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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근본
말씀/잠언 1:1-33
요절/잠언 1:7, 찬송가 200장
많은 사람이 성경은 잘 몰라도, 또 성경을 다 잃지 않아도, 잠언은 많이들 압니다. 또 잠언은 한번 씩은 읽어보기도 합니다. 또 사람들의 대화 속에서, 잠언의 말씀을 꺼내어 인용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개미에게 가서 배우라.” “보증을 서지 마라.”라는 말씀에 잠언에 있다며 인용합니다. 이처럼 잠언은 많은 경우 삶에 도움이 될 만한 금언, 또는 격언집으로 여겨왔습니다. 그만큼 쉽게 생각했습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그러나 잠언은 ‘격언’이 아니라 ‘비유’라고 번역해야 맞습니다. ‘잠언’은 일상적인 일을 비유로 삼아서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가야 할 교훈을 주고자 쓰여 졌습니다. 성경의 핵심진리는 우리는 세상에서 아무리 잘 산다고 할지라도 죄와 멸망으로부터 구원을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잠언도 우리가 어떻게 하면 지혜롭게 세상을 잘 살 것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말하고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잠언은 복음입니다. 더구나 이 잠언을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전하는 왕의 복음입니다. 왕의 복음으로서 잠언, 이 전체가 비유라고 본다면, 잠언에 대한 해석은 전혀 달라집니다. 겉으로 볼 때 잠언은 삶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열심히 살아라. 저울을 속이지 마라. 정직하게 살아라. 그런데 그 정직이란 표현, 저울을 속이지 말라는 그 표현 속에 담긴 그 내면의 이야기는 신자의 삶에 대한 도전이고, 구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만만치가 않습니다. 오늘은 서론에 해당됩니다. 잠언을 소개하면서 말씀에 대한 우리의 기본적인 자세를 말하고 있습니다. 잠언은 나눈다면 1-8장까지, 그리고 9장부터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8장에 지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지혜를 예수 그리스도로 봅니다. 그런데 9장4절에 가면, 이 식물을 먹으라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1장부터 8장까지는 복음에 대한 초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9장부터는 복음을 영접하는 자의 은혜의 세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뒤에 가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 왕국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렇게 본다면 잠언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것인가? 여정을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장, 왜 잠언인가(1-6)
1절을 보십시오.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솔로몬의 잠언이라고 해도 될 것 같은데,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이라는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솔로몬 왕이 자기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형식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 백성이 된 성도들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잠언은 근본적으로 주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주시는 지혜의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복음을 알지 못하는 자들,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어떻게 인생을 살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격언집이 아닙니다. 왕 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자기 백성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잠언을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2절을 보십시오.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여기서 ‘지혜와 훈계’는 영어의 ‘bread and butter’ 하면 ‘버터 바른 빵’처럼 ‘바른 길을 제시하는 성격을 가진 지혜’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백성이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지혜를 알게 하고자 잠언을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라고 했습니다. 지혜나 명철은 이해력, 분별력을 말합니다. 그런데 지혜가 무엇이 옳은가를 말한다면 명철은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를 깨닫게 해 주는 것입니다. 즉 지혜가 positive한 분별력이라면, 명철은 negative가 분별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지혜와 명철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옳은가를 아는 것도 필요하지만, 뭐가 잘못되었는가를 아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런 ‘지혜와 명철’은 지식을 많이 쌓는다고 또 삶의 다양한 경험을 한다고 심지어 오래 살았다고 해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이가 들어도 어리석은 사람은 여전히 어리석습니다. 지혜와 명철은 사람이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학위와 같은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주셔야만 되는 영적인 능력입니다.
그 예가 창세기에 요셉이 나오고, 다니엘서에 다니엘이 나옵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느부갓네살이 잔치를 베풀 때에, 손가락이 나타나 글씨를 씁니다. 다 놀라지 않았겠습니까? 그때 신하들이 다니엘을 지목하면서 그가 신들의 영이 있으므로 명철과 총명과 지혜가 있는 자라고 합니다. 이것은 지혜와 명철이 다니엘의 지식이 아니라, 노력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을 통해 그에게 주어진 것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알려주지 않으면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 지혜와 명철입니다. 그런 점에서 지혜와 명철은 흔히 말하는 세상의 처세술이나 처신술이 아닙니다. 어떤 삶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잠언이 말하는 지혜와 명철은 하나님만 갖고 계신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 주셔야 만이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잠언을 통해 우리에게 이를 알려주십니다.
