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삶이 머무는 마음의 고향 원문보기 글쓴이: 月田(金直漢)
문수산 축서사 사리보탑 국내 최대 규모인 이 탑은 진신사리 112과를 모신 5층 석탑으로 기단 넓이는 7.3m정도,총 높이는 15.5m이다, 각 층마다 한옥 모양의 조각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으며,지붕은 기와 용마루,벽에는 기둥,포,상하방 등이 부조되고 각 층마다 부처님을 조각하여 53분이 조성되어 있다.
[낙동·백두를 가다] 이몽룡은 봉화사람 ?
| |||||||||||||||||||
물야면 가평리에는 계서당이라는 고택이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계서 성이성이 살던 곳이다. 봉화는 이몽룡이 실존인물이며 바로 성이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렇다. 계서 성이성의 아버지인 성안의가 남원부사로 있을 때 성이성은 아버지를 따라 남원에서 공부를 했고, 이후 과거에 급제한 뒤 암행어사로 4번이나 출두, 암행어사의 표본이 됐다는 것. 이후 성이성은 출사를 여러번 거절한 뒤 봉화에서 계서당을 짓고 살았다.
성이성의 암행과 권선징악의 본을 실천한 점 등에 미뤄 아버지 성안의의 친구가 춘향전을 만들었다는 주장이다. 춘향전 집필 당시 양반의 실명을 바로 거론하기에는 시대 상황과 맞지 않아 성을 이씨로 바꾸었고, 대신 춘향의 이름에 '성'씨를 붙였다는 것이다.
춘향전 등장인물의 실존 여부에 대해 논란이 많지만 봉화군은 계서당 입구에 '춘향전의 실존 인물 이몽룡 생가'라는 안내판을 세우고, 봉화를 암행어사를 상징하는 곳으로 만들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
[낙동·백두를 가다] 소통의 대명사 봇짐장수 | ||||||||||
그래서 봉화는 보부상(봇짐장수)이 그 소통 역할을 해왔다. 보부상은 산 너머 마을의 소식을 서로 전하는 '전령'이었다. 멀게는 영주와 안동, 문경 등 백두대간을 거쳐 한양까지 길을 나섰고, 이웃한 강원도를 드나들며 '소통'의 대명사가 됐다. 춘양에서 영월로 가는 도래기재, 영월과 봉화의 또 다른 관문인 박달령, 석포와 소천·춘양 땅을 잇는 넛재, 춘양과 물야를 잇는 주실령 등 곳곳에 보부상 흔적이 남아 있다.
보부상이 있으면 으레 주막이 존재하지만 아쉽게도 남아있는 주막은 없다. 봉화는 산이 높아 이정표 자체가 없어 주막이 그 길라잡이 역할을 했고, 보부상의 쉼터이자 다양한 고을 이야기가 모이는 장소이기도 했다.
청량산 자락에 위치한 넛재(896m)에 대해 석포의 석남홍 문화해설사는 "하염없이 길고 높아 '늦재'라고도 하고, 고개의 처음이자 시작이 체감으로 100리"라며 "넛재는 쉬었다가는 제 시간에 넘을 수 없어 보부상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고개"라고 소개했다.
주실령은 봉화 보부상의 대명사다. 오전약수터와 얽힌 전설이 재미를 더한다. 물야의 후평장과 춘양의 서벽장을 드나들며 장사를 하던 봇짐장수 곽개천이라는 사람이 서벽장을 보고 주실령을 넘어 후평장으로 가던 중 잠이 들었는데 꿈에 산신령이 이르기를 "네 옆에 만병을 통치하는 약수가 있다"고 해 깨어 보니 약물이 솟고 있었다고 한다. 보부상이 오전이라는 조선 최고의 약수터를 발견한 셈이다. 봉화군은 지난해부터 오전약수터 일원에서 보부상 행렬을 재현, 외부에 알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