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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 ‘신곡(神曲)’ 소개(紹介)
책은 고전(古典)을 읽어야 한다. 고전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각 전문 분야의 고전으로, 철학에 플라톤의 저작, 또는 수학에 유클리드의 기하학 같은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인생 자체의 고전이다. 엄밀한 의미의 고전이란 이를 말하는 것이다. 호메로스의 시편(詩篇), 단테의 신곡(神曲), 밀턴의 실낙원(失樂園), 괴테의 파우스트, 셰익스피어의 비극 같은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인생을 배울 수 있다. 괴테가, 인생은 변하지만 사람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고 말한 사람 그 자체를 여기에서 배우는 것이다. 그리고 넓은 의미의 이런 고전은 다 시(詩)로써 발로된 데 유의해야 한다. 유럽 고대어에서 예언자와 시인이 동일어라고 하는데, 그것은 고전이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인스피레이션, 즉, 계시이기 때문인 것이다. 이때 미(美)는 물론 도덕을 포함하는 것이다. 따라서 고전의 특색은 사람의 본질과 사물의 원리를 제시하는 데 있다. 그래서 사람의 독창적인 사고력과 인격적인 개성을 확립시킨다.
보통 고전은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그것이 인생만큼 높고, 인생만큼 깊고, 인생만큼 넓기 때문이다. 인생에 대한 진실한 심정에 대해서는 고전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다. 엘리어트는 ‘단테론’ 에서, 선입관만 없이 대하면 ‘신곡’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철학자 케벨의 회술 가운데, ‘파우스트’ 를 일생 30회 이상 읽었으나 아직도 잘 알 수 없다고 한 말이 있는데, 이는 단순히 고전의 어려움을 말한 것이 아니라 초시간적인 그 깊이를 말한 것으로 알아야 한다. 이것이 고전인 것이다. 과연 고전을 떠나 인생을 알 수 없는 소이이다.
오늘날 특히 우리의 현실이란 이런 깊은 인생에서 볼 때 정신적으로 백지장이다. 여기 산 위대한 인물이 없음은 물론, 똑똑한 역사적인 유산 하나 없다. 여기서 누구를 탓하고 비난하고, 어디에다가 불평을 말하고, 무엇에 기대할 아무것도 없다. 이런 기대나 불평이란 우리의 역사와 현실에 대한 인식 부족이다. 이 점,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깊이 세계적인 고전에 침잠(沈潛)하여 우리의 개성을, 민족 성격을, 인생관을, 민족관을 다시금 분명히 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기독교 신앙과 고전의 관계도 깊은 것이 있다. 소위 기독교 사상이나 신학이 머리로써 하는 기독교 신앙의 해설이라고 한다면, 단테나 밀턴의 시편은 기독교 신앙에 의한 인생 체험의 시화(詩化)인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기독교 사상이나 신학 이상 기독교 고전을 통해서 더욱 건전한 기독교 신앙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카알 힐티가 ‘신곡’을 성서 이상이라고 한 것은 이런 의미에서이다.
고전이 인생을 가르치는 최상의 교사라고 할 때, 우리는 또한 진실한 인생 없이 참다운 종교가 있을 수 없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오늘날 우리의 이 신앙 부패나, 1세기가 되어도 기독교 신앙을 소화하지 못한 원인 역시, 신앙이 진실한 의미의 인생과 결부되지 못하고 본능적인 낮은 인생과 결부된 데 있다. 이 점 고전은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세례 요한의 임무를 한다.
영국의 유명한 정치가 글래드스턴이 ‘신곡’을 읽기 위하여 70이 넘어 이탈리아어를 배운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후일 그의 단테 연구는 상당히 깊은 경지에까지 들어갔다. 또 유명한 단테 연구가 토마세오(Niccolò Tommaseo)의 말에, 단테를 읽는 것은 의무이며, 재독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며, 이를 이해하는 것은 위대의 전조(前兆)라고 한 것이 있다. 그러나 고전의 위대는 그것이 사람의 개성에 대하여 갖는 관계 이상, 나아가 그것이 인류의 문명 자체와 역사 자체를 결정하는 데 있는 것이다.
