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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제6강 무득무설분 제7,제8 의법출생분
無得無說分 第七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가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耶아 如來가 有所說法耶아
수보리야 어의운하오 여래가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야아 여래가 유소설법야아
須菩提言하사대 如我解佛所說義컨댄 無有定法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며
亦無有定法如來可說이니다
수보리언하사대 여아해불소설의컨댄 무유정법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며
역무유정법여래가설이니다.
何以故오 如來所說法은 皆不可取며 不可說이며 非法이며 非非法이니
所以者何오 一切賢聖이 皆以無爲法으로 而有差別이니다
하이고오 여래소설법은 개불가취며 불가설이며 비법이며 비비법이니
소이자하오 일체현성이 개이무위법으로 이유차별이니다.
제7, 얻음도 없고 설함도 없다[無得無說分,무득무설분]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가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는가? 또 여래가 설법(說法)한 바가 있는가?”
수보리가 사뢰었습니다.
“제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이해하기에는 고정된 그 무엇으로써 최상의 깨달음이라고 할 것은 없습니다.
또한 고정된 그 무엇으로써 여래께서 설법하신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의 설법은 모두가 취할 수가 없으며, 말할 수도 없으며, 옳은 법이 아니며, 그른 법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일체 성현(聖賢)들은 모두가 조작이 없고 꾸밈이 없는[無爲,무위] 법으로써 온갖 차별을 꾸며서 펼쳐 보였기 때문입니다.”
깨침과 설법이 없음
‘무득무설(無得無說分)’이라고 하는 것은 ‘얻음도 없고 설함도 없다’ 아주 중요한 내용이지요. 앞서도 부처님께서 당신의 설법을 뗏목의 비유처럼 알라고 하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얻음[得,득]이란 무엇인가? 불교에서는 부처님께서 6년 고행 끝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인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다’ 또는 ‘성도했다’ ‘견성했다’ ‘오도했다’ 라는 표현을 합니다. 그것이 곧 득(得)입니다.
우리도 나름대로 금강경을 공부하면서 ‘아 이것이었구나’ ‘이러한 삶이구나’ 하는 것을 마음으로 느끼고 얻어가는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6년 고행을 하시고 얼마나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까. 불자들은 성도재일을 거창하게 기념합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그 사실을 가지고 성도재를 기념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부처님 당사자는 ‘아니야 얻음이 없어[無得,무득]’라고 합니다.
또 설법이란 무엇인가? 부처님께서는 당신의 깨달음에 근거를 해서 소위 팔만대장경이라고 하는 수많은 가르침을 설하셨습니다. 그것이 부처님의 설법인데 부처님은 이마저 ‘설한 것이 없다[無說,무설]’라고 했습니다. 철저히 자기를 비우고, 관념을 떠나고, 상을 없앤 금강경의 종지에 딱 맞는 내용입니다.
앞서도 말씀이 있었습니다만 금강경에서는 ‘어떤 경우의 상이라도 상을 가져서는 안된다’, ‘상은 병이 된다. 인생을 어둡게 하고 힘들게 하고 관계를 아주 나쁘게 하는 것이 바로 상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처님의 재산을 이야기한다면 첫째, 깨달음을 얻은 것이 큰 재산입니다. 두 번째 팔만대장경이라 하는 광대한 설법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이것이 무득무설분의 내용입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가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耶아
如來가 有所說法耶야
수보리야 어의운하오 여래가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야아
여래가 유소설법야아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두 가지를 물었지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는가’, 또 여래가 팔만대장경이라고 하는 설법을 했는데, ‘설한 바 법이 있는가’ 물었습니다.
그것이 사실은 부처님의 재산입니다. 부처님 재산은 당신의 깨달음과 설법 뿐입니다. 이 대목에서, 그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부처님 자신은 그 모든 희생을 치르고 얻어낸 당신의 두 가지 재산에 대해서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알량한 자기의 공덕과 노력, 봉사, 이것을 가지고 상을 내고 있지요. 그런 우리들에게 벼락과도 같고, 큰 태풍과도 같은 가르침으로써 남아있는 어떤 관념도 다 쓸어버리는 내용이 나옵니다.
