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국 대통령이 우리에게 남긴 일곱 가지 선물
건국 대통령이 우리에게 남긴 일곱 가지 선물
1년 전 건국기념일에 소개했던 이승만의 ≪독립정신≫을 상기하며 오늘을 생각한다. 안보상황은 1년 전보다 더 초라해지고 동네북이 되어, 이젠 상대국들이 마음만 먹고 공격한다면 국가체제를 보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외교적으로도 사면초가에 빠져 해결의 실마리를 잃어버린 지 오래인 것 같다.
어디서 불러낸 배짱인지 헤어 나갈 수 있는 통로는 콘크리트로 막아버리고, 국민들의 코에 코뚜레를 끼워 고삐를 틀어쥐고 반일 종족주의와 반미자주라는 두 개의 체인으로 엮은 자살폭탄을 둘러주며 장렬히 옥쇄하자고 선동 질 하는 이 역적 정부에 대한 경고의 외침을 이젠 포기해야 하나.
건국 대통령 이승만이 남겨준 보석을 팽개치고 저들 자신들도 알지 못하는 것 같고 실체도 분명치 않은 ‘경험해보지 않은 나라’로 질주하는 이 미친 국가에 대한 애정을 거두어야 하나 고민하게 하는 시점이다.
지금의 집권세력은 무슨 이유로 이승만을 폄훼하고 인정하려하지 않을까. 곰곰이 생각해 봐도 정상적인 사고의 틀에서는 답을 찾을 수가 없다. 그들은 이 나라 대한민국을 태어나선 안 될 국가로 인식하여, 끝내 전체주의 국가로 끌고 가 북한과 통일(통합)하려는 의도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건넨다는 것은 반대급부나 기대할 것이 있기에 한다. 그러나 이승만은 국가와 국민에게 공짜로 너무나 큰 선물을 남긴 분이다. 받은 자들은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받아 쥐었다. 그 의미를 알았던 당시의 국민은 0,001%에도 미치지 못했고 지금도 그 정확한 의미를 아는 사람은 10%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시간을 달리는 남자≫ 이 책을 채운 보석보다 귀한 선물 일곱 꾸러미를 들여다보기라도 해 보자.
1. ≪독립정신≫ - 한반도 역사에 한 번도 없던 자유주의 정신
이승만이 ≪독립정신≫에 담은 자유주의 정신은 조선의 백성들을 기독교 정신으로 개화시키고 서양의 정치제도와 법률을 받아들여 내정개혁을 단행하면서 중립외교를 펼쳐 조선의 독립을 보장받자는 것이다.
이승만은 배제학당을 통해 영어와 자유주의를 선교사들로부터 배우며 인간의 자유와 평등, 국민에게 정부선택권이 있음을 배운다. 졸업 후 독립협회를 기반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하며 러시아의 야욕과 조선의 무능을 질타하며 고종을 압박, 중추원 부의장에 윤치호, 우남도 중추원 의관에 임명되어 갑신정변의 주역 박영효의 등용을 요구한다. 이에 고종은 중추원을 해산하고 우남에게 종신형이 내린다.
감옥에서 우남은 ≪세계사 개요≫, ≪19세기의 역사≫ 등 역사서와 자유사상의 책들을 보면서 기독교 성경을 전파하여 선교사들을 놀라게 한다. 이는 후일 우남이 미국 유학을 떠나는 데 영향을 미친다.
1904년 2월 8일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우남은 감옥에서 52편의 논설로 된 깨어나라 백성아, 선진국은 왜 잘살게 되었는가, 신지식을 알려 주마, 요즘의 세계정세 읽는 법 등, 자유주의 정신에 바탕을 둔 ≪독립정신≫을 쓰기 시작한다.
우남은 자신의 운명에 대해 전쟁의 결과를 따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답답함과 그런 상황에서 자신은 감옥에 갇혀있다는 자괴감으로 실제 죄수 신분이기도 하지만 역사적 죄수가 된 심정으로 ‘한성감옥에서 죄수 리승만 씀’이라고 집필을 마친다.
