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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해(1980,1994)의 여름
기후학자들이 주장하는 ‘지구온난화’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징후인가?
올해는 예년에 비하여 꽃들의 개화가 열흘이상 당겼다. 지난 1,2월이 난동(暖冬)을 부린 영향이 컸으리라. 봄의 정취를 흠뻑 느끼게 하였던 벚꽃과 목련이 지고 며칠 안 되어 산야의 연록색 잎들은 푸르름을 더하여 갔다. 5월을 사나흘 앞둔 무렵에 벌써 초여름을 맞이한 느낌이었다.
온난화가 현실로 도래된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대구도 4월의 봄날을 많이 잃게 될 것이다. 4월 중순부터 9월말에서 10월 초순까지 여름 날씨가 계속된다면 여름은 약 5개월반에서 6개월 정도로 지금보다 1달 정도가 길어지게 될 것이다.
여름이 길더라도 가뭄과 이상 고온(高溫) 또는 이상 저온(低溫)현상이 없어야 농작물의 순조로운 생육을 기대할 수 있다. 또한 오랜 기간의 장마나 집중호우(豪雨)에 의한 홍수(洪水)가 없어야 함은 말할 나위도 없다.
여름을 맞으면 우리는 규모가 크든 적든 태풍과 집중호우에 의한 홍수나 산사태 및 이상 저온이나 고온, 가뭄 등으로 인명피해를 비롯한 농작물 피해를 입어왔다.
공직 근무기간 중 기상재해가 극심하였던 두해의 여름을 잊을수 없다.
그 한 해는 1980년의 여름으로 오흐츠크해 고기압이 강하게 확장되어 한반도 전역은 7~8월에 걸쳐 이상 저온현상을 맞았다.
벼가 정상적으로 자라려면 주요 생육기간 동안 일정 이상의 온도 및 햇볕 쪼이는 시간을 유지해야 한다. 그해 여름 7월에서 8월까지 두 달간에 걸친 이상저온(평균 섭씨22.6도)과 햇볕쪼임 시간의 부족(1일 평균 3시간, 예년 평균 1일 5.2시간)으로 벼 수확량은 전국 2,500만석 가량에 불과했다.
7월과 8월의 날씨는 6월의 날씨보다 더 선선하였다. 여름 더위의 절정기인 7월 20일에서 8월 10일사이의 21일간의 평균기온도 섭씨 22.7도에 불과하였다. 한냉(寒冷)하기 이루말할수 없는 여름이었다. 서늘하여 지내기는 좋았지만 농업행정과 지도업무에 종사하고 있었던 공직자들은 벼 이삭이 제때 패지 않아 노심초사하였다. 제때 이삭이 패지 않으면 적정온도와 햇볕 쪼이는 시간의 부족으로 벼알이 충분히 여물지 못하여 흉작(凶作)이 될게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수 없는 자연재해로 인해 흉작을 맞아도 민심은 위정자나 농정(農政)을 맏고 있는 공직자들을 좋지 않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런데다 전두환 군사정권은 사회정화차원의 일환으로 부정부패의 기미가 조금이라도 있는 공직자들을 대상으로 숫자 채우기식의 숙정(肅靜)을 단행, 관가는 살얼음판을 내 딛는 분위기였다. 그야말로 선량한 공직자들도 움추려 들었던 여름이었다. 당시 공직에 몸담았던 이들이라면 거의가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또 다른 한해는 지금부터 꼭 20년전인 1994년의 여름이다. 그해 여름은 북태평양기단과 고기압의 발달로 최악의 무더위를 맞은 여름이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데다 기온과 습도가 높아서 불쾌지수는 높았다. 오래 계속되는 열대야로 밤잠을 설쳤다. 대구지역의 찜통 더위는 대단하였다. 집안의 더위를 피해 시내인근 팔공산자락이나 한티재 등으로 밤 피서를 가거나 아예 그곳에서 텐트를 치고 자누워 가며 출퇴근을 하는 이들도 많았다. 요즘처럼 가정에 에어컨도 흔치 않았다. 선풍기 한두대가 고작이었다.
한반도를 덮친 한증막 같은 더위로 서울에만 해도 약 1,000여명 가량 목숨을 잃었다. 전국적으로 3,000여명도 더 숨졌다. 1904년 우리나라 기상관측 이래 가장 많은 인명이 태풍이나 홍수도 아닌 폭염으로 목숨을 잃었던 해였다. .
