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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동산은 어떤 곳이었을까?
만약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흰색이라면 지금의 “흰색”은 무슨 색이라고 불릴까? 만약 흰색만 있는 세상이 있다면, 그곳에서는 색을 무엇이라고 생각할까?
나무도 하얗고, 풀도 하얗고, 하늘도, 꽃도, 사람도.. 모든 것이 하얀 색인 세상이 있다면 거기서는 우리가 부르는 흰색을 “흰색”이라고 부르지 않고 “자연의 색”이라고 부를 것이다. 왜냐하면 한 색깔만 존재하는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색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검은 색의 반대되는 것을 흰색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만약 검정도, 빨강도, 초록도.... 모두 없어지고 흰색만 남는다면, 더 이상 색과 색을 서로 비교할 수 없기 때문에 이 흰색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될지를 모르게 된다. 그래서 “색은 무엇이다”라고 하는 이해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색깔에 대한 이해가 없는 세계 안에서도 흰색이 다른 색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흰색은 계속 흰색이지만, 단지 그것을 흰색이라고 부르지 않고 “자연 색”이라고 그 이름만 바꾸어 붙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상처럼 악도 없었고, 슬픔도 없었고, 고민도 없었으며, 또한 이러한 것들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곳이 바로 에덴동산이었다. 이곳에서는 의로운 일들을 의라고 부르지 아니하고 당연히 자연스럽게 해야 될 일이라고 생각하였으며, 또한 악은 그것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였다. 에덴 동산은 우리가 살고있는 이 세상과는 전혀 비교도 할 수 없는 완전한 세계였다. 주님께서는 “땅의 기초를 두사 영원히 요동치 않게” 하셨으며, (시 104:5) 인간을 사랑하셔서 죄나 슬픔을 주는 모든 악한 것들에 대하여 알도록 허락하지 않으셨다.
왜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 선악과를 두셨나요?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단순히 모든 악을 그들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게 하신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주어진 완전한 아름다움과 행복이, 그들 마음에 이루어 놓으신 사랑을 완전케 하심으로,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바라셨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드셨다. (창세기 2: 8-9) 그리고 아담과 하와에게, 이 땅의 모든 실과는 너희가 마음대로 먹을 수 있지만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이 나무의 과일은 먹지 말라고 하시고, 만일 먹으면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창 2:17 참고) 선악과는 단순히 어떤 규칙을 만드는 법이 아니고 선택을 주는 법이었다.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진 세계는 완전하여 악의 그림자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만약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시지 않았다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사랑은 단지 그들의 머리 속에 프로그램 된 무의식적 사랑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선택할 수 없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통하여 인간의 마음속에 사랑하기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심어주신 것이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하신 요한복음 14장 21절의 말씀은 바로 하나님께서 태초에 인간에게 심어주신 그 자유의지가 어떻게 진정한 사랑을 선택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선악과라는 법이 없었다면, 선악과를 따먹는 불법도 없었을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법에 대하여 어떤 의심과 오해를 갖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법을 만드셨는데 어떻게 불법의 의미가 존재하지 않았을까? 만약 불법이 없었다면 어떻게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게 되었을까?” 라고 질문한다. 성경은 이러한 질문에 정확한 답변을 하고 있다. 성경은 에덴에 선악과라는 법은 있었으나 이 법이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불법을 알게 만들지 않았다고 창세기 2장 9절과 3장 22절에 말씀하고 있다. 선악과의 이름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고 하였으며,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후에야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이 말씀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는 선과 악을 몰랐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악만 몰랐던 것이 아니라 선도 몰랐다. 왜냐하면 악한 행동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에 당연히 “선”이라는 말이 갖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주심으로 그들이 선과 악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하신 것처럼 생각한다. 또한 어떤 법이 주어졌다면 일반적으로 이 땅의 법이 갖고 있는 특징처럼 에덴에서도 법과 불법의 의미가 동시에 존재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 속에서, 하나님께서 법을 만듦으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불법이 생겨났다고 상상한다. 