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진화론과 불교적 입장의 차이>
우희종의 글을 원담이 문장을 다듬어 올린다.
①현재의 미시적 진화
약 138억 년의 우주의 역사가 하루하루의 시간이 누적되어 이루어진 점을 생각해볼 때 138억 년 속에 이루어진 생명의 탄생과 진화도 오늘 하루라는 시간 위에 이루어진 것이다. 과학으로서 진화론은 긴 시간의 누적을 다루기에 하루하루의 일상을 다루지 않는다. 거대한 시간의 역사 속에 드러나는 생명 현상이라는 결과에 주목하고 그 과정을 밝힌다. 따라서 과학으로서 진화론은 거대담론의 형태를 취하게 된다. 이에 대한 분자생물학적 근거 자료는 외형은 미시적 자료이기는 하지만 그 해석은 긴 시간의 흔적이라는 관점에서 분석된다. 진화론은 앞으로의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생명체가 어떻게 진화해 갈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또 그렇게 말해서도 안 되는 것이 과학으로서 진화론이다. 그것은 불가능한 추정이기 때문인데 그 예측불가능성이란 진화가 복잡계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학에서의 진화론은 과거 지향적이다.
이에 반하여 불교의 연기적 관점은 언제나 현장성과 지금 이 순간에 있다. 비록 생명체는 무명의 연을 따라 유전하지만 알아차림의 시간은 언제나 지금 이 자리다. 한 생명체가 숨 쉬는 이 자리에서의 한 순간이 이미 현대 천체물리학에서 말하는 138억년의 시간을 담고 있다. 동시에 그 생명체는 ‘무상’이라는 표현으로 언제나 변화의 흐름 속에 있는 존재임을 강조하고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삼세인과에 따라서 ‘과거의 인을 알고 싶으면 현재의 과를 보라. 미래의 과를 알고 싶으면 현재의 인을 보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시간이 과거로부터 미래라는 직선으로 흐를 때 진화론과 상통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강조되는 것은 불교의 관심은 진화론의 주요 관심 대상인 과거에 있는 게 아니라 현재라는 것이다.
과학으로서 진화론과 불교적 관점의 근본적 차이가 드러나는 지점은 진화를 이야기할 때 시간을 선형적으로 볼 것인가 비선형적으로 볼 것인가의 차이에 있다. 대승불교에서 삼세는 직선상의 시간의 개념을 떠나 과거의 마음도, 현재의 마음도,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는 비선형적인 시간으로 삼세의 시간은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서의 들숨과 날숨 사이에 있다. 업이라고 하는 형태로 긴 시간의 누적의 결과로 지금 내가 있지만 관심의 대상은 과거의 긴 시간의 역사가 아니라 지금 이 자리 심찰나에 일어나는 전변이다. 따라서 불교의 연기적 진화론은 찰나에 삼세가 담겨 있다고 본다. 138억년이 찰나에 담기고, 찰나에 138억년을 담을지라도 삶의 현장 속에서는 들숨과 날숨 사이, 그 사이에 일어나는 정신물질적 변화, 그 변화를 미시적 진화라 할까 이렇게 말해 볼 수 있다.
②미시적 진화의 힘
진화라는 변화의 주체이자 객체로 존재하는 생명체는 삶이라는 형태로 진화의 과정 속에 놓이게 된다. 생물학적 진화론이라는 거대 담론의 큰 틀에서 진화를 보면 주객이 따로 없다. 하지만 연기법에 근거한 미시적 진화에서는 비록 주객이 없다 해도 삶의 현장이라는 점에서 그 분별없는 가운데에도 분별이 있어 삶의 주인으로서 생명체가 강조된다.
