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개요
"역사란 무엇인가? 인류 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으로 발전하고 공간으로 확대되는 심적(心的)활동 상태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세계 인류가 그렇게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요, 조선사라 하면 조선 민족이 이렇게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다."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제1장, "역사의 정의(正義)와 조선역사의 범위" 중
"역사를 쓰는 자는 반드시 그 나라의 주인되는 한 종족을 먼저 드러내어, 이것을 주제로 삼은 후에 그 정치는 어떻게 흥하고 쇠하였으며, 그 산업은 어떻게 번창하고 몰락하였으며, 그 무력(武功)은 어떻게 나아가고 물러났으며, 그 생활관습과 풍속은 어떻게 변하여 왔으며, 그 밖으로부터 들어온 각각의 종족을 어떻게 받아들였으며, 그 다른 지역의 나라들과 어떻게 교섭하였는가를 서술하여야 이것을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독사신론(讀史新論)》 "서론(敍論)" 중
한민족 출신 독립유공자, 민족주의 사학자,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본디 영웅주의적 민족주의 성향을 짙게 띠었으나, 러시아 혁명 이후 민중사관을 받아들여 사회주의와 아나키즘 성향(특히 표트르 크로포트킨의 영향을 짙게 받았다.)으로 사상의 변화를 보였다.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호는 단재(丹齋)·단생(丹生)·일편단생(一片丹生)이다. 대전 출신이다. 필명은 금협산인·무애생·열혈생·한놈·검심·적심·연시몽인 등이 있다. 특히 '한놈' 등은 스스로를 낮추기 위해서 쓴 필명이다. 독립운동 시절 윤인원(尹仁元)·왕국금(王國錦) 등의 이명을 쓰기도 했다.
〈독사신론〉, 〈조선상고사〉, 〈조선사연구초〉를 집필하여 개항기 및 독립운동기 사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주체성을 강조한 민족주의 사관을 바탕으로 만주 땅이 한민족의 땅임을, 발해가 한민족의 국가였음을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역사 연구는 역사 자체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하였으며, 유물과 사료의 중요성을 강조한 실증주의자였다. 또한 독립운동가이기도 한데, 일체의 타협주의를 배격하고 폭력혁명론을 주장하였으며, 김원봉의 부탁을 받아 쓴 조선혁명선언이 유명하다.
2. 생애
1880년 12월 8일 충청도 공주목 산내면 도리산리(現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 233번지)에서 아버지 신광식(申光植, 1849~1886. 3. 8)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형 신재호(申在浩, 1872~1899)가 있었으나 요절했다.
현재의 청주시 낭성면 귀래리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살며 유소년기를 보냈다. 어린 시절에 자치통감을 공부하고 이를 기념하여 신채호의 할아버지는 모과나무를 심었다 한다. 그 모과나무는 아직까지 집터인 신채호 묘소에 있다.
1897년 성균관에 들어가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되었다. 이전부터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참여해 실패에 좌절했던 그였지만 그럼으로써 성리학을 다 배우기 전에 근대 사상을 접했고 이는 신채호가 성리학을 탈피한 독자적 이념을 세우는 밑거름이 된다.(배용일, 2002,.41 배용일, '박은식과 신채호 사상의 비교 연구', 경인 문화사, 2002년, p41)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그는 본격적으로 민족 운동에 뛰어들어 활동하기 시작한다.〈황성신문〉 언론인 및 〈대한매일신보〉 등에서 주필로 활동했으며 〈이태리 건국 삼걸전〉, 〈을지문덕전〉 등을 지어 민중에게 자주 의식을 고취시켰고 일진회의 성토에도 앞장섰다. 1910년대까지 그의 사상의 특징은 사회진화론에 기반한 영웅주의적 민족주의 사관이었다. 그는 역사의 주체와 동력은 영웅이라고 여겼으며 뛰어난 영웅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영웅사관(英雄史觀)'을 가지고 있었다. 신채호는 광개토대왕, 을지문덕, 최영, 이순신 등 외적과 맞서 싸운 군사적 영웅들의 평전 저술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해외 영웅전들을 번역하기도 했는데 량치차오의 저서를 번역한 "이태리 건국 삼걸전" 등이 있다.
민족주의 사학자 시절 신채호는 "세계는 영웅의 활동 무대이며 영웅이야말로 세계를 창조하는 성신(聖神)이다"라고 주장하는 등 극단적인 영웅사관에 심취했다. 그는 미국의 독립은 조지 워싱턴이라는 뛰어난 영웅에 의해 성취된 것이라 보았고, 이탈리아의 통일 역시 카보우르, 마치니, 가리발디라는 영웅 삼걸의 활약 덕분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영웅주의적 역사관을 통해 '왜놈들을 쳐부숴 줄 영웅'의 등장을 기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회진화론을 수용한 강성한 민족주의자로서 신채호는 당시 유행했던 동양 평화론이나[9] 국제법에 의한 믿음도 부정하고[김도형,1994,83] 한국의 자강을 강조했다.
국권 피탈 즈음해서 1907년 신민회의 독립군 기지 건설 운동의 일환으로 국외로 이주해 만주, 연해주 등지를 다니며 독립운동의 기반을 마련하고 견문을 쌓았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나철의 대종교(당시는 단군교)와 연계가 있었는데 이후 나철이 사망하고 2대 교주 김교헌이 종교 체제를 강화하는 형태로 대종교를 운영하자 사이가 소원해지게 된다. 신채호는 1909년 <대한매일신보>에 올린 논설에서 조선이 망한 이유로 다음 3가지를 들었는데 조선은 주변에 경쟁 국가가 없어 경쟁력이 생기지 않았고 무력을 경시했으며 보수적인 태도로 일관하여 정치 제도를 개혁하지 못해 망했다고 주장했다.(신채호, '엇던 외국 사람들이 한국을 조롱하여', 「대한매일신보」, 1909년 12월 11일) 1911년 권업회를 조직하고 주필로 일했다. 이후 1915년부터 1919년까지 북경에 체류하면서 <사고전서>를 보기도 하고 <조선사통론>, <조선사문화편>을 쓰기도 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사회주의에 경도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민중의 힘을 자각하게 된다. 3.1 운동의 진정한 의미 중 하나가 민중의 재발견이다. 영웅과 초인의 등장을 바라던 지식인들이 이전에는 선도해야 할 대상으로 취급하던 민중에 시선을 돌리는 계기가 바로 3.1운동이었다. 이는 뒤이어 일어난 중국의 5.4 운동에 따라 중국 지식인들이 시각을 교정한 것과도 일치한다. 이후 민중을 독립 운동의 동반자로 보느냐 아니면 여전히 교화의 대상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지식인들의 행적은 확연한 차이를 보이게 된다. 3.1운동 이후 신채호는 그간의 자신의 민족주의, 영웅 중심주의 사관을 버리고 아나키즘으로 본격적으로 전향하게 된다.
