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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42:1-7 내가 소리내어 여호와께
다윗이 숨어 있는 동굴 속에 사울이 들어왔을 때 이 주의 성도는 그런 우연한 일에 대경실색하거나 아니면 너무 놀란 나머지 비정상적인 모습으로 변했을지 모릅니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이 절망 가운데 있을 때 당황하거나 미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이 시에 나타난 바로는 다윗은 냉정함을 유지한 채 하나님을 확고하게 의지했으며 권위를 상실하는 태도를 취하는 대신 헌신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다윗이 굴에 있을 때에 지은 마스길 곧 기도
1. 본문 1-2절은 “(1) 내가 소리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2) 내가 내 원통함을 그 앞에 토하며 내 우환을 그 앞에 진술하는도다” 입니다.
이 시는 다윗이 쉽게 행했을지도 모르는 두려움에 좌절되거나 분노의 격정 속에서 그의 원수에게 보복하지도 않았으며 절망 속에 자기 생명을 포기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침착하게 기도드린 다윗의 특별한 마음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설명하는 표제가 이 시의 머리말에 부여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다윗이 자신을 하나님께 위탁한 사실을 언급하는 좋은 이유도 갖고 있습니다.
사울의 군대에 싸이고 사방으로 절망에 싸였을 때 그가 그러한 강한 유혹에 대해 기도로 무장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러한 한 맺힌 원수를 관대하게 다룰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다윗이 기도의 내용을 반복하는 것은 모든 유혹의 공격에 무감각해지도록 열심으로 기도했다는 사실을 시사해 줍니다.
다음 구절에서 다윗은 자기가 걱정거리를 주께 토로했음을 좀 더 분명히 말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토로하며 고통에 대해 말하는 것은 자신을 내적으로 고통스럽게 하는 저 착잡한 염려의 일면을 암시하는 것으로서 이로 인해 사람들은 괴로워하고 하나님께 나가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으로 짜증나게 됩니다.
또는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배려로 위로를 얻지 못하는 자들이 발하는 광란적 절규의 일면인 사실을 암시합니다.
한 마디로 우리가 생각하게 되는 것은 다윗이 사람들 앞에서 큰소리로 무절제하게 탄식하거나 내면을 짓누르는 근심으로 고통당한 것이 아니라 확고한 확신으로 자신의 슬
픔을 주님께 아뢰었다는 사실입니다.
시 142 편
2. 본문 3절은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 나의 행하는 길에 저희가 나를 잡으려고 올무를 숨겼나이다” 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여기서 염려를 느꼈음을 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믿음이 한결같았다는 사실에 대해 말한 것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심령이 “상할 때” 라고 말한 이유는 위험으로부터 빠져 나갈 분명한 출구가 없을 때 여러 가지 궁리에 호소함으로서 그 고통이 더욱 가중될 때 마음의 착잡한 상태를 나타내 줍니다.
분명히 안전의 출구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처음부터 구원이 이루어지는 길을 알고 계셨다는 사실을 다윗은 덧붙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 라는 구절에 마치 다윗이 하나님을 자신의 생명 보존의 증인으로 주장하는 것과 같은 다른 의미를 붙이고 있으나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그가 여러 생각으로 마음이 복잡하고 벗어날 길을 모색할 수 없었을 때에도 그를 구원할 길을 알고 계셨다는 의미가 더 정확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해결책을 강구하나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모를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고통을 알고 계시며 마치 아브라함이 주께서 “친히 준비하시리라”(창22:8)고 말했듯이 우리를 돌보고 계시다는 확신 속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이 말씀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3. 본문 4절은 “내 우편을 살펴보소서 나를 아는 자도 없고 피난처도 없고 내 영혼을 돌아보는 자도 없나이다” 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겪은 무시무시한 고난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당시에 다윗에게는 어떤 인간의 도움이나 위로도 기대될 수 없었으며 파멸은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주위를 살펴보아 한 사람의 친구도 찾을 수 없었다고 말한 것은 자기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이 땅에서 도움을 구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자기를 도움 자를 구할 정도로 주위를 살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만약 어떠한 사람이라도 다윗에게 나타났다면 그는 틀림없이 하나님의 자비의 손인 도구로 나타났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다윗이 인간으로부터의 모든 도움을 포기하는 것이었고 파멸로부터의 구원이 좀 더 특이하게 나타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 영혼을 돌아보는 자도 없나이다” 라는 표현에서 ‘돌아보다’라는 동사는 좋은 의미, 즉 사람의 복지나 안전에 대해 열심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시 142 편
4. 본문 5-7절은 “(5)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생 존 세계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6)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나는 심히 비천하니이다 나를 핍박하는 자에게서 건지소 서 저희는 나보다 강하니이다
(7)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케 하소서 주께서 나를 후대하시리 니 의인이 나를 두르리이다” 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촉진하려는 생각에서 다윗은 열렬함을 나타내는 “부르짖어” 라는 말로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윗으로서는 지금 죄수와 같기 때문에 구원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옥” 이라는 말은 다윗이 전에 숨어 있었던 동굴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이는 너무나 제한된 의미입니다.
