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점령'
1967년 이스라엘은 6일전쟁에서 기적적으로 승리한 후 넓은 영토를 갖게 된다. 시나이 반도, 가자지구, 웨스트뱅크(서안지구), 동예루살렘, 골란고원이 추가로 점령한 영토이다. 그러나 이스라엘로서는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니다. 새로운 영토는 늘 분쟁의 씨앗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이집트가 문제다 나세르가 갑자기 사망하고 후임으로 선출된 사다트 대통령은 이집트의 위신을 세우고자 새로운 전쟁을 벌인다. 1973년에 발발한 욤키푸르 전쟁이 그것인데, 결과만 볼 때는 이스라엘이 승리자이나 이집트로부터 선제공격을 당한 이스라엘 역시 큰 피해를 입었다.
이집트의 위신을 되찾았다고 생각하는 사다트는 자신감을 가지고 이스라엘과 평화협상을 추진하면서 1978년 시나이 반도를 되찾아온다.
그러나 나머지 지역은 여전히 이스라엘이 무력으로 점령하고 있다. 특히 유엔이 팔레스타인에게 분할해준 가자지구와 웨스트뱅크(서안지구)에서는 많은 주민들이 잦은 전쟁을 피해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등으로 피난을 떠났으나 전쟁이 끝난 후에도 여전히 돌아오지 못하고 타지에서 난민 생활을 하고있다.
이스라엘 정부가 '부재자재산법'을 신설하여 이들의 귀환을 막고있기 때문이다. 주인이 피난가서 비어있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집과 토지를 유대인들에게 넘겨준다.
피난 가지 못하거나 귀환한 팔레스타인들 상황도 암담하다. 이스라엘에서 살던 아랍인들도 거주지에서 쫒겨나 가자지구의 임시 난민캠프에서 절대빈곤 생활을 한다.
1차중동전쟁 이후 한창 불던 아랍민족주의의 기세를 보며 주변 아랍국가들이 자기들을 해방시켜줄 것이라고 믿어온 팔레스타인인들은 큰 절망에 빠진다.
그때까지 큰소리치던 아랍국가들이 6일전쟁에서 이스라엘의 압도적인 힘을 실감하고 팔레스타인 문제를 외면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각자 국내 정치상황도 쉽지 않다. 1970년 요르단 총리를 암살한 '검은 9월단' 사건에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연루되었음이 드러나자 이에 분노한 요르단 국왕은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일체의 지원을 중단시킨다.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은 이집트 역시 발을 뺀다. 쿠데타에 시달린 시리아와 이라크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다. 이렇게 팔레스타인인들은 주변 아랍국가들로부터 소외당한다.
팔레스타인 해방은 팔레스타인 스스로 이루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서서히 커지기 시작한다. 이러한 해방운동의 중심에 야세르 아라파트(Yasir Arafat, 1929-2004)가 있다. 일찍부터 무장 투쟁을 시작해온 아라파트는 파타(Fata)라는 무장 조직을 만든다.
1964년 아랍 정상들은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팔레스타인 무장조직을 만들기로 결의한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결성되고 파타가 그 핵심 정당이 된다. 팔레스타인인들이 스스로 투쟁에 나선 것이다.
'점령지의 현실'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지배한 팔레스타인 지역이 크게 개선되었다고 홍보한다. 팔레스타인인을 위한 집도 짓고 대학교도 세우고 '계몽된 지배'라고 자랑한다.
그러나 실상은 다르다. 점령지의 빈곤은 크게 나아진 게 없고 부당한 인권탄압을 당하기 일쑤이다.
무엇보다 열악한 경제상황이 가장 큰 문제다. 점령지를 개발할 의지가 없는 이스라엘의 정책으로 인해 1980년대 가자 지구의 실업률은 50-60%에 이른다. 난민캠프의 조그만 방에 13명의 삼대 가족이 모여 살기도 한다.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도 일자리를 구하기가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젊은 실업자들의 증오와 불만이 들끓는다. 운 좋게 취업한 젊은이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스라엘의 3D업종에 종사하면서 훨씬 낮은 급여를 받으나 노동자로서의 권리나 사회보장제도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한다.
