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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강해 5 (김명호 목사님)
히브리서 1장부터 5장까지는 주로 예수님이 얼마나 뛰어나시고 높으신 분이신지 그것을 비교해서 설명하고 그러면서 예수님이 그렇게 뛰어나신 분이라는 이유가 무엇인지 1장 1절로부터 3절까지 특별히 그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6장부터는 그게 이제 5장 12절부터 14절까지 그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다 어린아이들이다 그렇게 얘기를 하고 그 다음에 6장으로 넘어가면서 하나님의 그리스도 말씀에 6가지 도의 초보, 6가지를 쭉 얘기하는데 혹 기억되세요?
제일 처음에 무엇이었습니까?
죽은 행실을 회개하는 것 둘째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 그다음에는 침례, 그다음에는 안수, 그다음에는 부활 그다음에는 영원한 심판 이 6가지를 도의 초보라고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이 진리의 말씀을 따라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 도의 초보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고 있어야 된다는 이 얘기를 하면서 거기에 기초해서 어디로 나가자고요?
완전한 데로 나가자 완전한 데로 나아가자고 얘기를 하면서 그다음에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분과 성소 봉사에 대한 얘기를 9장까지 또 10장 중반쯤까지 그렇게 얘기를 하면서 언약 얘기와 함께 성소 얘기를 우리에게 성소와 성소 봉사 얘기를 우리에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10장 후반서부터 13장까지는 이와 같이 완전한 데 나아간 그리스도인들 신앙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하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1장에 누구 얘기가 나온 거예요? 신앙의 선조들 얘기가 나오는 거예요.
믿음으로 아벨, 믿음으로 노아는 믿음으로 에녹은 믿음으로 노아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이래서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 하면서 40몇 절까지 끝절까지 그 믿음으로 산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그 얘기를 쭉 전개를 해주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데 나아간 경험을 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믿음의 삶을 살게 된다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에게 얘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11장에는 특별히 믿음에 대한 정의 신약성경에서 믿음에 대한 정의를 가장 잘했다.
그러죠. 성경 전체를 통해서 그렇죠 믿음은 바라는 것들에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 그렇게 얘기를 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하는 그 말이 휘포스타시스라는 말이거든요.
휘포스타시스라는 말은 가장 쉽게 이해하도록 하려면 등기 문서라는 말입니다.
등기 문서. 그래서 옛날에 이 이 헬라 말을 쓰던 그 시대에 등기 문서를 휘포스타시스라고 말했거든요.
그건 이제 그 실상이라는 뜻이죠. 그게 근데 이제 그 등기 문서라고 하면 이제 그 뭔지 우리들이 다 압니다.
어떤 사람이 부동산을 사려고 하면은 미국에서는 잘 모르겠어요.
한국에서는 이제 부동산을 사려고 하면은 거기에 가서 부동산을 들여다보고 사는 게 부동산만 들여다보고 사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그것이 팔려고 하는 사람의 진정한 소유인지 확인하려고 하면 어디로 가야 돼요?
등기소 가서 등기 열람을 해야 됩니다. 등기 열람을 해야 되는데 그 부동산에 안 가봐도 무엇을 확인하면 이 등기 열람을 확인하면 집이 누구 소유로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나요?
예 그것처럼 믿음은 바라는 것 우리 바라는 것이 뭡니까?
예수의 재림을 바란다고 성경이 얘기했죠. 예수의 재림 복스러운 소망이라고 그랬지 않습니까?
그다음에 우리가 하나님이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란다고 그러지 하늘나라에 대해서 바란다고 그랬지 않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그러니까 이 부활 소망들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믿음은 이 바라는 것들의 무엇이다 등기 문서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직 부활을 경험하지 아니했고 하늘을 가서 보지 못했지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그런 것들이 있다는 등기 문서 노릇을 하는 것이다.
그런 얘기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이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살면서 이 사람들을 볼 때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볼 때에 무엇을 볼 수 있도록 해야 되는 거예요.
아 천국이 저렇구나 예수님이 재림이 부활이 저렇구나 이런 것들을 우리가 알 수 있도록 그렇게 드러나는 삶을 사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그렇게 산 사람들이 누구냐 믿음으로 아벨은, 믿음으로 에녹은, 믿음으로 노아는 이렇게 쫙 얘기를 한 거죠.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이 땅에 살 때에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등기 문서처럼 보여준 사람이다.
우리도 도의 초보에서 시작해서 완전한 데 나아간 사람들은 바로 사람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존재들이다 그런 얘기거든요.
그래서 히브리서 10장 하반부터 13장까지는 그것을 중심으로 얘기를 쭉 하고 있습니다.
편지서들이 일반적으로 좀 그렇죠. 앞에는 진리에 대한 이론적인 설명을 하고 후에는 그런 이론적인 설명의 바탕 위에서 생활이 이렇게 된다 하는 얘기들을 설명하는데 히브리서도 좀 그런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재림을 고대하면서 충실히 믿음으로 살자.
그 성소는 예수 재림까지 포함하고 있다 하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히브리 10장 37절 말씀을 좀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35절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이 성소 문제를 공부하면 담대함을 깨달으면 담대함을 버리지 않는 자리에 나간다는 암시가 있는 말씀이죠.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37절 잠시 잠깐 후면 오시리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오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그리고 이제 11장으로 넘어가면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이제 열심히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서 믿음으로 살면 이 믿음의 선조들처럼 그렇게 사는데, 성경이 히브리서를 가면서 중간 중간마다들이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아까 얘기했듯이 3장 1절로부터는 그렇게 얘기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에 믿는 도리에 무엇이라고 그랬어요?
예수님은 사도입니까? 예수님 사도예요. 사도 아니에요 제가 어디 가서 예수님 사도입니까 하면 다 아니라 그래요.
그런데 히브리 3장 1절을 보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그랬죠?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누구를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그러니까 예수님이 사도라고 그랬어요. 무슨 사도 믿는 도리의 사도입니다.
사도라는 말은요. 개척자라는 뜻도 있고요. 심부름꾼이라는 뜻도 있고요.
그래요.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 무엇을 개척하고 무엇을 하신 분이란 말이에요.
믿음의 도리를 개척하신 분이시고 그 다음에 믿음의 도리를 전하기 위하여 오신 분이라 심부름꾼이라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모든 예수 믿는 사람들도 심부름꾼들이에요.
누구의 심부름꾼이에요? 예수님의 심부름꾼들이에요.