보통 희랍 문명은 호메로스의 정신 위에 섰다고 말한다. 근세 유럽 문명은 또한 단테의 ‘신곡’ 위에 선다고 말한다. 이는 절대 과장이 아니다. 과연 단테는 중세 문명, 아니 단테 이전의 전 서양 문명의 유일한 총결산자로서, 여기서 근세 유럽 문명은 막을 열게 되는 것이다. ‘신곡’이 그 이전의 전 서양 문명의 백과사전으로 불리는 이유이다.
그가 근대 의식의 출발이라고 볼 수 있는 문예부흥의 초두에 서는 위대한 존재임은 말할 것도 없다. 단테는 ‘신곡’에서, 지옥과 연옥의 인도자로서 베르길리우스를 택하였다. 그는 이성을 상징한다. 또한 단테는 ‘신곡’은 물론이고 그의 많은 저작을 죽은 라틴어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국어로, 즉 이탈리아어로 쓴 최초의 유럽 사람이다. 루터의 개혁을 2백 년 앞서서 ‘제정론(帝政論)’을 통하여 벌써 철저한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사상을 피력하였다. 속권(俗權)에 대한 교황의 타락과 횡포를 여지없이 폭로, 규탄하였다. 그는 그의 재세시(在世時)의 교황 9명 중 여섯을 지옥에, 둘을 연옥에, 한 명만을 천국에 넣고 있다. 신곡 도처에서 우리는 교회와 교황들의 타락에 대한 그의 심한 분노에 접한다. 특히 천국편 베드로의 분노에서는, 그의 분노 때문에 천국이 온통 붉게 물들었더라고 하였다.
따라서 종교개혁은 벌써 그를 통하여 시작된 것으로 봄이 합당할 것이다. 그리고 전기(前記)한 ‘제정론’에서 더욱 주목되는 것은, 그는 벌써 여기서 세계와 인류의 통합 문제를 논하고 있다. ‘제정론’이 높은 의미의 그의 역사철학으로 불리는 이유이다. 2차 대전 후 이 문제에 대하여 인류의 양식이 겨우 눈뜨기 시작한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단테의 위대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과연 문학자 이상, 인류의 교사요, 하나님의 예언자였다.
그리고 여기서 한마디 할 것은, 우리 주변에는 호메로스·단테 등을 서양 고전 운운하여 한마디로 물리쳐 버리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이는 천박한 소치다. 도대체 동양 세계에서 인류적인 시편을 들어 보라. 고전적인 인생시란 없다. 일본의 문학자 나쓰메(夏目)는, 동양 시(詩)가 화조풍월(花鳥風月)을 읊어 인생에 흥취를 돋구는 데 대하여 서양 문학이란 시에서까지 인사(人事)를 취급하여 사람을 더욱 괴롭힐 뿐이라는 의미의 말을 하였다.
그러나 이는 동양인의 천박한 비인격적인 인생관을 단적으로 표시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 술잔이나 기녀(岐女)나 축첩이나 화조풍월(花鳥風月)로 무난히 보낼 수 있는, 아니 즐길 수 있는 인생이더냐? 과연 이는 인생의 진실과 존엄에 대한 모독이 아니냐. 실로 일본인 중에는 나쓰메 씨의 전성시(全盛時), 백 년 후면 씨의 작품이 기독교 성서를 능가할 것이라고 운운한 자들이 있었다. 이것이 역시 오늘날도 동양적인 맹목이 되고 있는 것에 동양의 문제가 있는 것이다. 고전이 고전 된 소이는 실로 그것이 인생에 대한 향락이 아니라, 이에 대한 철저 심각한 비판이요, 대결이요, 추구요, 해결인 데 있는 것이다.
이하에서는 주로 지옥편을 중심으로, ‘신곡’의 특질, 위대 등을 거쳐 그의 인물, 시대 그리고 가급적 지옥편 각 편의 간단한 소개에까지 손을 뻗치고 싶다.