3.1 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했으나 국제연맹에 위임 통치 청원서를 제출한 이승만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선출되자 이에 극렬히 반대하며 재선출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1919년 4월 11일 재선출에서도 이승만이 당선되자 신채호는 임시 의정원에서 퇴장해 버린다. 이 때 회의장 밖에 있던 이봉수(1892~?, 공산주의자로 차후 북한에서 활동하다 6.25 전쟁 이전에 숙청당함)와 한위건(1896~1937, 마찬가지로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로 이후 중국 공산당에서 활동하다 옌안에서 병사했다.)에게 강제로 회의장 안에 다시 들어가게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이후 외교론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요 방안으로 자리잡자 신채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직에서 빠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집권 세력의 대항 세력으로 돌아서게 된다. 그런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신문〉에 정면으로 맞서 〈신대한〉을 발간했다. (이 때 <독립신문>은 박은식이 주도). 이후 신채호는 이승만 등을 지속적으로 가열차게 비판한다. 위임 통치 청원 사건으로 촉발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분열 사태 후 신채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존재 이유 자체를 문제삼으며 창조론을 더욱 거세게 내세워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갈아 엎어버리려고 했지만 온건 세력인 안창호 세력과 김구 세력과의 대립으로 저지되었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가 열리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지도 기관을 세우자는 창조파의 대표 주자 역할을 하다가 국민대표회의 결렬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탈퇴한다.
1923년 김원봉의 부탁을 받아 조선혁명선언(의열단 선언문)을 짓는다. 여기에서는 '우리 조선인 한 사람이 일본인 한 사람씩을 죽이다 보면 언젠가는 일본인이 전멸할 것이며 내가 2명을 죽이면 조선인 1명을 살리는 일이며 내가 10명을 죽이면 조선인 9명을 살리는 길이다'라는 취지의 글을 썼다. 이외에도 자치론, 외교론, 실력 양성론, 무장 투쟁론 등을 차례로 매섭게 비판하며 민중에 의한 직접적인 폭력 혁명과 건설을 위한 파괴를 답으로 제시했다. 특히 자치론에 대해서는 "일본이 생불이 되어 모든 것을 돌려주고 명목상의 종주국만을 요구하더라도 생각있는 사람이면 그것이 치욕일 것임을 알 것이다"라고 일갈했다.
제1은 외교론이니 이조 500년 문약 정치가 '외교'로써 나라를 지키는 으뜸 계책으로 삼아 그 말세에 더욱 심하여... 탄원서나 열강의 공관에 던지며... 민족 사활의 대문제를 외국인 심지어 적국인의 처분으로 결정하기만 기다렸도다.
제2는 준비론이니 을사조약 당시 여러 나라 공관에 빗받돋듯하던 종이 쪽지로 넘어가던 국권을 붙잡지 못하며... 이상의 이유에 의하여 우리는 외교, 준비 등의 미몽을 버리고...
쉽게 요약하자면 우리 주권이 없는 상태는 아무 의미가 없으며 주권을 되찾기 위해서는 어떤 폭력적 수단도 마다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정도가 되겠다. 외교론의 경우 자국의 운명을 외국에 맡기는 행위로 무장 투쟁을 행할 여력을 깎아먹는 행위로 보았고, 준비론은 현재 조선이 식민지 상태로 모든 부문에서 일본과 열세인데 어떻게 준비를 해서 언제 그 준비를 끝내냐면서 이 두 방법을 미몽으로 규정하고 민중에 의한 폭력혁명만이 답이라는 내용이다
이 때 외교론을 비판하는 문구 중에 "국내 인민의 독립 운동을 선동하는 방법도 미래의 미일전쟁, 러일전쟁 등의 기회라며 천편일률적으로..."라는 부분이 있는데 실제 역사를 아는 우리로서는 씁쓸하기 이를 데 없다. 다만 실제로 태평양 전쟁과 만주 작전이 일어난 시점은 신채호가 옥사한 뒤였으며, 외교론 독립운동가들이 구상한 시나리오는 사실상 '희망사항'에 가까웠다는 사실은 감안해야 한다.
강도 일본이 헌병정치·경찰 정치를 힘써 행하여 우리 민족이 한발짝의 행동도 마음대로 못하고, 언론·출판·결사·집회의 일체 자유가 없어, 고통과 울분과 원한이 있으면 벙어리의 가슴이나 만질 뿐이오, 행복과 자유의 세계에는 눈 뜬 소경이 되고, 자녀가 나면, '일어를 국어라, 일문을 국문이라'하는 노예 양성소 -학교- 로 보내고, 조선 사람으로 혹 조선사를 읽게된다 하면 '단군을 속여 스사노 노미코토의 형제'라 하여 '삼한시대 한강 이남을 일본이 다스리는 땅'이라 한 일본놈들의 적은 대로 읽게 되며, 신문이나 잡지를 본다 하면 강도 정치를 찬미하는 반(半)일본화한 노예적 문자뿐이며, 똑똑한 자제가 난다 하면 환경의 압박에서 세상을 비관하고 절망하는 타락자가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음모사건'의 명칭 하에 감옥에 구류되어, 주리를 틀고 목에 칼을 씌우고, 당근질·채찍질·전기질, 바늘로 손톱 밑과 발톱 밑을 쑤시는, 팔다리를 달아 매는, 콧구멍에 물 붓는, 생식기에 심지를 박는 모든 악형, 곧 야만 전제국의 형률(刑律), 사전에도 없는 갖은 악형을 다 당하고 죽거나, 요행히 살아 감옥 문에서 나온대야 평생 불구의 폐인이 될 뿐이라. (중략)
설혹 강도 일본이 갑자기 부처·보살이 되어 하루 아침에 총독부를 철폐하고 각종 이권을 다 우리에게 돌려주며, 내정과 외교를 다 우리의 자유에 맡기고 일본의 군대와 경찰을 일시에 철수하며, 일본의 이주민을 일시에 소환하고 다만 이름뿐인 종주권만 가진다 할지라도 우리가 만일 과거의 기억이 모두 없어지지 아니하였다 하면 일본을 종주국으로 받든다 함이 '치욕'이란 명사를 아는 인류로는 못할지니라. (중략)
일반민중이 굶주림·추위·피곤·고통, 처의 울부짖음, 어린애의 울음, 납세의 독촉, 사채(私債)의 재촉, 행동의 부자유, 모든 압박에 졸리어, 살려니 살 수 없고 죽으려 하여도 죽을 바를 모르는 판에, 만일 그 압박의 주인되는 강도 정치의 시설자인 강도들을 때려누이고, 강도의 일체 시설을 파괴하고, 복음이 사해(四海)에 전하며 뭇 민중이 동정의 눈물을 뿌리어, 이에 사람마다 '굶어죽음' 이외에 오히려 혁명이라 하 길이 남아 있음을 깨달아, 용기 있는 자의 그 의분에 못 이기어 약한 자는 그 고통에 못 견디어, 모두 이 길로 모여들어 계속적으로 진행하며 보편적으로 전염하여 거국일치의 대혁명이 되면 간사·교활·잔혹·포악한 강도 일본이 마침내 구축되는(쫓겨나는) 날이라. (중략)
이제 파괴와 건설이 하나요 둘이 아닌 줄 알진대, 민중적 파괴 앞에는 반드시 민중적 건설이 있는 줄 알진대, 현재 조선 민중은 오직 민중적 폭력으로 신 조선 건설의 장애인 강도 일본 세력을 파괴할 것뿐인 줄을 알진대, 조선 민중이 한 편이 되고 일본 강도가 한편이 되어, 네가 망하지 안하면 내가 망하게 된 '외나무 다리 위'에 선 줄을 알진대, 우리 2천만 민중은 일치하여 폭력 파괴의 길로 나아갈지니라.