7절의 “의인이 나를 두르리이다” 라는 말을 ‘그들이 나를 기다릴 것이다’ 라고 다르게 번역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번역은 원래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두르리이다” 라는 말은 다윗이 모든 사람들에게 관심거리며 사람들의 눈이 그러한 유별난 구원의 사건에 끌리게 됨을 비유적으로 가리키는 것이라는 데 우리도 동의합니다
그 말을 비유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말은 의인들이 다윗을 축하해 줄 뿐만 아니라 승리의 표시로서 다윗의 머리 위에 왕관을 씌울 것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이 그를 축하하기 위해 마치 제왕과 같이 그 주위를 둘러설 것이라는 뜻으로 이 구절을 설명합니다.
그 말이 문자 그대로는 ‘그들이 내 머리 위에 왕관을 씌울 것이다’인데, 어떤 사람들은 대명사를 보충하여 의인들이 다윗 위에 내려진 은혜를 자기들에게도 주어지는 영광으로 생각한다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구원하실 때에는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구원을 계속 베푸시며 항상 그렇게 하듯이 그들에게도 왕관을 씌우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취한 의미는 가장 단순한 것으로서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세우기 위해서 의인들에게 특별한 본을 보여주심으로서 내려 주신 은혜가 극장에서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보이리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동사 גמל (가말)은 ‘되돌려 갚다’ 이상의 일반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또 우리가 다른 곳에서 보여주었듯이 ‘은혜를 베풀다’ 라는 말을 뜻합니다.
시143:1-3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다윗은 자기가 싸워야 했던 원수들이 사악하고 그 원수들의 핍박이 잔인할 정도로 부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깨닫고 겸손히 자신과 그 원들의 용서를 구하며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원수들의 잔인함을 하소연하면서 다윗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기억했다고 말합니다
또 다윗은 회복을 위해 기도하며 그의 남은 여생이 하나님을 경외하는데 바쳐지도록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시
1. 본문 1절은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 입니다.
다윗이 그렇게 열심히 애처로운 말로 자기 상황을 탄식하는 것은 원수들의 핍박이 아주 극심했었다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머리 부분에 쓰여진 말들은 다윗의 슬픔이 얼마나 컸는가를 보여줍니다.
다윗이 말하는 전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의로우심입니다.
“의”나 ‘공의’가 어떤 자들이 무식하게 생각한 것처럼 공로나 보수를 말한 것이 아니라 다윗이 그의 백성을 지키게 했던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말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윗은 똑같은 효과로 하나님의 “진실”과 “의” 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증거는 하나님께서 도움을 주기로 약속한 자들을 저버리지 않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백성을 도우실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대가 허물어지지 않게 하시며, 또 하나님 자신의 본질인 긍휼을 베푸시면서 자신이 의롭고 참된 하나님이신 사실을 보여주시기에 다윗은 기도 속에 이 두 가지를 모두 언급하면서 자신을 달래고 있습니다.
2. 본문 2절은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심판 속에 들어가지 않게 하소서 - 칼빈)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 입니다.
시편 143 편
다윗이 왜 계속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하는지 이미 암시했습니다.
재난이 임하면 우리는 기도하도록 하나님이 징계의 채찍을 주신 것으로 결론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시련에 처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지만 우리가 이런 가혹한 일에 처하게 되는 요인은 우리의 죄 때문인 사실이 확실합니다.
다윗을 핍박한 자들은 사악한 자들이었으며 다윗이 그 사악한 자들을 피하듯 다윗은 자신도 청렴결백하다고 의식하고 있었으나 다윗으로서는 정죄 받아 탄원하는 자처럼 하나님 앞에서는 자기 죄를 완전히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화해하고자 할 때 우리는 먼저 죄 용서함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일반 원칙으로 알아야 합니다.
