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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장> 마지막 싸움 8
'어서, 어서 빨리!'
라이샤의 머릿속은 어서 빨리라는 말만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었다. 아까 가이샤의 눈빛을 본 라이샤는 가이
샤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짧고 슬쩍 지나간 눈빛이었지만 라이샤는 그의 생각을 모두 읽어낼 수 있었다.
그는 말하고 있었다.
'속여서 미안하다.'
단 한마디였지만 라이샤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가 자신을 속이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임
을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말하고 있었다.
'창조주께서 주신 힘은 바로 너희들이 지켜오던 연못이다. 그곳의 물을 한번만 퍼먹도록 하여라. 그럼 그 안
에 있던 모든 힘들이 너에게로 갈 것이다.
그리고...... 사랑한다, 라이샤.'
불안했다. 너무나 불안했다. 왜 가이샤가 마지막에 사랑한다고 했는지 알 수 없다. 오직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그의 몸을 감싸고 돌았다.
천상계의 맑고 맑던 하늘은 이미 사라졌다. 구름으로 가득찬 세상만이 나타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곳
에서 서로 대치해있는 자들이 있었다. 서로 강력한 살기를 뿜으며 노려보고 있었다. 크리니추이더스가 말했다.
『지금 네 태도, 진심인가?』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이지?】
『너같이 약하고 허약한 존재가 나처럼 강한자들에게 달려든다는 것이 사실이냐고 물었다.』
【사실이다.】
크리니추이더스는 비웃었다.
『큭큭큭...... 웃기는 군...... 나의 보좌신들이라도 당해보아라!』
크리니추이더스의 주위에 서있던 용의 형상을 한 자들이 움직였다. 그들은 모두 가이샤를 향하여 공격을 시
도하고 있었다. 그들의 무기가 가이샤의 몸이 꿰뚫기 전에 그것을 막는 것들이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죽기를 바라지만 어쩔 수 없지.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먼저 만들어진 생물? 네가 만들어낸
생물중의 최초였군. 웃기는 일이야.」
가이샤는 말없이 나이라세를 바라보았다. 나이라세는 그의 눈을 보더니 고개를 휘휘 저으며 말했다.
「알았어, 알았어. 이제 제발 그 미안하다는 눈빛은 그만 보내. 자존심이 강하던 너에게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것은 나에게 부담스런 일이야. 후우...... 이제 저 쓰레기들을 처리해볼까.」
용의 형상을 한자들의 눈썹이 올라갔다. 자신을 쓰레기라고 한 것이 매우 거슬렸던 건가 보다. 모두들 이제는
가이샤가 아닌 나이라세를 향하여 공격을 시도하였다. 나이라세는 그들이 다가오는 기색을 보고 식은땀을 흘
렸다.
강했다. 이때까지 그가 상대하던 그 누구보다도 강했다. 나이라세는 자신의 힘을 최대로 끌어올리며 하나만 상
대하기로 하였다. 아무래도 하나이상은 자신에게는 무리일 것 같았다.
나이라세에게 달려드는 것을 그저 바라만 보지 않았다. 퉁가리, 나미, 자이커, 젠스, 마이샤, 타이카, 번, 바인
이 모두 달려들고 있었다. 이때까지 이유도 제대로 모르고 싸워왔던 그들은 이제 하나가 되었다. 그 누구보다
도 강하리라는 생각이 자신들의 머릿속을 메아리쳤다.
그들의 무기가 부딪혔다. 그리고 모두들 서로의 전투에 몰입하였고 가이샤와 크리니추이더스는 서로를 바라
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이샤는 슬픈 눈을 하고 있었다.