이러한 추측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이 완전하지 않았다거나, 하나님께서 죄를 창조하신 것 같은 결론을 내리게 유도한다. 그러나 성경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야 악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불법을 가르치지 않는 법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에덴에 만드셨던 법은 이 땅의 법과 달랐다. 에덴동산의 법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선악과를 먹지 말라” 하는 것이었고, 그 법을 어긴 결과는 “정녕 죽으리라”였다. 이 법을 나누어 보면 “먹지 말라”고 하는 규칙과, 선악과와, 그 규칙을 어긴 결과인 “죽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선악과는 에덴동산에 있었던 다른 과일 나무와 다름이 없는 하나의 나무였기 때문에 다른 나무와는 달리 악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 않았으며, “먹지 말라”라는 단어는 그 언어 자체로는 악을 가르치지 못한다. “먹지 말라”와 “살인하지 말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살인하지 말라”라고 법이 주어졌다면, 살인이 무엇인지도 가르쳐주었어야 하며, 그것은 곧 악을 가르치는 것과 동일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는 “살인하지 말라”든지, “도둑질하지 말라”하지 않으시고 “먹지 말라”라는 언어를 사용하여 법을 만드신 것이다. 이 법은 지금의 법처럼 악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아니었고, 단순히 하나님을 선택하여 사랑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기 위한 법이었다.
또한 이 법을 어겼을 때 주어진다고 했던 “죽음”이 아담과 하와에게 겁을 주어서 어쩔 수 없이 지키도록 강요할 수도 없었다. 아담과 하와는 “죽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들은 한번도 죽음을 본 경험이 없었다. 에덴동산의 나무가 가을 낙엽을 만들지도 않았으며, “영원한 삶”이라는 단어가 우리들에게는 이 땅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다른 세계의 언어인 것처럼, “죽음”도 아담과 하와에게는 다른 세계의 언어였다. 로마서 6:23절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하였는데, “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알지 못했던 아담과 하와가 어떻게 그 삯인 사망을 알 수 있었겠는가? 그들이 만약 죽음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그들은 죽음이 두려워서 그 법에 순종하였을 것이다. 또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그들에게 완전한 자유의지를 갖게 하는데 방해가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선택의 자유를 갖고 있는 의지를 통하여 줄 수 있는 사랑을 아담과 하와가 갖기를 원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법을 만드심으로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사랑을 완전케 하신 것이었다. 이 얼마나 놀랍고 경이로운 사랑의 법인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흰색이라면 색의 개념이 없어진다. 더 이상 서로 반대되는 색들의 세계는 없어지고 자연 색 하나만 남게 된다. 장미는 있으나 거기에 있어야 될 것 같은 가시는 없고, 태양은 있으나 해로운 자외선은 없다. 사랑은 있으나 질투는 없고, 성공은 있으나 실패는 없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세계는 그 반대의 뜻이 완전히 없도록 완전하게 만드셨다. 사과의 반대말이 무엇일까? 토끼의 반대말이 무엇일까? 이러한 생각을 깊게 하다보면 실제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들은 그 반대의 의미를 갖고 있는 사물이 없다는 것을 이 타락한 세상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율법은 하나님 자신을 가리킨다. 요한은 예수님에 관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말하고 있다. 말씀은 곧 예수님 자신를 의미하며, “하나님은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야고보서 1:17)므로 그 말씀인 율법은 그림자를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태초에 지으신 그 완전한 세계로 복귀하게 될 때는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반대개념은 사라지게 되어, 악의 반대 의미로서의 선도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즉,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흰색이라면, “흰색”이라는 단어가 없어지는 것과 같다. 우리가 선이라고 생각하고 행하던 모든 일들에 붙었던 “선”은 없어지게 되고 “자연적인 일” 또는 “당연한 일”이라고 부르게 된다. 더 이상 우리는 선한 행동을 선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당연히 인간으로서 해야되는 자연 법칙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고 흰색이 다른 색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흰색은 여전히 그 색을 갖고 있을 것이지만 그 이름만 바뀌게 되는 것이다. “선이라고 부르지 않는 선”이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에덴동산의 상태였으며 이 땅에서 성화를 통하여 마지막 세대가 얻어야 할 우리 마음의 최종적 목표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심으로 에덴에 다른 색을 만들지 않았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는 것이 하나님 사랑하기를 거절하는 것인 줄 알았지만, 그 사랑하기를 거절하는 그 행위가 갖고 있는 본질에 대한 지식이 그들의 마음에 없었으므로 그것이 에덴의 색을 변화시킬 수는 없었다. 선악과는 단지 아담과 하와가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면 가서는 안될, 어떤 다른 세계(죄의 결과의 세계)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만을 주었을 뿐이다.