칼라일은 ‘영웅 및 영웅숭배론’에서 문인으로 단테와 셰익스피어를 들고 있다. 그는 단테를 침묵 속에 잠긴 10세기 유럽의 대변자라고 불렀다. 그리고 셰익스피어가 외적 세계를 읊은 데 대하여, 단테는 내적 세계를 읊었다고 하였다. 정신과 영혼을 읊었다고 하였다. 여기 실로 셰익스피어 이상 단테의 위대가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신곡’은 Seelenkunst, 영혼의 예술로 불린다. 그는 인간 정신을 노래한 것이다. 단테 자신 ‘신곡’을 자유의지로 하는 공죄(功罪)로써 신(神)의 정의 앞에 서는 인간을 그린다고 하였다. 괴테가 말한 불변하는 인간, 저의 양심의 법칙, 영혼법의 서사시인 것이다. 철학자 피히테가 말한 만상(萬象) 밑에 숨은 신성관념(神聖觀念), 즉 신의 엄존, 인사(人事)의 신적(神的) 지배를 노래하는 것이다.
‘신곡’에서 지옥이 상징하는 것은, 칸트가 말한 신의 지상명령에 거역한 양심의 심연(深淵), 영혼의 과정, 상태인 것이다. 즉 죄와 벌이 정의에 의하여 결부된 곳이다. 이에 대하여 연옥편은 죄에서 해방되어 이를 극복하는 양심을 노래한다. 보통 지옥편을 조각적, 연옥편을 회화적, 천국편을 음악적, 혹은 각각 현실적, 신비적, 상상적이라고 말하지만, 기독교 신앙에서 이를 보면 지옥편은 불신 세계를 그리는 것이고, 연옥편은 신앙생활을 그리는 것이며, 천국편은 내세의 완성을 그리는 것이다. 신비, 상상이라고 할 때 영적 체험이 없는 자에게 그렇지, 연옥편은 그의 깊은 신앙 체험인 것이며, 천국편 역시 이 체험을 통하여 보는 내세를 그리는 것으로 순전한 상상의 세계는 아닌 것이다.
단테의 이 영혼의 예술에 대하여, 그것은 단테의 신앙 또는 인생관이고 주관이니까 나의 괘념할 바가 아니라고 말할 자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곡’의 위대와 사명은 이런 부도덕한, 짐승 같은, 인생을 모독하는 자들의 심중에 혼을 다시 불러일으키고, 거기 양심법, 영혼의 대법(大法)으로 단단히 못을 박는 데 있다. 혹자는 이를 가리켜 그가 사람의 영혼에 쐐기를 친다고 하였다. 처음 지옥편을 읽는 모든 진실한 사람들의 고백은, 공포에 사로잡혀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다. 시몬즈는 셰익스피어가 맑은 반사경이라면 단테는 독한 화학시험지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모든 사람은 감출 수 없는 자기의 영혼의 적나라한, 처참한 상태를 보기 때문이다.
시몬즈는 또 ‘신곡’ 의 운율을 논하여, 호메로스의 hexameter–육각운(六脚韻)은 대서양의 파도를 타고 항해하는 것 같은 활달 경쾌한 기분이며, 밀턴의 blank verse-무운시(無韻詩) ‘실락원’은 스톱을 갖는 풍부한 파이프 오르간의 간주곡을 듣는 듯, 영원한 천사의 교향악을 듣는 듯하나, 단테의 terza rima-삼운일귀(三韻一句)의 운율은 비할 수 없는 탄력과 강도를 갖는 눈부신 철갑 밀집부대의 행진이라고 하였다.
단테의 시의 특질은 밀턴의 광(廣)에 비하여 심(深), 포괄성에 대하여 강렬, 광대에 대하여 명확으로써, 그 명석·투명·확실·신속·격렬에 있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외부 세계가 아니고, 황달병자의 시력같이 모든 사람에게 불분명하게 누렇게 혹은 회색 일색으로만 보여, 혹은 이를 향락하고 혹은 이를 이용·저주·모독하는 인생의 내부 세계, 영혼의 생태, 사람의 본질을 이렇게 심각, 투철하게 파악한 데 실로 단테 예술의, 아니 신앙의 위대가 있는 것이다. 칼라일은 이를 그의 천재에 돌렸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그의 천재의 요술로만 알아서는 안 된다. 그 자신 그의 시가 전적으로 그의 생애를 소진(消盡) 시켰다고 말하였다. 사실 그는 이의 완성과 함께 죽은 듯하다고 한다. 라벤나의 부녀자들은 그를 보면 지옥에 다녀온 사람이라고 속삭였다고 한다. 지옥편을 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칼라일은 또한 그의 초상을 평하여, 그의 눈은 인류의 상태에 대한 경악을, 그의 입술은 이에 대한 멸시를 표시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놀람이나 멸시만은 아닐 것이다.
