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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me 너희도 증언하느니라
Text Jh15,21-27
(21)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라 (22)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23)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24)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그들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들이 나와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25)그러나 이는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 바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26)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27)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1. 지난 몇 주일 동안 우리는 요15장의 말씀을 통해 열매 맺는 삶에 대해 함께 생각했습니다. 지난 설교를 얼마나 기억하시는지 시험부터 보고 오늘 말씀을 전하려 합니다. 100점 맞으면 상품도 있습니다. 다 맞추셔서 다 상 받으시기 바랍니다.(ㅎㅎ) <문제> 다음 각 문제에서 괄호에 들어갈 말은? 1. 예수님은 ( )( )( )( ), 하나님은 ( )( ), 성도는 ( )( ) 2. 가지가 맺어야 하는 열매는? ( )( )의 열매이고 3. 이 열매는 어떤 경우에라도 ( )( ) 맺어야 하는 열매, ( )( ) 속으로 가서 맺어야 하는 열매 등에 대하여 말씀드렸었습니다. 조금 더 어려운 문제 하나를 추가합니다. 4. 이 말씀은 ( )( )( )( ) 이후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뭘까요?
오늘은 요15장 시리즈 설교 중 마지막으로 21-27절이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미움과 박해가 등장합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어떤 환경에서도 맺어야 하는 사랑의 열매는 미움과 박해를 받는 상황으로까지 이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은 미움과 박해 속에서도 증언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오늘의 말씀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가는 순례자로서의 성도들에게 주시는 은혜가 풍성하게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은 특별히 교역자보건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이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의 교역자들을 복음의 증인으로 세우셨음을 감사하게 하고, 교역자들이 영과 육과 가정의 건강을 가지고 오래도록 기쁨으로 그 사명을 감당하도록 우리 교회가 함께 돌보고 응원하게 하는 은혜가 풍성하기를 기도합니다.
2. 먼저, 21-23절을 봅니다. “(21)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라 (22)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23)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는 제자들이 미움을 받는 이유는 단순히 그들이 사회적으로 미움을 받을 만한 사람들이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 이 말은 ‘너희가 나에게 속해 있기 때문에, 너희가 나를 따르고 나에게 속한 것을 열매로 나타내기 때문에’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열매를 맺는 사람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세상과 충돌한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세상에서 박해를 받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알지 못한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의 부족이 아닙니다.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있는지 몰랐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본심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천하만국에 알리기 위한 “제사장 나라”(출19,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로 세우신 것이지, 자기들만을 위한 ‘유일한 나라’로 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의 믿음도 칭찬하셨고, 세리와 죄인들에게도 하나님의 긍휼이 열려 있음을 선포하셨습니다(마8,12).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을 특권으로만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그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셨지만 죄인은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선지자들도 누누히 강조한 일이었지만 유대인들은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종교적 규례를 철저히 지킨다고 자랑하는 사람보다 죄인임을 자복하며 얼굴을 들지 못하고 눈물로 은총을 구하던 세리가 하나님께 옳다 인정함을 받고 내려갔다는 예수님의 말씀(눅18,13)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도리어 신성모독이라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끔찍한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로 선택되었지만 스스로 ‘유일한 선민’이라며 하나님의 말씀과 반대되는 길을 갔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니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도 모르고 그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예수의 냄새를 풍기는 예수의 사람들도 미워한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라고 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전혀 새로운 하나님을 소개하신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하나님께서 이미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겔18,23입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예수님은 바로 그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 가운데 오셔서 온전히 보여주신 것입니다.이 ‘사랑의 하나님’을 말했음에도 받아들이지 않았고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한 것이 바로 죄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가르치셨습니다.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아버지를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의 거부는 무지로만 설명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빛이 왔는데 빛을 거부하는 것입니다.(요1,5 & 요3,19) 본문은 ‘세상이 왜 제자들을 미워하는가’에 대한 말씀이면서 동시에, “예수님의 제자가 누구에게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는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는 가지인 성도들은 예수님에게서 흘러나오는 포도나무 진액, 사랑의 진액을 받아 자신들을 미워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열매’를 나타내 보여야 합니다.
여러분, 분명하고 확실해졌습니다. 아무리 거부하고 비난하며 조롱하고, 미워하고 적대하며 박해를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 사랑의 증인, 예수 십자가 사랑의 증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설령 우리를 미워하고 박해하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그 때문에 사랑하기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이 말하는 증인의 사명은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한다는 것은 불의와 폭력을 그대로 감당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혜롭게 자신을 보호하면서도, 마음에서 사랑을 잃지 않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사랑의 증인으로서의 자기 사명을 포기하거나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사랑하리라”라고 선포해야 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았을 뿐만 아니라 성령님까지 보내셔서 도와주고 계십니다. 옆에 있는 분에게 말씀해보세요. ‘난 사랑하며 살거야. 넌 어때?’ 아멘.
3. 다음, 24-25절입니다. “(24)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그들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들이 나와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25)그러나 이는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 바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22절에서는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이라고 하였는데, 24절에서는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말씀으로 가르치신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그들 가운데서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고, 가르치셨고, 사랑하셨고, 병든 자를 고치셨고, 귀신을 쫓아내셨고, 죽은 자를 살리셨고, 죄인들을 품으셨고,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것을 특별히 “표적”이라고 부릅니다. 표적은 단순히 놀라운 일을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이 일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 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을 보여주는 표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보았는데도 믿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그들이 나와 내 아버지를 보았고” 여기서 아주 중요한 말이 나옵니다. “보았고…” 21-23절에서는 말해줬는데도 알지 못한다고 하셨는데, 24절에서는 보고서도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보여주시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미워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알지 못해서 거부한 것만이 아니라, 보고도 거부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직접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을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을 본다는 것은 아버지를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마음이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하나님을 거부했습니다.