2. 대한민국의 탄생 – 자유주의 역사의 시작
봉건왕조 체제의 조선사회는 비참함 그 자체였다. 150년 전 강화도 조약을 기점으로 개방체제를 지향하며 근대체제로 눈을 뜨지만 곧 식민체제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며 일본 군국주의 체제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길게는 150년 짧게는 80년 만에 대한민국을 완벽히 변화하였고 성공적인 근대혁명을 이루어내며 한국의 자유와 민주주의 수준은 세계 20위의 평가를 받으며 종교적 자유는 물론, 더 이상 양반 상놈 신분계급이 없는 평등 사회가 되었다.
정치적 자유 역시 80년 전부터 정착된 자유선거로 정당 선택의 자유 역시 권력에 책임을 물을 만큼 세계최고를 누리고 있다. 이러한 성공은 시작이 남달랐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1948. 5. 10 제헌국회 구성을 위한 최초의 자유선거로 선출된 제헌의원에 의해 제정된 헌법에 의해 대통령과 정부가 구성되어 1948. 8. 15 대한민국이 건국되고 1948. 12. 12 UN승인 한반도 합법정부로 인정받아 자유민주주의체재가 단기간에 뿌리내린 국가의 성공적 모델이 되었다.
건국이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써 이승만은 국호를 대한민국, 체제를 민주공화제로 완결시키는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승만은 연속된 세 개의 혁명을 주도한 세기적 인물이었다. 첫째는 반봉건혁명이었고, 둘째는 반식민혁명, 셋째는 반공산, 반전체주의 혁명이었다.
일본 식민체제의 종식은 징검다리 하나 건너면 공산주의로 가는 출구였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자유민주주의체제의 미국과 서유럽은 너무 멀리 있었다.
러시아가 일본 패망 6일 전에 참전을 결정한 것은 일본에 의해 좌절되었던 동아시아 이권을 되찾는다는 의미였기에 일본의 패망은 한반도에서 일본 군국주의 대신 소련 공산주의로의 탈바꿈 외엔 어떤 의미도 없던 상황이었다.
공산주의 체제가 한반도로 확산되는 것을 막아야 했던 이승만은 이미 1941년 여름 ≪Japan inside out≫에서 전체주의와 대결에서 민주주의가 승리할 때 자유도, 민주도, 평화도, 독립도 가능함을 간파하고 미국과 대한민국이 가야할 길을 밝혔던 것이다.
근대적 자유민주 체제가 일찍부터 뿌리내린 미국과 서유럽 10여개 국가를 제외하면 한국의 자유민주 체제 정착과 성숙은 놀라운 일이고 봉건제, 식민제, 공산체제의 유산과 환경을 극복하고 이뤄낸 위대한 성공이다.
3. 한미상호방위조약 – 오늘의 한국을 만들어 낸 여의봉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성립됨으로써 우리는 앞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많은 혜택을 보고 번영을 누릴 것이며 외부 침략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함으로써 우리의 안보를 확보해 줄 것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앞두고 발표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성명서 내용 중 일부이다. 70년 전 한 지도자의 혜안과 노력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번영과 자유를 이룩하게 한 초석이 된 것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휴전에 결사반대 했던 이승만이 휴전 수락 조건으로 제기하여 받아낸 것이다. 1953년 4월 휴전반대 항의문을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내면서 “만일 중공군을 북한에 둔 채 휴전한다면 한국은 통일을 위해 단독으로 북진할 것이라 했다.
미국의 이익을 위하고 자국 내 여론의 압력에 시달리던 미국은 휴전을 강행해야 했겠지만 그럴 경우 단독으로라도 북진통일 하겠다는 이승만이 걸림돌이었기에 미국은 레짐 체인지를 계획하게 된다.