이 심부름꾼은 자기 마음대로 뭘 할 수 있나요? 예 심부름 시킨 사람의 얘기대로 해야 되거든요.
그러니까 이 심부름 하는 사람은 심부름 하는 동안에는 자기 의지가 없어요.
그거는 심부름 시키는 사람대로 얘기를 해야 돼요.
여러분들 저기 아히마하스 혹 아세요? 아히마아스는 아주 발이 빠른 사람이었거든요.
그거 이제 사독의 아들이에요. 제사장 사독의 아들이죠.
그러니까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압살롬이 죽었잖아요.
이게 숲속에 가다가 목에 걸려가지고 머리가 이 나무에 걸려가지고 매달렸다가 죽었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아히마아스가 요압한테 얘기하지 않습니까?
이제 다윗편이 이겼다는 소식을 왕에게 전할 수 있도록 내가 가겠습니다.
하니 요합이 못 가게 하잖아요. 야 가지 마라. 이번 심부름은 니가 가서 칭찬받을 일이 아니다.
넌 가지 마라. 그러니까 구스 사람을 보냈잖아요.
군사 사람을 보냈는데도 자기가 가겠다고 자꾸 졸라댔다고요.
그러니까 가라 그랬어요. 그런데 이 사람 발이 빨라가지고 다윗 앞에 누구보다 빨리 도착했어요.
구스 사람보다 빨리 도착했어요. 그래 가지고서 이겼습니다 하고 이제 소식을 전했잖아요.
다윗이 알고 싶은 건 뭐예요? 압살롬이 죽었나 살았나 그걸 알고 싶은데 그 내 아들 압살롬은 어떻게 됐냐 하니까 아 시끄러운 소리만 나지 제가 그거는 모르겠습니다.
이랬단 말이에요. 왜냐하면은 다윗이 그 얘기 듣고 안 좋아할 것 같으니까 그다음에 이제 구스 사람이 와서 이제 왕의 대적은 다 그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얘기를 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제 다윗이 통곡을 했는데 우리가 소식을 심부름꾼인데 지금 아히마아스나 구스 사람 심부름꾼이잖아요.
그런데 심부름꾼은 자기가 전할 소식을 분명히 알아야 돼요.
그걸 알지 못하면은 심부름 시킨 사람의 뜻을 증거하지를 못하죠.
아히마아스 같은 심부름꾼이 되면 안 된다 그 말입니다.
우리는 믿는 도리의 사도이신 예수님에게서 또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이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면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니 그랬어요.
그래서 이 보냈다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냈다고 하는 말이요.
아포스텔로예요. 내가 너희를 보낸다.
아포스텔로에서 나오는 말이 아포스 사도라는 말이에요.
그래서 아포스텔로 보낸다. 사도는 아포스톨로스예요.
헬라말로 아포스톨로스 이 아포스톨로에서 나온 말이 영어 아포스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심부름꾼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 이 땅에 오셨고 예수님께서 보낸 모든 제자들은 예수님의 심부름꾼으로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고 오늘 저나 여러분들은 다 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심부름꾼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믿는 도리를 개척해 주셨어요. 그래서 예수님 믿는 도리의 사도세요.
근데 예수님께서 믿는 도리의 사도신데 왜 우리가 예수님께서 따라가신 그 발자취를 따라 가야 되잖아요.
그런데 한 발자국도 빗나가지 않고 발자국에 똑바로 팔을 흔들면서 따라 여기까지 따라오신 분이 몇 분이나 되세요?
참 그거는 그런 소리 할 사람 아무도 없죠. 우리는 비틀거리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하고 그럽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믿는 도리의 사도심이요 그다음에 무슨 말이 있어요?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 그러니까 예수께서 개척해 놓으신 그 길을 따라 가다가도 실수할지라도 넘어질지라도 그것을 용서하시고 일으켜 주시는 분이 어디 계세요?
하늘에서 봉사하시면서 속죄 봉사하시면서 뭐 하셔요?
나의 피 나의 피 호소하신다. 그래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에 사도시며 거기까지만 한 게 아니고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자.
그러니까 하늘의 성소에서 우리 주님께서 대제사장으로서 나의 피 나의 피를 호소하시는 그 주님을 바라보는 것은 우리의 믿음 생활을 확실하게 하고 소망 중에 견고하게 하는 일에 절대적인 일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바라봐야 되는 거예요.
이제 12장에 가가지고 믿음의 주여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이제 그 예수님을 바라보는데 그 예수님이 지금 하늘에서 뭐 하신 거예요?
대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고 속죄하시고 피 뿌리시는 그 예수님을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거거든요.
그러면서 날마다 예수님이 가신 그 걸음을 따라 걸으면서 우리들 자신이 어린 양의 피로 어린 양의 보혈로 날마다 우리를 씻어 희게 하면서 사실 내가 씻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나가면 씻어주세요. 그래서 요한복음 13장에 베드로가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절대로 하지 못하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7절부터 쭉 읽어보면 나와 요한복음 13장 8절 9절에 가보면 그렇죠.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며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그랬어요.
그러니까 씻어주시는 분이 내가 씻는 게 아니고 누가 씻어주신다고 말씀하신 거예요.
예수께서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내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그러니까 우리는 날마다 주께서 나를 씻겨주시도록 나를 주님한테 뭐 할 줄 알아야 돼 맡길 줄 알아야 돼요.
우리가 같은 허물을 자주 범합니까? 여러분들도 그래요.
저도 똑같거든요. 우리는 모두 다 무슨 건이 있어요? 무슨 근 아킬레스건 이라는 게 있잖아요.
그러니까 각 사람마다 특별한 잘 걸려 넘어지는 데가 있어요.
약점이 성경 가운데 그 대표적으로 드러난 사람 하나가 글쎄 대표가 될는지는 모르겠지만은 아브라함이잖아요.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리게 하면서 자기 와이프를 무엇이라고 그랬어요.
누이라고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바로가 아 사라가 아리따운 여자라 홀랑 데리고 갔어요.
누이라니까 바로가 잘못했어요. 잘했어요. 누이라고 한수 데리고 왔는데 그런데 데리고 갔는데 자기 누이라고 한 아브라함이 야단을 맞았어요?
바로가 야단을 맞았어요? 바로가 야단을 맞았어요.
아니 하나님도 참 희한하지 잘못은 누가 했는데 아브라함이 했는데 야단은 누굴 쳤어?
바로 야단을 쳤어. 이거 왜 이럴까 이거 왜 이 아브라함을 혼내줘야지 거짓말을 한다고 말이에요.