대구는 7월 중순의 7일간(7.10 ~ 7.16)의 낮 최고평균기온이 무려 38.2℃를 기록했다. 게다가 6월 하순에서 7월중순에 걸친 장마기간에도 거의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다. 비가 내리지 않아 모내기를 할 수 없는 논(天水沓)이 더러 있었다. 저수지(貯水池)나 작은 연못 또는 웅덩이의 물을 이용, 간신히 모내기를 마친 논도 저수지를 비롯한 크고 작은 못들이 거의 바닥이 나 물을 댈 수 없는 형편이었다. 전국의 많은 농촌지역에서도 그러하였겠지만 7월 초순부터 논바닥이 마르는 지역도 있었다. 관할 읍사무소(당시 칠곡출장소)에서는 지역에 연고를 둔 건설회사로부터 굴삭기(포크레인)와 인력을 지원 받아 하천바닥을 굴착(掘鑿) 했다. 오랜 가뭄으로 거의 마르다시피한 하천 바닥을 무려 1 ~ 1.5미터 깊이 정도로 굴착하면 물이 쬐여 나오고 바닥에 일정량 차이면 양수기로 물을 퍼 올려 근처의 벼논 바닥을 적셔주었다. 벼도 생육단계별로 물을 필요로 할 때는 물을 대 주어야하는 바 그 정도의 물을 적셔주는 것은 급한 불을 끄는 정도에도 못미쳤다. 더위에 지쳐 땀 흘리며 헉헉거리는 운동선수에게 물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훔쳐 주는 정도에 불과했다. 어떤 농민은 우선순위를 무시하고 자기 논에 물을 먼저 대야 한다며 목소를 높이기도 했다. 장기간의 가뭄을 당하면 농사짓는 이웃간에 물 전쟁이 일어나 농촌 인심이 사나워지기가 십상이었다. 농민이 소리를 높인다고 함께 목소리를 높일 수 없는 공직자 신분이라 설득을 시킬뿐이었다. 가뭄이나 홍수 및 태풍 등 여름철 기상재해를 당하면 예로부터 관주도(官主導)로 민간을 지원해왔다. 도지사나 특.광역시장 및 기초자치단체의 시장이나 군수는 기상재해대책을 잘 세워야 하며 읍.면장들은 기상재해가 발생하면 신속하게 대응하여 피해를 최소화 해야만 했다. 시장이나 군수를 비롯한 읍면장도 기상재해에 능동적으로 잘 대처해야만 지역민들에게 유능한 기관장이라는 호평을 받을 수 있다.
그해 여름 8월 오랜 가뭄으로 몸부림쳤던 일이 관할지역에서 있었다. 다름 아닌 관할지역의 산에서 지낸 기우제(祈雨祭)였다. 지역 농협에서 주관하였던 기우제로 나도 참여했다. 기우제를 지내 우연히 비라도 내렸더라면 농협 기우제는 태종우(太宗雨)만큼이나 신비한 위력을 가져 주관했던 농협장은 농민들로부터 대단한 추앙을 받았겠으나 비는 오지 않았다. 답답한 농민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추슬러 주는데 불과했지만 없었던 행사보다는 나았다. 그렇게라도 정성을 들였으니 지역 농촌경제를 주도하는 대표로의 이미지 관리는 한 셈이었다.
인디언 풍습에 의하면 인디언 추장이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온다는 이야기가 있다. 추장은 단 하루만 기우제를 지내는게 아니라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이나 의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그것들로만 해결할 수없는 소위 말하는 불가사의(不可思議) 한 일들이 과거에 벌어졌다. 앞으로도 벌어진다면 신의 영역인 종교는 영속될것이다. 올 여름도 가뭄이 오래 지속되어 농민을 비롯한 일반 국민들이 애를 태운다면 그해 여름처럼 기우제를 지내려하는 목민관이 있을지 궁금하다.
첫댓글 냉해입고,가뭄피해등 농사는 기후가 중요하네요 풍년들어야 민심도 좋고 마음도 여유로와 지지요 그간 고생많았습니다 .덕분에 잘살았습니다.
참으로 공직 기간 동안 수고 많았습니다. 덕분 농민들에게는 큰 힘이 되었겠습니다. 이제 다 잊어시고 홀가분한 맘으로 올 여름 시원하게 맞이하세요. 아무리 농사를 잘 짓고 싶어도 때에 따라 알맞은 비와 좋은 일기를 주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 참으로 자연의 순리를 깨닫고 우리 손으로 환경을 지키며 또한 기후변화에 잘 대응할 수 있다면 살기좋겠지요.民心이 天心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두 해의 여름 잘 읽었습니다.
과학 기술의 힘으로 자연을 정복하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
오랫동안 가물어서 근심이 큰 농민들이 많으실 거로 생각됩니다. 시원한 비가 한차례 내려주길 간절한 바람을 가져 봅니다.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올 가뭄도 대단하내요. 시원하게 단비가 내렸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