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은 둘째 손녀 앞니에 묶은 실을 잡고 웃음을 참지 못한다. 큰 손자가 제 동생 젖니 발치 하는 장면을 휴대폰으로 촬영하여 나에게 생생하게 중계 중이다. 둘째는 앞니를 무명실에 묶인 채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 이미 제 엄마가 할 행동에 질린 듯 불안한 모습으로 커다란 눈만 껌벅이며 울음보가 터지기 직전이다. 셋째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호기심 가득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치아 뽑기는 성장하는 이이에게 중요한 의식이다. 무명실을 치아 뿌리 가까이에 단단히 묶어야 한다. 느슨하게 묶으면 실만 빠져나와 낭패하기에 십상이다. 한순간 이마를 딱 친다. 그런데 딸은 한번 터진 웃음보를 멈출수가 없나 보다. 웃느라 실을 당기는 손에 힘을 주지 못한다. 둘째는 무서움에 결국, 울음을 터트린다. 중계하는 큰 녀석은 할머니는 실패한 적이 없었다는데 엄마는 할머니의 능력을 전수하지 못했는지 실패만 거듭한다는 멘트를 날린다.
동영상을 보면서 과감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모습이 어설프고 답답하다. 딸은 묶은 실을 잡고 심기일전 다시 시도하더니 치아 뽑기에 성공하였다. 이가 빠진 자리에 약솜을 물고 있는 둘째 모습을 보는 것으로 동영상 중계는 끝이 났다. 웃음과 울음이 교차하는 행복한 딸 가족의 한 모습이다.
어릴 때 병원도 없는 시골에서 자랐다. 이가 흔들리면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더구나 예민한 나는 온통 정신이 흔들리는 이에 가 있다. 그때 엄마는 반은 의사였다. 젖니가 흔들릴 때면 당연히 엄마의 무면허 치과 진료가 시작된다. 어떤 어른들은 이를 묶은 실 끝을 문고리에 연결하여 문을 젖히는 순간 뽑는다지만, 우리 엄마는 그런 억지는 부리지 않았다. 무명실을 도구로 사용하지도 않았다. 발치 의료 행위는 그래도 한발 앞선 것같다. 얼마나 흔들리는지 살짝 확인만 하겠다며 나를 안심시켰다. 엄마 말이라면 감히 거역할 수 없어 입을 크게 벌린다. 흔들어 확인하는 순간 손가락 끝으로 잽싸게 젖혀 버린다. 어느새 엄마는 내 입안에서 피 묻은 빠진 이를 꺼내어 보여준다. 이미 절반은 빠져 있던 상태라 별 아플 것도 없다. 엄마는 손가락 하나로 해결하였으니 그 시절 나름 능력자였다. 뽑은 이를 지붕 위에 힘껏 던지며 까치에게 새 이를 달라는 신성한 절을 하며 발치가 마무리되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온 동네 이빨이 흔들리는 아이들은 거의가 우리 엄마에게로 보내졌다. 무면허이지만 동네 면허증을 가진 발치 전문가였다.
신경 쓰이던 이를 뽑았으니 시원하기는 했지만, 동네 개구쟁이 머슴애들이 앞니 빠진 개호주라 놀릴 것은 뻔하다. 더구나 앞니가 없는 못난 얼굴이 되었으니 창피하기도 했다. 괜히 투정 부리며 크게 울었던 것 같다.
이후로 나는 이가 흔들려도 절대로 엄마에게 알리지 않았다. 많이 흔들리면 힘들지 않아도 쉽게 뽑혔다. 나 스스로 치아를 빼면서 공포심에서 벗어나고 내가 뽑았다는 뿌듯함도 있었다. 어릴 때 치아를 잘 뽑았던 그 재능을 살렸다면 나는 아마도 치과 의사가, 그것도 치과 의료계에서도 소문난 명의가 되었지 싶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면서 싱겁게 혼자 픽 웃는다.
그래도 까치에게 지성으로 빌었던 엄마의 덕분인지 모르겠다. 치아교정도 없었던 시절이었지만 내 치아는 하나도 삐뚤어지지 않고 가지런하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기억들이 밀려온다. 치과의사의 진료를 받지 못했던 시절, 엄마는 무면허 진료라지만 합병증은 없었다. 요즘 젊은 엄마들은 이가 조금만 흔들려도 치과 의사에게로 달려간다. 집에서 발치 할 일이 없다.
자식들을 키우면서 엄마가 발치 해 주던 그 의료 행위를 대를 이어 내가 하고 있었다. 요즘도 간혹 아들과 딸은 오래전 이야기를 농담 삼아 하고 있다. 엄마에게 붙들려 이를 뽑혔던 불안했던 기억 때문인지 딸은 큰 손주를 데리고 치과에 다니며 충치 검사도 받고 젖니도 뽑았다. 나의 이빨 빼는 능력은 아무래도 내 엄마의 실력보다 한참 못 미쳤나 보다. 그래서인지 아들 치아는 고르지 못하다. 어떻게 집에서 무작스럽게 이를 뽑을 수가 있느냐며 간혹 남매가 나를 타박했다. 그런 딸이 자녀 셋을 키우다 보니 일일이 치과에 데리고 다니기도 힘들고 귀찮아서인지, 아니면 이 정도 흔들리는 젖니는 충분히 뺄 수 있다는 그동안의 엄마로서의 자신감이 생겨서인지 모르겠다. 어느샌가 둘째 셋째에게도 발치를 하고 있다.
나이 든 사람들은 어린 날의 이런 기억 하나쯤은 있으리라 짐작된다. 무면허 치과 진료 행위는 내 엄마에서 나를 거쳐 그렇게 또 딸에게 대물림되었다. 이후로도 큰손자는 제 동생들의 이빨 뽑기 동영상을 몇 차례나 더 중계해 주었다.
이다음 큰손자와 두 손녀도 어른이 되었을 때 추억할 것이다. 저희끼리 모여서 제 엄마 무면허 의료 행위를 떠올리며 한바탕 크게 웃지 싶다. 그런데 이담에 손자 손녀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제 어린 아들딸에게 할 짓을 상상해본다. 왠지 내 예감은 틀리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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