바로를 야단을 쳤을까 하나님께서 편애하셔요. 안 해요.
하나님은 공평하세요 안 공평하세요? 저는요. 하나님은 참 당신의 백성을 편해하시는 것 같아요.
편해하시는 것 같은데 그것이 하나님의 공평인지도 몰라요.
그런데 제가 이거 왜 아브라함을 안 치고 바로를 야단을 쳤을까 그걸 생각을 하니까요.
만약에 아브라함을 야단을 치면 아브라함은 자기가 잘못한 것 알아듣겠죠.
그러나 바로는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할까요? 아니에요.
어찌 녀석 잘못해가지고 이 야단 맞는 거 당연하고, 나는 동생이라고 해서 데리고 왔는데 뭐 그렇잖아요.
근데 바로를 야단을 치니까 누구도 깨닫고 아브라함도 깨닫고 누구도 깨닫고 바로도 깨닫고 그래 제가 그걸 읽으면서 참 하나님의 백성은 다른 사람들이 책망받을 때 내 허물을 생각하고 주님 앞에 굴복할 수 있는 사람들이구나 하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주위에 어떤 사람이 뭐 무슨 일로 인해서 야단 맞는 그런 일들을 혹 보면서 아이고 고소하다 그랬으니 혼이 나야지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그런 일을 볼 때에 나를 살펴보라는 이야기 나를 살펴보라 거기 그런 교훈이 있어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런 일을 하고 난 다음에 그다음에는 괜찮았어요.
그다음에는 그런 일 없었어요. 아니 20장에 가면은 그랄 왕한테 가서 또 그래 그때는요.
사라가 90이 다 됐을 때예요. 그는 내 사라가 아리따와서 그런 거짓말을 또 한다고 생각 아니 아름다워서 그래서 그건 이제 주석학적 얘기가 있지만 어쨌든 간에 그게 하나님께서 저는 그래서 허물이 비슷한 허물이 반복될 때 그것이 자꾸 드러날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너는 그거 고쳐야 된다고 지적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가락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아브라함아 너 애굽에 내려갈 때 나타났던 성질 고쳐졌나 고쳐졌는지 한번 보자하고 또 집어넣은 거예요.
안 고쳐졌어 응 그러니까 우리가 뭔가 잘못했을 때 그 비슷한 환경 속에 들어오면 그게 내가 가지고 있는 아킬레스건이거든요.
그러니까 또 비슷한 환경에서 또 범하거든 그럴 때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뭘 지적하는 거예요 너는 요거 고쳐져야 된다.
이거 고쳐져야 된다. 그렇게 자꾸 하나님께서 지적해 주시는 은혜의 손가락이에요.
그러니까 그거 지적해 주시는 거 감사하죠. 얼마나 감사해요.
그거 모르면 그거 지적 안 해주면 자기가 잘못한 것을 깨달을 수가 없게 되지 않습니까?
우리 생애 가운데 그렇게 아킬레스 건이 자주 흔들리는 것 그런 경험들을 우리 자주 하는 것 같아요.
여러분들은 모르겠는데 저는 자주 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도 잘 안 고쳐지는 것 같아요.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성경 가운데 뭐라고 하는지 아시죠?
목이 곧은 사람 이 요새의 번역들을 보니까 목이 뻣뻣한 사람이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심부름꾼으로 기별을 바르게 전하면서 주님 앞에 날마다 굴복하고 자기 발을 내밀고 우리 아킬레스건이 지적될 때마다 주님 앞에 굴복하면서 씻어주세요.
씻어주세요. 그렇게 해서 어린 양의 피해 그 옷을 씻는 경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렇게 산다.
이게 이제 11장부터 쭉 그 얘기 이제 우리에게 해주는 거예요.
11장이 중심적으로 얘기하고 이제 12장에서도 믿음을 주의 온전케 하시리는 예수를 바라보자고 얘기를 하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러면서 10장 37절에 잠시 잠깐 후에 오시리가 오시리라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그랬어요.
잠시 잠깐 후에 오시리가 오시리니 그 잠시 잠깐이 얼마나 됐어요 잠시 잠깐 후에 오실리가 오신다고 그랬는데 그 잠시 잠깐이 얼마나 됐어요
십년 70년 이전에 기록됐단 말이에요. 70년 이전에 히브리서가 기록됐는데 지금 얼마나 됐어요?
아 지금 2천 년이 넘어 그런데 잠시 잠깐 후에요 했어요.
잠시 잠깐 후면 오시리가 오시리니 이게 무슨 말일까 예수님께서 요한계시록 22장 마지막 파트에 보면은 내가 진실로 내가 속히 허리라 속히 오리라 요한이 요한 계시록을 기록한 데도 주후 90년 정도니까요.
그때만 쳐도 지금부터 2천년 거의 전이잖아요.
그런데 아직 안 오셨어. 그래서 아 그러면 이것은 하나님 시간인가 이게 하나님 시간이라고 그러잖아요.
주께서는 하루가 천년 갖고 천년이 하루 없고 이제 우리 베드로서 배우면 그 말 나올 거란 말이에요.
베드로후서에 있는 말이니까 그러니까 주께서는 천년의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으니까 성경 누구한테 준 책인데 하나님한테 하나님 보라고 쓴 책이에요.
아니에요 그건 누구한테 준 책이에요? 우리한테 준 책이에요.
그러면은 그 성경에 나오는 잠시 잠깐이라고 하는 얘기가 하나님께는 천년이 하루 같으니까 하나님께 의미가 없어 우리한테는 우리한테 의미가 있어야 되잖아요.
그래서 이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잠시 잠깐 후면 오시리가 오실 것인데 또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예수님 오늘 오시면 어떻겠습니까?
오늘 저녁에 예수님께서 영광 중에 재림하시면 어떻겠어요?
아멘 아멘 어떻게 하세요? 네 옛날에요. 제가 저 강원도 장로수양회 초청을 받아서 갔거든요.
그러니까 그 영동 지역의 장로님들이 한 80명 모였어요.
다 교회에서 와가지고 그리고 이제 그 교회 교인 집회하는 교회 교인들하고 다 합해가지고 뭐 한 100여 명 이상 이제 모였어요.
제가 각론을 시작하면서 그렇게 물어봤습니다. 우리들은 다 제 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 교인들이지요 하니까 아멘 그러니까 여러분이나저나 예수님의 재림을 아주 손꼽아 기다리죠.