1927년 신간회 발족에 발기인으로 참가했으나 크게 마음에 둔 것은 아니었는데 홍명희와 안재홍의 권유로 해외에서 참가한 것. 이 무렵 아나키즘 사상을 담고 있는 '대흑호의 일석담', 소설 '용과 용의 대격전' 등의 글을 남겼다. 1928년 잡지 〈탈환〉을 발간하고 자금 조달차 일본령 대만으로 갔다가 대만 지룽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대련으로 압송되었고, 1년 반 가까이 소요된 재판 끝에 1930년 5월 9일 최종적으로 10년형을 선고받고 20년 전 안중근 의사가 순국했던 곳인 여순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 때 혐의는 치안유지법 위반과 통화위조죄였으나 실제로는 아나키즘과 연결이 강했다.[12] 러시아 혁명 이후 1920년대 초기부터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후기에는 민족주의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사회 평등주의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1920년대 후반 즈음 아나키즘에 깊은 영향을 받았는데 처음 아나키즘과 연결된 것은 의열단 선언을 쓰는 등 의열단과 연계를 가지던 시기에 아나키스트였던 의열단원들 중 일부와 접촉하면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나키즘과 민족주의자 신채호의 연결이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지만 애초에 신채호는 민족의 독립이라는 목표하에서 유교 - 영웅사관 - 대종교를 포함한 민족주의 - 아나키즘을 거침없이 넘나들었던 전례가 있다. 독립이라는 목표만 제외하면 도구는 신경 안썼다고 보면 단순하지만 그렇다고 아나키즘이 단순히 민족 독립을 위한 도구였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말년으로 갈수록 신채호의 사상은 아나키즘의 영향을 짙게 받게 되었으며 민족 독립이라는 목표 역시 현재 상황에서 시급한 목표였지, 그것을 지상 목표로 삼는 전형적 민족주의자의 태도를 보이지는 않게 되었다. 민족주의자로서의 신채호에 비해 사회주의자나 아나키스트로서의 신채호에 대한 연구는 근래에 들어서야 이루어진 편으로 김구처럼 제도권 입장에서 민족주의자로서 교과서의 단골이던 신채호가 공산주의와도 관련이 있었다는 것은 쉽게 대중에게 알려질 사실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는 이회영도 마찬가지여서 독립운동사에서 엄청난 영향을 끼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교과서에서 이회영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
신채호는 여러 비판점에도 불구하고 유연하게 사상을 받아들였으며 근본적으로 인간 해방이라는 이념하에 식민지 조국의 현실과 자본주의, 국가주의 등 여러 억압과 착취의 현실을 고민해 온 역사학자 겸 독립운동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채호가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았던 것은 3.1 운동 당시 봤던 민중들의 힘이었고 그 이전까지 계몽주의자였던 신채호 입장에서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의지로 독립을 외친 것이 매우 신선했기 때문이었다. 북경에 거주하면서 이회영, 유자명 등의 거물들과 교류하며 아나키즘을 수용했을 것이고 나중에는 민족보다는 민중을 더 중시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당시 일제에게 억압받던 대만, 중국 등 다른 지역의 아나키스트들과 연계하기도 했다.
계몽 운동을 독립의 수단으로 생각했던 신채호에게 민중 해방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 아나키즘은 매력적이지 않을 수가 없던 것이다. 사상적으로 옳기만 하다면 유연하게 수용했던 신채호의 생각과 항상 대쪽같은 모습은 전형적인 선비의 모습이다. 이 과정에서 쓴 글 중 하나가 "외국의 주의가 조선에 전해지면 조선의 주의가 아니라 주의의 조선이 된다"는 이야기로 유명한 <낭객의 신년만필>인데 청소년 추천 서적으로 지정되어서 이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 적이 있다. 이 글도 아나키즘의 대표적 인물이자 러시아 혁명기에 활동한 '표트르 크로포트킨의 세례를 받자' 등 아나키즘 성향이 강하게 드러나는 글이기 때문이다.
특히 신채호는 당시 한국의 유사아나키스트들과 달리 정말로 자본주의와 국가를 유산계급이 무산계급을 착취하는 인육분쇄소라고 표현할정도로 대차게 비난할정도로 혁명에 열의에 차있었다.
10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뤼순에 수감된지 8년만인 1936년 2월 18일 옥중에서 뇌일혈로 의식을 잃었고 3일간 방치되었다가 21일 오후 4시 20분경 사망한다. 당시 감옥 내의 의료 시설이 열악했고 뇌일혈은 딱히 치료법이 없었다. 결정타는 뇌일혈이었지만 고문당한 후유증과 열악한 감옥 생활로 인한 영양 실조와 동상에 걸려 건강이 이미 몹시 악화된 상태였다. 일본 측에서는 신채호가 옥사하면 반일 감정이 심해져 힘들겠다는 판단에 면회온 가족들에게 보호자만 있으면 내보내 주겠다고 제안했고, 가족들은 부호였던 일가 친척을 내세워 석방 신청을 했지만 신채호는 그가 이미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했다는 것을 알고 거절했다. <조선일보>의 취재와 추가 연재 요청도 능력 부족을 이유로 거절했으며 일본 연호인 쇼와를 사용하는 것에 일침을 가했다.