국제정치학을 전공하고 외교에 능수능란했으며 공산주의를 잘 파악하고 있던 이승만은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폭탄조치를 1953년 6월 18일 단행하며 세계를 경악에 빠뜨리고 어떤 일이라도 저지를 수 있는 인물이라는 인상을 상대편에 심어줌으로써 휴전협정 성공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성사시킨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우리에게 그 가치를 헤아릴 수 없는 엄청난 것이었으며 그 효과는 한반도 평화유지, 경제개발 우선정책, 국군의 70만 대군 보유, 민주화에 기여, 미국의 지원을 받은 한국의 외교망 확대, 미국의 동맹으로써 서구문명에 완전히 개방되며 해양국가로 편입된다.
4. 공산주의는 수용할 수 없다.
소련은 한반도 38선 이북을 차지, 김일성을 내세워 주도면밀한 공산화 작업을 진행하고, 남쪽의 미 군정은 공산주의와 대립보다 타협, 즉 좌우합작을 선호했다. 이에 이승만은 미국과 충돌하면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에 기초한 대한민국 건국을 이끌었다.
공산주의에 대한 이승만의 최종평가는 “공산주의가 건국에 도움이 되면 수용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수용할 수 없다,”라고 스스로 요약하고 있다. 이승만에게 가장 큰 가치는 대한민국의 건국이었다.
이에 반해 공산주의자들의 최고의 가치는 조국을 공산화시켜 소비에트체제에 편입시키는 일이었다. 공산주의 세력은 소비에트로부터 받은 풍부한 자금으로 임시정부 장악을 시도했다.
우남과 백범의 자유주의·민족주의 연합이 김원봉과 한길수의 러시아 중심 세계주의·공산주의 연합에 맞서 임시정부를 지킨 덕에 해방 후 혼란 속에서도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를 구성 원리로 대한민국이 탄생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승만은 ≪Japan inside out≫ 에서 세계는 전체주의와 민주주의 세력 간의 대립이 올 것이고, 여기서 민주주의가 이겨야만 평화와 약소국 독립이 올 것이며 미국의 민주주의 존속도 가능할 것이라 보았다. 이승만은 전체주의 대표적 체제를 일본군국주의와 공산주의 그리고 파시스트라고 보았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하는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확고하게 반대했으며 독립운동을 할 때부터 2차 대전 이후의 국제관계가 공산주의와의 차가운 전쟁을 피할 수 없음을 깨닫고 있던 선각자였다.
5. 농지개혁 - 국민을 만들어 내다.
브라질 전 대통령 룰라, 좌파 출신이면서 실용적 리더십을 가진 그를 2004년 8월 중앙일보가 인터뷰 하면서
”브라질처럼 풍부한 자원을 가진 나라에 어째서 5,000만 명이 넘는 절대빈곤층이 존재합니까?“ 라고 묻자 룰라 대통령의 대답은 이랬다.
“한국은 과거 50년대 농지개혁을 했지만 브라질은 그러지 못했고, 아직도 그것이 풀어야할 숙제입니다,”
15년 전 룰라의 인터뷰 기사는 “자원도 빈약하고 가난했던 대한민국이 오늘날 세계 11위의 경제대국, 세계 6위의 수출대국이 되는 근본 요인은 바로 근본적인 ‘사회개혁’인 ‘농지개혁’ 성공에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미 군정청은 1946년 2월 ‘토지개혁법안기초위원회’를 설치하여 정치적 민주주의, 경제적 시장경제 질서 구축을 위해 토지개혁에 착수한다.
한편 북한은 1946년 3월 5일 ‘토지개혁령’을 발표하여 농경지 45%, 96만 4천 정보를 무상몰수 68만 2천호에 무상 분배하며 “토지는 밭갈이하는 농민에게”라는 달콤한 구호 아래 농민에게 주어진 것은 토지소유권이 아닌 경작권에 불과했고, 생산량의 25%라는 고율의 현물세를 납부해야 했다.
한국전쟁이 끝나자마자 경작권마저 빼앗는 협동농장으로 전환 1958년 8월 모든 농민이 협동농장에 편제되어 토지에 결박당한 농노(農奴)로 전락했다.