잠언을 주신 또 다른 목적이 무엇입니까? 3절을 보십시오. “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해서 훈계를 받게 하며.” 2절이 지식과 관련이 있다면 3절은 행위와 관련이 있습니다. 지혜롭게, 공의롭게를 예전번역은 이를 ‘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의와 공평과 정직’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님의 속성이요,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의’만 해도 율법을 다 지키는 완전한 거룩한 삶입니다. 산소 같은 남자로도 안 됩니다. 순도 100% 순수 무공해와 같은 의로운 사람이 바로 ‘의’입니다. 그래서 그 의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 저의 의가 이 정도인데, 이 정도 의라면 구원받을 수 있죠? 그래, 그 정도 의라면 구원받았다.”라고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이 의로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는 누구도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도 그런 의를 가질 수 없고, 그런 의로운 삶을 지켜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잠언의 지혜는 의가 없는 자에게 의를 갖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 의가 뒤에 가면 하나님의 지혜로 표현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또 한번 의를 얻은 후, 계속하여 의를 추구하며 살 수 있게 도와준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비유로 주신 말씀이 잠언입니다. 즉 잠언은 의가 없는 우리를 구원할 뿐 아니라, 구원받은 이후의 삶을 인도하고 돕기 위해 마련된 말씀입니다. 그래서 값없이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이 이 땅에서 의와 공평과 정직을 행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게 합니다. 그런 점에서 잠언은 우리에게 또 다른 복음입니다.
그래서 잠언기자는 말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이니.” ‘어리석은 자’와 ‘젊은 자’는 동의어입니다. 젊은이들이 이 말을 싫어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젊은 자’는 열정과 에너지는 넘치는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삶의 지혜가 부족한 사람을 말합니다. 자동차로 비유하면 엔진 힘은 좋은데, 아직 핸들과 브레이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핸들과 브레이크와 같은 슬기를 주고 지식과 근심함을 주는 것이 잠언입니다. 그래서 제대로 달려가도록, 제대로 인생을 활용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런데 잠언은 젊은 자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5절을 보십시오.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지략을 얻을 것이라.” 잠언은 지혜와 명철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는 자들에게도 학식을 더하고 지략을 더하게 합니다. 한마디로 있는 자는 더 풍성하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학식’은 세상지식이나 능력이 아니라 사람을 이롭게 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도리와 지식을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선하고 거룩하게 살아가도록 돕는 지식이 학식입니다. 잠언은 이런 학식을 더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미 그런 자식을 갖고 있어서, 우리로 하면 목자로 살고 있다 할지라도, 잠언을 통해서 더 풍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잠언은 하나님이 품으셨던 지혜를 일상에 비유하여 주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지혜와 명철을 갖게 하고, 우리를 더 풍성한 삶으로 인도해 줍니다. 이 잠언을 잘 새기고 깨닫기를 기도합니다.
2장, 지식의 근본(7-9)
지혜를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근본’은 시작이라는 의미도 있고, 최고라는 뜻도 있습니다. 여기서는 시작이나 처음이라는 뜻이 강합니다. 즉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에서 지식, 곧 지혜와 명철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경외한다는 것은 공포에 싸인 두려움이 아니라 거룩한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거룩한 두려움은 사랑과 순종이 함께 합니다. 존경심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사랑이 먼저입니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것을 알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외는 그 사랑 안에서 기쁨으로 자원하여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옳고. 하나님의 말씀이 다 나를 위하여 주신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할 때, 즉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 때, 지식을 얻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자세가 바뀔 때, 인생에 대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시작됩니다. 지혜와 명철을 얻습니다. 메-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라. 지식의 첫걸음은 하나님께 엎드리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굉장히 영감 넘치는 번역입니다.