유랑 중 한번은 그의 피곤한 발이 루지아나의 산간 모 승원을 찾았을 때 수도사들이 그에게 “무엇 을 구하십니까?” 하고 물으니, 한 마디 “평화를!” 하고 대답하였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우리는 이를 단순히 신세타령으로만 알아서는 안 된다. 이는, 그가 ‘신곡’ 첫곡에서 말하는 황폐한 산림같이 엉크러진 조국 이탈리아의 현상, 아니 인류의 상태에 대한 그의 기원이 아니면 안 된다. ‘신곡’이야말로 우리는 그의 이러한 인류에 대한 위대한 동정, 숭고한 비애(noble sorrow)에서 산출된 것으로 믿는 바이다. 이가 또한 ‘신곡’이 지옥의 절망과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천국의 완성·기쁨·Commedia 희곡(喜曲)으로 끝나는 소이인 것이다. 그리고 ‘신곡’을 한낱 풍자문학·중상문학(中傷文學)으로 보는 자들은, 인생에 대하여 일편의 진실이 없는 무지자(無知者)들이다.
밀턴은 시를 정의하여 simple 단순하고, sensuous 감각적이고, passionate 열정적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그것이 인생의 실재를 직관, 파악하는 생명인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단테의 ‘신곡’이야말로 인생의 내부 세계를, 본질을 그렇게 리얼하게, 직관적으로, 생명적으로 파악한 점에서 과연 호메로스·셰익스피어·괴테 이상이다. 이리하여 영혼의 예술, 영혼의 쐐기로서의 그의 시는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이 또한 감각적인 세계로 만족하는 자들이 이에 접근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단테 자신이 이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괴테도 결국 이에 접근을 못 하였다.
시인 셸리는 역사상 다음에 계속되는 인류의 여러 시대의 감정·지식·종교에 대한 교육자로서, 호메로스에 대해 단테뿐이라고 하였다. 그는 호메로스 이후 다시 실신(失神)하였던 유럽 정신이 근세에 와서 단테의 입술에서 각성하였다고 하였다. 과연 혹자의 말대로 그는 이탈리아에 소리와 말을 처음 주었을 뿐 아니라, 실로 전체 유럽의 언어를 음악적으로, 종교적으로 만든 것이었다. 이것이 또한 교리의 제작자로서의 신학자와 고전 시인의 결정적인 차이인 것이다.
이렇게 단테는 실로 루터 이상 넓은 의미에서 성서를, 양심법을, 영혼법을, 도덕법을 유럽인들의 가슴 속에 뿌리박은 것이다. 루터가 교회를 지배하는 데 대하여, 단테는 교회의 내외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을 지배한다. 그는 실로 넓은 의미의, 유럽의 신앙과 도덕을 수호하는 위대한 방파제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단테야말로 전 인류에게 영원히 분열·신음·암흑·불의·탐욕에 대하여 자유와 평화·통일·정의의 승리를 확신케 하고, 또한 이를 위하여 궐기케 하는 인류 정신의 위대한 정화(精華)이며 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의 필연으로 이때까지 그는 주로 유럽 세계와 관련되었지만, 이제 앞으로는 전 인류와 관계될 것이다. 나는 오늘날의 동양이야말로 더욱 그의 영혼의 예술을, 아니 양심과 도덕의 입법자(立法者)로서의 그를 요구함이 간절하다고 보는 바이다.
(1958년 5월 제75호)

첫댓글 <소위 기독교 사상이나 신학이 머리로써 하는 기독교 신앙의 해설이라고 한다면, 단테나 밀턴의 시편은 기독교 신앙에 의한 인생 체험의 시화(詩化)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