미 군정청은 1948년 3월 22일 법령 173호를 반포하여 신한공사가 가지고 있던 적산농지를 유상 배분한다. 이 조치로 50만 소작인이 자유지주가 되었으며 정부수립 후 한국 정부에 의한 농지개혁을 앞당기고, 선행 모델을 제공하는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이승만은 1948년 12월 4일 ‘토지개혁문제’라는 라디오 연설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할 적에 양반, 상놈을 구별하거나 부자와 빈민을 인(印)쳐서 낸 것이 아닙니다. 민주정체의 주의는 반상(班常)이나 귀천(貴賤)이 없이 모든 인민이 평등, 자유로 천연한 복리를 다 같이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를 위해 토지개혁법이 유일한 근본적 해결책이라는 겁니다.”라고 했다.
이승만은 이보다 앞섯 1946년 2월 ‘과도정부 당면정책’에서 농지개혁법의 구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첫째, 국유지와 적산 토지를 땅 없는 농민에게 적당한 가격에 적정한 방법으로 분배하여 완납 후 개인소유화 하며, 대지주 소유 토지는 소유권을 국법으로 인정하고 보호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피할 수 없는 사실이라 했고,
둘째, 토지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환시켜 경제발전을 도모하겠다는 의도를 나타낸다.
셋째, 농지개혁을 단행해 농민들을 이용하는 공산혁명을 예방하고, 호남 지주들이 중심이 된 한민당의 영향력으로부터 농민들을 차단 자신의 정치적 기반으로 삼을 정치적 목적이었다.
1950년 3월 10일 공포된 최종 농지개혁법은 평년작의 150%를 5년에 분할 땅값으로 상환하는 것이었다.
농지개혁의 성과
이승만의 농지개혁으로 58만 5천 정보의 농지가 분배되었다. 농지개혁 논의가 본격화되자 지주들은 시가보다 20~30% 싼값에 나중엔 농지개혁법 제시액보다 싸게 팔아치워 71만 3천 정보에 달하며 전체 농지의 92.4%가 농민에게 돌아갔다.농지개혁 이전 이 땅의 대다수 농민들은 아무개 댁 소작농일 뿐이었으며 일본인에 대해, 미군에 대비할 때나 ‘조선사람’이었다. 선거한다기에 지주 댁 아들, 동경유학 갔다 왔다는 아무개 댁 아들을 찍어주었다. 그것도 글자를 몰라 작대기 하나를 찍었고 작대기 셋이 좋다기에 작대기 셋을 찍었다. 그들이 대통령을 뽑았고 그걸 임금님이라는 의미로 알았으며 아직 그들은 ‘국민’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면서기들이 와서 땅을 나눠주었다. 처음으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내게 무엇인가를 해 준 것이다. 처음으로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난생 처음 자기 땅을 갖게 된 이들은 “이승만 박사 덕분에 쌀밥을 먹게 되었다.”며 이승만 집권기 내내 정권의 지지기반이 되었다.
공교롭게도 농지분배점수제 규정이 공포된 이틀 뒤 북한이 6·25 남침을 감행했고, 남한 전역을 점령한 북한은 토지개혁을 단행 수확량의 25%라는 현물세를 부과하는 패착을 두며 “이 박사 덕분에 쌀밥을 먹게 된” 이 땅의 농민들은 공산군의 사탕발림에 넘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농민들은 전쟁수행을 위한 ‘임시 토지수득세’라는 걸 부담하며 전쟁수행에 막대한 기여를 했다.
농지개혁의 효과는 반상과 귀천이 사라지는 효과를 보았다. 6·25 전쟁은 이를 더욱 가속화 하는 역할을 했다. 보상받은 지주들의 돈은 전시 인플레로 푼돈이 되었고, 피난지에서 생활비 조달을 위해 지가증권의 액면가는 하락해야 했다.
지주들을 귀속기업체에 우선 채용하는 규정이 있었지만 소작료로 무위도식하던 그들에겐 근대적 기업을 관리할 능력이 없었다. 그렇게 하여 지주들은 산업자본가로 변신할 기회를 놓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전시 지주들이 팔아치운 지가증권을 매입한 신흥 상공인들이 그걸로 귀속업체들을 인수했고, 일반보상총액 54%가 귀속업체 인수에 쓰였으며 후일 산업화의 주역이 되었다.