유언으로 "내가 죽거든 왜놈들 발에 시체가 채지 않게 화장해서 재를 바다에 뿌려 달라."는 말을 남겼으나 주변인들 대다수가 신채호의 시신을 국내로 가져가자고 주장했고 이에 국내에 안장했다. 묘소는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귀래리에 있다. 이 곳은 본디 조부 대까지 살던 고향이기도 하다. 안장 과정에서도 큰 어려움을 겪었다고 전해진다. 사회주의, 아나키즘 사상 때문에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받았음에도 군사정권 시절까지 가족이 고생이 많았다고 하는데 이건 신채호가 평소에 이승만을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3. 평가 및 개인적 면모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 〈독사신론〉을 저술하는데 이는 기존의 단군 - 기자 - 삼한으로 이어지는 한민족의 고대 사관에서 기자를 자르고 단군조선 - 부여 - 고구려로 이어지는 사관으로 전환한 것이다. 이전 역사 서술이 거의 일본 역사서의 번역에 그치고 있었던 상황이었던 것에 비해서 임나일본부설 비판부터 근대적 역사 연구 방법론까지 어지간한 이야기는 다 나온다. 때문에 '최초의 제대로 된 근대적 역사 연구'는 신채호의 독사신론에서 찾는 것이 일반적이다.
1924년 10월 13일부터 1925년 3월 16일까지 동아일보에 여러 논문을 썼는데 이를 1929년 조선도서주식회사에서 홍명희 등이 엮어낸 것이 바로 《조선사연구초》이다. 《조선사연구초》 6편의 논문은 주로 한국 고대사에 관한 것으로 〈고사상이두문명사해석법(古史上吏讀文名詞解釋法)〉, 〈삼국사기중동서양자상환고증(三國史記中東西兩字相換考證)〉, 〈삼국지동이열전교정(三國志東夷列傳校正)〉, 〈평양패수고(平壤浿水考)〉, 〈전후삼한고(前後三韓考)〉, 〈조선역사상일천년래제일대사건(朝鮮歷史上一天年來第一大事件)〉 등의 제목으로 되어 있다. 「평양패수고」는 고대의 평양과 패수가 오늘날의 평안도 평양과 대동강이 아니라 만주 봉천성의 해성현(海城縣)과 점우락(蔪芋濼)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낙랑국'과 '낙랑군'을 구별하여 평양에는 '최씨 낙랑국'이 있었고 한나라 식민지 낙랑군은 한반도에 없었다는 주장을 폈다.
1931년 옥중에서 쓴 글을 안재홍이 조선일보에 연재하였는데 이는 후에 〈조선상고사〉로 불리게 된다.〈조선상고사〉는 1948년 출간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본래 〈조선사〉라는 이름으로 통사를 목표로 연재했으나 연재가 백제의 멸망에서 끊겼기에 이와 같은 이름을 얻었다. 〈조선사연구초〉에는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 실려 있고 〈조선상고사〉 서문에 유명한 '아와 비아의 투쟁'이 씌어 있다. '아와 비아의 투쟁'은 아나키즘이 사회를 인식하는 대표적인 방법이다. 원래 주체와 객체(대상)와의 투쟁 또는 주체와 세계와의 투쟁이라는 관점은 이미 피히테, 셸링를 비롯해 헤겔 이전 독일 역사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독일의 민족주의 역사 철학에서 등장한다. 따라서 '아와 비와의 투쟁'은 관점에 따라 18세기 초 독일 민족주의 역사 철학의 한국판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는 부분인데 이렇게 타국에서 빌려온'' 민족주의 역사 철학의 지적 기원은 신채호만이 아니라 민족주의 사학에서도 거의 지적되고 있지 않다. 그리고 신채호는 우리 민족의 고유 사상이자 정신인 '낭가 사상'을 강조했다.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에서 삼국사기의 편집자 김부식을 무자비하게 비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신채호는 당시 서경천도운동을 주장하였던 묘청이야말로 고려의 역사를 바꿀 수도 있었던 자주적인 역사관을 가졌던 사람이라고 주장하면서 김부식이 '묘청의 난'을 진압하게 되면서 자주적인 역사관이 사대주의 천하에 억눌리게 되었다고 한탄하였다. 하지만 묘청도 비판했는데 미치광이처럼 제멋대로 행동해 묘청의 난은 실패했고 고려의 역사관은 사대주의에 머물렀기 때문이었다.조선의 정여립 역시 높게 평가했으나 프랑스 혁명처럼 세계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다고 한계를 그었다. 단순히 묘청과 정여립을 띄웠다는 사실만 흔히 알려지지만 차이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신채호는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극도로 부정적으로 바라보며 백제사와 고구려사의 많은 부분이 왜곡되거나 조작되었다고 주장했다. 신채호의 이런 주장 때문에 그동안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역사학계에서도 삼국사기에 대한 불신이 높았고 많은 부분이 왜곡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사람이 많았다. 이런 오해는 한국 고대사 전반에 대한 불신으로까지 이어졌는데 이러한 점을 역이용해서 일본은 임나일본부설을 밀었고 실제로 과거 한때 대한민국에서 임나일본부설을 믿었던 사람들이 제법 있었으며 2000년대 이후에 와서야 상당 부분 풀리게 되었다. 그동안 역사학계에서 한중일의 모든 역사들의 교차검증이 끝나자 삼국사기가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매우 정확한 역사서임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신라를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보았으나 신라 고유의 '풍류도'나 '낭가 사상'이 조선 '국혼'의 원류와 통한다고 평가한 등 신라의 모든 것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신채호의 비판은 '중국화'와 관련된 부분에 집중되었고 그것과 대비되는 고유성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편이었다. 반면 백제와 고구려에 대해서는 매우 우호적이었다. 문제는 백제에 대한 우호적인 시선이 개인적인 감정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이런 우호적인 감정을 가지고 자신이 상상했던 것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저서에 적었다는 점이다. 한때 교과서에 수십 년 동안 실려 있었던 백제의 산동반도 진출설도 사실은 정인보와 신채호의 사적인 상상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럴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하는 수준으로 쓴 것인데 과거 역사학계가 신채호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던 시절에 '신채호 선생이 이렇게 쓴 데에는 분명히 무슨 근거가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교과서에까지 수록해 버린 것이다. 이후 오랜 재검증 결과 아무리 찾아봐도 근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져 현재는 완전히 부정되고 있으며 교과서에서도 삭제되었다. 그래서 역사학도들에게는 애증의 존재라고 할 것이다. 물론 고려사와 고려사절요가 남은 고려,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엄청난 사료가 남은 조선과는 다르게 사서가 거의 전무한 고대사 연구에 큰 족적을 남겼으니 위인이라면 위인이다. 하지만 신채호의 그늘이 엄청나서 많은 이들이 그의 사관을 벗어나지 못한채로 역사를 답습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많은 유사역사학 주장자들에게 근거로 이용당하기까지 한다. 조선상고사를 보고서 조선상고사가 진짜고 현대 역사학은 가짜라고 하는 인간도 지금까지도 있다.