『왜 그런 눈을 하고 있는 것이지?』
【너의 그 태도가 슬퍼서이다.】
『......이해가 안되는군. 내가 어째서 불쌍하다는 것이지?』
【지금 네가 하는 이 행동이 자신에게 무엇으로 돌아갈지도 모르고 행하는 네가 불쌍하다는 것이지.】
『내가 불쌍하다? 그런 표현은 처음 듣는군. 언제나 최고였던 나에게 그런 표현은 매우 생소하지. 덜떨어진
너와는 달리 말야. 후후후...... 꽤나 어색한 표현이지만 지금은 장난으로 받아들여 주지.』
【말이 많군, 크리니추이더스......】
『후후...... 그때는 어떻게 네가 나를 쓰러뜨렸는지 모르겠다. 정말 신기한 일이었지.』
【그렇게 신기한 일도 아니지. 그때는 내가 강했으니까.】
『그래, 네 말이 맞아. 그 시절에는 네가 강했어. 나는 이 세계에서 적응하기 위해서 훈련을 하고 있는 중이
었고 너는 완전히 익숙해진 상태에서 나와 싸웠으니까. 결국 난 호홉때문에 너에게 졌고 봉인을 당했지. 하지
만 이렇게 나의 아들을 남겨놓았다. 언젠가 나의 아들을 만들것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내가 봉인되면서
만드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어. 정말 나에게는 이상한 일이지. 후...... 서론이 너무 길었군.』
【그래.】
가이샤의 손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아무 형태도 없고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왠지 다가갈 수 없는
빛이었다. 크리니추이더스가 그것을 보고 코웃음을 터뜨렸다.
『훗, 웃기는군. 정말 그 정도로 나에게 덤비겠다는 것인가?』
【난 너를 기쁘게 할 마음이 없다. 단지 너를 쓰러뜨릴 것이다.】
『웃기는 군.』
크리니추이더스의 손이 빛나기 시작했다. 크기는 가이샤와 비슷했지만 그곳에서 나오는 광채는 가이샤의 것
과 비교할 것이 아니었다. 가이샤는 크리니추이더스가 만들어낸 '힘'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놀라운가?』
【전혀.】
『훗...... 그 가식으로 가득찬 모습...... 언제까지 가는 것인가 한번 보도록 하지.』
크리니추이더스는 자신의 손에 있던 것을 가이샤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강력한 광선이 가이샤를 향하여 뿜어
져 나가기 시작하였다. 가이샤도 그것을 보고는 자신의 '힘'에서 광선을 뿜어내었다. 가이샤가 열등히 밀리기
시작하였다. 가이샤는 모든 힘을 꺼내어 그것을 상대하고 있었지만 크리니추이더스는 그것이 장난인 것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상대하고 있었다. 크리니추이더스의 입이 슬쩍 올라가더니 말했다.
『웃기는 군.』
크리니추이더스의 몸이 살짝 움직였다. 그리고 크리니추이더스의 광선이 가이샤의 광선을 밀어내기 시작하였
다. 가이샤는 이제 자신이 사라질때임을 알았다. 그의 운명은 여기까지 였다. 창조주께서 이미 그렇게 정해놓
은 것이었다. 가이샤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했기에 담담히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광선을 바라보며 편안한 표정을 하다가 크리니추이더스를 바라보았다. 크리니추이더스는 가이샤를 죽였다는
생각에 기쁜지 귀밑까지 째져 있었다. 가이샤는 슬픈 눈을 하고 바라보았다. 이제 그의 운명도 곧 끝이 난다.
그것도 이미 정해져있던 것이었다.
가이샤는 생각했다. 그리고 느꼈다.
자신을 아끼고 사랑했던 모든 것들. 자신을 아껴주던 모든 것들.
자신을 바보라고 항상 그랬지만 언제나 가이샤에게 힘이 되었던 나이라세.
자신의 사랑하는 두번째 아들 마이샤.
약간은 맹한 기운이 있는 바하무드.
자신을 창조주라 여기고 자신을 받들어준 자들.
세라핌, 퉁가리, 나미, 자이커, 젠스, 민트...... 타이카, 번, 바인, 하르게.
그들에게 모두 미안했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아들......
라이샤.
미안하다.
"아버지!"
가이샤는 볼 수 있었다. 참담한 표정을 짓고 사라져가는 자신을 바라보는 라이샤를. 가이샤는 그의 눈을 바라
보았다.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들아, 난 괜찮단다. 이미 정해졌던 나의 운명. 이렇게 사라지리라 나는 알고 있었단다. 그런 표정을 짓지
마렴.'
'크리니추이더스...... 이제 곧 자네도 나를 따라 올걸세. 언제나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남을 깔봤던 그 자
만심...... 창조주님의 곁에서 제대로 배우세.'