25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더 깊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 바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시35,19에서도 “부당하게 나를 미워하는 자들이…”라고 하고, 시69,4에서도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가…”라고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도록 미워한 것이 분명한데도, 하나님은 그 미움조차 구원의 역사 속에서 사용하셨음을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사랑의 가장 위대한 증거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역설입니다. 사람의 미움이 하나님의 사랑을 막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미움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죄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돌이켜 살기를 원하십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고 죄인을 불러 회복시키십니다. 상한 자를 고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하나님의 마음을 몸으로 보여주셨는데 사람들은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사랑을 보여주셨는데 왜 미워했을까요? 사실 이것이 죄의 무서움입니다. 죄는 단순히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무지가 아닙니다. 때로는 빛을 보고도 빛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요3,19이 이것을 설명합니다.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오, 여러분!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미리 아시면서도 아들을 보내셨고, 예수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내놓으시면서 미리 아셨던 미움과 박해의 길을 걸어가셨다는 점입니다. 미움이 있을 것을 알고 박해로 반응할 것을 알며 그 길의 고통을 아시면서도 사랑으로 그 길을 걸으셨습니다.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미움 때문에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우리의 증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받으면 사랑하겠습니다.’가 아니라, ‘사랑받지 못해도 사랑하겠습니다.’이며, ‘좋은 말을 들으면 선대하겠습니다.’가 아니라, ‘비난을 받아도 선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입니다. 이것이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가 맺는 열매입니다.
여러분, 목회자가 말씀을 전하고 복음을 증언하다 보면 모든 사람이 항상 박수쳐 주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오해도 받습니다. 때로는 비판도 받습니다. 때로는 선한 의도가 다르게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목회자가 사랑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교회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목사님은 무조건 참고 견디셔야 합니다.’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그 사랑의 사명을 오래 감당할 수 있도록 우리가 함께 돌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는 서로의 짐을 지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영적 건강을 위해 기도하고, 육체의 건강을 살피고, 충분한 쉼을 존중하고, 목회자의 가정을 귀하게 여기고, 그 가족들을 하나님의 귀한 자녀로 대하고, 목회자의 사역을 성도들이 함께 감당해야 합니다. 그것이 목회자를 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증인의 사명을 오래 감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곤경에서도 사랑의 열매를 포기하지 않는 목사님과 그렇게 사랑의 증인으로 사실 수 있도록 적극 돕고 후원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4. 끝으로, 26-27절입니다. “(26)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27)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제 너희가 가서 증언하라. 사랑의 열매를 보여주어라’ 그런데 그 전에 아주 놀라운 약속을 하나 주십니다. 성령께서 오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라 하였습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하시는 모든 신비한 사역들은 예수님이 말씀으로 가르치셨고 삶으로 보여주셨던 사랑의 계명을 증언하시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맺게 하시고, 동시에 그 사랑을 세상에 나타내도록 하십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말씀입니까? 성령의 증언과 제자들의 증언이 함께 갑니다. 성령께서 하시니까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반대로 우리가 열심히 해야 성령께서 도와주신다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께서 일하시고, 우리는 그 일에 순종하여 증언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너희도”라고 하였습니다. 목회자도 증언하고, 장로도 증언하고, 권사도 증언하고, 집사도 증언하고, 청년도 증언하고, 어린아이도 증언합니다. 교회 전체가 증언의 공동체입니다. 목회자는 교회의 증언을 대신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목회자는 교회가 증언의 공동체로 살아가도록 말씀으로 세우고 돕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목회자에게 “목사님, 열심히 하십시오.”라고만 말할 것이 아니라, “목사님, 우리가 함께하겠습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목사님이 말씀을 전하면 성도들이 삶으로 그 말씀을 살아내야 합니다. 목사님이 복음을 전하면 성도들이 자기 자리에서 복음을 드러내야 합니다. 목사님이 교회를 위해 기도하면 성도들도 목사님과 그 가정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목사님이 성도들을 돌보면 성도들도 목사님의 건강과 가정을 돌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바울을 위대한 사도라고 기억합니다. 그런데 바울의 사역을 자세히 보면 바울 혼자 사역하지 않았습니다. 바나바가 있었습니다. 실라가 있었습니다. 디모데가 있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있었습니다. 누가도 있었습니다. 수많은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6장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일일이 불러가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복음의 사역은 한 사람의 영웅적인 사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목사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목사님에게 모든 일을 맡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목사님이 목사님의 사명을 잘 감당하시도록 성도가 성도의 사명을 함께 감당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실 때 성도들도 목사님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목사님이 심방하고 상담하고 가르치는 동안 교회 곳곳에서 성도들이 함께 섬기십시오. 그리고 목사님의 몸이 건강할 수 있도록 건강을 돌보는 일을 존중해 주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 목사님의 가정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목회자의 가족도 교회의 사역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한 가정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님이 가정에서 웃을 수 있고, 아내와 행복할 수 있고, 자녀들이 교회를 부담스러워하지 않고, 가족 모두가 하나님 안에서 평안할 수 있도록 교회가 배려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너희도” 증언하느니라고 하신 말씀에 합당하게 사는 한 모습입니다.
여러분, 목회자와 평신도 모두가 미움과 적대와 박해, 삶의 고통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도 ‘사랑하며 사는 것’을 보여주는 증인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