중국 신문에 역사 관련 사설을 연재한 경력이 있으나 돈을 벌기 위해 쓴 글이었기 때문에 본인은 이 글들을 쓴 것을 몹시 후회했다고 한다. 자신이 쓴 글을 편집자가 약간의 자구 수정을 했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때려치운 일화도 있다. 그냥 어조사만 고친 정도인데도 이렇다. 사장이 사과하러 찾아와도 그냥 '돈만 아는 사장놈이 어디서 감히...'라는 태도로 그대로 내쫓았다고. 호구지책을 위해 글 쓴 것을 후회했다는 이야기는 이와도 연결된다. 당시 도망치듯 중국에 건너가서 집필 활동을 할 때였기 때문에 돈도 별로 없었는데, 그는 매일 중국의 서점이나 헌책방에 가서 선 자리에서 관련된 책을 모두 읽어버린 후, 통째로 암기하여 집에 가서 자신의 원고와 비교 분석하여 다시 글을 쓰는 일을 반복했다 한다. 뭐 이런 괴수가... 어느날 찾아간 집의 귀한 책이 불에 타자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복원해 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또한, 조선 혁명 선언문을 작성할 때는 방에 틀어박혀서 꼬박 1달을 글쓰는 데만 매진했다고도 한다. 이러다보니 황당할 정도로 완벽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사설 연재를 집어치운 앞의 일화도 그렇지만, 자신이 이전에 쓴 글도 이후에 다시 봐서 마음에 안 든다는 생각이 들면 그 자리에서 불살라 버렸다는 일화가 남아있다. 이때문에 아까운 원고들 상당수가 이렇게 신채호의 손에서 사라졌다.
이와 같은 어려운 사정 때문인지,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 등에 있는 한담에선 "내가 지금 3원만 있으면 무슨 책도 사고 무슨 책도 살 텐데... 아니다. 정말 1원만 있다면 이 책을 사서 공부할 수 있는데..."와 같은 글귀가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자존심이 강해서 다른 사람에게 손을 벌리지 않았기 때문에, 친구들이 놀러가서 몰래 집구석에 매우 적은 돈(조금만 더 크면 의심하니까)을 쑤셔박아놓았고, 단재는 집을 청소하다가 이 적은 돈을 발견하고 '헐 언제 잃어버렸었지... 횡재했구만'이라며 겨우 입에 풀칠을 하기도 했다는 일화도 있다. 주위 사람들도 이정도밖에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에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조금 이른 시기 만주 땅을 돌면서 답사를 할 때 광개토대왕비 탁본 한 장 못한 것을 두고두고 아쉬워했을 정도였다고.
의외로 신채호는 기자(箕子)의 존재를 부정한 적이 없다. 기자가 중국에서 와서 고조선에서 단군을 제치고 왕이 되었다는 기록 자체를 긍정하는 것은 아니고, "특별한 발견이 있기 전까지는 기자의 연대를 그냥 두고 볼 것"이라던가, "그냥 3천 년 전에 기자라는 사람이 있었고 우리 나라에 왔었구나 하는 정도로만 보면 된다"는 것.
신채호는 초기의 영웅전 번역 이외에도 다양한 소설을 서술했다. '꿈하늘', '용과 용의 대격전', '일목대왕의 철퇴'가 대표작이다. 다만 궁예에 대해서 다룬 '일목대왕의 철퇴(미완성)'을 포함해서, 문학성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했다는 느낌이 강하다. 단적으로 '용과 용의 대격전'은 짤막한 단편이지만, 당시 심취하였던 아나키즘적 성향이 강하게 드러난다. 을지문덕을 재발굴한 인물이기도 한데 일제 시대에는 을지문덕의 명성이 이미 시대가 오래 지나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신채호가 을지문덕에 대한 책을 펴내고 민족 정신을 고취시키면서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서양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보며 유교의 이상이 서양에 먼저 실현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는 박은식 등 다른 당대 민족주의자들도 비슷하게 본 것이다.
조선의 종교와 이론 수용 자세에 대해서 비판적 자세를 취했는데, 이런 어록이 있다.[15]
옛날(舊時)의 도덕이나 금일의 주의(主義)란 것이 그 표준이 어디서 났느냐? 이해(利害)에서 났느냐? 시비에서 났느냐? 만일 시비의 표준에서 났다 하면 청구이담집(靑丘俚談集)에 보인 것과 같이 나무의 그늘에서 삼하(三夏)의 더위를 피하고는 겨울에 그 나무를 베어 불을 때는 인류며, 소를 부리어 농사를 짓고는 그 소를 잡아먹는 인류며, 박 연암의 호질(虎叱)문에 말한 것같이 벌과 황충이의 양식을 빼앗는 인류니, 인류보다 더 죄악 많은 동물이 없은즉, 먼저 총으로 폭탄으로 대포로 세계를 습격하여 인류의 종자를 멸절하여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러므로 인류는 이해 문제일 뿐이다. 이해 문제를 위하여 석가도 나고 공자도 나고 예수도 나고 마르크스도 나고 크로포트킨도 났다. 시대와 경우가 같지 않으므로 그들의 감정의 충동도 같지 않아 그 이해 표준의 대소 광협(廣狹)은 있을망정 이해는 이해이다. 그의 제자들도 본사(本師)의 정의(精義)를 잘 이해하여 자기의 이(利)를 구하므로, 중국의 석가가 인도와 다르며, 일본의 공자가 중국과 다르며, 마르크스도 카우츠키의 마르크스와 레닌의 마르크스와 중국이나 일본의 마르크스가 다 다름이다.
우리 조선 사람은 매양 이해(利害: 이익과 손해) 이외에서 진리를 찾으려 하므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곡(哭)하려 한다.
1925년 1월 <동아일보>에 발표한 ‘낭객의 신년만필’
신채호는 그 올곧은 정신으로도 이름이 높다. 일본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으려고 고개를 들고 세수를 했다는 일화는 역사 공부 좀 했다면 한 번 들어봤을 만한 일화. 또한 선생은 세수 할 때에 고개를 숙이지 않아서 온통 옷을 버리기가 일쑤였다. 누가 그 이유를 물으니까 "나는 평생에 머리 숙이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하였다.오산에 있을 때에도 이 세숫법을 고치지 않았는데 한 번은 시당이 "에익 으응, 그게 무슨 세수하는 법이람. 고개를 좀 숙이면 방바닥과 옷을 안 질르지" 하고 혀를 차는 것을 보고 "그러면 어때요?"하고 여전히 고개를 뻣뻣이 하고 두 손으로 물을 찍어다 발랐다 한다. 그는 결코 누구의 말을 들어서 제 소신을 고치고, 남의 사정이나 감정을 꺼려서 자기 일을 고치는 인물이 아니었다. 이 일화를 보면 신채호가 직접적으로 고개를 숙이면 굴복이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고기가 일본산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다 토해버렸다든지 하는 일화가 많다. 또 일상 생활과 일상 상식에 관심이 없어 빨간 속옷을 빛깔이 곱길래(...) 입고 다녔다든가, 앞에서 보듯 방구석을 치우지 않아 지인들이 (그냥 주면 절대 안 받으니) 돈을 몰래 놓아두고 다녔다는 식의 이야기도 많다.