모든 생명체는 주위와의 관계를 통해 다양한 모습으로 진화해 가지만 인간은 삶의 주인으로서 능동적으로 바람직한 관계를 맺어 간다. 개인적 삶이건, 가족과의 삶이건, 사회적 삶이건 적극적 관계 맺음을 위해 공생활동에 참여한다. 자타에 유익한 관계 맺음을 위해 노력하는 일이 연기적 진화의 바탕을 이룬다고 할 것이다. 이것은 생물학적 진화를 넘어 또 다른 진화의 기제가 될 수 있다. 불교에서의 비폭력 불상해의 가르침은 호혜와 공생관계의 단절이나 관계의 왜곡을 가져오는 행위를 금지하라는 것으로 이는 상의상존하며 함께 진화해가는 관계를 무시하고 타자를 대상화하여 절멸하지 말 것을 권장한다. 이렇게 전 지구적으로 호혜상생적인 진화를 위한 능동적 참여는 비폭력을 위한, 비폭력을 향한, 비폭력 그 자체로 나타난다. 이것이 연기적 진화의 힘으로 불교가 진화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 가운데 하나다.
③관계론에 의거한 현대 진화론과 불교의 연기적 진화론:
현대 진화론의 한 축을 이루는 사회생물학은 다양한 입장에서 비판되었고, 이를 통해 많은 생산적 논의가 서구 사회에서 이루어졌다. 사회생물학이 이루어 낸 좋은 통찰에도 불구하고 유전자 실체론이라는 환원론적 시각은 불교의 무아론과 대치되는 일종의 상견에 의거한 유물론적 관점이다. 그러나 사회생물학이 근거하고 있는 1970~80년대의 초기 분자유전학에 이어 21세기 들어와서 전개된 현대 후성유전학, 이보디보, 복잡계과학, 시스템생물학 등의 발전은 관계론적인 통합적 관점이 각광을 받게 된다.
*참고: 이보디보(EvoDevo)는 Evolutionary Developmental Biology 진화발생생물학을 말한다. 진화학과 발생학은 원래 따로 연구되던 학문이다. 1950년대 DNA의 이중 나선 구조가 발견되면서 분자생물학이 발전하게 되었다. 분자생물학에서 유전자를 연구하면서, 유전자가 발생에 기여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시에 그렇게 하여 유전자 생물학에서 진화적 의미를 찾게 되었다.
관계론에 의거한 현대 진화론과 불교의 연기적 진화론은 많은 부분에서 상응한다. 생명체 자체도 그렇고 종의 진화라는 측면에서도 생명체의 주위 환경과의 진화 과정은 철저히 상호의존적인 관계맺음을 통해 다양한 초기 조건에 따라 지구의 놀라운 생물 다양성을 이룩했다. 현재 진화론은 생명이란 물질로 환원될 수 없는 관계성 속에서 창발되어 나타나는 현상이며, 이는 진화 과정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점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불교적 관점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인간은 생태계 속에서 수동적으로 변화해 가는 것이 아니라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는 역할을 함으로써 삶의 주인이 되어 138억 년, 아니 불교식으로 말한다면 삼세에 걸친 진화 과정에서 언제나 능동적인 참여의 자세를 견지했음을 말해준다. 기본적으로 불교의 연기적 진화는 수만, 혹은 수억 년의 진화라는 관념적 진화가 아니라 하루하루의 지금 이 자리에서 ‘상구보리’라는 수행과 ‘하와중생’이라는 신행으로 실현되며, 또한 그 수행과 신행이라는 두 모습이 결코 둘이 아님을 말해주는 진화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기적 진화는 일상 생활 자체가 수행과 신행이 되어야 함을 말하며, 그것은 삶의 자세이자 또한 간절한 기다림의 자세임을 뜻한다. 이때의 기다림이란 그 어떤 대상이나 깨달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과정으로서의 간절한 ‘깨어있음(覺)’을 말한다.
깨어있음을 통한 진화에의 적극적 참여를 통해 불교적 진화는 생물학적 진화를 뛰어 넘게 되며, 이러한 변화는 우리 각자 생활속에서의 능동적 ‘나눔’의 삶으로 구체화된다. 나눔이란 상호 관계성의 시작이자 상호 변화의 단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학으로서의 진화론과는 달리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적 진화는 자타불이, 자리이타, 동체대비의 형태가 될 것이다. 간절한 기다림의 자세로부터 나오는 ‘깨어있음’이라는 수행과 더불어 자신이 처한 일상의 삶 속에서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이웃과 더불어 나누는 신행이라는 형태야말로, 다양하고 아름다운 생명의 발현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 힘이란 것이 생명의 진화를 바라보는 진정한 불교적 관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