율법의 기능은 무엇인가요?
이제 선이라는 개념은 악이 있을 때에만 존재하게 되고, 선이 있기 때문에 악이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는 것과 불법을 아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로마서 7:7절을 통하여 이러한 상태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다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바울이 죄와 율법의 다른 점을 몰라서 “율법이 죄냐”고 묻는 것이 아니다. 어린아이들까지도 율법과 죄가 다르다는 것을 안다. 여기서 묻는 물음은 그 차이점을 묻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죄를 갖고 있느냐” 또는 “율법이 죄를 만드는 것이냐”는 것이다. 바울은 “그럴 수 없느니라”고 강력히 반대한다. 율법이 죄를 포함하고 있거나, 죄를 만들지 않고, 단지 율법은 내가 죄를 지었을 때에 그것이 죄라고 가르쳐 준다고 말하고 있다. 즉 율법이 죄를 어떻게 짓는 것인지 가르쳐 준다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얼굴에 검정이 묻었는지 아닌지를 알려면 거울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그런데 거울을 통해서 자기 얼굴에 검정이 묻었는지를 알았다고 하여 그 거울이 자기 얼굴에 검정을 묻혔다거나 어떻게 묻힐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율법의 기능은 거울처럼 우리의 잘못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우리가 잘못을 하지 않았으면 거울로서의 율법이 아무 것도 반사하지 않을 것이므로 우리에게는 악도, 선도 나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타락하기 전의 세상에는 “살인하지 말라”와 같은 불법의 의미가 포함된 법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타락한 후에, 법의 거울은 타락한 인간의 마음에 갖고 있는 악한 본성을 비추기 위하여 “살인”이나 “간음”, “도둑질”같은 불법을 반사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죄를 짓지 않으면 이 법이 거울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게 되므로, 죄가 존재하지 않았던 에덴동산에서는 율법이 오직 사랑을 완성케 하기 위한 도구로서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의 율법을 갈라디아서 3장 24절에서 “몽학선생”으로 표현한 것이다.
법은 우리에게 단지 당연한 일을 행하라고 말하고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아 나는 오늘 휴지를 버리지 않았어! 아 나는 오늘 내 아기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아 나는 오늘 살인을 하지 않았어, 도둑질도 하지 않았다고! 아 나는 참 선한 일을 했다”라고 말을 한다면 이 사람은 분명히 정신병자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당연히 인간으로서 행해야 할 도리이기 때문이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고, 자기 자녀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들에 나는 새들도 그들의 새끼를 양육한다. 그런데 만약 이 당연한 일을 행하지 않으면 율법이 나타나 불법을 행하였다고 선언한다. 거울이 없는 물체를 반사하지 않는 것과 같이, 법은 우리가 당연히 해야할 일들을 행하지 않기 전까지는 절대로 불법을 나타내지 않는다. 법이 있지도 않는 불법을 가르치거나 반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신 법이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하나님의 속성을 얼마나 완벽히 반사하고 있으며, 이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어떻게 완전케 하셨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2. 죄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사랑의 율법은 하나님의 정부의 기초이므로 모든 지성적 존재들의 행복은 그들이 이 의의 대 원칙에 완전히 일치함에 달려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강제적 굴종을 기뻐하지 않으시므로 모든 존재로 하여금 당신께 자원하여 봉사하도록 그들에게 의지의 자유를 허락하셨다. 하늘이나 땅이나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창조물들은 그림자가 전혀 없는 완전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완전한 의와 행복만이 있었던 그곳에 한가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 변화는 루스벨이 살고 있었던 하늘에서 시작하였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피조물들에게 허락하셨던 자유의지를 악용하는 자가 있었다. 죄는 하나님께로부터 그리스도 다음가는 최고의 영광을 받았으며, 하늘 거민들 가운데 가장 높은 권세와 영광을 가졌던 자에게서 시작되었다.