須菩提言하사대 如我解佛所說義컨댄 無有定法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며
亦無有定法如來可說이니다
何以故오 如來所說法은 皆不可取며 不可說이며 非法이며 非非法이니
所以者何오 一切賢聖이 皆以無爲法으로 而有差別이니다
수보리언하사대 여아해불소설의컨댄 무유정법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며
역무유정법여래가설이니다.
하이고오 여래소설법은 개불가취며 불가설이며 비법이며 비비법이니
소이자하오 일체현성이 개이무위법으로 이유차별이니다.
須菩提言하사대 如我解佛所說義컨댄
수보리가 이쯤 되면은 상당히 공부 많이 했잖아요.
그래서 부처님께 말씀하기를 “제가 부처님이 설하신 바의 뜻을 이해한 바로는”이라고 말씀드립니다.
無有定法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며 亦無有定法如來可說이니다
무유정법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며 역무유정법여래가설이니다
이 말은 금강경에서도 유명한 말이지요. ‘무유정법(無有定法)’이란 ‘고정된 법이 없다’ 는 말입니다.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하는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지만, 어떤 고정된 실체로서의 깨달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석가모니 부처님은 큰 깨달음을 얻었고 그 깨달음은 인류사에 있어서 가장 큰 사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어떤 실체로써 남아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 깨달음에 의한 부처님의 설법 역시 ‘무유정법여래가설(無有定法如來可說)’이라고 했습니다. ‘고정된 어떤 실체의 법이 있어서 여래께서 가히 설했다고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래가 설한 고정된 실체로서의 법은 없다’ 는 것이지요.
우리는 금강경 하면 소의경전이라고 해서 애지중지 합니다만 그것은 다 응병여약(應病與藥)입니다. 병에 따라서 약을 베푸는 것이지요. 그 약방문은 그 병을 앓는 사람에게만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해당이 안돼요.
서구의학에서는 만인에게 똑같이 같은 감기약을 주지만 엄격하게 말해서 그것은 좋은 처방이 아니지요. 옛날 동양의학에서는 감기약만 해도 그 사람이 나이가 몇 살이고 성별은 무엇이고 어떤 음식을 즐겨먹고 사는 곳은 습기가 많은가 건조한가 방향은 어떤가 까지 일일이 다 따져서 그 사람에게 딱 맞는 약을 지었습니다. 그 처방은 그 사람에게만 필요하지 다른 사람에게는 해당이 안됩니다.
마찬가지로 부처님 설법도 사람사람에 따라서 다 다릅니다. 똑같은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살아온 과정이 다르고 지식이 다르고 습관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고정된 법이라고 모두에게 쓸 수가 없는 것이지요.
대승불교로 넘어오면서 많은 사람에게 통용될 수 있는 금강경 같은 대승경전이 존재합니다만 사실 부처님의 설법은 일대일 설법이었습니다. 사람마다 앓고 있는 병이 다 다르기 때문에 엄격하게 말하면 일대일로 설법 할 수 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수보리가 ‘어떤 고정된 법으로써 부처님이 설하신 것이 없다.’ 라고 단언해서 말을 합니다. 수보리의 수준이 상당하지요. ‘제가 부처님의 설하신 바의 뜻을 이해하기로는’ 하고 전제하고 나서 감히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어떻게 제자가 부처님의 법에 대해서 또는 부처님의 설법에 대해서 함부로 단언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감히 단언을 했습니다. 수보리도 자기의 이해에 대해서 상당히 자신을 가지고 있는 입장이지요. 또 덧붙여 수보리는 다음과 같은 대목을 부연설명합니다.
何以故오 如來所說法은 皆不可取며 不可說이며 非法이며 非非法이니
所以者何오 一切賢聖이 皆以無爲法으로 而有差別이니다
하이고오 여래소설법은 개불가취며 불가설이며 비법이며 비비법이니
소이자하오 일체현성이 개이무위법으로 이유차별이니다.