다윗이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통해서만 피난처를 발견했다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성실하신 사실을 믿고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윗은 여기서 단지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의 본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어느 인간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변명할 수 있을 만큼 의로운 자는 없다는 사실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우리가 암시했듯이 심판의 요소는 제쳐놓고 우리의 죄를 용서받아 하나님과 화해함으로서 가까이 할 때에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실 수 있다는 많은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의 심판을 받게 될 때 모든 인간의 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이 사실이 말로는 보편적으로 인정된 사실이나 심각하게 깨닫는 자는 별로 없습니다.
인간들은 상호간에 베푸는 은혜가 있기에 하나님을 만족케 하는 것도 인간의 인정을 얻는 것처럼 쉬운 것으로 생각하고는 모든 인생들은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대담히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를 올바르게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의롭게 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주의해 보아야 합니다.
의롭게 된 자란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아 의롭다고 인정받은 자나 하늘의 심판관이 무죄라고 인정한 자인 사실을 이 구절에서 분명히 말해 주고 있습니다.
지금 다윗은 누구도 무죄한 자가 없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어느 성자의 의도 하나님의 검열을 면할 만큼 완전치 못하기에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며 그들은 당연히 정죄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 세상에서 완전한 것이 발견된다면 다윗으로서는 확실히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열조들의 의는 다윗에게 알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시편 143 편
그러나 다윗은 누구도 용서받을 수 없는 존재이기에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을 제일의 보편원리로 보고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에 자신을 맡겨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죄 용서함을 대신하는 완전한 거룩성을 주장하는 자들을 사로잡고 있는 사단적 요소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만약 그들이 짐승같이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에 은밀하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면 그 정도의 교만은 결코 그들에 의해 증명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마치 그리스도 왕국이 깨끗한 생활에 있는 것처럼 중생에 대해서 고차원적이고 굉장한 용어로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매일 하나님을 구하는 불필요한 화해인 영원한 언약의 주된 복을 제거함으로서 그리고 헛된 교만으로 자신과 남을 치켜세움으로서 자신들이 어떠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들은 그러한 태도를 증오해야 합니다.
그들은 공공연하게 하나님을 경멸하는 일은 주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언급한 이 자체가 전부는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이 심판관으로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면 모두가 의로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사실을 교황주의자들은 인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그들은 바로 앞에 언급한 이단의 위험 인물과 사이클롭스(Cyclopses)보다 훨씬 거전하고 온건합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자신들이 의롭다고 하지는 않으나 그들은 공로와 만족을 강요함으로서 다윗의 본을 따라가기에는 아직도 거리가 멉니다.
그들은 항상 그들 행위에 결점이 있다는 사실을 시인하기에 하나님의 은총을 구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의 도움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즉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과 행위로 의롭게 되는 사이에는 중재되는 것이 없으며, 이 둘은 성경 말씀에서 정반대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교황주의자들이 일부는 행위로 의롭게 되며 일부는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된다고 하는 세 번째 종류의 의인교리를 발명해 낸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설 자가 없다고 한 것은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의 심판에 다 드러난다는 것인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다윗은 이러한 복합적인 의인의 개념은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만 하나님만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어떠한 인간의 의도 하나님 앞에서는 전혀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시편 143 편
3. 본문 3절은 “원수가 내 영혼을 핍박하며 내 생명을 땅에 엎어서 나로 죽은지 오랜 자같이 흑암한 곳에 거하게 하였나이다” 입니다.
자기만이 죄의 형벌을 받는다고 생각했기에 다윗은 이제 원수들에 대해 말합니다.
다윗이 그 원수들에 대해 먼저 말하기 시작한 것은 상식에 어긋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원수들의 잔인함은 자신들의 만족을 채우는 일에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도인 한 사람의 멸망을 기대하는 데에도 나타났기에 다윗으로서는 하나님께서 속히 도와주시지 않으면 이제 곧 멸망할 수 밖에 없다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 절에서는 죽은 사람뿐만이 아니라 부패한 시체에까지 비유되었습니다.
“죽은지 오랜 자같이” 란 말은 이 세상을 떠난 지 오래 된 자들을 뜻합니다.
그러한 말은 다윗이 하나님을 치명적인 질병에서부터 치료해 주실 수 있는 분으로 신뢰했을 뿐만이 아니라 자기가 비록 땅에 묻히고 사람들 마음에서 잊혀진 지 오래되었어도 하나님은 다시 일으키실 수 있으시며 자기를 재 가운데에서 회복시키실 수 있는 분으로 생각하였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시편 143 편
시143:4-7 그러므로 내 심령이 속에서
본 편의 시제는 “원수가 주는 고통에서 구원해 주시기를 원하는 기도” 입니다.