아멘 그래요. 장로님들은 모이는 예배당이 이거보다 조금 작은데요.
지붕이 뻥뻥 울리도록 소리를 하니 얼마나 소리가 씩씩하고 큰지 그래서 아 그러니까 예수님 내일 오시면 대단히 좋겠죠.
아니 조용 아멘 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요. 조용히 그래서 아니 이게 어쩐 일이십니까?
어제 재림을 기다리시는 분이라고 하니까 아멘이라고 하셨는데 내일 오신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왜 조용합니까? 다 서로 쳐다보면서 제가 몇 번 재촉하니까 한 사람이 드디어 아유 목사님 내일 오시면 안 돼요.
아니 예수님 재림을 그렇게 기다리셨는데 왜 내일 오시면 안 됩니까?
준비가 안 됐어요. 우리 오늘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들 준비가 다 잘 되셨나요?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준비가 안 돼서요.
아 정말 그렇겠습니다. 그러면은 1년 시간을 더 주면 준비가 다 되겠습니까?
그 1년 가지고는 안 돼요. 그래요. 그래서 제가 답 물었습니다.
10년이면 되겠습니까? 에 10년도 안 돼요. 그럼 예수 재림 기다리는 거예요?
안 기다리는 거예요 오시라는 거예요. 오지 말라는 거예요.
그러더니 한 사람이 드디어 아유 목사님 10년이 아니라 50년을 줘도 안 됩니다.
그래 그럼 우리는 예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입니까?
예수 재림 안 하기를 기다리는 사람입니까? 하니까 아무 말이 없어요.
우리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린다고 하는 실상이 그런 겁니다.
속히 오셔야지 속히 오셔야지. 그러면서 내일 오신다고 하면 겁이 나.
그래서 잠시 잠깐 후면 오시리가 오시리니 결코 지체하지 아니 하시리라.
진실로 내가 속히 오리라. 이걸 도대체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바르게 이해하는 것일까 이제 머릿속에 고민입니다.
이게 어떻게 이해해야 되느냐 그러다가 주께서 저에게 이해할 수 있는 지혜를 주셨어요.
그 얘기가 뭔지 아세요? 내가 역사만큼 오래 사나 우리 오늘 오신 여러분들 역사만큼 오래 사십니까?
누구도 대답 안 하시네. 역사만큼 오래 사시는 분 아무도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성경에 가르치고 있는 종말론이 역사적 종말론을 우리는 주로 생각을 합니다.
예언 연대도 있고 2300주야 뭐 한 때 두 때 반 때 70이래 129일 1335일 이 예언적 연대들이 나와 있잖아요.
그것들은 다 역사적 연대를 우리에게 예언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이요. 한때 두 때 반 때도 봤고 2천3백주야 다 봤는데 7일에 230주이야가 성취되는 것을 다니엘이 봤어요.
성취되는 걸 봤어요 못 봤어요. 다니엘은 칠십일회가 저게 성취되는 것도 못 보고 세상 잠들었습니다.
그러면 다니엘이 자기는 그걸 경험을 하지 못했으니까 아이 하나님이 나한테 주기는 줬는데 이게 엉터리다 그럴 거예요.
우리는 뭐만큼 못 살아요? 역사만큼 살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 재림 교인들은 종말론을 얘기하면은 다 어디로 달려가요?
역사적 종말론으로 달려가요. 그건 성경에 연구하라고 했으니까 연구해야 돼요.
그런데 성경에는 종말론이 크게 두 가지가 나오는데 이제 얘기했듯이 하나는 무슨 종말론이요?
역사적 종말론입니다. 또 하나는 뭐시겠어요? 개인적 종말론입니다.
개인적 종말론입니다. 이것은 저 시편 몇 절이죠?
39편 4절로 7절까지 보면 이 개인 종말론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4]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5]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 [6]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7]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 39:4-7)
그러니까 이 시인은 다윗이 쓴 신데요. 이 시인은 이 다윗은 무엇을 알게 해달라고 그랬어요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어떠한 것을 알게 해달라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걸 보니까 자기의 종말과 연한이 뭐만 해요?
다윗의 날이 뭐만 해요? 손만큼 되게 하셨다 그랬어요.
넓어요
봐요. 그러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역사적 종말론을 얘기하는 것과 동시에 무슨 종말론을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 개인의 종말론을 얘기하는 그러면은 제가 오늘 죽으면 여러분들이 오늘 죽으면 예수님 재림은 언제 맞이하실 거예요?
내일 아침에. 그러니까 모든 각 개인은 예수님을 언제 맞이해요?
내일 아침에 맞이해요. 속히 오셔요. 잠시 잠깐 후면 오실이가 오셔요.
그래서 이것은 역사적 대한 말씀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무엇이 초점으로 얘기되어지는 것이다.
무슨 종말에 대 종말을 중심으로 하신 말씀이다. 개인적 종말을 중심으로 하신 말씀이구나.
정말 우리 각 사람에게는 예수님께서 잠시 잠깐 후면 오시는 분이십니다.
그 우리가 죽고 나면은 세월이 없어요. 우리가 호흡이 딱 끊어지고 나면 그 사람에게는 뭐가 없어요?
시간이 없어요. 세월이 없습니다. 그러면 한숨 실큰 자다가 참 우리 예언의 신에 기록돼 있는 말씀대로 깨우라 깨어라.
티끌 가운데 자는 자들아 일어나라 하는 소리를 듣고 펄떡 일어나면 그것이 언제예요?
내일 아침이에요. 또 하나의 오늘이죠. 내일 아침 그러니까 우리 모든 사람들은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언제 맞이하는 거예요?
내일 아침에 맞이해요. 제 얘기가 틀린 것 같습니까?
성경적으로 그런 것 같습니까? 역사적 종말론을 가지고 얘기하면 그 말은 안 맞아요.
그러나 우리 각 개인들은 역사만큼 오래 살지 않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 오늘만 사는 사람입니다. 내일은 내 날이 아니에요.
오늘만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3장 13절에 사도바울은 이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3장 12절부터 보면 이렇게 돼 있습니다.
“[12]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2-13)
그러니까 이게 뭐라고 그랬어요? 13절에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그러니까 우리는 어느 날만 살아요.
오늘만 살아요. 오늘이라는 매일을 살아요. 그래서 히브리서는 더욱 완전한 데 나아가자.
하늘 성소를 바라보자. 예수님의 대제사장 봉사하시는 것을 바라보자.