그런데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미련한 자’는 머리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자’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진리를 알지 못합니다. 모르면 알고자 해야 하는데, 앞에 말씀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고, 하나님께 엎드려야 하는데, 미련한 자는 그렇게 안 합니다. 오히려 자기가 아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자기가 아는 것만 아는 것인데, 그 아는 것에서 자기를 내세우고 자기를 주장합니다. 하나님께 엎드리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하게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미련합니다. 미련하기 때문에 갈 길을 모르는데, 거기다가 지혜와 지식을 업신여깁니다. 미련한 자는 답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권면합니까?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아비 어미는 말씀을 전하여 주는 부모요, 성경선생입니다. 목자를 말합니다. 이들이 가르치는 말씀을 귀담아 들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들으며...떠나지 말라’고 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명색이 하나님의 자녀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자기 생각, 자기 나름대로 살고자 하는 경향이 이들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마음은 우리에게도 있죠? 말씀 듣고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것을 좋아하기보다도, 내 편한 대로, 내 멋대로 살고 싶은 본성이 있기에, 내 맘대로 살고자 하는 속성, 죄성 있기에,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붙잡아 두고자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9절을 보십시오.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 사슬이니라.” ‘아름다운 관’은 꽃으로 만든 화관으로 이를 쓰는 것은 존귀하게 여김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결혼식에 신부가 이 화관을 씁니다. 가장 존귀한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잠4:9). 또 ‘네 목의 금사슬’이라고 했습니다. 영광스럽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따라 사는 그 사람, 그 사람을 하나님이 가장 귀하게 여기시고 영광스럽게 해주십니다. 화관을 씌워주시고 그를 높여 주십니다. 시험과 유혹이 많은 세상을 이기고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에 참여하도록 해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훈계를 따라 사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화관을 쓰는 영광을 얻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3장, 따르지 말라(10-19)
하나님의 말씀인 지혜를 따르는 것은 이처럼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무엇일까요? 10절을 보십시오.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따르지 말라.” 여기서 ‘악한 자’는 어떤 범죄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법에서 떠나도록 유혹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우리와 함께 가자고 합니다. 그리고 가만히 엎드렸다가 사람의 피를 흘리고 죄 없는 자를 숨어 기다리다가 그를 덮쳐서 산채로 죽이자 합니다. 소위 인신매매, 살인매장을 하자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그렇게 사람을 죽이고 귀중품을 빼앗아 가져가자고 합니다. 그리고 빼앗은 물건을 모두 똑같이 나누자고 말합니다. 이것은 갱단영화에서 많이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누가 나에게 연말이 다가오는데, 뻑치기로 사람을 죽여서 야산에 묻고, 그의 돈을 나누어 갖자? 라고 하면 유혹이 될까요? 유혹이 당연히 안되죠? 뭔 미친 놈인가? 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너무 황당무계한 소리를 하기에 전혀 유혹이 안됩니다. 유혹이 되려면 현실에서 이러 날 수 있는 그럴듯한 말을 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비유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떠나자는 악한 자들의 유혹은 이처럼 흉악한 범죄에 가담하라고 유혹하는 것과 결과적으로 같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별 것 아닙니다. 지금은 살짝 바꿉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말씀을 살짝 안 듣습니다. 살짝 내 마음대로 삽니다. 그 살짝이 점점 더 벌어져, 나중에는 내 인생이 흉악범죄에 가담한 자와 같이 사람을 잡아 생매장 시키는 것과 같은 그런 악독한 조폭과 같은 짓을 하도록 만들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 유혹의 핵심은 바로 ‘온갖 보화’를 얻자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돈을 벌어, 잘 살아보자는 것입니다. 결국 현실의 헛된 욕망이 그래서 잘살아 보고자 하는 욕망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고 듣게 하는 것을 방해하는 첫 번째 요소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공부하지 말고 신한 은행 털자? 그럼 누가 그렇게 하겠습니까? 아무도 안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작은 욕망들이 쌓여서, 말씀에서 떨어지게 됩니다. 이것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주님의 권면은 무엇입니까? “내 아들아 그들과 함께 길에 다니지 말라 네 발을 금하여 그 길을 밟지 말라.” 아예 처음부터 그들과 놀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자들과 함께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세상의 유혹은 너무나도 달콤합니다. 뭐가 있어야만 사람대접을 받을 것 같은 것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한때, 한국에서는 명품백을 사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섰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명품백이 뭐길래? 왜 저럴까 저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20대 회사원이 말합니다. 너무 회사일이 힘들어 죽겠는데, 1년 동안 모은 돈을 가지고 400만원 주고 명품백을 사면, 자기에게 큰 위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너무 기분이 좋다는 것입니다. 이거라도 있어야 자기가 회사에서 버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이 그렇습니다. 뭔가 내 마음을 위로해줄 것이 있어야만 좀 이 어려움을 견디고 살아갈 것만 같은 모습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한 건 하자. 이번만 딱 한번 하자. 이번만 넘어가면 천장을 뚫을 수 있다. 하면서 넘어가는 것입니다. 즉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함께 하는 자리, 이들이 가는 삶의 방식을 따르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대저 그 발은 악으로 달려가며 피를 흘리는데 빠름이니라.”(16)고 했습니다. 이들은 겉으로는 성공과 부를 보장해주고 자기 심장이라도 뽑아줄 것 같이 말합니다. 갱단영화를 보면 어떻습니까? 이번에 마지막이다. 하고서 은행을 텁니다. 그리고 똑같이 나누자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똑같이 나눕니까? 은행을 턴 후, 가면서 한명씩 죽입니다. 갱단 영화의 일반적인 스토리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다 그렇다는 것입니다. 결국 다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이익을 많이 준다고 할지라도 죄를 짓고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해서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길이라면 그 길을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길을 가는 자들이 어떤 지를 말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새가 보는 데서 그물을 치면 헛일이겠거늘.”