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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살아가는 이야기-74
(경주최부자 그 못다한 이야기)
최부자집 풍수자료를 검색하다가 인터넷상에 떠돌아 다니는 숱한 자료와 글들을 보았다. 어떤 글은 가짜뉴스인 것도 있고 다들 경주최부자를 추앙하는 글들이 천편일율적으로 대동소이 했다.널리 알려진 육훈이나 육연을 미화한 것들인데 거의 같은 내용을 퍼가거나 스크렙한 수준이었다.
나는 오늘 12대 만석군이 몰락하는 과정과 현재를 조명해보려고 한다.
주인공은 당연히 마지막 만석군 최준이다. 경주에서는 9대진사 12대 만석군으로 알려져 있지만 족보에 의하면 진사 두분 생원 세분인데 방계자손을 포함하면 진사가 9명인지는 모르겠다. 생원 진사는 향리에서 보는 일종의 자격시험이다. 가훈에 진사이상 하지마라 해서 그런지 대과에 급제한 분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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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의 개막
이 집안의 풍파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병탄하므로 시작된다. 동학란 이후 구한말 어수선한 시절에 활빈당들이 전국의 만석군 등 지주들을 약탈 할 때도 대대로 어려운 백성들을 구휼하고 사방 100안리 굶어죽은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훈을 실천한 공덕으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승리한 일본은 1910년 드디어 조선을 병탄한다. 그러자 11대 만석군이던 최현식은 세상에 뜻을 접고 아들인 최 준에게 집안을 맡기고 은둔하게 되니 이 때 최 준은 20대 후반의 나이였다.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는 가훈에서 알 수 있듯이 의병대장 신돌석이나 천도교 2대 교령 최시형 등이 이 집에 피신하여 장기간 기거했다고 한다. 최 준은 이런 분들에게 의협심과 항일정신을 일깨우고 인내천을 주창하는 천도교에도 심취하며 은연자중 민족의식을 고양해 나간 것으로 보인다.
백산상회 설립
1919년 3.1만세운동이 있고 상해 임시정부가 생기자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독립운동 자금을 대는 것이라 판단하고 ,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와 의기투합하게 된다 .일제의 경계가 삼엄한 시절에 돈이 있다 해도 상해로 전달할 길이 여의치 않았다.
안동의 의성김씨 종손은 파락호로 가장하고 밤마다 노름판을 벌려 새벽녘에야 판돈을 싹쓸이 한척 위장하여 독립자금으로 빼돌려 천석이 넘는 전답을 팔아먹고 세번이나 종가집도 넘어가서 종친들이 돈을 거둬 넘어간 종가집을 다시 사주기도 하는 식이었다.
1920년 백산상회라는 무역회사를 안희제와 설립하여 중국으로 물품을 수출하고 대금을 받아 이익금의 일부를 상해로 전달하는 방식을 택하게 되는데, 일본 식산은행에서는 대출을 해주면서 대표 취체역인 최준에게 개인보증을 요구하게 했다. 사업자체가 이런식이니 8년만인 1928년 부도가 나게 되고 300년 넘게 이어져 온 만석군 집안이 졸지에 망하게 되는 위기에 처했다.
마침 이 때는 3.1운동 이후 바뀐 사이토 총독이 내선일체를 내걸며 문화정책을 주창하며 유화정책을 쓸 때인데 조선팔도에 덕망이 알려진 경주최부자를 파산시켰을 때 돌아올 후유증을 염려한 아리가라는 식산은행 총재가 3만석에 해당하는 빚의 상환을 유예하고 요즘으로 치면 법정관리에 들러가 신탁관리를 했다고 한다.