지주들이 몰락한 농촌사회의 주인공은 자작농이었다. 이제 자기 땅을 가진 이들이 열심히 일하며 농업생산성이 높아졌으며, 여유자금은 새로운 생활제품 구입으로 내수시장 확장에 기여했으며, 자식들에 투자하여 인재를 키워 가난했던 이 나라를 오늘 세계의 11위 부국으로 끌어올렸다. 그들이 우리 아버지 어머니이고 우리 자신들이기도 하다.
흔히들 대한민국은 전후 독립한 나라들 중 산업화와 민주화 모두를 달성한 기적의 나라라고 말한다. 그 기적의 바탕에 이승만이 성공적으로 추진한 ‘농지개혁’이 있었고 그것이 대한민국을 만든 것이다.
6. 교육혁명 – 중세인 에서 현대시민으로
이승만 정부 시절 정책실패와 무능, 희생 그리고 전쟁 통의 혼란과 생활고가 있었지만 원로학자 유영익 교수는 1950년대를 “창조적 변혁의 전환기이자 획기적인 시기”이며 한국인이 자유, 평등, 민주주의 등 보편적인 이상을 향해 전진을 계속했던 시기였다고 했다.
연평균 4.9%의 경제성장율, 자유민주주의실험의 정착, 농지개혁으로 지배계급이 몰락하여 중세적 신분제 소멸, 그리고 좌파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극단의 시대≫에서 언급했던 ‘한국의 교육기적’이 있었다.
이승만이 드라이브를 걸었던 교육혁명은 ‘잠자던 중세인’을 깨워내 ‘똑똑한 현대시민’으로 바꿔놓는다. 교육기적은 1950년대를 지나며 양적, 질적 팽창을 했다. 1946년 53.4% 초등 취학률이 1958년 95.2%로 완전취학에 이른 것은 전쟁으로 인한 혼란과정을 거치면서도 빅뱅을 이룬 것은 수수께끼이다.
건국이후 네이션 빌딩 과정에서 교육의 역할은 국가공동체의 비전을 담아 새로 건국된 국가 공민에 걸 맞는 정신혁명을 주도했고 민주주의, 반공주의와 결합해 자유민주주의적 기본 질서를 담은 헌법정신을 떠받드는 힘이었다.
이승만의 교육관이 투영된 실용주의-민주주의-반공주의-민족주의-세계주의 등이 1950년대 교육의 핵심가치 다섯 개다.
교육기적은 최고지도자의 의지이자 1950년대 시대적 합의였으며 교육을 헌법의 관련조항에 담아 제정된 법률적 장치와 국민적 합의라는 3박자의 일치가 만들어낸 결과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이승만과 한국인 전체의 의지가 공동 연출해낸 1950년대 교육 빅뱅의 연장선 속에 살고 있다. 그에게 감사해야하는 이유는 너무도 많다.
7. 대륙문명에서 해양문명으로 대전환
대한민국은 반도 국가이다. 한민족은 늘 바다를 끼고 살면서도 한 눈은 대륙을 바라보아야 하는 중간지대적 속성을 숙명처럼 안고 살아왔다.
신라의 청해진을 해상 거점으로 했던 장보고는 물론, 고려의 왕건은 해상무역을 발전시켜 예성강 하구 벽란도가 국제 무역항으로 각광을 받으며 개성상인의 뿌리를 만들었다.
이렇듯 해양과 친숙했던 전통은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출발한 조선조의 출범으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특히 성리학이 교조화 되는 조선 중기 이후 해양과 철저하게 담을 쌓고 대륙문명에 편입하게 된다.
사대교린(事大交隣) 정책에 의해 국제무역을 통제했고, 해금(海禁) 정책으로 바다를 향한 도전과 패기의 기상은 파도 속에 잠겼고, 개방과 교류라는 해양문명의 핵심 DNA 마저 지워지게 된다.