이라고 했습니다. 메시지 성경은 사람들이 보는데서 은행을 턴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보는데서 은행을 털면, 금방 잡힐 것입니다. 그러니까 악한 자는 그 악한 결과를 뻔히 보여 주는 것처럼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악한 자는 완전 범죄를 꿈꿉니다. 아무도 모를 거야, 이것은 오직 나만 알고 있어! 하지만 요즘은 CCTV가 다 보고 있습니다. 굳이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허망한 것입니다. 또 “그들이 가만히 엎드림은 자기의 피를 흘릴 뿐이요, 숨어 기다림은 자기의 생명을 해할 뿐이니.”라고 했습니다. 결국 “이익을 탐하는 모든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인생의 길을 결정할 때,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내게 얼마나 유익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A냐 B냐?를 결정할 때, A는 얼마이고, B는 얼마이고, 결국 나는 떨어지는 것은 얼마인가? 이것으로 항상 인생을 결정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길은, 자기 유익을 따라가는 길은 결국 자기 생명을 잃는 길, 곧 영생을 잃는 길이 됩니다. 그러므로 얼마나 이익이 되느냐가 인생의 선택의 기준이 아니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인가? 하나님을 떠나는 것인가? 이것이 말씀을 따라가는 것인가? 아니면 말씀에서 멀어지는 것인가?를 기준으로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게 아무리 이익이 되는 길이라고 할지라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은 조폭들의 인생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니 거절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현실적인 욕심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을 조심해야만 우리는 나를 구원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며, 구원에 이르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잠언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4장,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20-33)
우리가 응답해야 할 초청이 무엇입니까? 20절을 보십시오.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입니다. 시끄러운 길목에서도 성중에서도 소리를 질러 말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누구나 지혜를 듣고 나오도록 초청하십니다. 지혜는 너무나 소중하고 귀한 것입니다. 귀하고 소중하면 명품마케팅을 해야 하는데, 하나님은 마치 남대문시장에서 떨이...떨이...외치며 팔듯이 지혜를 팔고 계십니다. “지혜 사세요. 지혜 사세요.”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시작이라고 했습니다. 지혜는 어떤 명품보다 소중하고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귀한 지혜를 하나님이 남대문 시장에서 떨이 팔 듯이, 온 동네 다니시며 팔려고 하십니다. 왜 이렇게 하실까요?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고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합니다.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합니다. 한마디로 너무나 안타깝고 망할 짓만 골라서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을 어떻게든 구원하고자 언제 어디서나 외치시며 지혜를 사라고, 지혜를 구하는 삶이 되라고 외치시는 것입니다. 명품인데, 명품 전략을 쓰지 않고 싸구려처럼 막 팔아서라도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모든 사람에게 막 나눠주려고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싸구려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은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고 하십니다. 지혜에서 멀리 떠나고, 세상의 유익을 쫓아가고, 금은보화 쫓아가는 이런 삶에서 돌이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돌이키는 자에게 주의 영을 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래서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하십니다. ‘보이리라’는 확실히 알게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공부한다고 해도 말씀을 잘 알지 못합니다. 아무리 고민을 많이 한다고 해도 말씀을 모릅니다. 오직 주의 영이 부어져야 말씀이 보입니다. 주의 영이 부어져야, 이게 뭐고 저게 뭐고 분별력이 생기고 구원이 무엇인지 알고, 복음이 무엇인지 알고, 말씀이 말하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주의 말씀을 듣고, 책망을 듣고 돌이키는 자에게 주의 영을 부어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이게 해 주십니다. ‘말씀이 보인다.’ 이것은 엄청난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24절을 보십시오. “내가 불렀으나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폈으나 돌아보는 자”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25절을 보면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아니 하였다고 했습니다. 남대문 시장에 가면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한참 옷을 찾고 뒤져서 입어보고, 벗어 던지기를 반복합니다. 그리고 싸구려네, 별로네 하고 가 버립니다. 가게 주인 입장에서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도 그런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외쳐도 안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결말을 경고하십니다. 26절,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 이는 지혜의 초청을 거절한 자들이 멸망당하는 것을 하나님은 기정사실화 하십니다. 그리고 이들이 멸망당할 때, 웃는다고 하십니다. 이는 고소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거저 나눠주시는 이 지혜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 것인가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자들은 한방에 박살이 날 것입니다(시2:1-3,4) 이들에게 모든 것을 날려버리는 광풍이 임합니다. 재앙이 폭풍같이 임합니다. 퍼펙트 스톰이라고 사방에서 바람이 불어옵니다. 동쪽에서 바람이 불어오면 서쪽으로 피하면 됩니다. 그런데 동서남북 사방에서 바람이 불어옵니다. 피할 곳이 없습니다. 이처럼 재앙이 불어와서 자신이 일생 모은 것을 다 날려 버리면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그러면 그때 가서야 이들은 주님을 부릅니다. “아이고 하나님! 아이고 하나님! 좀 살려주세요.” 그러나 주님은 이때 응답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부지런히 주님을 찾지만 주님을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결국 지혜와 명철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는 한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늦기 전에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때 가서 많은 사람이 반드시 후회할 것입니다. 태풍이 분다고 예보했는데, 괜찮을거야 하고 바다에 나가는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태풍을 만난 후에 후회해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기회는 뒷머리가 없다. 지나간 다음에 잡고자 해도 잡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때까지 은혜의 기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나고 나서 후회해야 소용이 없습니다.