신동아 2001년 1월호 조용헌의 글에 의하면 아리가 총재는 일본에서 명문가문 출신으로 고건축답사나 여행이 취미였던 사람으로 최씨 집에도 수차례나 다녀간 사람으로 최부자집의 법주나 김치맛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파산시키지 않고 신탁관리를 한데는 총독부에 협조하라고 코를 꿰고, 최씨의 고가를 인수하여 신라박물관을 건립하려고 한 모양민데 최부자가 내 생전에는 곤란하고 사후에나 가능하다고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조상이 도왔는지 운좋게 해방이 되면서 다시 살아나게 된다. 만석 재산은 3천석으로 줄어졌지만 다시 살아 난 것은 천만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보성전문 인수기회를 놓치다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는 정무공의 후예로서 먼 친척뻘이었다. 그런 연유로 2대교주 최시형도 피신처로 삼을 정도로 유대가 돈독하여 동학의 인내천 사상도 자연스레 접목되었다. 천도교의 3대 교주 손병희는 최시형의 처남으로 자주 래왕하는 사이였는데 이용익이 설립했던 보성전문학교를 천도교에서 인수하여 운영하다가 사정이 어려워지자 운영을 맡길 대상자로 최부자를 지목하고 1919년 찾아오나 백산상회 설립을 추진하던 최준은 자기는 여력이 없으므로 서로 자주래왕하며 친한 사이가 된 호남의 십만석군 김성수를 추천한다. 천재일우의 기회를 독립운동 자금 때문에 잃게 된 셈이다
최씨의 사랑방 손님들
호텔이나 숙박시설이 변변치 않던 시절에 최씨의 사랑방 래방객으로는 풍류객 협객 술객은 물론 최익현 최남선 정인보 여운형 장덕수 김성수 송진우 조병옥 같은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드나들었다고 하니 경주최부자의 위상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된다.
최익현은 의병활동을 하던 동지들을 인솔하고 오고 최린은 보성전문학교 수학여행단을 이끌고 왔다니 최부자집은 호텔이고 여관이며 숙박시설의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만석 중에 삼천석은 가용으로 쓰고 삼천석은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쓰고 나머지 삼천석은 래방객 접대에 썼다하니 칭송받을만 하다.
불운한 개인가족사
최씨집안의 풍수분석에서 언급했듯이 부혈을 고집하다 보니 손이 귀하여 대부분 외아들로 내려오며 두번이나 양자를 들여야 했다.교촌으로 이사한 6대조 최언경과 조부 최만희가 양자 만석군이다. 아산의 윤보선 가문도 유명한 만석군 가문인데 고조부 이하로 숱한 인재가 배출된다.
윤웅렬 윤영렬 윤치호 윤치소 윤치영 윤보선 윤일선 등 친일파가 많지만 대딘한 자손이 이름을 떨치고 있고, 고창의 인촌가문은 동아일보 고려대 삼양사를 이끄는데 김성수의 직계로 김병관 김상만 김상기 김병관 김재호와 김연수의 직계로 김상준 김상협 김상하 김상홍 김병휘 김한 등 화려한 인물들이 포진하고 있다. 그에 비하면 12대로 만석을 한 집안치고는 자손들이 너무나 한미한 것이 아쉬운 대목이다.
최준의 동생은 최윤 최완 최순으로 셋이 었다. 최윤은 참의원 참의를 지낸 친일파였다. 일제는 전쟁이 수세에 몰리자 이광수 최남선 김활란 같은 저명인사와 조선일보 시장 방응모와 인촌 김성수 동생인 경성방직의 김연수, 화신백화점 박흥식 등 전국적으로 덕망있고 영향력있는 인사들에게 친일의 올가미를 씌우고 있었다. 이러한 싯점에 당연히 최 준도 대상이 되었을 것으로 본다. 최윤은 백산상회 부도로 어러워진 형님을 대신하여 자발적으로 참의가 되었다 하니 그랬다 손 치더라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라 칭송받는 가문으로 보면 부끄러운 일이었다.
둘째동생 최완은 상해임정에 재무부장의 감투를 맡을 만큼 독립투사었는데 부친이 위독하다는 고등계형사의 위장전보를 받고 급거 귀국중 체포되어 38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하게 되는 독립유공자이다,
막내 최순은 백산상회 일을 보면서 군자금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다가 부도가 난 이후 피신한 후 해방뒤 귀국하여 초대 제헌국회원에 나셨는데 서북청년단에 의해 암살되는 불운한 동생이었다.