왜 그런고 하니 '여래께서 하신 바 법은 다 가히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야. 가히 설할 수 있는 것도 아니야.’ 우리는 부처님처럼 설하려고 아주 애를 씁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설하는 게 아니야. 법도 아니고 비법도 아니야.’ 뭐라고 고정해서 ‘이것이다’ 라고 ‘어떤 관념에 떨어진다든지 어떤 상에 집착한다든지 하면 그것은 이미 부처님의 진정한 정신에는 위배된다’는 것입니다.
所以者何오 一切賢聖이 皆以無爲法으로 而有差別이니다
소이자하오 일체현성이 개이무위법으로 이유차별이니다.
‘까닭이 무엇이냐. 모든 어진이나 성인들은 다 무위법으로써 차별을 둔다’ 그랬어요.
무위법과 반대되는 것을 유위법이라고 하는데 유위법은 조작이 있는 법을 말해요.
유위니 무위니 하는 것은 불교 특유의 용어지요.
우리가 하는 일은 전부 어떤 조작이 있고, 거기에 우리 마음이 개재되고 조건이 개재되고 이유가 개재됩니다. 그에 반해서 정말 진리를 알고 모든 존재의 실상을 제대로 꿰뚫어 보는 사람들은 전혀 그런 것이 다 떨어져 나가서 없다는 것이지요. 그것을 무위법이라고 합니다.
사실은 무엇도 고정된 법은 없어요. 병이 났으니까 할 수 없이 진맥을 해서 처방전을 내리지요. 병이 났으니까 약이 있는 거예요. 본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위법으로’라고 하는 것을 ‘본래 아무 것도 없는 데서’라고 해석해도 좋습니다.
아무것도 없는데서 이 병에는 이약을 먹고 저 병에는 저 약을 먹는 것입니다.
탐욕이 많은 사람에게는 부정관을 하게하고 분노가 많은 사람, 화를 잘 내는 사람에게는 자비관을 하게하고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인연의 이치라고 하는 연기관을 하게 해서 지혜를 증장시키게 하는 등등 불교에는 가르침이 많지요.
금강경은 어떻습니까. 금강경은 사람들의 상병을 집중적으로 치료하는 가르침입니다. ‘무상(無相)’을 으뜸으로 삼아서 ‘모든 것은 아니다 없다 인정할 수가 없다’ 하는 식으로 상병을 치유합니다. 그러나 금강경 가르침도 사실은 꼭 있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상병에 떨어져 있으니까 무상의 약으로써 치료를 하는 것이지요.
앞서 열거한 것처럼, 여러 가지 증상에 따라 부처님의 가르침이 얼마나 차별되고 가지가지 종류가 많습니까. 아무것도 없는 데서, 즉 무위법으로써 이런 저런 분별을 두어서 그에 따른 가르침이 많이 있습니다. 본래는 없는 데서 성인들이 그러한 차별을 두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는데도 그렇지요. 부모들은 그 때 그 때의 상황에 따라서 이런 저런 방법을 쓰며 가르칩니다. 고정된 어떤 가르침은 없습니다. 철들고 나이가 든 어른들에게는 어린이를 지도할 만한 머리는 다 있거든요. 어디서 배운 게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 바로바로 처방이 나오는 거지요.
일체현성은 무위법에서, 아무것도 없는 데서 이런 저런 처방의 차별을 두게 되었다’는 것이 그 이치입니다. 무득무설분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金剛般若波羅蜜經 제6강 (2):제8의법출생분
제6강(2):제8 의법출생분
依法出生分 第八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若人이 滿三千大千世界七寶로 以用布施하면 是人의
수보리야 어의운하오 약인이 만삼천대천세계칠보로 이용보시하면 시인의
所得福德이 寧爲多不아
소득복덕이 영위다부아
須菩提言하사대 甚多니이다 世尊이시여 何以故오 是福德이 卽非福德性일새
수보리가 언하사대 심다니이다 세존이시여 하이고오 시복덕이 즉비복덕성일새
是故로 如來가 說福德多니이다
시고로 여래가 설복덕다니이다.