직장 출근을 위하여 이스라엘 지역으로 들어가는 검문소에서는 수시로 인권 유린이 일어난다. 아무런 설명 없이 무한정 기다리게 하거나 동물 울음소리를 내도록 강요당한다. 이에 불응하면 당연히 검문소를 통과할 수 없다.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매일 아침 이를 악물고 모욕적인 인권 침해를 참는다.
점령지의 삶이 열악할수록 팔레스타인인의 저항이 늘어난다.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 매일 10건 이상의 폭력 시위가 발생한다. 돌을 던지고, 타이어를 태우고, 길을 막고, 팔레스타인 깃발을 게양한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체포되고 사망자도 발생한다. 시위와 진압이 같이 격렬해진다. 이스라엘군의 총격에 사망하는 사건도 생기면서 시위대의 성격이 서서히 달라진다.
'인티파다(intifada, 반란 봉기)의 시작'
1987년 12월 8일 이스라엘 검문소에서 사고가 발생한다. 이스라엘 탱크를 실은 트럭이 가난한 팔레스타인 근로자들이 탄 자동차를 들이 받아 4명이 사망하고 여러 명이 부상을 당한다. 단순한 교통사고일 수도 있는 이 사고는 희생자들이 살던 빈민자 난민캠프에서 '유대인 운전기사는 얼마전 친척이 팔레스타인에게 살해를 당했는데 그 복수로 일부러 팔레스타인 자동차를 받았다' 라는 이야기가 나돈다.
난민 캠프는 분노로 들끓는다. 장례식 후 이들을 추모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리고 금새 돌과 유리병을 던지는 거친 시위로 발전한다. 그날 시위 현장에서 팔레스타인의 어린 소년이 이스라엘 총격에 사망한다. 어린 소년의 죽음은 더 큰 분노를 유발시킨다. 마른 초원에 들불이 번지듯 가자지구의 다른 캠프로 시위가 확산된다.
튀니지에 망명해 있는 아라파트 PLO 의장이 '어린 소년의 죽음은 우발적인 사고가 아니라 사전에 기획된 이스라엘의 공격'이라는 성명을 내자 시위는 웨스트뱅크까지 번진다. 동시다발적으로 가자지구와 웨스트뱅크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시위가 일어난다.
이스라엘이 점령한 이후 이런 큰 규모의 시위는 처음이다. 시위대 중 상당수는 이스라엘의 점령 이후 태어났거나 그 시기에 유년 시절을 보내면서 강요된 밑바닥 인생에 지친 젊은이들이다. 돌을 들고 이스라엘의 기관총과 탱크에 맞선다. '1차 인티파다'의 시작이다. 인티파다는 아랍어로 떨림, 각성이라는 의미로 불현듯 일어나는 민중봉기에 쓰이는 말이다.
가자지구와 웨스트뱅크의 시위는 동예루살렘으로 번진다. 돌과 유리병을 던지는 시위는 폭력으로 진압되고 다시 더 과격한 시위와 진압을 주고 받는 장면은 외신을 통하여 전세계에 실황으로 송출된다. 이스라엘 정부는 여전히 일상적인 시위 정도로 간주하고, '이란과 시리아가 배후'라고 주장한다. 전혀 엉뚱한 정치적인 분석이다. 이란도, 시리아도, 심지어 PLO도 갑작스런 대규모 시위에 놀라기는 마찬가지이다.
가난과 억압, 이에 대한 불만과 분노가 이 거대한 민중저항의 진짜 배후이다. 인티파다가 가장 격렬하게 진행된 곳이 가장 가난한 지역과 거의 일치한다는 점이 알려주듯 극심한 실업률과 가난 탓에 미래가 막혀버린 청년들의 절망감이 인티파다의 원동력인 셈이다.