모든 피조물들은 그들에게 완전한 평화와 행복을 위하여 주시는 어떠한 제한을 갖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에 관한 지식을 숨기심으로 흰색만이 있는 완전한 나라에 다른 색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시고, 선악과를 통해서 그들에게 자의로서 사랑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그들을 제어하고 억압하기 위함이 아니라 완전케 하시기 위함이셨다. 그런데 루스벨은 이러한 사랑의 법칙을 무시하고 자기 자신을, 자기 스스로 만들어 내고 있는, 자아의 함정으로 이끌어 들였다.
평화와 자유와 행복은 피조물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평화와 행복을 느낄 수 있는지 잘 아신다. 그런데 이러한 대 자연의 법칙을 어기고 자기 스스로에 정신을 집착하면 자신 안에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모든 경이로운 것들이 자기 스스로 생겨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된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사업에 성공하여 많은 돈을 벌게 되면 그것이 자신의 힘으로 된 듯, 가난한 자들을 억압하고 그 번 돈들을 유흥비나 자기 자신만을 즐겁게 만드는 일들에 쓰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루스벨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놀라운 능력과 아름다움에 집착한 나머지 그것의 근원이 자기를 창조한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차츰 잊게 되었다. 마침내 그는 자기 자신이 만든 자아의 감옥에 갇혀서 자아를 숭배하기까지 이르렀다. “아침의 아들” 루스벨은 덮는 그룹들 가운데 으뜸이었으며 거룩하고 흠이 없었다. 그는 크신 창조주의 어전에 서 있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을 둘러싼 영광의 끊임없는 빛이 그에게 머물고 있었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저는 완전한 인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으로 단장하였었음이여... 너는 기름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 사이에 왕래하였었도다.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 (겔28:12-15)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 (겔28:17)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사 14:13-14)
의만 존재하였던 하늘에서 루스벨의 첫 의도가 죄로서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것은 죄로 향하게 되는 과정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루스벨 스스로 느끼게 되었던 감정들과 이론들은 바로 진화론과 심리학 안에 나타나는 이론들과 흡사하다. 모든 만물이 우연적인 사건을 통하여 스스로 생겨났다는 것과, 우리가 스스로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 바로 진화론과 심리학의 기본적인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사상은 영혼불멸설과 헬레니즘, 동양철학들이 섞여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스스로 그 힘의 근원을 갖고 있다는 new age 사상을 만든 것이다.