若復有人이 於此經中에 受持乃至四句偈等하야 爲他人說하면 其福이 勝彼하리라
약부유인이 어차경중에 수지내지사구게등하야 위타인설하면 기복이 승피라리라
何以故오 須菩提야 一切諸佛과 及諸佛阿耨多羅三藐三菩提法이 皆從此經出이니라
하이고오 수보리야 일체제불과 급제불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 개종차경출이니라
須菩提야 所謂佛法者는 卽非佛法이니라
수보리야 소위불법자는 즉비불법이니라.
제8, 법의 의하여 출생하다[依法出生分,의법출생분]]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 대천세계에 가득한 금 은 보화를 가지고 널리 보시하였다면, 이 사람이 얻은 복덕이 얼마나 많겠는가?”
수보리가 사뢰었습니다.
“아주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이 복덕은 곧 복덕성(性)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 가운데서 네 글귀만이라도 받아 지녀서 남을 위해 말해 주었다면, 그 복덕이 앞의 복덕보다 훨씬 뛰어나리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모든 부처님과 모든 부처님의 최상의 깨달음에 도리는 다 이 경전(經典)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이른바 불법(佛法)이란 곧 불법이 아니니라.
부처와 깨달음의 어머니, 금강경
의법출생분(依法出生分) ‘법에 의해서 출생하다’ 이런 뜻이지요. 우리는 세속에 있으면서 의식주만을 위해서 살다가 불교를 만나서 뭔가 삶의 방식이 달라지고 삶의 가치관이 달라지고 생각하는 바가 달라집니다. 이것은 하나의 변화입니다. 어떻게 보면 새롭게 태어났다고도 할 수가 있어요. ‘가르침에 의해 새로 태어났다’고 하는 것이 의법출생이지요.
우리는 부단히 출생해야 합니다. 이 육신은 부모로부터 한 번 출생했지만 우리의 마음, 우리의 정신은 새로운 가르침에 의해서 매일매일 새롭게 출생을 반복해야 합니다. 그런 뜻에서 의법출생이라는 말은 중요한 말이고 아주 좋은 말이예요.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若人이 滿三千大千世界七寶로 以用布施하면 是人의
수보리야 어의운하오 약인이 만삼천대천세계칠보로 이용보시하면 시인의
所得福德이 寧爲多不아
소득복덕이 영위다부아
문득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러한 질문을 했습니다.
‘어의운하(於意云何)오’하고 묻는 것은 ‘너의 생각에 어떠하느냐’ 쉽게 말해서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뜻이지요. 삼천대천세계는 지구라고 보면 좋습니다. ‘이 지구에 가득히 채운 금은보화로써 보시에 사용했다면 이 사람의 소득복덕이 얼마나 많겠는가’
지구에 가득 채운 것은 고사하고라도 주머니에 가득 찬 돈만 가지고 자선사업을 했다든지 가난한 사람을 도왔다든지 병자를 도왔다든지 하면 큰 복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마어마한 칠보입니다. 지구에 가득 찬 칠보를 가지고 물었어요. 거기에 대한 수보리의 대답입니다.
須菩提言하사대 甚多니이다 世尊이시여 何以故오 是福德이 卽非福德性일새 是故로 如來가 說福德多니이다
수보리가 언하사대 심다니이다 세존이시여 하이고오 시복덕이 즉비복덕성일새 시고로 여래가 설복덕다니이다.
須菩提言하사대 甚多니이다 世尊이시여
수보리가 말씀하사대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많을 수 밖에요.
何以故오 是福德이 卽非福德性일새 是故로 如來가 說福德多니이다
이건 조금 어려운 말인데 ‘소위 칠보로써 보시한 그 복덕이 복덕성이 아니다’ 그랬어요. ‘성(性)’이라고 하는 말은 ‘실체’라는 뜻입니다.