쇄국으로 매진한 조선의 양반 지배층은 돈을 천한 것으로 여겨 상공업은 천민계급의 더러운 직업으로 전락하게 된다. 기술이 뛰어난 장인(匠人)들의 사회적 예우는커녕 수탈과 착취의 대상이 되었기에 훌륭한 기술이 후대에 전수되지 못하고 대가 끊기곤 했다.
조선 중기 인조와 효종 대에 네덜란드인들이 등장하고 특히 하멜은 조선에 13년 간 억류되었다 나가사키로 탈출하여 본국으로 돌아가 ≪하멜표류기≫를 출간했다.
이들의 등장은 도자기 교역과 깊은 관련이 있어 유럽과 나가사키를 오가며 일본도자기를 유럽에 비싼 가격에 판매했다. 지금도 유럽 왕실엔 당시 일본에서 수입된 ‘아리타(有田)야끼’와 ‘사쓰마 야끼’가 다수 소장되어 있다.
유럽 귀족을 열광시켰던 일본 도자기는 조선 도공과 그 후예들 작품이었다. 조선에서 박해받던 이들은 일본에서 장인으로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인생역전을 이루게 된다.
중국은 1842년 아편전쟁 이전까지, 조선은 1876년 일본과 강화도 조약 체결 전까지 폐쇄와 은둔, 고립의 상징이었다. 당시 조선은 중국을 섬기며 척왜양이(斥倭洋夷), 척화(斥和), 왕조사회의 봉건적 반상(班常)신분 제도라는 반 문명 상태를 정상사회로 착각하여 살아가고 있었다.
한국은 지난 70년 간 세계사 유래에 없는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문맹률 70%에서 0%, 평균수명은 45세에서 82세로 연장되었다. 자원 없이, 침략 없이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채택한 이유이며 그 뿌리는 이승만이다.
그것은 조선의 정신세계를 지배해 왔던 대륙으로부터 미국으로 상징되는 해양문명으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대한민국의 지속적인 발전과 안보의 확보를 위해 우리가 취해야 할 길은, 민족적 감정을 자제하고 미국과의 동맹 강화,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가 시급하다. 그것은 곧 한미일 해양 삼각동맹의 강화를 뜻한다.
공동저자 조우석은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한국사회에서의 좌우 진영 구분의 잣대는 ‘뒤틀린 좌파’가 갖고 있는 퇴행적이고 자폐적인 에토스 때문에 국제사회의 논리와 따로 논다고 했다. 일테면 저들은 보편적 좌파의 국제주의와 개방성, 인권과는 전혀 무관하게 움직인다. 철지난 민족주의보다 더한 종족주의 정서에 갇혀 ‘민족 나르시즘’ 즉 외부 세계에 대한 열등감과 콤플렉스를 숨긴 채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한국)’ ‘세상에 부러움 없어라(북한)’라는 식의 헛된 위로와 자기만족을 반복하는 괴이쩍은 정신구조다.“라고 썼다.
그동안 한국 내(우물 안)에서 하던 망나니짓을, 이길 수 없는 이번 한일 경제전쟁(우물 밖)에서 대놓고 망나니짓 행패를 부리는 것을 국제사회는 분명히 지켜보고 기억할 것이다. 우리의 후손들이 흔적을 씻어내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국력을 소진해야할지 아찔하고 부끄러워 아이들에게 미안하기 그지없다.
● 책 소개 : 시간을 달리는 남자 刊 백년동안 (304쪽)
※ 지은이 : 공동저자
권혁철 - 자유경제원 자유기업센터 소장
김광동 – 나라정책연구원장
김용삼 – 박정희재단 기획실장
남정욱 – 숭실대 문예창작과 겸임교수
류석춘 –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배진영 – 월간조선 기자
복거일 – 소설가
윤서인 – 만화가
조우석 - 문화평론가
* 2019년 7월 28일, 한국전쟁 정전 66주년 기념일에 제가 카톡방에 게재했던 내용입니다. <최 선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