1. 본문 4-5절은 “(4) 그러므로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하며 내 마음이 속에서 참담하니 이다 (5) 내가 옛날을 기억하고 주의 모든 행하신 것을 묵상하며 주의 손의 행사를 생각하고” 입니다.
지금까지 다윗은 요동치 않는 고난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이제 다윗은 자기 심령이 바위처럼 굳세지 못하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육신에 슬픔이 넘쳐도 다윗은 완전히 성령의 은혜와 믿음에 힘입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약해지고 고통으로 낙담하게 되더라도 고난 속에서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해 주시기에 절망하여 확신을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다윗의 본을 통해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다윗은 슬픔을 가라앉히기 위한 수단을 얼마나 열심히 강구하였는지를 언급합니다(5-)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함으로서 자신을 격려하는 수단은 강구하지 않고 자신을 포기한 채 시련 속에 가라앉아 버리는 경우는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가 당하는 시련은 이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로 우리를 일깨우기에는 너무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보다 다른 목적으로 과거에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확신합니다.
고난으로 죽게 됐을때 구원받는 좋은 방법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듯 이것은 다윗이 유년시절부터 경험한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너무나 제한된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히브리어 קדם (케뎀)은 좀 더 광범위한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윗이 자기 경험과 과거 역사도 포함해 말한 것으로 압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계속 인자하심을 베푸신 증거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다윗을 본받아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자 할 때,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도와 주셨는지를 기억해 우리 자신에게도 적용시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의 쓰라린 슬픔이 당장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도 그 유익은 후에 나타날 것입니다.
앞 절에서 다윗은 걱정과 염려로부터 아무 위로는 받을 수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적시에 좋은 결과가 기대되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묵상합니다.
시편 143 편
히브리어 동사 שוח (슈아흐)는 ‘입으로 선포하다’ 나 ‘마음에 결심하다’ 를 뜻합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내가 주의 행사를 말하였나이다’ 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동사 הגה (하가)가 ‘묵상하다’ 를 뜻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시인이 간절함의 표시로 같은 것을 반복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잠깐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생각하나 곧 별개의 것으로 두고 맙니다.
이런 경우에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전혀 놀라지도 않기에 어떤 위로도 받지 못합니다.
이 지식이 영구한 것이 되도록 우리는 계속 관심의 도움을 힘입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2. 본문 6-7절은 “(6)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같이 주를 사모하나이 다 (7) 여호와여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내 영혼이 피곤하니이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을까 두려워하나이다” 입니다.
여기에 명상의 좋은 효과가 나타나 있는데 다윗은 이 묵상으로 기도 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들과 우리 자신들의 경험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행위를 심각하게 생각해 본다면 하나님의 선하심 속에서 우리 마음은 필히 하나님을 찾게 될 것입니다.
사실 기도는 믿음에서부터 나오게 되지만 하나님의 은총과 긍휼이 우리의 믿음을 확고히 하는 실제적 증거로서의 기도는 방탕한 상태를 치료하는 아주 적합한 수단입니다.
다윗은 ‘그의 영혼을 마른 땅’ 에 비유해서 자기 사랑의 열심을 비유로 표현합니다.
극심한 열에서는 땅이 하늘을 향해 물을 구하듯이 입을 여는 것처럼 갈라집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활력이 사라진 것처럼 열심히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갔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다음 절에 좀 더 잘 나타납니다.
여기서 다윗은 자신의 특별한 믿음의 또 다른 증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약해져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 고통과 다른 구원의 소망 사이에서 망설이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지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연약함과 더불어 다윗의 갈등은 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말한 영혼의 쇠약은 두려움, 슬픔, 걱정거리를 억제함으로서 보여줄 수도 있었을 냉철한 자제심보다는 더 좋은 기도의 자극제가 되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하나님만 의지하려고 다른 모든 소망을 마음에서 쫓아 버리고 극심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올라가는 마차를 만든 사실이 있습니다.
시편 143 편
시143:8-12 아침에 나로 주의 인자한 말씀을
본문은 기도 응답에 의해 이룰 소원에 관한 말씀입니다.
1. 본문 8절은 “아침에 나로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나의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받듦이니이다” 입니다.