어떤 형상이 있거나 헤아릴 수 있거나 수량이 있는 실체적인 입장에서의 복은 유위복이라고 보면 됩니다. 조작이 있는 복이지요. ‘그런 것은 복덕의 성품이 아니기 때문에 여래가 복덕이 많은가 하는 문제를 물었습니다’하고 수보리가 대답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보시를 했다면 그 복이 많기는 많지요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한량이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한량이 없는 것과 비교를 해서 이야기 하려고 예를 먼저 이렇게 든거예요.
若復有人이 於此經中에 受持乃至四句偈等하야 爲他人說하면 其福이 勝彼하리라
약부유인이 어차경중에 수지내지사구게등하야 위타인설하면 기복이 승피라리라
만약 다시 어떤 사람이 이 금강경 가운데서 경 전체나 또는 사구게만이라도 수지해서 자기 인격으로 삼았을 때 그것을 가지고 남을 위해서 설명했다고 할 것 같으면 그 복은 저 복보다 수승하다 훨씬 뛰어나다.
물론 경전을 지니고 다니는 것도 수지에 해당됩니다만 여기서 수지는 ‘잘 터득을 해서’라는 뜻입니다. ‘저 복’은 뭡니까. ‘칠보를 보시한 복’입니다. 칠보를 지구를 가득히 채워서 보시한 복보다도 그 복이 뛰어나다고 했습니다.
금강경을 이렇게까지 이야기 했는데 당연히 금강경 공부를 해야지요. 그 복이 어떤 식으로 어떻게 돌아오는지는 알 바 없습니다. 아무튼 경전에서 칠보를 지구에 가득 채운 그 보시의 복보다도 이 금강경 아니 금강경의 사구게만 가지고 내가 잘 이해를 하고 내 것으로 지니고 남을 위해서 설명해 준다면 그 복이 저 복보다는 뛰어나다고 하였습니다. 법의 가치는 이렇습니다. 이런 말이 어째서 가능한가 하면 물질적인 복은 아무리 많더라도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설사 이 지구에 칠보를 가득 채워서 보시를 했다 하더라도 한 생각 잘못하면 큰 보시를 하고 얻은 그 복도 순간에 날아갈 수가 있습니다. 1억을 보시하고도 그 관념에 떨어져서 자나깨나 상(相)을 내고 있으면 마이너스 2억 3억이 되는 도리가 있으니까요. 참 큰 일이죠.
한데 이 금강경의 가르침은 우리 인간이 기존에 가지고 있는 무량대복, 그 궁극적 차원, 우리 인간의 궁극적 내면에 눈을 뜨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량입니다. 한계가 없어요. 누가 뺏어갈래야 뺏어갈 수가 없고, 빌려줄래야 빌려줄 수 없고, 저당도 못 잡히고, 사기도 안 당해요. 이것은 오직 자기만이 수용할 수 있는 것이고 또 이것을 남에게 베풀기로 하면 끊임없이 베풀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무량대복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이런 말이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그걸 잘 이해해야 돼요.
깨달으신 성인의 말씀, 다시 말해서 부처님의 가르침, 금강경의 가르침은 우리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궁극적 내면의 가치에 눈을 뜨게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눈을 뜨게 되면 세상에서 말하는 그런 복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진시황은 끝없는 복을 누린 사람이라고 역사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복은 몇 푼어치 안돼요. 그때는 미개한 때라 아무리 복을 많이 누린다 해도 요즘 중산층 사람들이 누리는 복보다 훨씬 못해요. 진시황이 언제 택시를 탔습니까. 버스를 탔습니까. 잘 다듬어진 아스팔트 길을 간 적이 있습니까. 돈 몇 천원만 주면 근사하고 으리으리한 사우나에서 목욕을 할 수가 있지요. 세상에서 제일 복이 많았다는 진시황은 그런 것을 못 누렸습니다. 유루복이라는 것은 이렇게 허망한 거예요. 따지고 보면 아주 어이없는 것입니다.
불교는 이러한 이치에 눈을 뜨도록 가르칩니다. 지금 현재 우리가 어떤 수준에서 살든지 세상에서야 뭐라고 평가를 하든지 아무 상관없이 불법의 이치를 가지고 우리가 정신적으로 풍요롭고 자유롭고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당당한 삶을 살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참 소중한 가르침이지요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어떻게 이보다 더 소중한 가르침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 복은 저 복보다 훨씬 뛰어나다[其福勝彼기복승피]는 말을 했습니다.