그러면서 우리의 초점이 예수님에게 있도록 하고, 그리고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라 오늘만 올바르게 진리 안에 있거라. 그 얘기를 우리에게 해주는 거예요.
쉬워요. 어려워요.
그러니까 우리에게 일주일 동안 잘 살아라 하는 거 하고 오늘만 잘 살아라 하는 거 하고 어느 것이 쉬워요.
제가 이 진리를 성경 속에서 깨달은 다음에 믿음으로 사는 것이 참 쉽구나.
오늘만 잘 살면 돼.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 죄의 유혹으로 강팍케 됨을 면하도록 오늘 잘 살아야 돼요.
오늘은 안식일이라 우리가 예배당에 와서 거의 하루 종일을 보내니까 오늘 잘 사셨어요.
지금까지 예배당에 와가지고 있어도 잘못 살 수가 혹 있죠.
그러니까 우리는 호흡마다 뭘 해야 돼요? 사죄에 호흡을 해야 돼요.
제가 정로의 계단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위를 은혜의 대기로 덮어놓으셨다.
은혜의 대기로 둘러놓으셨다. 그 구절을 읽으면서 그렇구나.
우리는 그리스도인은 순간순간 살아가면서 무엇을 호흡하면서 사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호흡하면서 사는 사람이다. 그래서 순간순간 우리는 은혜를 호흡하면서 하나님의 사유하시는 은사를 맛보면서 주의 씻어주시는 손길을 맛보면서 그렇게 순간순간 오늘을 사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을 살면서 오늘 저녁 해가 지면은 그 다음에 헤어지고 나면은 뭐 저녁에 앉아서 두른두른 얘기들도 하고 텔레비전도 보고 뭐도 하겠죠.
그러다가 뭐 해요? 눈 똑바로 뜨고 어 잠이 오면 안 자려고 애를 쓰면서 그렇게 밤을 샙니까?
새요 안 새요 뭐 그런 사람도 혹 있을 거예요. 그러다가 결국은 사람인데 다 잠듭니다.
그 잠드는 게 뭐죠? 죽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죄가 세상에 들어온 다음에 밤이 되면 자게 하셨어요.
밤에 잠들어 자는 것은 무엇을 경험하게 하는 거예요?
사망을 경험하게 하는 거예요. 우리는 이제 오늘 밤에 또 죽을 겁니다.
다 사망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아침에 해가 뜨고 그때 되면 우리는 또 다 뭐 하는 거예요?
잠 깨요 일어나면 그거는 무엇을 훈련시키는 거예요?
부활을 훈련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루라는 단위를 오늘이라는 단위를 우리에게 주시면서 그 오늘이라는 하루 동안에 무슨 경험도 하게 하시고 사망 죽는 것 경험하게 하시고 또 뭐도 경험하게 하시고 훈련하게 하시고 부활을 훈련하게 하시고 그 우리는 매일 죽고 매일 부활하는 경험을 하고 살도록 하나님께서 경영하셨어요.
우리가 잠자리에 드는 것은 죽음을 경험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렇잖아요. 나는 깊은 잠 들어놓으면 누가 엎어 가도 몰라 그렇게 자는 사람 복 받은 사람입니다.
저는 잠이 얇아가지고요. 그렇게 푹 잠 잘 자지를 못해요.
잠이 얇아서 그런데 잠이 깊은 사람은 나 우리 목사님 복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엎어 가도 몰라요. 그건 죽은 것과 한 가지죠. 그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면 아 주님 또 나를 부활 훈련을 하셨군요.
이게 나의 종말과 우리는 그렇게 존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죠.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
그 다음 뭐라고 그랬어요? 한 날에 괴로우면 그 날에 좋게요.
그런데 우리는 어제 걱정을 오늘도 떠매고 있고 또 그거 언제 가지고 가요 어디로 가져가요?
내일도 가지고가고 모레도 가지고가 우리는요. 지금 저는 여러분 앞에서 열심히 얘기하고 여러분들은 웃으며 듣지만은 잠시 후에 우리가 어떻게 될는지 아무도 몰라요.
서울에 태능 교회 장로 한 사람이 있었어요.
50대 초반인가. 그런데 이 사람이 2층 집인데 2층에 내려와 가지고 아래층에 거실 소파에 앉아가 소파에 앉았다가 스르르르르르르르 쓰러졌어요.
그게 끝이야 집안 식구들이요. 이 사람 아래층에 내려갔는데 불러도 대답이 없어 밥 먹을 시간이 됐는데 그래서 쫓아와가지고 소파에 엎드려져 자고 있는 거예요.
아니 밥 먹으라고 하니 싸늘하게 식었어요.
돌연사 이거 돌연사라고 그래 돌연사 젊은 사람이었어요.
젊은 사람이었다고 그러니까 우리의 시간은 어느 시간 시간이든지 보장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의 족합니다. 그러니까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고 오늘 하루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 그 하루를 어떻게 살라고요?
주님 앞에서 뭐 하면서 살아라. 어린 양의 피로 씻으면서 베풀어 놓으신 은혜의 호흡을 계속해서 하면서 그렇게 살라고 우리에게 부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내일 하지 우리가 이 세상에 일하다가 내일 할 것들이 있어요.
오늘 다 못하잖아요. 그러나 적어도 주님 앞에 서서 살아가는 것은 내일 하면 안 돼.
오늘 다 하래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까요.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우리 스스로한테 한번 물어볼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기도문 가르치실 때 어떻게 가르치셨었어요?
무슨 양식을?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성경은 하루 단위예요.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그다음에 만나는요.
만나는 뭐 가만히 내가 쌓아놓도록 한 거 아니잖아요.
그날 것은 그날 거두었어요.
그래서 이 모든 교훈들이 무엇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거예요.
인생은 오늘만 사는 존재들이다.
예수님께서 역사적 시간으로 언제 오시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죽을 날이 언젠지 아십니까? 내가 죽을 시간은 언제 줄 아십니까?
몰라요. 우리가 그걸 모르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역사적으로 오실 시간도 모르는 겁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언제 예수님께서 오신다면 지금 2024년이니까 만약에 예수님께서 2034년에 오신다.
그렇게 하면은요. 아브라함은 언제 예수님 재림을 맞이할까요?
무슨 질문을 하는지 이해가 잘 안 되시나요? 바울은 언제 예수님 재림을 맞이하실까요?
바울이 죽은 그 이튿날 왜냐하면 딱 죽고 나면 그 다음에는 그에게 뭐가 없으니까 세월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아브라함도 죽은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면서 요새 우리식으로 표현한다면은 무엇이라고 할까요?