자기 자신을 높이고자 했던 루스벨의 야망은 자신보다 우월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보고 질투심을 느꼈다. 그는 자신이 예수님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시키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만드신 그 법이 불완전하며 불필요하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였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곧 말씀 자체이셨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장 1절 참고) 루스벨은 하나님께서 세워 놓으신 율법으로 완전케 되어진 사랑을, 자신과 다른 천사들을 억압하는 방편이라고 말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사단이 어떻게 하와를 유혹하였는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3:1-4) 여기서 사단이 쓰고 있는 논쟁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억압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는 방법인 선악과를 먹는 것을 금지하셨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이기적인 존재이고 자신은 이러한 잘못을 개혁하는 자처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루스벨은 자기 자신이 만들어 놓은 마음의 감옥에 갇혀서, 하나님의 법에 실려있는 공의와 완전케 하시는 사랑을 잊게 되었다. 또한 자신이 타락한 똑같은 방법으로 하와의 마음에 의심을 심어주어 인류를 타락하게 만들었다. 완전한 의만 있었던 하늘과 에덴에서 루스벨은 자기 스스로, 어느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었던 죄를 만들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시작이 하나님의 법의 불완전함으로 해서 만들어낸 실수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다.
3. 왜 하나님께서 사단의 세력을 곧바로 진압하지 않으셨는가?
하나님께서는 불만의 정신이 성숙하여 공공연한 반역의 행동이 나올 때까지 사단이 그의 반역을 추진하도록 허용하셨다. 그 까닭은 사단의 계획들이 충분히 발전되어 그것들의 참 본질과 의도를 모두가 볼 수 있게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죄의 시작과 그 동기는 타락하지 않은 천사들과, 다른 타락하지 않은 세계의 존재들에게는 하나의 신비에 속한 것이었다. 흰색만이 있는 세계에서는 색이 무엇인지는 설명할 수 있으나, 그것을 느끼게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느낌은 경험에 의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락하지 않은 존재 자들은 하나님께서 알도록 허락하지 않으신 세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루스벨이 만든 그 죄가 어떠한 결과를 낳을 것인지를 보여주셔야만 하였다. 온 우주에 하나님의 공의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그 결과가 확실히 나타날 때까지의 시간이 필요로 하였다.
기름부음을 받은 그룹인 루스벨은 매우 높은 지위에 있었으며 그는 하늘의 존재자들에게 큰사랑을 받았으며, 그들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하나님의 정부는 하늘에 거하는 자들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세계들도 포함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행위가 충분히 발전하기 전에는 이것이 악한 일이었다는 것을 나타낼 수 없었으며 그의 불만은 반역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었다. 하늘과 여러 세계의 거민들은 그 당시에 죄의 참 성질과 결과를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사단의 멸망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볼 수 없었을 것이며, 만일 그를 즉각적으로 멸망시켰다면 사랑에서가 아닌 두려움에서 하나님을 섬겼을 것이다. 그 기만자의 영향은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을 것이며 또한 반역의 정신도 완전히 근절되지 않았을 것이다. 무궁한 세대를 통한 온 우주의 복지를 위하여, 사단이 그의 원칙들을 더욱 충분히 발전시켜서 하나님의 정부에 대한 그의 비난을 모든 피조물이 바른 시각에서 볼 수 있도록,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와 그리고 그분의 율법의 불변성에 대하여 영원히,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남지 않도록 해야만 하였다.