초기 인티피다의 목적은 더 나은 삶에 대한 요구였다. 자치나 독립같은 정치적 구호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성찰을 가벼이한 이스라엘은 점령지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진압병력을 늘인다.
'저항 운동의 발전'
웨스트뱅크(서안지역)와 가자지구는 팔레스타인 거주지역으로는 비슷하지만 분위기가 다르다.
두 지역을 비교하자면,
웨스트뱅크는 민족주의 단체들이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며 서구적인 민족주의 사상이 많이 깔려있다. 반면에 가자지구는 이슬람주의 세력이 강하고 한결 더 종교적이다. 이슬람주의 세력이 인티파다를 주도해나간다. 이스라엘 반대 세력의 중심이 되는 하마스(Hamas)도 가자지구에서 뿌리를 내리고 성장한다.
이러한 지역적 성격 차이는 저항 운동 노선의 차이를 가져온다. 두 지역은 서로 떨어져 있기 때문에 실질적인 연대도 어렵지만 지도부의 성격이 서로 달라 이후 저항 운동의 방향에도 차이가 난다. 웨스트뱅크에서는 저항 운동을 효율적으로 이끌기 위해 여러 민족주의 단체들이 모여 UNLU를 결성한다. 튀니스에 있는 아라파트는 행여나 저항 운동의 중심축이 UNLU 로 넘어갈까 우려하여 파타를 UNLU에 동참시킨다.
1988년 1월 UNLU는 '팔레스타인의 이 불타오르는 봉기는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팔레스타인 국가의 독립을 쟁취할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임을 전세계에 알린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이스라엘군 철수, 계엄령 해제, 유대안 정착촌 건설 중지, 민주적 선거와 자치권 보장을 요구한다. 그러나 UNLU의 운동은 가자지구에는 뚜렷한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가자지구의 이슬람주의 운동 조직들이 UNLU에 동의하지 않는다. 가자지구에는 하마스(Hamas)가 있다. 하마스는 무슬림형제단 팔레스타인 지부에서 갈라져 나와 가자지구에서 급성장한 조직이다. 하마스와 PLO는 조서로 다른 색깔을 띄고있다. PLO가 세속주의를 지향하는 민족주의 독립운동 조직이라면 하마스는 팔레스타인에 이슬람국가를 세우겠다는 목표를 가진다. 독립은 동일하지만 목표점은 서로 다르다.
이렇듯 가자지역에 이슬람주의 세략이 강해진 데에는 이스라엘 정부가 일조한 측면이 있다. 1970년 후반 PLO가 저항의 중심으로 급부상하자 이를 전략적으로 약화시키기 위해 이슬람주의자들을 지원했다. 민족주의자들보다 이슬람주의자들이 덜 위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슬람주의자들을 이스라엘 행정부에 취업을 시킬 정도로 이슬람주의를 경시했다. 1980년대 중반 가자지구에는 이슬람의 영향력이 크게 성장한다. 모스크도 늘어나고 예배에 참여하는 팔레스타인의 수도 증가한다. 웨스트뱅크에도 이슬람 신학교가 세워지고 모스크가 건설된다.
다시 인티파다로 돌아와서,
인티파다가 수그러들 기색이 없이 계속되자 이스라엘 정부는 전에 없이 강력한 진압정책을 펼친다.
가자지구와 웨스트뱅크에 전기와 통신망을 끊고 야간 통행금지를 실시한다. 시위를 주동한 인물은 수배령을 내리고 아예 그의 집을 철거해버리는 강력한 보복정책을 병행한다. 시위대가 매복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가로수를 모두 뽑아버리기도 하는데 심지어 과수원 전체가 사라지기도 한다. 1988년 한 해 동안 올리브 나무와 유실수가 모두 2만 5,000 그루나 뽑혀버렸다. 경제적 압박도 가한다. 세금을 늘이고 점령지역의 농산물을 이스라엘로 반입하지 못하도록 금지시킨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생활은 더욱 바닥으로 떨어진다. 소득을 줄고 실업률은 크게 높아진다. 그나마 취업자 중 25% 이상이 일자리를 잃는다.