그의 역사관은 현재 한국의 역사관에 엄청난 영향을 주어, 국사책에도 그의 연구가 많이 반영되어 있다. 아와 비아의 투쟁이란 말은 각종 역사 관련 시험에서 가장 유명한 말 중에 하나이며, 2015년 대학수학능력시험 국어 B형 지문으로까지 등장하여 국어 B형을 응시한 고등학생들의 머리를 터트렸다. 그러나 현대에 여러번 지적되듯이 사관이 지나치게 주관적인 성격을 가져서 특히 극단적으로 고구려를 옹호하고 신라를 배척하는 편향적인 역사관을 가졌다. 또 고구려가 감숙성까지 진출했다고 주장하는 등 무리수를 폈으며, 위에서 본대로 백제의 산동진출설이나 한사군 재요동설 주장 등 현대의 입장에서 보면 근거가 부족하거나 심하게 말해서 뇌피셜(...) 수준인 주장도 많이 했다.
또한 자금 부족과 사료 획득의 한계로 연구가 부실했던 사례도 많다. 그가 사료로 쓴 도서나 금석문 같은 것이 현대에 와서 존재하지 않고 교차검증도 안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조선상고사 후반부는 거의 그 책의 해설본이라고 할 만큼 조선상고사에서 자주 나오는 책으로 '해상잡록'이라는 것이 있는데, 교차 검증도 전혀 되지 않고 현재 전하지도 않는다. 또한 잘못 판독한 경우가 꽤나 있어서(대표적인 것이 삼조선설) 그의 주장은 후대의 연구 성과에 의해 대부분 사장되었다.
민족주의가 지나쳐서 본인이 잘 알지 못하는 부분에까지 왜곡을 한 경우도 존재한다. 조선상고사에서 택견이 일본 유술의 원류가 되었다고 적었는데 한국 무술계에 이상한 사이비 무술 가져다 놓고 고대로부터 전해왔느니 하는 식으로 역사 팔아먹는 사람이 꽤 있는지라 무술인 중에도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또한 그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북한의 주체사상에 입각한 역사관에 이용되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살수대첩 같은 경우 수공하고는 1도 상관이 없는데 수공설이 등장한 것도 그의 왜곡때문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사론(史論), 그리고 구한 말부터 항일 투쟁 시대까지의 민족 사학의 정신은 꽤 높이 평가받아, 사학사(史學史)에서는 상당한 비중으로 다뤄지며 존경받고 있다. 그 시대는 지금처럼 전산으로 사료들이 데이터 베이스가 되고 여러 연구가 대규모 지원을 받아 이루어진 상황은 커녕 일제의 탄압에 대놓고 연구를 하기도 힘든 상황이었으니, 그의 오류를 이유로 비난하는 것은 과한 처사이다. 하지만 신채호의 연구 결과 자체를 절대시하는 것은 지금 시점에서는 유사역사학이라는 소리를 피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일 것이고. 이는 모든 과거의 학자를 바라볼 때 비슷하게 적용되는 사실이다.
그가 워낙 독보적인, 그리고 대표적인 민족사학자이자 항쟁가였기 때문에 후대의 인물들은 현대의 역사관 논란을 타파하기 위해 주로 재야에서, 심지어 몇몇은 틀린 것으로 밝혀진 것들을 그의 주장을 차용하는 것이 많다. 일례로 쥬신이라는 이름은 그의 저서 <조선상고사>에서 비롯된 떡밥(그는 '주신'을 이야기했고, 쥬신이라는 말이 나온 것은 그 후 정의의 사자 라이파이로 유명한 만화가 김산호가 대쥬신제국사를 편찬하면서 나온 단어이다.).
"그러면 진서나 위서나 남제서에는 어찌하여 이를 빼버렸는가? 지나 사관(史官)이 매양 국치(國恥)를 꺼려 숨기는 괴상한 버릇이 있어……오직 양서나 송서의 '백제가 요서를 공략해서 차지하였다.'고 한 구절은 그 기록이 너무 간단하고 사실이 너무 소략하므로, 당 태종이 우연히 주의하지 못하여 그 문자가 그대로 유전된 것일 것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백제 본기에는 이런 일을 빼었는가? 이는 신라가 백제를 미워하여 이를 뺏을 것이고, 또는 후세에 사대주의가 성행하여 무릇 조선이 지나를 친 사실은 겨우 이미 지나사에 보인 것만을 뽑아다 기록하고 그 나머지는 다 빼버린 때문이다."
《조선상고사》
이 부분은 백제의 요서경략설을 다룬 부분인데, 이에 대한 기록이 남조의 사서에만 나오고 북조의 사서에는 나오지 않는 것을 신채호가 추측한 부분이다. 그런데 이 내용은 현대까지 학계에서 논쟁이 끊이지 않는 대목이고, 왜 기록이 없는가도 갑론을박이 진행되고 있다. 위서의 경우에는 집필진이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서 손댄 부분이 많고, 당 태종 연간에 지어진 북제서 같은 경우도 당 태종이 직접 편찬에 참여하는 등 편파성을 강화했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환빠들 중 단재의 주장 일부분만 따서 자기들 주장이 맞다고 하는 경우도 있는데 전체 글을 보면 그를 보완하는 설명도 많이 했다. 가장 대표할 만한 예가 세조 분서설. 세조가 고대 역사서를 태워 지금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다는 떡밥인데 신채호 주장 전체를 보면 세조가 태운 것은 주로 역술서 같은 책들로 역사서 이야기는 나오지도 않았다. 신채호 주장은 당시 문화 등을 알 수 있는 역술서 등을 태워 그것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한 것인데 환빠들은 이를 왜곡한다. 환빠들은 단재의 이름과 권위가 필요한 것이지 그의 저서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환빠들의 거란 한민족 떡밥 - 고통받는 단재.
하지만 반대로 이런 환빠들의 특성 때문에 역으로 환빠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최대 무기가 되기도 하는데, 신채호는 천부경 등을 대차게 까기도 했기 때문이다. "역사를 연구하려면 사적 재료의 수집도 필요하거니와 그 재료에 대한 선택이 더욱 필요한지라. 고물이 산같이 쌓였을지라도 고물에 대한 학식이 없으면 일본의 寛永通寶(관영통보)가 箕子(기자)의 유물도 되며, 십만책의 藏書婁(장서루) 속에서 坐臥(좌와)할지라도 서적의 진위와 그 내용의 가치를 판정할 안목이 없으면 후인 위조의 《천부경》 등도 단군 왕검의 성언이 되는 것이다."(조선사연구초)
분명 신채호는 존경받을 만한 독립 운동가고 사학자이기에 환빠들이 신채호를 방패 삼아 밀고 오면 조심스러워지는 역사학자도 있다. 하지만 비판할 점이 상당히 많은 학자이기도 하기 때문에 작정하고 비판하는 사람도 꽤 있는 편. 단재 사학의 독단성, 교조주의적인 면모는 학계에서도 비판하며, 특히 두세 번씩 본인의 추측만을 거친 이두 해석법은 정말 평이 좋지 않다.