4. 구속의 경륜
마태복음 5장 17절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라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이 말씀 안에 십자가의 의미와 이유가 들어 있다. 여기서 “완전케 하려 함”의 의미는 영어로 fulfill 이라고 쓰여, “이행하다” 또는 “실현하다”라는 의미이다. 즉 의무나 직무, 법률 또는 명령을 이행한다는 의미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곧 그의 말씀인 법을 완전케, 즉 실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람의 타락은 온 하늘을 슬픔으로 가득 채웠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죄의 저주로 시들었고, 비참하게 죽을 운명에 처한 존재들이 살게 되었다. 율법을 범한 자들이 피할 길은 없는 것같이 보였다. 그러나 이때 하나님께서 만세 전부터 감추어 오신 하나의 비밀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골1:26-27) 하나님의 사랑은 법으로서만 나타나지 않으시고 이제 법을 어겨 죄로서 죽을 수밖에 없는 이방인이 된 우리를 다시 죄 짓기 전의 완전한 사람으로 다시 이끌어 오시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이렇게 하시기 위해서는 한가지 문제점이 따랐다. 하나님과 말씀은 동일하기 때문에 만약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반대하는 결과를 빚게 되므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하였다. 또한 죄의 결과를 대신 질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의 율법과 동일한 존재뿐이었다. (히브리서 6:17-18절 참고) 우리가 큰 죄를 범하면 그 죄에 해당되는 죄 값을 치루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에 대해서도 그만한 죄 값을 치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천사나 인간들 중 하나를 속죄양으로서 대신 죽게 하였다면, 우주의 거민들이 볼 때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은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닌 것처럼 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죄의 용서가 단순히 그 죗된 행동만을 단순히 없었던 것처럼 만들어 버리는 것에서 끝날 수는 없었다. 다시 인간을 죄로부터 원상복구 시키기 위해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죄로 인하여 타락해진 인간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셔야만 하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인간의 상태를 다시 원상복귀 하시기 위하여 구속의 경륜을 지구의 창조 이전에 이미 세우셨던 것이다. 이 신비스러운 “평화의 의논”(슥 6:13)은 “창조함으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 되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어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비참의 심연에까지 내려가실 것을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영광의 소망이신 예수그리스도가 그 영원한 법을 실행하심으로, 완전케 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요 3:16)이었다. 오! 구속의 오묘함이여! 그분을 사랑하지 않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여!
5. 마지막까지 주시는 선택의 자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대신 돌아가심으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선택과 의향에 관계없이 무조건 구원을 받게 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주신 것도 완전한 사랑, 즉 자유의지가 선택한 “사랑의 순종”을 원하셨기 때문이었다. 선택의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의 공의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더욱 완전하여졌을 뿐이며, 강제적인 구원은 하늘의 법칙과 전혀 맞지 않는 것이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의향과 관계없이 하늘에 간다면, 하늘은 무법천지가 될 것이다. 하늘나라는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여 그 사랑의 믿음을 행할 수 있는 자들이 거함으로, 또 다른 반역이 없는 영원한 안전과 행복이 보장되어야 한다. 또한 우리가 하늘에 갈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완전히 재창조 하셔서 지금의 나와 완전히 다른 나로서 하늘에 가게될 것이라는 생각은 인간적인 추측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의 마음을 단순히 재창조하실 계획이었으면, 이렇게 긴 세월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선택의 자유는 죄짓기 전이나, 십자가 후에도 변할 수 없는 하늘의 근본 법칙이기 때문이다.
죄를 지은 후 인간은 그가 누렸던 자유의지를 잃어버렸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의의 줄은 끊기고 인간 안에 온전히 자리잡았었던 하나님의 의는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인간은 의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더 이상 가질 수 없었다. 하얀색만 있었던 인간의 마음은 모두 까만 색으로 바뀌었다. 인간의 마음은 더 이상 의를 명상하거나 선택할 힘이 없었다. 인간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롬 6:16)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구속의 경륜의 첫 번째 단계로서 인간에게 잃어버렸던 그 선택권을 다시 주시려 하셨다. 선택할 수 있는 사랑을 주시는 것이 하늘의 원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암흑만이 존재하였던 인간의 마음이 성육신 하신 예수님의 인성과 연결이 되어, 끊어졌던 전기선이 연결되면서 불이 다시 밝혀지듯, 우리 마음에 의의 불이 다시 켜지게 되었다. 사단의 본부인 “죄의 법”과 싸울 수 있는 하나님의 본부인 “마음의 법”이 예수님의 성육신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세워지게 되어, 십자가의 사랑을 믿는 그 믿음으로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신 것이다. (롬 8:4 참고)