'나이라세...... 너에게는 미안하다는 말밖에 하지 못하겠구나. 언제나 나를 도와줬지만 나는 너에게 거짓말밖
에 하지 못했지. 미안하다. 이런 날 용서하렴.'
'마이샤...... 바쁘구나. 상대가 강하지. 하지만 잊지 말아라. 넌 절대로 지지 않는단다. 넌 바로 천하의 가이샤
의 아들이기 때문이지. 후훗......'
'바하무드......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렇게 사라져 미안하네. 자네의 그 맹한 기운은 여전하군. 나이를 그렇게
먹었는데 고쳐지지 않는 건가? 후훗...... 자네는 내가 사라진다 하여도 사라지지 않을 걸세. 이미 창조주께 말
해 두었네. 자네 자신이 죽고 싶다고 여길때까지 자네를 살아있을 것이라고.'
'퉁가리...... 언제나 나를 따랐지만 제대로 대해주지 못한 것이 미안하구나. 그리고...... 나미를 아껴주렴.'
'나미야...... 너의 그 속도를 보지 못해 아쉽구나. 넌 나에게 보여주겠다고 언제나 말했지. 이렇게 가는 날 용
서하렴. 그리고...... 퉁가리를 아껴주렴.'
'자이커야...... 크리니스카이쳐를 잊거라. 너에게는 청천벽력같은 소리일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너에게 좋은
것이다. 크리니스카이쳐는 이미 크리니추이더스의 일부분이 되었다. 다시 깨어난다고 하여도 너와는 친구가 되
지 못할 것이다. 그는 크리니추이더스의 아들이니까. 친구를 잃는 것에 너무 낙담하지 말거라. 언젠가 잃었던
친구를 되찾을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젠스경...... 자네는 언제나 똑바로 만들어진 틀에 따라 움직였지. 그것이 자네와 라이샤의 너무나도 다른 점
이었어. 이제는 그런 것을 좀 고치도록 하게. 너무 틀에 얽매이는 것도 좋지 않은 것이네.'
'민트야...... 저기서 네가 그 미소를 보이고 있구나. 너무 기다리게 하여 미안하다. 이제 넌 곧 환생하게 만들
어주마. 그럼 라이샤의 곁에서 행복하렴.'
'세라핌...... 이미 너는 소멸되었구나. 하지만 너의 그 잔소리는 나의 귓가를 맴도는걸? 하핫...... 너의 잔소리
는 정말 대단했지. 너를 만든 나조차 꼼짝하지 못하게 만들었으니. 내가 너를 만들면서 일만 시켰구나. 이제
다시 태어나면 좀 더 편하게 살아가렴. 일만을 생각하는 것은 몸에 안좋단다. 하핫......'
'타이카...... 자네는 뭐에 불만이 있어 나에게 반기를 들었는지 모르네.
왜 그러는지도 모르네. 하지만 지금 자네가 나의 편을 들어주고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너무나 기쁘군. 알고
있었나? 나는 이렇게 사소한 일에도 기뻐하는 사람이었다네. 후훗......'
'바인...... 후...... 자네는 이제 그만 그 표정을 짓게. 스스로는 이유를 모른다고 하지만 이미 옛날부터 깨달았
을게야. 자네는 스스로 마음을 닫았지. 부모님에게서 버림을 받는 사실을 어렸을때부터 알아버린 것이었지.
후...... 그리고 그때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것도 미안하네. 날 용서하게.'
'번...... 이런 말썽꾸러기 꼬마녀석. 후훗...... 너의 충실하고 강한 형을 옆에서 잘 도와주렴. 그는 너처럼 자신
의 의사표현을 잘하는 성격이 아냐.
그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겠지? 후...... 미안하다.'
'하르게...... 자이커를 미워말아라. 그도 의사표현이 서툴단다. 원래는 너와 친해보려했던 것이 너를 그렇게 대
했던 것이야. 그를 너무 미워하지 마렴. 그는 너와 친해지고 싶었을 뿐이란다. 그의 마음을 조금만 더 헤아려
주렴.'