눅15장에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탕자가 아버지 품을 떠나 허랑방탕한 삶을 살아온 지난 날의 삶을 회개하고 다시금 아버지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버지는 다 망가져 돌아온 둘째아들을 영접해 줍니다. 그런데 만약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형 밖에 없다면 어땠을까요? “동생아! 얼마나 고생이 많았니. 잘 돌아왔다.”하며 반겨줄까요? 눅15장을 보면 형은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아버지 재산 반이나 날려 먹고 이제는 내 재산도 날려 먹으려고 돌아왔냐? 하며 문전박대하지 않았을까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돌아온다면 돌아와 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 돌아오는 것이 은혜입니다. 미루고 미루다가 나중에는 후회해도 소용없게 되는 날이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왜 이들이 이런 재앙을 당할까요? 29절을 보십시오. “대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30절 “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음이니라.” 지혜와 명철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말씀의 책망을 듣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미워할 뿐 아니라 업신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누가 나를 업신여긴다면 가만히 있겠습니까? 나도 상대방을 업신여길 것 아닙니까? 하나님도 그러신다는 것입니다. 말씀에는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 하나님의 영광과 권위가 다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무시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요1:1. 롬9:17). 이들이 이렇게 말씀듣기를 싫어하고 하나님을 무시하니, 하나님도 이들을 무시하십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업신여기니, 하나님도 이들을 업신여기십니다. 결국 폭망하는 것입니다. 누가 손해입니까? 자기들만 손해입니다. 3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 이 사람들의 행위는 말씀을 듣지 않고 무시한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욕심을 따라 산 것입니다. 자신의 유익을 따라 산 것입니다. 이들은 멸망당할 신세를 면하라고 주신 말씀을 무시한 것입니다. 은혜의 기회를 발로 차버린 것입니다. 결국 그 대가를 자신들이 받습니다. 그러므로 지혜가 부를 때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삶의 결과가 전혀 달라집니다. 32절을 보십시오.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 ‘퇴보’는 ‘배신한다. 되돌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런 점에서 여기서의 ‘퇴보’는 하나님을 배신하고 그 말씀을 듣는데서 되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이런 퇴보는 결국 자기를 죽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미련한 자의 안일을 말합니다. 미련한데, 안일하기까지 합니다. 여기서의 안일은 잠 많이 자는 정도가 아닙니다. 재앙을 경고해도 막연히 괜찮다고 여기고 태평하게 사는 것입니다. 즉 재앙의 경고 앞에서도 괜찮아요...!하며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입니다. 미련한자의 이러한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메-성경은 “내 말을 무시하는 것은 죽는 것이요, 자기도취는 자살행위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혜의 말씀을 듣는 자는 어떻게 됩니까? 33절을 보십시오.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 그러니 지혜의 말씀을 들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평안히 산다고 하십니다. 여기서의 평안히 산다는 것은 인생의 환란이나 질고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평안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샬롬입니다. 샬롬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평화입니다. 즉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는 마음의 평화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예배하신 구원의 길을 끝까지 가며 마침내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결국 말씀을 듣는가? 그렇지 않는가에 따라 완전히 그 인생이 달라집니다. 말씀을 듣지 않는 자는 결국 세상의 욕심이 이끌리는 대로 살다, 재앙을 만날 때에도 도움을 얻지 못하게 되고, 나중에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없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지혜의 말씀을 듣는 자는 하나님이 존귀하게 여기심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는 삶이 되고, 마침내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잠언은 말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내 아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7,8) 우리가 잠언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의 말씀을 들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지혜와 명철을 얻어서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얻고, 구원을 얻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