예수님께서, 선과 악을 알게된, 타락한 인성을 취하여 이 땅에 오셔서 사단의 모든 유혹에서 승리하심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함이셨다. (창3장, 롬 8:1 참고) 우리는 이제 믿음으로 용서함을 받고, 사랑으로 사단의 모든 유혹을 물리침으로 예수님의 모본을 따라가야 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롬 1:15-16)
[사단도 믿음은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갖는 가장 큰 의는 바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관한 발견이다. 고행과 자학, 선한 행실로서 구원을 살 수 있다는 구교의 잘못된 가르침에서 방황하던 루터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는다는 귀중한 진리를 터득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많은 개혁자들이 나타나 죽음을 불사하고 이 귀중한 진리의 터전을 쌓아 오늘날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은 모든 기독교인들의 가장 근본적인 신앙의 발판이 되었다. 그러나 이 기별은 시대가 변화하는 과정에서 점차 바뀌어지게 되었고, 사회의 구조와 문화가 변화함에 따라서 기독교인들의 성경에 대한 이해도 변화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믿음을 단순히 하나의 지식적 동의로서 생각한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의 믿음과 행위에 대한 귀중한 말씀들이 하나의 위인전처럼 느껴지게 되고, 이러한 선구자들의 삶의 방식은 실제로 구원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처럼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이 갖고 있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려 하심”을 하나의 사실로서 인정하는 그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칭의와 성화에 대한 이러한 인본주의적이고 철학적인 추측은 한번도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에 대한 구원의 문제를 완전히 신비 속에 묻어 버리게 한다. 왜냐하면 바울은 로마서 2장 14절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고, 이 양심으로 사는 것은 행함의 부류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야고보서 2장 19절은 이 문제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네가 하나님을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사단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다고 이 성경은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독생자를 주”신 것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그 사실을 지식적으로 알거나, 인정만 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에게 양심이 있는 것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그 나름대로의 믿음이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들의 구원은 우리 마음속에 십자가를 통하여 은혜로서 주신 믿음과 양심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결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마음에 들어와 사랑을 만들고, 그 사랑이 온전한 믿음을 만들게 되어, 이 믿음이 우리의 양심이 됨으로, 우리가 이 믿음의 양심대로 행할 때에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것이다. 우리 믿음의 주여,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은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의 결과를 예수님께서 대신 이루셨다고 자동적으로 우리가 하늘에서 살 수 있는 자격을 갖춘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과 공의를 이해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온전한 이해는 그분을 믿게 만들며, 그 믿음으로 우리는 속죄함을 얻고, 속죄함의 경험은 우리의 사랑을 온전케 하여 그분의 말씀을 기쁨으로 순종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랑이 없는 믿음은 행함이 없는 구원을 주장할 것이지만, 사랑이 충만한 믿음은, 그것이 구원과 관계없다 하여도, 사랑의 행위를 기쁨으로 행할 것이다. 거듭남을 통하여 하나님과 화합하는 경험을 한 사람들에게는 선한 행동이 하나의 벼슬이나 나타내 보이고 싶은 자랑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자연의 법칙, 즉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행위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행해지는 업적이 아니고 구원을 받은 자들에게 나타나는 당연한 행동인 것이다. 흰색만 있는 곳에서 흰색이 “흰색”으로 불리지 않는 것처럼 구원받은 무리들에게 선한 행위는 “행위”로서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 (요 14: 23)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버지의 사랑을 얻고자하여 보여주는 사랑이 아니라, 이미 사랑하여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마음의 표현인 것이다.
6. 공의를 이루시기 위하여 지체되는 그리스도의 재림
우리는 지금 선과 악의 대 전쟁 속에 살고 있다. 수십 억 사람들에게 각각 천사들이 배치되어 있으며 하늘에는 매 순간에도 수십만의 천사들이 자기들의 맡은 임무를 수행하느라 바삐 날아다니고 있다.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사닥다리를 야곱이 보았듯이 우리가 눈을 뜨고 그 천사들을 볼 수만 있다면, 하늘의 구름보다도 더 많은 천사들이, 그 어떤 비행기보다도 떠 빨리 지구와 하늘 나라를 순식간에 왕래하며 지구의 소식을 전하고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늘의 천사들은 사단의 천사들과 맞서 싸움을 하며 인간을 죄에서 구출하기 위하여 전쟁을 벌이고 있다.