의문의 아들 최식
이 가문의 의문은 1907년에 태어나서 1975년에 타계한 최준의 외아들 최식이다.백산상회가 부도날 때 스물한살인데 후계자 노릇을 하기에 성숙한 연령인데 제역할을 못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이양반이 능력을 발휘하였으면 12대에 끝나지 않고 13대로 이어질수 있었지만 미스테리한 일이다.이 가문이 여기서 막을 내려야 하는 한계였는지도 모른다.소문에 의하면 아편중독자라고 하였는데 해방후 남은 전재산을 대구대학에 출연하고 집안이 누란의 위기에 놓였을 때도 최준은 아들은 제껴두고 손자인 최염과 지는 해를 잡으려고 고군분투 한다. 손자인 최염이 어떤 언론에서 인터뷰할 때 아버지는 금융조합장을 하는 등 사회활동도 열심히 한 마음이 한량없이 좋은 분이었다고 했다.
해방과 대구대학 설립
해방은 이들 가문에도 찾아왔다.가산이 압류된지 17년의 만에 풀렸지만 재산은 9천석에서 3천석으로 줄어 있었다. 해방정국은 암울했고 풍전등화와 같았다. 옛영화를 되찾기에는 시대상황이 너무나 급변해 있었고 역부족이었다. 오래전부터 교류했던 인촌이 인수한 보성전문은 고려대학교로 발전했고 같은시기에 괘릉의 만석군 이규인은 경주중학교를 설립하여 성공리에 운영되고 있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북이 공산치하가 되고 남한도 정부가 수립되면 토지개혁이 된다는 것쯤은 예견하였으리 생각된다.
이제 자기대에서 만석군은 종지부를 찍고 육영사업에 남은 전재산을 출연하여 여생을 바치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1947년 대구대학교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뜻을 같이 하는 영남의 지주 몇명이 재산을 함께 출연했다.
이병철과 박정희의 영남대학교
교촌집은 물론 여기저기 산재해 있던 수십만평의 선산까지 모두 학교재단에 출연했지만 이듬해 1948년에 시행된 토지개혁으로 지주들이 받은 토지증권은 폭등하는 인플레에 휴지나 마찬가지로 변해버렸다. 6.25전쟁도 거치면서 자연스레 학교운영이 어려워졌다.
이때 대구에서 제일제당 제일모직으로 재벌반열에 든 이병철은 기업이미지를 좋게하려면 학교를 운영하는 것이 좋겠다고 결론을 내고 대상을 물색하던 중 대구대학 교수를 하다가 삼성에 들어간 신현확을 내세워 인수여부를 타진하계 된다. 이때 이병철은 대가를 지불하려 했으나 학교는 개인 소유물이 아니고 공공의 것이라며 한사코 거절하며 학교만 잘 운영해 달라며 최준은 한푼도 받지 않았다 한다.단지 자네가 학교운영을 잘 하는지는 지켜봐야겠다며 이사로는 남아 있었다 하는데, 이병철의 입장으로서는 대가를 지불하고 인수하지 않아서 자기학교가 아니라고 생각하였는지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다가 사카린밀수사건이 터지자 한국비료는 국가에 헌납하고 대구대학은 박정희에게 헌납한다. 그 후 청구대학과 합쳐지면서 영낭대학이 됐다.지난 10월6일자 유튜브에 최염씨의 강연회 동영상이 올라와 있어 관심있게 보았더니, 두대학의 합병소식을 듣고 서울의 이병철 사무실로 처들어 가니 이병철은 도망가 버리고 없고 신현확에게 지팡이로 책상을 치면서 일언반구도 없이 너희 마음대로 학교를 팔아먹느냐고 일갈을 했다 한다. 그러나 이미 각본대로 일사천리로 이사회는 통과되어 법적으로는 아무 하자없이 설립자로서의 자격은 완전히 상실되고 새로운 영남대학이 탄생되었다.
박정희갸문과의 계속되는 악연
3년 뒤 1970년 격랑을 걲어온 마지막 만석군 최준은 86년의 생을 마감하고 조용히 눈을 감는다. 격변기를 같이 넘었던 듬직한 손자 최염에게 그러나저러나 영남대학교가 잘 되도록 도와주라는 유언을 했다.
