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22] 이명희(李名熙) - 부활의 체험을 맛보며 3. 어려운 개종 - 1
1 대구에서 입학했지만 신학교가 서울 수복과 함께 이전하는 바람에 나도 서울로 올라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서울 생활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결국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아르바이트가 필요했는데 구해진 것이 역시 가정 교사였다.
2 종로 3가 봉익동, 자녀가 줄줄이 7명이나 되는 한 가정에 교육을 맡았는데 한 집에서 무려 5년을 지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서도 계속 그 집에서 있어달라기에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계속 그 집에 있었고 완전히 한 식구처럼 되었다.
3 그런데 58년 겨울이라고 기억되는데, 나의 친구 정경균군(지금 서울대학교 교수. 사회학 박사, 교수 교회에 출석하고 있음)이 대학 졸업 후 몇 개월 행방불명이 되었다가 불쑥 나타난 것이다.
4 정 박사와 나는 대학시절 서울 염천 교회 교우로서(지금 갈월동에 있음) 함께 주일학교, 성가대, 청년회 활동도 하면서 막역하게 지낸 친구요 교우였던 것이다.
5 그런데 그가 서울대학교를 졸업하면서 3, 4개월간 왠지 행방을 감추어 버렸으며, 가까운 친지들에게 물어보아도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아마 취직 때문에 부산에 갔을 거라는 추측들도 있었다. 그러한 억측 속에 행방불명이 된 정 박사가 내 앞에 불쑥 나타난 것이다.
6 그런데 그 정 박사가 어처구니없게도 통일교회 전도사가 되어서 나타났다. 그는 재림주님이 구름을 타고 오실 것으로 믿느냐고 물었으며, 본 대로 오시리라고 했는데 그 본 대로라고 하는 말은 이 땅에 와서 고생하신 그대로 고난의 모습으로 나타나신다는 것이다.
7 그리고 선악과가 어떻고 부활이 어떻고 세상의 종말이 어떻고 하면서 나의 장로교 전통 신앙의 입장에서 볼 때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소리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모습이 얼마나 진지하고 열성적인지 사회학을 한 친구가 신학을 전공한 나에게 성서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설교를 하고 있으니 여기에 또 하나의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8 그의 집안도 오래전부터 장로교 집안인데다가 그의 어머니인 지영주 권사님이 일찍이 통일교회 교인이 되셨고, 아버지 정찬정 장로님은 지 권사님을 통일교회에서 빼내기 위해 통일교회에 가서 신앙 토론을 하다가 그도 통일교인이 되었고, 또 그의 할아버지도 통일교인이 되셨다.
9 그러다가 정 장로님은 원리를 알고 나서는 가정의 생계도 돌보지 않고 지방에 전도 나갔었다. 그러니 생활이 말이 아니요 그러다가 가족이 모이면 원리 토론이 벌어지는데, 한참 공부하던 정 박사는 그때는 집을 뛰쳐나와 우리 집안은 종교 때문에 망한다고 투정을 할 때도 있었다.
10 그러던 그가 통일교인이 된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자기가 그렇다고 해도 내게는 통하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가정은 할머니 때부터 기독교 장로회 가정이고 부친은 장로님이시고 어머니와 형님은 독실한 집사님이시다.
11 그런데 어찌 감히 내가 개종을 할 수 있겠는가? 만일 개종을 한다면 그것은 불효도 이만저만한 불효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렇게 열성적인 정 박사에게 아쉽게 생각하면서 한 말은 “네가 다시 장로교인이 될 수도 없는 것처럼 내가 또 통일교인이 될 수도 없는 것이 아니냐,
12 설령 네가 말하는 대로 통일교회만이 구원의 길이 있고 장로교회는 구원이 없어 지옥에 간다 하더라도 할머니, 아버지가 가신 길을 나도 갈 수밖에 없지 않으냐. 그러니 신앙은 서로 다르다 하더라도 단 우정은 끊지 말자” 하고 더 이상 신앙 토론을 하지 말자고 호소하였다.
13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3일이 멀다 하고 내가 가정 교사를 하고 있는 그 집에 찾아와서 신앙 논쟁을 벌이고 성서 토론을 해 나가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끝내는 꼭 한 가지 부탁만은 들어 달라고 하는데, 그것은 원리 강의가 있으니 들어 달라는 것이다.
14 그 강의에 유도하기 위해 그의 고모 되시는 분과 합동작전을 펴왔다. 그 열과 성이 얼마나 지극했는지 내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미안하기 짝이 없지만 오직 그 성의를 봐서 참석해 주겠다고 했으나 들어 보겠다는 마음은 전혀 없었다.
15 지금의 청파동 전 교회 이층 다다미방에서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8시간을 계속 강의를 하셨는데 강사는 유효원 전 협회장님이셨다. 8시간동안 계속된 그 강의로 틀림없이 창조원리, 타락론, 종말론 등등의 내용의 강의를 하셨을 텐데 지금 기억에는 그때 내가 무엇을 들었는지 기억에 남는 것은 전혀 없다.
16 오직 유효원 협회장님의 웅변적이고 열성있는 강의의 모습과 내 주변에 앉아 계셨던 분이 수시로 내 표정을 살피는, 조금은 무례한 모습들이었다. 그 후 그 협회장님의 자신 있는 그 강의에 얼마만큼 감명을 받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17 그런데 나의 표정은 무표정이며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렇다고 졸은 것도 아니다. 다만 참 열심이시다 하는 것과 너무 장시간이라 지루하구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5시에 끝나고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 정 박사는 어떠냐 하고 청강 소감을 묻는데, 나는 무엇을 들었는지도 생각 안 나는데 소감이 있을 수 없었다.
18 다만 소원을 이뤄줬을 뿐이라는 정도의 반응이었다. 그것은 마음 문을 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정 박사가 얼마나 실망했으며 맥이 빠졌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해본다. 내게 한 전도가 그렇게 힘들었으니 나도 전도하는 데 얼마나 힘드는지 모른다. 그것은 그때의 탕감이라고 생각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