하지만 대개는 그와 당시 시대의 환경을 감안해야한다. 신채호 당시의 형편상 교차 검증이 거의 불가능했다는 것이 인정받기 때문이다. 신채호의 대척점으로 훨씬 안정된 형편에서 연구했던 실증 사학의 이병도 또한 '지명의 한자가 뜻이 비슷하기 때문에'라는 식으로 지역 비정한 예가 수도 없이 많다. 발음을 통한 연원 연구에서 가장 큰 문제는 발음의 해석이 자의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삼청동이 三淸洞으로 표기한다면 세 가지 맑은 것들이 있는 동이라고 하는 것인데 세 가지 맑은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혹은 저 삼청동의 한자가 진짜 본래 뜻이 맞기는 하냐 같은 문제가 생긴다.]
때문에 적어도 신채호가 역사에 대한 열정 만큼은 인정받는다. 제국주의 권력자들에게 쫓기며 도피와 망명 생활에 밥 굶으면서도 책 한 권에 목말라했던 역사학자와 등뜨습고 배부른 21세기에 살면서 밥 먹고 인터넷으로 하는 짓이 입만 열면 소위 '강단 사학의 탄압' 운운하면서 뒤로는 오히려 저들이 정치권과 결탁하려고 들는 현대의 사이비지식인, 역사왜곡장사꾼들을 결코 동일선상에서 비교할 수 없다. 민족주의 사학에 대한 비평도 단재가 처했던 식민지 현실과 20세기 초반 반제국주의 민족주의의 부흥이란 측면에서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이렇게 시대적 여건에 따른 피해의식과 민족 정체성 붕괴에 대한 위기의식을 대한민국이 엄연히, 그것도 나름 잘나가는 독립 주권 국가이며, 북한 같은 자학적 민족주의에 찌든게 아니라 개방적인 민주사회를 표방하는 현대 사회에서 무비판적으로 집착하는건 전혀 다른 문제다. 단재는 역사학자로서 한 연구 뿐만 아니라 본인 자신 또한 20세기 초반 식민지 현실에서 각종 사상적 경향을 변화무쌍하게 넘나든 혁명가로서 본인 자신 또한 역사학적 연구 대상으로서 흥미진진하기 그지 없는 인물이다.
1962년 이미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으나, 여러 독립 운동가들과 함께 일제의 호적 등록을 거부한 탓에 일제의 호적법을 계승한 대한민국 국적법상 무국적자로 지내야 했다. 그러다가 2009년 4월 14일 그가 일찌감치 탈퇴한 임시정부 수립 90주년을 기념해서 겨우 국적을 회복하게 되었다.
흔히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명언을 남겼다고 알려져 있는데, 신채호가 이 말을 했다는 근거는 없다. 또한 '조선상고사'에서 역사를 잊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 라는 내용이 있다고도 알려져 있지만 이 또한 근거는 없다. 실제 '조선상고사'에는 해당 문장이나 비슷한 문장이 없다. 누가 먼저 한 말인지는 알 수 없다. 영어권에서는 비슷한 맥락의 명언이 윈스턴 처칠이 했다는 루머로 널리 알려진다.
사실상 신채호의 역사관은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힘의 논리를 중시하는, 당시의 역학 관계에 영향을 받고 그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가 주장했던 자주에 대한 열망은 결국 힘이 받쳐줘야 가능한 것이었다. 조선인의 지배는 이전 왕조들, 특히 서경 천도 운동에서 힘을 숭상하고 자주를 외쳤던 세력이 패배하고 사대주의자가 승리했기 때문에 이후 왕조들이 사대를 받아들였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민족은 망국의 슬픔을 겪어야 했다는 것이었다. 현재 조선인들이 왜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시간적 흐름 속에서 고민했던 역사학자였다. 이러한 논리 속에서 현재 그의 역사적 해석, 특히 조선 시대에 대한 해석은 비판을 받고 있다. 신채호가 강조한 자주로는 조선 시대가 사대주의에 점철된 국가였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 안확은 조선 시대를 근대 사회 정치 이론에 빗대어 실증적 연구를 진행했고 긍정적인 부분이 있었음을 밝혀냈다. 그러나 주목받지 못하고 묻히고 말았다. 현재 그의 연구는 조선 시대를 사회 정치 이론에 끼워맞추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결국 1960년대 ~ 1970년대 이후로 조선 시대사 연구가 활성화되면서 조선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지금까지도 이루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신채호가 조선의 중화 사상을 극렬히 비판한 점을 지적하면서 조선의 중화는 문명이었고 이것이 단순한 사대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밝히는 작업들이 진행 중이고 어느 정도 성과도 나왔다. 아직까지 고등학교 교과서 등에는 반영이 되지 않았다. 교과서란 게 학계 연구 성과와는 심하면 수십년 차이난다. 그의 주장이 현재 들어서 비판을 받지만 신채호는 대한민국 사학사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근대 이후 민족주의 역사학자로서 큰 성과를 보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신채호는 독립 운동을 역사학과 결부지으면서 그 사상 기반을 다진 중요한 인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당대 지식인답게 외국어에도 관심이 많았던걸로 보인다. 굉장히 독특하게 영어를 공부했는데 그래서 웃긴 일화가 많다. 처음에는 김규식한테서 영어를 배웠다고 한다. 하지만 신채호의 발음이 영 안 좋았는지 김규식이 계속 발음 가지고 태클을 걸었다고 한다. 결국 화가 난 신채호는 "나는 외국인과 대화 할 것도 아니고 책만 읽으면 된다고 하지 않았소!" 하면서 그 뒤로는 이광수한테서 영어를 배웠다고 한다. 외국의 역사와 사상에 관심이 많었지 회화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걸로 보인다.
다른 일화로는 어느날 변영만이 신채호가 영어 읽는 모습을 봤는데 신채호는 ‘neighbour’를 ‘네이그후바우어’라고 읽고 있었다. 변영만은 신채호에게 “단어 안에 묵음이 있으니 ‘네이버’라고만 발음하시오”라고 했다. 그런데 신채호는 오히려 당당하게 “그건 영국인의 법이겠지요. 내가 그것을 꼭 지킬 필요가 무엇이란 말이오.” 대답했다.