그래도 시위는 줄지 않는다. 도로 바닥에 못을 깔아 이스라엘의 진압 차량을 막을 정도이다. 웨스트뱅크와 가자지구의 자치조직은 이스라엘 정부가 방치한 교육, 치안, 보건 등 생활 지원을 제공하고 심지어 사업 상담도 실시한다.
이스라엘은 '뼈 부러뜨리기(Break their bones)' 라는 초강경 진압 정책을 시작한다.
시위대를 해산하는 대신 시위 가담자를 직접 타격하여 부상 입히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돌 던지는 사람의 손목을 부러뜨리고 포승줄에 묶여 저항하지 못하는 이를 무차별 폭행한다. 첫날에만 200 명 이상의 골절 부상자들이 발생한다.
철심이 박힌 고무탄환을 발포하여 시위자들에게 큰 부상을 입힌다. 시위대가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장면들이 해외 언론의 카메라에 포착되면서 이스라엘의 잔인한 진압 방식에 대한 국제여론이 크게 악화된다.
1년 6개월 동안 체포된 팔레스타인 사람이 5만 명에 달한다. 부랴부랴 새로운 수용소를 만들 정도다.
그러나 이런 대규모 체포는 역효과를 불러온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감옥은 정치학교가 된다. 그 곳에게 더욱 급진적인 의식화 교육울 받고 풀려나기 때문이다. 대규모 수감을 통해 시위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항 운동이 더욱 정교화되고 이념화된다. 이런 과정에서 많은 희생자가 나온다.
첫 1년 동안 311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이 사망한다. 같은 기간 이스라엘은 10명의 사망자가 생긴다. 부상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리고 526채의 팔레스타인 가옥이 철거된다. 일상은 정지되고 거의 모든 지역에서 폭력 충돌이 반복된다.
'저항의 결과'
당시 이스라엘에는 이스라엘 국적의 아랍인이 전체 17% 정도 차지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통합정책의 성공이라고 내세우는 자랑거리였다. 히브리어를 사용하고 이스라엘 학교를 다니고 이스라엘 직장에 취업하는 아랍인들을 인티파다 이전까지는 스스로 이스라엘인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생활하였다.
그러나 인티파다가 거듭될 수록 이에 동조하는 이스라엘 국적 아랍인들이 늘어난다. 동조 파업을 벌이고 시위대에게 식량과 의약품을 제공한다. 심지어 시위 부상자들을 위한 헌혈 운동도 활발해지고 PLO 해외계좌로 후원금을 보내기도 한다. 이들은 인티파다를 보면서 자신들은 아랍인이라는 정체성을 다시 깨달은 것이다.
팔레스타인의 무력 시위는 이스라엘인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많은 이스라엘인들이 그동안 정부가 홍보해온 '계몽된 점령'이 허구임을 알게 된다. 또한 점령지는 결코 이스라엘의 영토가 아니고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을 요구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이스라엘 사회는 내부적으로 극심한 논쟁이 벌어진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행하는 과도한 폭력 진압과 반인권적 정책에 대해 이스라엘인들의 비판 목소리가 높아진다. 반대로 폭력 시위를 자행하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 혐오감을 표현하는 이들도 늘어난다.