아! 꿈도 안 꾸고 잘 잤다. 한숨 잘 잤다 그러고 일어날 거예요.
왜냐하면 잠든 사람에게는 뭐가 없으니까 세월이 없어.
제가 어머니가 별세하신 다음에 장례식을 하면서 그때 이 사실을 아주 깊이 깨달았어요.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잠들게 하시는지, 죽은 사람은 뭐가 지겹지 않아요?
기다리는 것이 지겹지 않아요. 기다리는 것이 여러분 아이가 말입니다.
엄마 어디 가서 오는데 그 아이가 안 오나 안 오나 하다가 그만 넘어져서 잤거든요.
한숨 자고 보니까 엄마가 이렇게 웃고 들여다보고 있어요.
그러면 그 아이가 얼마나 기다렸어요?
잠들기 전까지만 기다렸어요.
근데 잠들고 난 다음에 깨어난 아이가 엄마를 보면 “엄마 언제 왔어? 내가 금방 잠들었던 것 같은데...” 이럴 거 아니에요. 모든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사람이 부활의 아침에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시간이 잠든 다음에는 시간이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잠이 깨어져 있는 동안에는 며칠만 살아요.
오늘만 삽니다. 오늘만 사니까 오늘 잘 살아야 돼요.
그러니까 우리가 서로 화해하고, 사과하고, 용서하고, 이해하고, 사랑해야 될 것은 언제 다 끝내야 해요. 오늘 다 끝내야 해요. 내일 하지 그러지 말라 이 말입니다. 내일은 올지 안 올지 몰라요.
그럼 내일 내가 눈을 뜨면 그건 내일이에요. 오늘이에요.
지금은 내일인데 내가 눈을 뜨면 그것도 오늘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얼마나 기가 막힌 표현인지 참 성경이 이렇게 말했구나!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시 39:4)
전에도 언제 한번 말씀드렸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물들은 부피가 다 있잖아요.
부피 부피가 있어요. 종이 한 장이라도 부피가 있어요.
그런데 이 세상에 있는 사물 중에 부피 없는 면적만 있고 부피 없는 것이 무엇이라고 그랬죠?
면적은 있는데 부피가 없는 거요. 이 세상에 있는 사물 중에 공기 공기도 먹을 수가 있죠.
아까 그 시편 39편 4절로부터 7절까지 읽으면 그게 나오는데 그림자 그림자는 뭐가 있는데 면적은 있는데 뭐가 없어요?
부피가 없어요. 그런데 우리 인생은 뭐와 같다고 그림자 같아요.
우리가 뭐 잔뜩 하는 것 같은데 뭐가 없어요? 부피 없는 존재들이에요.
그런데 잔뜩 부피가 있는 줄로 우리들은 생각을 하죠.
그게 우리의 모습이라고 성경은 가르쳐줍니다. 왜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야고보 4장에 나오잖아요.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라 그것을 성경은 간단하게 얘기하면서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 매일 우리가 매일 매일이라고 만나는 것은 다 항상 무슨 날이에요 오늘 오늘이라고 일컫는 동안 제가 이 구약 성경을 이렇게 쭉 읽어나가면서 창세기 17장, 창세기 25장 7절을 이렇게 읽어나가면서 저는 이 원어를 잘 모르지만은 이제 추석해 놔놓고 원어 설명해놓은 거 이제 대조해가면서 이제 가끔 이제 보게 되거든요.
항상 그렇게 하지는 못하지만은 그래서 보거든요.
보는데 그거 보다가 깜짝 놀랐어요. 이제
창세기 25장 7절을 원문으로 직역해 보세요.
에 보면은 아브라함이 아브라함의 향연이 170 5세였다.
그렇게 돼 있어요. 아브라함의 향연이 175세였다.
그런데 원문을요. 살펴서 지적을 하면은요. 아브라함이 하루씩 175년을 지냈다.
그렇게 돼 있어요. 원문이 그래요. 제가 그걸 다 깜짝 이 성경의 인간의 날수를 계산하는 것은 몇 년 단위로 계산하는 게 아니고 무엇으로 계산하더라.
하루씩 계산하는구나 하루 욤이라는 말을 썼는데 그게 날 그래요.
날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날들을 175년 지냈다.
이 말이 175년 그러니까 그거는 하루씩 175년을 그러니까요.
하루씩 살다 보니 175년을 살았다 그 말입니다.
왜 우리들도 그렇죠. 하루씩 살다 보니 지금 여기까지 산 거예요.
하루씩 살다 보니 그러니까 하루씩 사는 그 하루를 어떻게 살아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오.
이 하루를 누구 안에서 충성스럽게 살라고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충성스럽게 살아라.
그래서 이 구약 성경에 이 사람들 수명을 얘기할 때에 이 아브라함에 대해서 25장 창세기 25장 7절에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그러면 창세기 5장에 아담이 930년을 향수하고 죽었더라 셋이 905년을 향수하고 죽었더라 이런 식으로 죽자가 나왔는데 이것은 어떤 어법일까 그래 그것도 찾아봤는데 똑같아 아브라함이 930년이라는 날들을 살고 죽었대.
날들을 살아 날들을 살고 죽은 거야.
히브리 11장에는 믿음의 사람들의 일생을 소개해 줍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다 며칠씩 살았다는 말이에요.
오늘이라는 하루씩 살았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허락된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되겠어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에녹은, 믿음으로 노아는....
그 하루하루를 사는 것을 무엇으로 살아라. 믿음으로 살아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라. 이 믿음이라는 “피스티스”라는 말인데 쉽게 이해하면 맡긴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나를 예수님에게 맡겨 버린다 그 얘기입니다. 오늘의 걱정, 염려, 내 삶의 무거운 짐들을 다 예수님께 맡기고 하루 하루를 기뻐하며, 감사하며, 신뢰하며, 찬양하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그게 믿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참 잘 못 맡겨요.
참 잘 못 맡겨요. 벌써 맡기는 것 같이 하다가 위기가 되면 하고 도로 찾아와요.
어떤 목사님이 설교를 하는데요. 제가 그 설교를 들으면서 정말 머리를 많이 끄덕였어요.
예배에 대해서 설교를 하는데 우리 재림교회 목사님인데 예배에 대해서 설교를 하는데 이렇게 이 말이 인상에 남았어요.
무슨 말인가 하면은 불신자들은 일이 닥치면 일이 닥치면 예배하러 가더라.