그래놓고 ‘그 가르침은 궁극적으로 이 금강경이라는 데에서 나왔다’ 이런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何以故오 須菩提야 一切諸佛과 及諸佛阿耨多羅三藐三菩提法이 皆從此經出이니라
하이고오 수보리야 일체제불과 급제불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 개종차경출이니라
‘왜 그런 위대한 복이 가능한가’ ‘수보리야 모든 부처님도 부처님의 최상의 깨달음도 모두가 이 도리에서 나왔다.’하였습니다. 이 도리, ‘이 경’하는 것은 금강경인데 책이나 모니터에서 보는 금강경이 아닙니다. 그것은 금강경 해설서예요.
진짜 금강경은 우리들 본래인의 모습입니다. ‘우리 본래인의 모습’ 지금 겉으로 드러나고 있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 사람사람이 가지고 있는 본래인의 차원입니다. 그것은 ‘궁극적인 차원’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금강경입니다. 그것을 설명하는 종이로 된 소위 말하는 소의경전인 금강경은 금강경 해설서예요.
그래서 ‘이 경에서 나왔다’할 때의 ‘이 경’은 ‘금강경’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궁극적인 차원을 말하지요.
‘개종차경출(皆從此經出)’ ‘모두가 이 경에서 나왔다.’ ‘우리의 궁극적 차원에서 나왔다’
‘부처님의 깨달음도 우리들의 궁극적인 차원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들의 궁극적 차원에 눈을 뜨면 우리들은 달라지고 변화합니다. 이러한 것을 가르치는 것이 부처님의 법입니다. 그러므로 불법이 위대합니다. 그렇다고 거기에 또 집착을 하거나 그 관념에 사로잡힌다면 ‘그것은 아니다’ 그 말을 꼭 하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금강경입니다.
須菩提야 所謂佛法者는 卽非佛法이니라
수보리야 소위불법자는 즉비불법이니라.
불법이라고 하니까 우리는 껌뻑 넘어갔습니다. 불법이라고 하는 것에 그만 목을 매고 그 어마어마한 사실에 움쩍달싹을 못합니다.
불법은 좋고 대단하지요. 그러나 대단하다고 하는 관념에 사로잡혀 버리면 이미 진정한 불법과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그러니까 여기 ‘소위 불법이라고 하는 것은 곧 불법이 아니다’라고 ‘즉비(卽非)’라는 말이 나옵니다.‘곧 불법이 아니다’
뒤로가면 ‘이 이름이 불법이다’라고 하는 논리가 이어져서 자주 나옵니다.
이러한 금강경의 논리는 시원시원하고 뛰어납니다. 이것이 다른 경전에서는 볼 수 없는 금강경의 특별한 가르침입니다.
금강경에는 봉사정신이라든지 보살행이라든지 하는 것은 별로 많이 소개되어 있지 않지만 옛날부터 선사들이 특히 금강경을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칠보를 이 우주에 가득 채운 그 복 얼마나 많으냐. 하지만 금강경의 이치는 그보다 훨씬 더욱 뛰어나다. 그 뛰어난 복도 전부 여기에서 나왔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만 거기에 목을 매고 그 가치에 어찌 할 바를 모르지만 그것마저 버려라. 소위 불법이라고 하는 것은 곧 불법이 아니다. 이 이름이 불법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관념을 싹 쓸어버립니다.
마당을 깨끗이 쓸어놓으면 얼마나 보기 좋습니까. 한데 쓸면서 지나간 사람의 발자국이 남습니다. 금강경은 그 발자국 마저도 깨끗이 쓸어버리는 가르침입니다.
참 후련하고 속시원하지요.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불법과 깨달음을 소중하게 말해놓고도 ‘거기에 매달리지 말라’ 는 말씀을 하십니다.
출처 : 염화실
[출처] 금강경 강좌 제6강 - 무비스님|작성자 단장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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