또 다른 일화로 이윤재가 신채호가 영어를 읽는 모습을 봤는데 신채호가 한문식으로 토를 달아 느릿느릿 읽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I am a boy'를 I는 am a boy이니라' 식으로 말이다. 이윤재가 “선생은 영어를 어찌 한문 읽듯 읽소?” 하고 묻자, 신채호는 웃으며 “영어나 한문이나 글은 마찬가지가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가정사에서는 힘들게 지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초창기에 결혼해서 장남을 보았으나 부인의 모유가 부족하여 대신 먹이라고 사다준 연유를 잘못 먹여 체한 장남이 사망하고 말았다. 이 때 분유통을 모두 도끼에 찍어 강물이 온통 우유빛으로 변했다고 하는데 이후 국외로 나가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재산을 주면서 이혼했다. 이후에 중국에서 지내는 과정에서 1920년 간호사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자혜(15세 차이가 난다.)와 재혼을 했으나 이 시기도 경제적인 문제로 고생했던 것은 앞서 언급된 바 있다. 박자혜는 3년만에 신채호의 권유로 조선으로 돌아갔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낳았으나 삼남은 1942년, 15세의 어린 나이에 요절했고 차남 신수범만 장성하여 대를 이었다. 신수범은 1991년에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실증을 중시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에 이르러서 사학자로서의 신채호는 주관적이고 독선적이었으며 부정확한 사료 분석 및 사료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을 하였다고 비판받고는 한다. 다만 현대 사학계에서 신채호의 연구가 대부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신채호를 비판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은 일인데 매일매일 새로운 사료가 발견되고 연구 방법론이 갱신되는 역사학계에서 1900년대 초반 변변한 참고 서적과 교류할 학계도 없이 홀로 연구하다시피한 신채호의 저작이 현대에도 특출난 학술적 가치가 있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다. 물론 신채호의 권위를 이용하여 자신의 잘못된 주장을 떠받치려는 사람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그 사람의 문제이지 신채호의 문제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19]
독립운동에서도 신채호는 자신이 주장하는 폭력혁명론 이외에 외교론, 실력 양성론, 군사적 무장투쟁론 등 모든 의견을 맹렬하게 비판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해체를 주장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에 많은 지장을 초래했다는 평가가 존재한다.
위 폭력혁명론 중시에 맹비난 당하는 이유에는 자신의 역사관마저도 함몰되었다는 평가가 동반된다. 김부식을 맹비난했다고 하지만 정치질로서 한 것이 사람으로서 맹비난당할 것은 없다. 김품석 옹호질이나 아들내미 막장질 지적을 정치 공세라 억지 부리기를 집단 유지는 하나도 없는 폭력혁명론에서는 맹비난할 이유는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만일 이러한 것을 공격했다면 이승만에 대한 맹공이 타당성을 가졌고 국군이 신채호를 기억하는 것에 우려감을 표할 일도 없을 것이다. 결국 그렇지가 얺았고 광해군의 의도적 왜란 반성 삭제를 두둔한 정인홍이나 망상에 빠진 묘청을 미화하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
2021년 9월에 진수하는 해군의 3천톤급 도산안창호급 잠수함 3번함의 함명으로 '신채호함'이 명명된다.
4. 저서
평론
독사신론(1908)
낭객의 신년 만필(1925)
선언문
조선혁명선언(1923)
역사서
조선사연구초(1927)
조선상고사(1931)
조선상고문화사(1931)
위인전
이태리건국삼걸전(1907)
이순신전(1908)
을지문덕전(1908)
최도통전(1909)
소설
꿈하늘(1916. 미완)
용과 용의 대격전(1928)
일이승(미완, 유고)
일목대왕의 철퇴(미완)
5. 대중매체에서
1982년 8월 MBC가 8.15 특집 다큐멘터리 드라마 <한: 단재 신채호 일대기>를 방영했는데 극본과 연출은 <제1공화국>을 맡았던 김기팔 작가와 고석만 PD 콤비, 해설은 성우 최응찬이 각각 맡았으며 배우 이정길이 연기했다. 촬영 당시 광개토대왕릉비는 실물 크기로 재현해낸 후 경기도 고양군 서오릉에 세웠다.
<하츠 오브 아이언 4> 모드 중 하나인 레드 플러드에서 한국 촉진주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OTL과 달리 주체사상을 주장하며 최종적으로 고구려를 재건하는걸 목표로 두고 있다. 이후 반대편 촉진주의 핀란드와 전쟁이 일어나면 환핀대전 이벤트가 발생한다.
카이저리덕스에는 레드 플러드와 달리 고증을 지켜서 극렬 아나키스트 지도자로 등장하며 국명도 '조선자유지구'(Korea Free Territory).현실에서 민족적 아나키스트인 모습을 참고했는지 일반적인, 민족의 경계를 넘는 포용애 같은 서구진영 아나키즘과 달리 항일ㆍ민족해방을 강조하는 면이 짙다.
대통령 각하 만세에서는 멸망 직전 한국을 구해낸 조지원과 그가 만든 파시즘 사상인 삼균주의를 보고 민족 고유의 사상이라고 미친듯이 좋아한다. 이후 삼균주의 이론가가 되어 삼균주의를 직접 만드는데 신채호 덕분에 몽상적 사회주의 비스무리한, 조지원 스스로도 그냥 통치하기 편하려는 목적으로 만든 이름뿐인 사상이 이론적으로도 탄탄한 사상으로 변하게 된다.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는 대한제국이 계속 존재하게 되면서 역사를 함부로 평가 할수 없게 된 상황에서 처음으로 왕족에 대해 자기 주관대로 평가를 내리면서 보수파에게 위협을 받으나 국민들의 자유로운 역사 해석을 원하는 주인공의 지지 덕분에 일약 스타가된다. 정치인으로서는 아나키스트였던 원래 역사와 달리 레드플러드처럼 고구려 중심 세계관을 세우려는 민족주의자이면서 인간 해방의 대의를 포용하는 사회민주주의자인 것으로 묘사된다. 신흥 민족주의 세력과 손을 잡지만 신채호 본인은 한민족 중심인 고구려 보다는 다민족 국가였던 발해와 같은 보편 제국을 만들어서 북방민족의 동등한 다민족 국가를 꿈꾼다.
6. 같이보기
국사
역사학
조선상고사
환빠
용과 용의 대격전
7. 가족
조부 : 신성우(星雨) - 조모 : 안동권씨
부 : 신광식 - 모 : 밀양박씨
형 : 신재호 - 형수 : 순흥안씨
매 : 고령신씨 - 매제 : 안동권씨 오채
처 : 박자혜 , 본은 밀양.
장남 : 신수범(1921~1991) - 1975년 제일은행 퇴직
자부 : 안동 권씨
자부 : 경주이씨 덕남[24](1943~2023)
손자 : 신상원(1971) - 공무원 - 손부 : 인동장씨 소영
증손 : 신정윤, 신하림
손녀 : 신지원(1970~)
차남 : 신두범 (요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