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6.25남침 전쟁에 참전한 아동(소년지원병)들의
공훈을 계속무시하고 갈 것인가?
6.25참전소년지원병은 부모와 국가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할 14세 ~ 17세의 어린 아동의 신분으로 병역의무도 없이 자유민주주의 수호전쟁에 6.25 후퇴와 1.4후퇴를 전후하여 나라의 존망이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위기에 처하여 가장 전투가 치열한 생사가 오고 가는 시기에 29.622명(국방부자료)이 계급 군번을 받고 참전한 아동들이다.
6.25 남침전쟁은 3일 만에 수도서울을 함락당하고 약 1개월 10일만(1950.8.5 북괴군 낙동강도하)에 전국의 92%가 점령당한 미증유의 국난으로 국가비상동원령(國家非常動員令)에 따라 전 국민이 전방과 후방에서 총력 방어전에 참전한 피난민과 지역주민 중에서 모병, 징집, 동원, 자원입대, 현지입대 등으로 충원된 병력 중에는 18세 미만의 새순같이 돋아나는 어린 아동(少年)들이 병역의무도 없이 입대한 소년병, 그 중 더러는 나이를 속여 가면서까지 청장년의 틈에 끼여 입대 또는 학도호국단의 선배 틈에 끼어 입대한 소년 학도병도 상당수 에 이른다.
학도병이 있는 부대에는 소년 학도병이 끼어 있었고 그 외 일반 청장년의 모병 또는 현지입대 한 부대에도 많은 소년 학도병과 소년병이 끼어 전군 각 부대에 산재하여 약방에 감초가 들어가듯 소년병은 그 와중에 어느 부대에나 다 끼어 있었지만 소년병이란 칭호도 없이 계급과 군번을 부여받고 일반 병정으로 취급된 상태에서 전쟁을 했다.
아동병들은 기민하고 명석하여 소총소대의 분대장 또는 수색대원. 포병. 무선통신병, 행정요원 등 학식이 있어야 감당 할 수 있는 병과로 발탁되어 그 분야에서 용감무쌍하게 자기소임을 다해 싸웠다.
그 중에는 소년 분대장으로써 탁월한 전술을 발휘 상사로부터 인정을 받아 임관을 하도록 하여 군에서 잔뼈가 굵어 평생의 절반이상을 군 복무로 남처럼 배우지도 못하고 승급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예편된 소년병도 상당수에 달한다.
6.25남침전쟁의 발발당시 아군의 총병력은 105.752명(육군병력94.974명)으로 그 후 아동병들이 입대한 시기인 6.25후퇴와 1.4후퇴를 전후하여 충원된 병력이 13만명으로 증설하였다하더라도 23%상당의 아동병들이 끼어 참전하였다함은 당시의 실정으로 보아 병력자원의 고갈현실에서 전력을 보강하는데 많은 보탬이 되었을 뿐더러 그 아동병들이 삶과 죽음이 오고가는 살벌한 전쟁터에 어린 몸을 던진 그 용기와 기백의 혼(魂)은 다수의 장병들에게 힘이 됐을 것이고 이들은 전군 각 부대의 자기 위치에서 용감하게 싸워 절체절명의 위기를 막아낸 낙동강 방어 전선, 그 중 대구가 붕괴되기 직전 가장 치열했던 다부동전투를 시작으로 두 번이나 빼앗겼던 수도 서울을 탈환하는데 많은 공을 세웠다고 보며 종전 될 때 까지 격전의 여러 현장에는 소년병이 끼어 끝까지 사수(死守) 했으며 이 전투에서 피어보지도 못하고 순직한 아동병 2.573명(국방부자료)은 그 후예가 없어 기일제(忌日祭)도 없다.
미국의 제7대 대통령인 앤드류 잭슨(Jackson, Andrew.1767.3.15
~ 1845.6.8)은 변호사이며 법관출신인 그는 1802년 테네시주 민병대의 대장이 되었고 1815년 1월 영.미전쟁 때는 민병대를 인솔하여 영국군과 싸워 뉴올리언스의 교외에서 적군을 격파함으로써 일약 전쟁영웅이라는 칭송을 받게 된 잭슨은 “용기 있는 한사람이 다수의 힘을 갖는다.”라는 격언(格言)을 남겼다.
이 격언이야 말로 6.25남침전쟁에 소년 소년병(아동병)들의 용기(勇氣)와 기백(氣魄)은 다수의 장병들에게 사기진작(士氣振作)의 힘이 되었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국내외의 전사(戰史)를 관찰해보자
삼국시대에 신라의 유명한 김유신 장군도 백제의 계백장군과의 전투에서 네 번 싸워 네 번 전패한 전황 속에서 한 어린 화랑 관창이 죽음을 무릅쓰고 적진으로 뛰어 들어 갔으니 계백장군에게 그만 사로잡히고 만다.
“도대체 네놈은 나이가 몇이냐?”
“나이를 알아 뭣하겠다는 말씀이오? 나는 신라의 화랑일 뿐 이오”기가 막힌 계백장군은 관창의 얼굴에 솜털도 지워지지 않은 앳된 소년임을 알고 ,그를 돌려보냈지만 관창은 다시 말을 돌려 임전무퇴를 외치며 죽을 각오로 계백장군에게 달려들었다. 백제군은 그의 목을 베어 말안장에 달아서 신라군 쪽으로 보냈다.