다시 다윗은 하나님이 그의 은총을 눈에 띄게 볼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나로 .... 듣게 하소서” 라는 표현은 적당한 표현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듣는 것이라기보다는 느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이해함이 없는 단순한 깨달음은 우리에게 아무 유익이 없기에 다윗은 듣는 것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전혀 맛보지 못하고 말씀에 관심도 없으며 하나님을 아버지처럼 믿고 이해하지 않는 사람들의 반동은 얼마나 사악한지를 볼 수 있습니다.
“아침에” 라는 부사를 제사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는 너무나 빈약한 해석으로서 이는 아침과 저녁에 두 번 드리는 제사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은총을 베푸실 때 새로운 날을 창조하셨다고 이해함으로서 어색한 의미로 해석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통스러운 재난의 때가 가끔 어두움으로 표시되는 것처럼 그것은 번영된 복된 상태에 대한 은유라고 생각합니다.
다윗이 이전에 단순하게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을 재촉하기 위해서 반복한 것을 그렇게까지 무관한 여러 의미를 붙여야 하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아침에” 란 적당한 시기나 신속함과 같은 의미를 뜻합니다.
다른 곳에서처럼 다윗은 ‘하나님께 소망을 갖는’ 한 가지 이유를 갖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책임을 부과함으로서 즉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시며 아버지의 관계를 유지하실 것을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서원을 들어줄 것을 요청하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일종의 의무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 편의 공로나 훌륭함을 시사하는 데서 비롯된 한 우리가 즐기는 소망은 아무것도 아니며 우리의 무능함을 증거 해 주는 것입니다.
그의 길이 열리도록 하는 다윗의 기도는 그를 괴롭히는 염려를 가리킵니다.
시편 143 편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으로 길을 열어 주시지 않으면 다윗으로서는 실망한 나머지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으며 설 수조차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의 영혼은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고통 속에서 구원받기 위하여 하나님의 위로를 구하는 것입니다.
2. 본문 9절은 “여호와여 나를 내 원수들에게서 건지소서 내가 주께 피하여 숨었나이다” 입니다.
다윗의 원수들이 그에게 출구를 남겨놓지 않을 정도로 그의 멸망을 그렇게나 열심히 꾀하고 있었기에 이 기도도 같은 효과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히브리어 동사 כסיתי (키시티)를 ‘바라다’로 번역하는데, 그 의미는 ‘덮다’이며 우리도 그 의미와 다르게 보고 싶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의 해석은 다윗이 그가 처한 임박한 위험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밀한 그늘로 향하여 그 보호 아래 자신을 숨긴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아주 자연스러운 번역으로 보이는데 다윗이 여러 가지 구원 수단에 의지하지 않고 자기 상황을 하나님으로 알게 하는데 만족하여 은밀하게 그를 불렀다는 교묘한 해석보다는 우리는 위의 번역을 더 좋아 합니다.
3. 본문 10절은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케 하소서 주의 신이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 입니다.
다윗은 이제 한걸음 더 나아가 단순히 외부적인 고난 속에서 건져 주실 것을 위해 기도할 뿐 아니라 그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정로를 걸어갈 수 있도록 더욱 중요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유혹이 우리를 극심하게 공격하여 부당한 구원방법에 의지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맡기기가 특히 어려울 때에 우리는 이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염려, 두려움, 질병, 권태, 고통이 사람들을 유혹하기에 우리는 충동에 의해 부당한 길로 급히 빠지지 않도록 다윗의 본을 보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윗이 자신을 나타낸 방법을 유의해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다윗이 구한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달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준수하며 행하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전자의 가르침은 그다지 효과가 없습니다.
시편 143 편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이 할 일을 보여주시는 대로 행동하지 않기에 우리의 사랑을 하나님께로 가까이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전의 글로서만 우리에 대한 스승과 교사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내적인 역사에 의해서도 스승과 교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교사가 되는 방법은 네 가지가 있습니다.
즉 주께서 친히 말씀으로 우리를 가르치며, 주의 성령으로 조명해 주셔서 마음을 밝히시며, 주의 영의 감화로 우리의 마음에 그 교훈을 새겨 주시며, 이렇게 하심으로서 우리가 그 말씀하신 것을 진실로 행할 수 있도록 까지 하십니다.
말씀을 단순히 듣는 것만으로는 효과가 없고 우리가 이해하는 것으로도 불충분합니다.
그 외에 우리가 우리의 마음으로 순종함이 있어야 합니다.
또 우리가 실제로 주님의 말씀을 따라 가야 합니다.