불신자들은 자기에게 무슨 일이 닥치면 예배하러 가더라.
어디로 예배하러 가느냐 무당한테 예배하러 가더라. 점쟁이한테 예배하러 가더라.
그렇잖아요. 점쟁이 찾아가고 무당 찾아가고 하는 거 다 자기가 당한 이런 일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하고 가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그것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신을 찾아가는 제사장을 찾아가는 하나의 예배 행위다.
그런데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 재림 교인들은 이 일이 닥치면 예배 드리러 안 온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그렇게 설교하는 걸 내가 들으면서 참 맞아 내가 머리를 끄덕거렸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집에 좀 어려운 일이 있으면 예배드리러 와요.
안 와요.
안 와 불신자들은요. 몸이 좀 아프면 이거 어떻게 낫나 싶어 누구한테 쫓아가요?
점쟁이 찾아가고, 무당 찾아가 이거 어떻게 하면 낫나 그런데 우리 재림 교인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몸이 좀 아프면 교회 와요.
안 와 그러니까 그 사람들하고 예배드리는 태도가 정반대야.
그 사람들은 위기가 있고 위험이 있을 때 어디로 쫓아갈 줄 아는데 그들이 믿는 신에게 쫓아가서 자기네들이 어떻게 도움을 받을까 쫓아가는데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위기가 닥치고 몸이 아프면 어딜 가요?
예배하러 안 가 예배하러 안 가 그러니까 제가 그 설교를 가만히 들으면서 그거 참 맞네.
맞네. 이거는 정어리 거꾸로 사네. 거꾸로 살아 우리 오늘 이 자리에 오신 분들은 거꾸로 살지 맙시다.
거꾸로 살지 맙시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 주님 앞에 충성스럽게 살아라.
그래서 이 히브리서는 이제 10장 후반에서부터 13장까지 쭉 읽게 되는 그래서 10장 24절 25절에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뭐하라 더욱 잘 모여라 그랬잖아요.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4-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처럼 하지 말고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이 말은 더욱 모이기를 힘쓰라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지금 역사적 시간으로 그 날이 점점 가까워 오는데 모이기를 잘 해요. 안해요?
화요일 빠지고, 금요일 빠지고 자꾸 빠져요.
그러니깐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거리 모이기를 힘쓰라고 했는데 우리 오늘날 신앙생활의 삶이 말씀대로 해요.
안 해요. 아니에요. 그게 오늘 우리 재림교회의 신앙의 형태입니다.
모습입니다. 이래가지고는 안 되겠죠.
그러니까 우리는 성경이 말한 대로 모이기를 자주 하면서 모여서 진리의 말씀을 성경이 말하는 대로 추구하고 깨닫고 그리고 깨닫는 것만 가지고 안 돼요.
그것이 뭐가 돼야 돼요? 내 생활이 돼야 돼요. 그게 생명이 돼야 돼요.
생명 제가 이제 얘기를 끝내려고 하는데요. 제가 이 얘기는 뭐 여러분들 다 알 얘기지만은 여기 이렇게 더 완전한 데 나아가고 성소를 바라보고 위에서 봉사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님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요.
야고보서는 말입니다. 야고보서 우리가 이제 야고보서 마틴 루터는요.
이렇게 말했어요. 로마서는 성경이라고 하는 반지의 보석과 같다 그랬어요.
이 성경을 반지에 비유한다면 로마서는 반지위에 있는 보석과 같아 마틴 루터가 그랬거든요.
야고보서는 이건 지푸라기 같은 성경이다. 뭐 같은 성경이 루터가 야고보서를 뭐 같은 성형이라고 그랬어요.
지푸라기 같은 것은 가치가 별로 없다 그 말이잖아요.
지푸라기 같은 성경이니까 왜 그런가 하니 루터는 지금 무엇을 깨달아가지고 믿음으로 말미암 는 의를 깨달았어요.
루터가 독일말로 성경을 번역했잖아요. 아마 번역하면서 그렇게 특별히 느꼈을 거예요.
야고보서 뭐 하라고 행해라 행해라 그러니까 믿음으로 모든 것이 된다고 자꾸 깨달아가지고 들떠 있던 이 루터가 가만히 보니까 이 야고서는 무슨 성경이에요?
지푸라기 같은 성경이야. 그래서 오늘날 다 우리가 이 야고보서 얘기를 하면은 뭐 하라고요?
행함을 야고보는 행함을 강조한다 그러잖아요. 그러면서 그다음에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느냐 행함으로 의롭게 되었느냐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말미암아 그 의의가 완전해졌고 유기 그래서 배우기를 그래 배웠고 주석도 그렇게 섰고 그랬으니까 저도 어떻게 가르쳤겠어요?
주석에 놓은 대로 배운 대로 야고보서는 행함을 강조했다.
믿음만 가지고는 네 온전하지 않다. 그 믿음이 행함이 될 때에 온전하여 진다.
그렇게 이제 행함이 이야기 열심히 했잖아요. 그런데 한 날은 야고보서를 쭉 읽다가요.
깜짝 놀랐어요. 야고보서가 행함을 얘기하고 있는 책이 아니구나.
아 그걸 이제사 깨달았어요. 야고보서 뭔지 알지?
야고보서 2장 18절에 너는 믿음이 있다 하고 나는 행함이 있다고 하니 행함이 없는 믿음을 내게 보이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약 2:18)
그래서 제가 가끔 그래 믿음은 보여줄 수 있어요. 없어요 하면 다 없다 그래요. 야고서는 믿음을 보여줄 수 있다고 그랬어요.
없다고 그랬어요. 있다. 그래서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너에게 보이리라.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
그 다음에 26절에 가면은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야고보서가 행함이 얘기를 하는 책이 아니네. 그걸 읽고 내가 충격을 받았어요.
이때까지 내가 야고보서를 잘못 알았구나. 야고보서는 행함의 얘기를 하는 책이 아니고 뭐예요?
야고보는 생명의 얘기를 하는 책이에요.
행함이 없는 믿음은 무엇입니까? 죽었으니까 생명이 있는 믿음은 그 다음에 이 얘기는 말아야죠.
생명이 있는 믿음은 행함이 있다. 그 얘기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야고보서가 하는 이 얘기는 행함의 얘기를 하는 게 아니고 무슨 얘기하는 거예요?
생명이 얘기하는 거예요. 니가 살았나 죽었나 그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면은 우리가 살아있으면 뭐가 나오게 돼 있어요?
