성을 내기도 했다 일기예보는 영하의 날씨로 시신을 지키고 있다 그사이 탁발이 지나갔고 긴 축제행렬이 지나갔다 두부 실은 트럭 행상이 지나갔으나 그 어떤 음식의 냄새도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문밖에는 사르륵, 폭설이다
조문하듯 차들은 몇 회째 헛바퀴만 돌리고 있다
가장 좁은 장례 아무도 발자국을 남기지 않았다 가장 가깝다는 건 같은 채널을 공유했다는 것, 작고 허름한 문의 바깥보다 문의 안쪽 화면이 더 가까웠다 남루한 관계보다 쉽게 켜고 끌 수 있는 관객이 더 좋았다
저 좁은 방에 어쩜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릴까 노상의 쓰디쓴 술 한 잔도 없이 조문하는 목소리들, 꼭 한 사람의 목소리가 빠진 왁자함엔 알아듣기 힘든 말들이 있다
오늘, 갸웃한 궁금증이 한 죽음을 불러냈다.
<안은숙> 약력
서울 출생
건국대학교 대학원 교육학 석사 졸업
2015년 『실천문학』으로 시 등단
2017년 『경남신문 신춘문예』로 수필 등단
경기문화재단 전문예술창작 문학 분야 선정 작가
공저 『언어의 시, 시의 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