기만하는 교황주의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는 단지 우리가 좋은 것으로 향하게 할 분이라고 상상하는 것처럼 시인은 “나를 가르쳐 .... 행케 하소서” 라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여기서 다윗은 먼저 실제적으로 행하여야 함을 말합니다.
다윗은 다음에 ‘주의 신이 나를 인도하소서’ 라고 말해서 같은 것을 계속 주장합니다.
다윗은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우리의 마음을 밝힐 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실제로 움직이게 하여 마치 손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처럼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관련 구절은 사악한 사람들과 가질는지 모르는 경쟁에서 과도한 정열을 쏟는 것에 대해 유의할 필요성이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정열을 스스로 억제할 만한 지혜나 능력이 충분치 못하기에 항상 절제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이 구절은 우리가 자유 의지에 대해서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성경 말씀은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삶을 신앙 생활이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성령에 완전히 순종하게 될 때까지는 올바르게 판단하는 능력에 대해 다윗이 여기에서 부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미 언급한 ‘인도하심’이란 용어는 또한 회의에 빠지게 하고 우유부단하게 만드는 교황주의자들이 많이 떠드는 은혜를 다윗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말처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 라는 말씀을 좀 더 효과적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편’ 이라는 말을 ‘청렴결백’ 이라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다윗의 의도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에서 벗어날 때마다 우리가 실수 속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 이라는 말은 우리가 타고난 타락한 본성과는 반대되는 것입니다.
시편 143 편
성령의 은혜로 올바른 인도를 받게 되기까지는 모든 사람의 사상이 오염되거나 왜곡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육체의 판단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하나도 선한 것이나 건전한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사악한 자들이 악령의 인도를 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들은 마귀의 대리자로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삼상16:14).
그러나 다윗이 여기서 “주의 신” 을 말한 것은 특별한 언급이 아니라 자신은 부패하였기에 선하고 옳고 참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성령에 의한 것임을 찬양하기 위함입니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라고 말함으로서 다윗은 자기가 구하는 것을 얻는다는 확신이 오직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총과 약속에 의한 것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주를 우리의 하나님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 자신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유로이 주시는 은혜에 있다는 것입니다.
4. 본문 11절은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살리시고 주의 의로 내 영혼을 환난에서 끌어내소서” 입니다.
이런 표현으로 다윗은 구원이 완전히 하나님께서 후히 베푸시는 은혜에 의한 것임을 좀 더 분명하게 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만약 스스로의 힘으로 어떤 것을 이루었다면 하나님만이 모든 것의 근원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우리 속에는 하나님이 은총을 베풀만한 것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선하심을 보여주시는 것은 ‘그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도와 주신다”고 했습니다
“의” 라는 말도 같은 목적으로 쓰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의를 보여주시는 수단으로서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동시에 고난의 극심한 정도에 대해서 친히 말씀하신 것을 반복하십니다.
다윗은 소생함을 얻는데 생명의 열쇠를 쥐고 계신 하나님이 부활의 능력으로 그를 회복시키지 않았다면 여전히 사망의 권세 하에 남아 있어야 했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5. 본문 12절은 “주의 인자하심으로 나의 원수들을 끊으시고 내 영혼을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멸하소서 나는 주의 종이니이다” 입니다.
이 구절까지 대여섯 번째로 다윗은 계속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시편 143 편
하나님이 사악한 자들을 멸하실 때 아무리 그 정도가 심하더라도 그들에게 내리는 보복이 그에 대한 아버지 같은 사랑을 증거하는 것임을 다윗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선하심과 가혹함은 가끔 함께 나타납니다.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 선을 뻗칠 때 하나님은 원수들에게 분노의 천둥을 발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사야가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 구속할 해가 왔으나”(사63:4) 라고 말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무장하고 나오신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다윗이 자신을 “주의 종”이라고 칭한 것은 결코 자신의 직임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이 특권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은 것임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는 ‘주의 종’이 된 사실은 우리 자신의 노력이나 투쟁에 의해 얻어지는 명예가 아니고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주의 제자들 속에 우리를 포함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것임을 말합니다.
이는 다윗이 다른 곳에서 좀 더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는 바와 같습니다.
“여호와여 나는 진실로 주의 종이요 주의 여종의 아들 곧 주의 종이라 주께서 나의 결박을 푸셨나이다”(시116:16).
이는 자신을 하나님의 신하로 보아 자기 생명을 그의 보호아래 맡기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인식하에서 실제로 살아가는 것이 신앙 생활이고 우리 모두의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