인디파다가 이스라엘 내부의 갈등을 부추기는 셈이다. 1989년 77명의 이스라엘 군인이 점령지 근무를 거부하여 투옥되기도 한다. 또한 텔아비브에서는 많은 시민들이 정부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인다. 이런 여론의 변화로 1990년대 초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지도부와 평화 논의를 나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시위대와 진압 군경의 무력 충돌은 계속 이어진다. 훗날 공식적으로 1차 인티피다가 종료되는 1993년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평화로운 공존을 모색하겠다는 '오슬로 평화협정' 체결까지 1,100명 이상의 팔레스타인이 사망하고 이스라엘도 160명이 사망한다. 서로간의 큰 희생을 경험한 후 오랜 충돌을 마감하고 평화를 모색하기 시작한다.
'오슬로 평화협상과 불완전한 이행'
평화의 계기는 밖에서 왔다. 1990년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공격하자 미국은 연합군을 결성하여 이라크를 몰아낸다. 걸프전이다. 걸프전의 승리로 미국의 위상은 세계 유일 초강대국 수준으로 높아진다.
정치력이 절정에 이른 조지 부시 대통령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낸다. PLO를 협상 대상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스라엘의 태도로 회담이 여러번 좌초될 위기를 겪지만 중동 평화에 강한 신념을 가진 노르웨이 외교관 뢰드라르센의 중재 노력으로 오슬로에서 이스라엘과 PLO 간의 비밀회담이 진행된다.
1993년 9월 이스라엘의 라빈 총리와 PLO의 아라파트 의장 사이에 역사적인 오슬로 평화협상이 체결된다. 협정의 주요 내용은, PLO는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고, 이스라엘에 대한 폭력 공격을 중지할 것,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에서 이스라엘군을 철수시키고, 팔레스타인 정부 수립을 동의할 것, 이 모든 절차는 5년 안에 마무리할 것을 포함한다.
비록 동예루살렘의 지위와 유대인 정착촌 문제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외형상 훌륭한 협정이다. 그러나 오슬로 협정은 제대로 이행되지 않는다.
이스라엘군은 철수하지만 유대인들의 불법 정착촌은 늘어난다. 유대인 불법 정착촌의 건설을 방임하거나 오히려 부추기도 한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의 점령이 오히려 더 굳어지는 느낌을 받는다.
새로 들어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PA, Palestine Authority)는 부패하고 무능하다. 지도부가 내부 권력 투쟁에 골몰하는 동안 팔레스타인의 경제 여건은 나아지지 않는다. 팔레스타인들의 불만은 쌓이고 하마스 등 강경 세력들은 오슬로 협정을 비난한다.
이스라엘 우익세력들도 오슬로 협정을 무효화시키려고 한다. 1995년 오슬로 협정에 서명했던 이스라엘 총리 라빈이 극우파에게 암살당하면서 2년 남짓의 짧은 평화가 위기를 맞는다. PA의 통제를 거부하는 하마스가 자살폭탄 테러를 저지르자 이스라엘 극우파는 오슬로 협정을 파기하라고 목소리를 높힌다.
오슬로 협정이 체결된지 불과 7년이 흐른 2000년 이스라엘 극우 정당의 지도자 아리엘 샤론이 수천 명의 무장병력을 대동하여 예루살렘의 성전산(예루살렘에 있는 유대교의 종교 성지)을 방문하자 결국 2차 인티파다가 일어난다.
1차 인티파다는 돌을 던지며 시위하였다면 2차 인티파다는 총과 수류탄, 그리고 자살폭탄 공격으로 맞선다.
전투기, 탱크, 로켓포를 동원하여 무력진압을 하는 이스라엘은 급기야 팔레스타인 지역에 분리장벽도 설치한다.
1
성전산을 방문했던 이스라엘 강경파 아리엘 샤론이 다음 해 선거에 승리하여 총리가 되고, PA는 하마스가 자치 선거에서 승리하여 집권 세력이 된다. 양측 모두 강경파들이 집권하면서 평화는 다시 멀어진다.
참고: 중동은 왜 싸우는가 (박정욱)
다음은 쿠르드노동당의 투쟁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