“그가 내게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케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들으신 바 되었으므로 내가 네 말로 인하여 왔느니라. 그런데 바사 국군이 이십 일일 동안 나를 막았으므로 내가 거기 바사국 왕들과 함께 머물러 있더니 군장중 하나 미가엘이 와서 나를 도와주므로 이제 내가 말일에 네 백성의 당할 일을 네게 깨닫게 하러 왔노라.” (다니엘10: 12-14) 이 싸움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무엇을 얻기 위하여 온 우주의 거민들이 보는 앞에서 싸움이 일어나고 있는가? 사단과 그의 천사들도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 그들이 질 수밖에 없음을 알면서도 왜 그토록 싸움은 치혈해지고만 있을까? 피조물이 창조자와 싸울 수 없음을 알면서도 왜 싸우는 것일까? 이 싸움이 사단과 그의 부하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거기에는 그 이유가 있다. 만약 그들이 자기들의 죄에 대한 책임을 다른 것에 전가시킬 수만 있다면 그들이 무죄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싸움은 최초부터 하나님의 율법에 관한 것이었다. 사단은 하나님이 불공평하시며, 그분의 율법에 결함이 있고, 우주의 행복을 위하여 그것들을 변경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애써왔다. 율법을 공격함으로 그는 그 율법의 제정자의 권위를 뒤집어 엎으려고 하였다. 이 싸움을 통해서 하나님의 율례에 결함이 있어 변경해야 되는지 혹은 완전하여 변할 수 없는 것인지가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 고소에 대하여 하나님은 하늘의 법이 공평하며, 누구나 다 지킬 수 있으며, 사단이 내세웠던 주장들의 결과가 어떠한 것들임을 구속의 경륜을 통하여 밝히 나타내셨다. 또한 수많은 약속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을 것과, 언제라도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음을 예수님의 생애를 통하여 증명 하셨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서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베드로후서 1:3-4)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히브리서 6:17-18)
하나님의 남은 백성은 예수님의 모본을 따라 온 우주의 거민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계명은 지킬 수 있는 것이며, 선한 것이요, 축복이고, 사랑이라는 사실을 선포할 하나님의 증인들인 것이다. 이 싸움의 마지막 증인들로서 하나님께서는 한 무리를 인도하실 것인데 그들이 곧 요한계시록 14장에 나오는 “십 사만 사천인” 이다. 이 사람들은 죄악으로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요한계시록 14:4-5) 마지막 세대를 사는 이 무리는 십자가의 사랑의 힘을 온 우주 앞에 선포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하여 인간이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있음과 죄 없이 살 수 있다는 것을 증거 하실 것이다. 사단은 이 무리를 핍박하여 고통과 시험을 줌으로 욥에게 주어졌던 암흑을 지나가게 할 것이지만, 이것을 통하여 온 우주는 사단이 건설하고자 했던 그 정부가 얼마나 악하고 거짓된 것인지를 분명히 알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정부의 완전성을 온전히 이해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법을 옹호하는 작업은 길고 어려운 시간을 지나야 한다. 예수님의 재림이 지체됨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여야만 하고 하나님 자신도 고통을 겪어야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는 독자이신 예수님께서 그의 눈앞에서 고통 속에 죽으시는 것을 보았다. 또한 그의 사랑하는 모든 인류가 고통을 당하는 것을 매순간 보시고 계신다. 그러나 이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우주의 영원한 안전과 행복을 위하여 죄의 본질은 드러날 것이며, 하나님의 법의 필요성과 완전성은 입증될 것이다. 온 우주는 죄의 결과에 대한 증인이 될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피조물에게 완전히 이해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율법의 완전성을 입증하신 그 모본을 인간이 온전히 따르게 될 때에 이 싸움의 끝은 올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히브리서 11:4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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