'카이젤...... 자네에게는 특별히 하고픈 말이 없군. 이제 그를 놓아줄때도 되지 않았나? 왜 그렇게 그에게 집
착하는 것인지 알 수 없군. 자네는 옛날부터 속을 알 수 없는 상대였지만 지금은 더욱더 그 속을 알 수가 없
군. 자네는 저주받아서 태어났다고 하지만 자네는 축복속에서 태어났네. 자네가 태어났을때 엘프들이 얼마나
기뻐하였는지 아나? 비록 그들이 자네를 버리기는 하였지만 난 엘프들이 그렇게 기뻐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
네. 위선자같은 소리지만 그들을 용서하기를 바라네. 그들도 자네를 아끼고 싶었을테야.'
'......카오스. 넌 이미 젠스와 동화되어버렸구나. 원래는 네가 카이젤의 편이 되어 젠스를 데려가야했지만 크리
니추이더스의 빠른 봉인해제 덕분에 네가 배신자로 판정받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구나.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이제는 젠스와 카오스가 아닌 젠스 하나로 살아가기 바란다. 그렇게 분열하려고 하지 말거라. 이제 너는 젠스
와 일부가 되어 살아야 해.'
'샤이...... 민트와 다시 만난것이 그렇게 기쁘니? 후훗...... 너의 기뻐하는 표정을 보니 내 마음도 기쁘기 이를
데가 없구나. 너의 그 표정...... 언제나 보존하고 싶을 정도야. 앞으로는 그런 미소만 지어주길 바란다. 예전의
그런 표정은 짓지 마렴.'
'......크리니스카이쳐야. 자이커는 너의 친구란다. 그것을 인식하렴. 너의 아버지때문에 너는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넌 네 스스로 움직이고 있단다. 역시 넌 크리니추이더스의 아들이 맞구나. 이런이런...... 너를 구박
하는 것처럼 되어버렸군. 하지만 구박이 아니란다. 이해하렴. 앞으로도 자이커를 친구로써 잘 대해주기 바란다.
한번 친구는 영원한 친구라는 것을 기억해주기 바란다.'
'......크리니추이더스여. 원하지 않던 친구여. 자네가 결국 나의 목숨을 끊는군. 그렇게 기뻐말게. 운명은 정해
진 것이니. 결국...... 자네를 구해내지 못한점...... 미안하네.'
빛은 사라졌다. 그리고 모두의 마음속에 가이샤란 이름은 지워지지 않을 것으로 남아버렸다.
라이샤는 주저앉아버렸다. 자신은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죽었다는 사실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
다. 왜 가이샤가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전했는지 알 수 있었다. 라이샤의 두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울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냥 가려했지만 역시 너는 울고 있구나. 그런 표정짓지 말라고 하지 않았더나. 아버지로써 마지막으로 하는
이야기다. 절대 다시는 다른 사람에게 눈물을 보이지 말아라. 남자의 눈물은 다른사람에게 보여줘서 도움되는
것이 없단다. 해가 될뿐이지. 기억해라. 자신이 사랑했던 존재들을. 그리고 나의 이름은 잊어라. 나는 하나의
먼지였던 것 뿐이니.'
모두들 싸움을 멈추었다. 멈출수밖에 없었다. 가이샤가 사라지는 빛기둥이 사라진 후 각자의 마음속으로 들려
온 가이샤의 목소리에 모두들 놀랄 수 밖에 없었다. 특히 크리니추이더스는 그가 죽으면서 자신에게 메세지를
남길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지 꽤나 놀라는 것 같았다.
『운명이 정해진 것......? 그렇다면 나는 그 운명을 쓰러뜨리겠다! 나에게 쓸모가 없는 운명이라면 부숴버리겠
다!』
크리니추이더스의 힘이 퍼져나갔다. 무엇을 위해 화를 내고 무엇을 위해 이런 힘을 내뿜는 것인지 몰랐다. 오
직 그렇게 하고 싶을 뿐이었다.
『나를 거역하겠다는 뜻인가?』
크리니추이더스와 같은 공명. 하지만 크리니추이더스보다 강한 공명. 크리니추이더스는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매우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크리니추이더스는 목소리의 발상지를 찾았다. 크리니추이더스보다 강한 공명......
그것은 라이샤의 몸에서 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