세월이 37년이나 지난 2007년 이명박과 박근혜가 한나라당 공천을 두고 혈투를 할 때 최염은 기자들에게 그간의 경과를 자상하게 설명하고 박근혜가 영남대학교 이사장을 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는 요지로 폭로했다. 그것이 유효했는지는 모르지만 대의원 선거에서는 이겼으나 당원투표에서는 져서 이명박이 대통령이 됐다.
영남대학교 재단과 관련된 인터넷에 떠도는 말을 종합하면 박근혜가 이사장도하고 이사도 하면서 당연직 이사를 제외한 정이사의 대부분을 측근들로 채우고 최태민의 의붓아들 조순졔가 실세역할을 했다는 요지다.
요즘 장안의 화두는가짜뉴스다.진짜 가짜뉴스도 있고 내로남불식 가짜뉴스도 많다.김일성주의 처럼 맹목적인 충성파도 있고 적이면 무조건 매장시키려는 치들도 많다. 특히 이념투쟁이나 정치에서는 죽기살기식이다.치킨게임처럼 험한 세상이 되었다.
보수논객이라는 지만원의 사이트에 최부자관련 글은 이런 차원이었다. 내가본토 보수이지만 보수도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게됐다.
모택동은 문화혁명이라는 미명하에 7천만명이나 죽게했지만 천안문 가운데 사진이 걸려있고 모든 중국화폐에 얼굴이 그려져있다. 공칠과삼이 중국식 인물평가법이다. 이승만도 독재는 했지만 건국을 했다.이승만이 아니었으면 벌써 공산치하가 되고도 남았을 거다. 이양반도 공칠과삼임을 나는 인정한다.
마찬가지로 박정희도 공칠과삼으로 변함없이 존경하고 있다
공칠과삼ㅡ그러나 얄고나 있어야.
나는 아버지가 중년에 외도를 하는 바람에 엄마와 늘 불화가 있고, 그 때문에 엄마가 천수를 다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아버지를 경원시하며 살았는데, 나이를 먹으니까 아버지도 공칠과삼이라고 인정하게 되었다. 학교는 문앞에도 못 가보신 분이니 친일할 일도 없고 농사만 지었으니 정경유착이나 권력에 아부할 일도 없었다. 자랑같야서 구체적으로 언급은 않겠지만 좋은일도 많이 하셨다.어찌 인간이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 과가 없을손가.
그런데 영남대학교와 관련한 박정희와 박근혜에 대해서 과오를 지적하면 거의 병적이다 시피 알르레기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더우기 탄핵정국에서 좌파들이 작당하는 꼬락서니를 보고는 같은 하늘아래 살 수 없다는 식으로 결사적이다.
내가 IMF명퇴를 하고 할 것이 없어 부동산중개업을 할 때 어느날 두동면사무소에서 경주로 연결된 지방도를 달리고 있었다. 구미리 주원마을 옆도로에 현수막이 걸려있어 지나치며 읽어보니 박근혜는 어쩌고저쩌고 하며 영남대학을 규탄한다는 내용이었다. 현수막이 걸려있는 곳은 만석군 최부자의 윗대 산소가 세기나 있는 선산이다. 그곳은 내가 풍수에 심취해 있을 때 야트막한 능선이 두개가 있는 그넓은 산에서 산소를 찾는다고 애를 먹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관심이 유별난 곳 이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10만평이나 되는 땅을 평당 780원에 팔아버린 모양이었다. 그 지역은 전원주택지로 인기가 있는 지역이고 당시 시가로 3.4만원은 호가하는데 기준지가로 팔았다니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과연 나머지 차액은 누가 챙겼을까.(2018.10.6일자 최염씨 연설회 유튜브 동영상 참조)
정경유착의 실마리
그 문제는 여기서 접고 영남대의 설립과정을 살펴보자. 63년 박정희는 대통령이 되었고 67년 재선되었다. TK지역의 정재계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서 박대통령의 퇴임 후를 논의하고 대학교를 하나 설립하기로 한다. 삼성의 이병철은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한국비료는 국가에 헌납한 상태였다. 부실화 한 청구대학과 이병철이 운영하는 대구대학을 합치기로 하고 교명은 영남대학교로 내략되었다 100만평이 넘는 부지를 매입하고 건물을 짓는 비용의 염출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다만 대학건물은 학생들이 오르내리게 쉽게 최고 5.6층으로 짓는게 상식인데 영남대의 본관 건물은 20층이 넘는 고층건물인데 각하가 경부고속도로를 지나가면서도 보이도록 지었다니 믿거나 말거나 이다.