행동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게 산 것이죠. 산 것이 어떻게 오늘 여기 오셨어요?
차 타고 왔는데요. 누가 픽업했어요? 아무개가 픽업했는데요.
고맙죠. 그렇다. 그 대답이 틀린 말은 아니죠. 우리가 여기 온 것은 무슨 작용으로 생명 작용으로 우리가 여기 왔습니다.
제가 지금 열심히 무엇이 말하고 있어요? 제 속에서 생명이 작용하니까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히브리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성소 기별을 주시면서 그 핵심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영원한 생명이 나를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주장하게 하라고 가르치는 겁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이 저한테 이런 말도 하게 하고 여러분은 여기 와서 앉아 있도록 하고 먹게 하고 그 모든 것이 무슨 작용이에요?
생명 작용입니다. 그러니까 그 생명이 작용하는 것이 행동으로 나타나거든요.
그러니 행함이 없는 것은 뭐 한 자예요? 죽은 자예요.
그러니까 행함이 있는 자는 무슨 자다 산 자다. 마가복음 12장 27절에 무슨 말씀이 있는지 아시죠?
마가복음 12장 27절에 무슨 말씀이 있는지 여러분들 다 아실 거예요.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막 12:27)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오.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그러니까 우리가 무슨 자가 되면 하나님 못 만나요.
죽은 자가 되면 하나님 못 만나요. 죽은 자는 뭐가 없는 자예요?
행동이 없는 자예요 행동이 없는 자 자예요.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깐 이 히브리서 전체를 통해서 예수를 바라보고 예수를 깊이 생각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유하시는 은총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어가지고 무슨 자가 되라 산 자가 되라.
그래서 산 자의 하나님께서 장차 누구를 데리러 오실까요?
예 산 자를 데리러 오세요. 산 자를 죽은 자를 데리러 안 오세요.
죽은 자는 뭐 할까요? 장례식 해 주시고 산 자는 나와 함께 살자고 어느 땅으로 데리고 가실까요?
산 자의 땅으로 데리고 가세요. 그래서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시 27:13)
여러분과 제가 그날에 산 자의 땅에서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수 있도록 오늘이라 일컫는 이 하루를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생명이 작용하는 예수 생명이 작용하는 그 생명으로 주님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복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제 각론이 좀 어려웠습니까? 어렵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 어린이들에게 너무 어려운 얘기를 해서 참 대단히 미안하기도 했지만 우리 장사하는 사람들은 어렵지 않을 것이고 여러분들이 가정에서 여러분들의 어린 자녀들에게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그 아이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이 성경의 핵심 기별을 증거해 주시면 좋습니다.
제가 저 경상남도에 가서 이 어떤 집에서 이 얘기를 하루 7시간씩 한 15명 되는 사람 앉혀놓고 수요일부터 안식일까지 하루 7시간씩 얘기 하루 7시간씩 아침에 새벽에 일어나서 한 시간 아침 먹고 점심 먹을 때까지 몇 시간 점심 먹고 나서 저녁 먹을 때까지 몇 시간 저녁 먹고 나서 또 한 시간 이렇게 해서 하루에 7시간씩 얘기하더라고요.
수요일부터 그러니까 이 집 여자 주부가 집사인데 이걸 이제 깨달은 거예요.
아 성경 기별은 생명의 기별이구나 생명의 길이로구나 이걸 이제 깨달았어요.
근데 이 집사님이 교회에서 유년 선생님이에요. 유년반 그 아이들이 5명이 안 돼요.
그 아이들 앉혀놓고 아 아이들한테 예배당 안에서 조용조용해야 된다.
착한 행실을 해야 된다. 그래야 예수님이 기뻐하시지 이때까지는 그런 식으로 얘기를 했는데 이 아이들한테 이 얘기해가 안 되겠다.
생명의 얘기를 해줘야 되겠다. 그렇게 이제 생각이 들었대요.
그래가지고 생명의 얘기를 하면서 아이들이 알아 들을까 이게 어려워서 아이들이 알아들을까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조심스럽게 해결을 했는데 깜짝 놀랐대요.
왜냐하면 어른들보다 훨씬 더 잘 알았더라는 겁니다.
어른들보다 그래서 어른들은 머릿속에 이미 다른 생각이 많이 들어있기 때문에 이게 단순하게 안 들어가는데 아이들한테 얘기해 너무 잘 들어가더라.
이 얘기도 잘했겠죠. 들어가더라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아이들한테 이제 기도를 시키면 기도의 말이 달라지더라는 겁니다.
전에는 기도할 때마다 예수님 오늘 떠들지 않게 해주시고 우리 친구들하고 잘 사이좋게 놀게 해주시고 이것이 기도의 말이었는데 이 얘기를 아이들이 알아듣더니 그 기도하는 말이 휙 달라지는 것을 자기가 봤다고 그러면 저한테 그렇게 얘기를 했어요.
제가 그 얘기를 듣고 상당히 고무됐어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집에서 아이들한테 제가 얘기했잖아요.
자기가 가르치는 바를 자기가 확실히 이해해야지 대상을 따라서 어떻게 얘기해줄는지 방법이 생각이 나거든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자녀들한테 가정에서 이런 얘기들을 어릴 때부터 알도록 가르쳐주는 일은 그리스도인 오늘만 사는 그리스도인 부모들이 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 이런 축복을 누리게 되시고, 그래서 우리 자녀들이 이 생명의 기별 안에서 성숙해서 그들도 우리 주님의 날에 산 자가 되어서 함께 만나는 자리에 있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감사합니다.
하늘에 계시는 거룩하신 아버지 이 안식일 오후에 우리 주님 앞에 함께 앉아서 성경에 히브리서를 통해서 주시는 기회를 들을 수 있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아버지 이 자리에 말씀을 듣는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 다 이름으로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히브리서를 통해서 믿음의 주여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면서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면서 그분이 하늘에서 우리를 위하여 제사장, 대제사장으로서 봉사하시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하루하루 주의 보혈로 씻김을 받고 오늘이라는 하루 동안에 주의 영광이 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성령으로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해서 주의 씻기는 그 용서의 손길 안에 주의 보혈로 날마다 순간마다 씻김을 받으면서 주께서 마련해 주신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주님 재림하시는 날 산 자로 주님 앞에서 만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도록 그 이름을 기억하시고 각 개인과 가정에 복을 주시옵소서. 오늘도 남은 시간 주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작용으로 형통하게 지내도록 주님께 영광 돌리며 지내도록 이끌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