5만에 이르는 대 신라군이 5천에 불과한 백제군에 네 번씩이나 무릎을 꿇고 참패한 상황에서 죽어 되돌아온 어린 화랑 관창의 용기에 신라군의 사기는 다시 불 같이 되살아나기 시작해 이기겠다는 한마음 일치의 정신으로 신라군은 공격에 공격 진격에 진격을 거듭한 결과 백제군을 무찌르고 완승의 압승을 거두게 한 어린 소년의 화랑관창은 역사속의 영웅으로 전래해 내려오고 있고
1429.5.7 영,불 100년 전쟁이 한창진행 중이던 때 프랑스의 17세 의 소녀 잔다르크는 용감하게 흰 갑옷을 입고 전투에 참가하여 영국군을 퇴각시킴으로써 프랑스군에 최초의 승리를 안겨주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영국군과 의 전투에서 연전연승(連戰連勝)을 거둠으로써 프랑스의 수호신으로 부각되었다.
이 두 전설의 주인공인 소년 소녀가 무술(武術)이나 전술(戰術)이 능하여 그 전쟁을 이겨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다만 이들에게도 그 어린 아동의 용기(勇氣)와 기백(氣魄)이 다수의 장병들에게 힘이 되어 승리로 이끌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이 입증된다.
6.25남침 전쟁은 반만년 역사를 통하여 900여회의 전쟁 중 가장 큰 전쟁이고 세계대전이며 미국과 소련이 주축이 된 냉전시대의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전쟁이기도 하다.
이의 전쟁에서 한국산 군마(軍馬) 렉레스(Reckless) 스토리가 매우 감동적이고 영웅소년병과의 비교(比較)룰 위해 소개하고자한다.
6.25 직전 서울 경마장 소속 경주마 ‘아침해’가 250달러에 미 해병대로 팔려가 ‘렉레스’라는 군마(軍馬兵)병이 됐다.
미 해병대 1사단 5연대 화기소대 소속이던 렉레스는 연천지구 여러 전투애서 무려 386차례나 탄약을 지고 철조망을 넘고 포화 속으로 운반하는 전공을 세웠다. 1953년 3월 중공군과 미 해병대가 5일 동안 치열한 공방전을 벌일 때 렉레스는 혼자 탄약을 지고 51차례나 전선을 돌파한 경이적인 기록을 수립했다. 그사이 무공훈장도 5개나 받았다.
미군은 렉레스의 무공을 기려 미국으로 데려가 1959년 하사관 계급을 부여했다가 1968년 천수를 다하고 사망하자 장엄한 장례식으로 예우했다고 한다.
미국의 시사잡지‘라이프’는 1997년 이 렉레스 군마를 세계 100대 영웅으로 선정했다. 정말로 이 군마는‘잊을 수 없는 6.25참전 영웅’으로 꼽은 점에 대해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
이처럼 미국은 하물며 말도 못하는 짐승도 국가를 위하여 헌신한 군인(軍人)들처럼 결코 소홀히 대하지 않고 군인은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국가와 국민은 군인의 명예를 책임지고 지키는 불문율이 이어져 가는 강대국에 반해 우리나라는 10대 경제대국 대열의 일원으로서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 소년병들의 영웅심(英雄心)이 과연 그 군마(軍馬)만치도 못한지 반세기가 넘도록 명예회복도 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어 우리 소년병들은 절규(絶叫)하면서 언제 떠날지 모르는 노년기에 살고 있다.
더 나아가 우리나라의 보훈실태는 어떠한가? 살펴보자!
6.25 북괴의 남침전쟁은 실질적으로 우리들 소년병이 아니었으면 승리를 못 하였을 것으로 판단되는데도 특별한 희생에 대한 보훈이 없고
이 나라를 북괴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용맹스럽게 싸워 최고의 훈장인 태극무공훈장(太極武功勳章)을 받은 명예의 용사가 월 37만원으로 거지처럼 살고 있다.
그까짓 훈장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다친 사람만 비참하고 죽은 사람만 억울한 것이다.
6.25 참전용사에겐 월18원만 던져주면서, 일본에서 북의 공작금 가지고 잘 살고 있는 골수거물 빨갱이 곽동의에게는 재일학도의용군이라 하여 월 100여만원씩 보상금으로 지급한다고 한다.
광주에서 경찰과 군인을 쏴 죽인 폭도와, 부산동의대에서 경찰을 새카맣게 태워 죽인 극열학생들에게는 수억원씩을 안겨주거나 제주4.3폭동사건을 미화하여 남로당 수괴급 폭도의 위폐를 평화공원에 봉안한 것이라던 지!
그들이 때려죽이고, 태워 죽인 군인과 경찰을 향해서는 국가폭력배라 하여 무시하고 있어 나라가 저질로 놓은 일로 봐서는 사리(事理)에도 맞지 않을 뿐더러 주객이 전도된 상태다.
이 모든 것이 국가가 공평무사하게 처리하지 못한 우리나라의 현상이며 주관부서의 무관심으로 아희들의 강제징집으로 아동권(兒童權) 침해에 대한 상태에 대하여 아무런 입법조치를 하지 않고 있는 국회의 부작위(不作爲)는 위헌(違憲)을 확인한다. 라는 근거를 들어 헌법소원으로 현재 헌법재판부의 심판에 회부됨으로서 소년병의 특별한 희생을 부정하는 국가보훈처의 주장은 자가당착(自家撞着)의 우를 범하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
2015. 4.
6.25참전소년지원병 전우회
수도권본부 회장 심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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