그리고 학교운영에 필요한 경북개발주식회사도 설립했다.외동면 우박리에 지금은 공단이 된 수만평의 목장지도 구입하고 경산에 경죽사료공장도 만들었다
이 때 공화당 재정부장은 봉명산업이라는 광공업을 하는 문경출신 이동녕이었다. 지금 경주보문단지 동쪽으로 보문호수와 연접한 SBS 태영그룹의 더아더스 골프장이 있다. 밑에는 블루원콘도가 있고.
그 자리는 삼주개발 도투락 목장이었다. 그 전에는 양장이라 부르던 축산시험장 경주지장이었다.일제시대부터 양사육을 시험하던 국가기관이었다.대관령지장에는 한우를 운봉지장에는 면양을 시험하던 곳인데 이것을 어떻게 하여 불하를 받아 사유화 했는지 그 내막은 내가 알 수 없는 영역이다.내가 등하교 길에 이 양장의 초원에 매료되어 축산학과에 갔고,78년에 이 목장에 취직이 되어 근무할 때 암곡동에 있는 마장도 인수되어 총무부장은 마장과 연접한 몇십만평의 인근토지를 매입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삼주개발 대단위목장을 했다.
이동녕회장 사후 얼마 가지않아 경주시 용강동에 있던 삼주유업 도투락우유는 남양우유에 넘어가고 삼주개발은 태영에서 인수하게 된다
애필로그
언젠가 기회가 있어 논픽션을 쓴다면 모를까 이제 여기서 접는게 좋을 것 같다.
벌써 86세가 되신 최부자의 종손 최염씨의 동영상이 눈에 밟힌다. 이제는 말도 어눌해졌고 목소리에도 힘이 없었지만 자기생애에 어떻게 해서라도 할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야 한다는 어떤 엄숙한 사명감에 연단에 셨는가 싶었다. 이 양반이 넘어야 하고 상대해야 하는 대상자는 탄핵을 받고 영어의 상태다.허송세월도 많았고 회한의 기회도 있었을 듯 한데 이제와서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애처롭기 그지 없다.
잃어버린 지난 50년의 세월을 다시 찾기를 기원해 본다
참고자료
신돔아 2001년1월호 경주 최부잣집 9대진사 12대 만석꾼(조용헌)
한겨레신문 2013.2.1 경주 최부자집은 박정희에게 어떻게 몰락했나
매일신문2016.5.22 김병구의 서울생활 어떻습니까 ㅡ최염씨
유튜브 2018 .10.6 경주최부지 후손최염 선생 강연회
엄상익 변호사 블로그 /큰스승 김상협/아들의 항변. 경주최부자와 고창 김부자
지만원의 시스템클럽 (구)자유게시판 2013.2.5
경주최부자의 모락과 박정희대통령은 어떤관계?
(작성자 현산)
위키백과 ㅡ최윤(1886년)
네이버블로그 nonepapa/독립운동가 story/경주최부잣집 4형제
https://blog.naver.com/nonepapa/220868407059
< 교촌 최부자집의 소쿠리형 안산 -안산 너머로 남산이 朝t山이다>
첫댓글 선배님 감사합니다. 교촌최씨에 대한 숨은 이야기를 하나하나 알아가는 계기로 삼겠습니다. 여러번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최준의 손자인 최염은 경주고 1회 졸업생입니다.
그리고 최부자댁과 관련이 되는 독립군 총사령인 고헌 박상진 의사의 이야기도 곁들였으면 좋을 것 갔습니다.
좋은정보 감사합니다
최염씨의 학력을 검색해보니 대구대학을 나오고,
영남대 서울동창회를 오래하신것만 나오고 출신고는 안나와서 궁금했는데요
존경할만한 선배이시군요
박상진의사는 너무 길게 쓰다보니 빠뜨렸네요
4촌자형이기도 하다 했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