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모가치
박태선
울 아버지는 시골에서 농사를 짓다가 70년대 초, 20대 후반에 상경하여 대한통운 영등포 지점에 일자리를 얻으셨습니다. 시멘트와 쌀가마니, 무연탄 등속의 짐을 화물차에 싣거나 철로변에 부리는 일이었어요. 철길 건널목 근방에 있던, 일꾼들이 옷을 갈아입던 판잣집이 생각나고요. 그 처마 아래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쓴 코스모스와 맨드라미가 아스라한 기억 너머 아른아른한 풍경으로 떠오르네요.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손바닥에 박인 굳은살을 더운물에 불려 가며 가위 날로 긁어내셨는데요. 한때는 시멘트 독이 올라 쑥찜질을 하느라 집 안에 온통 쌉싸름한 내음이 진동하던 나날도 있었습니다.
대한통운에서 하역 일꾼으로 10년을 일하신 이후에는 일흔이 넘도록 30년 이상을 노가다판에서 막일꾼 노릇을 하셨습니다. 13년 전, 일흔 중반에 간암에 폐암 합병증으로 돌아가셨는데 입관할 때 아버지의 시신을 붙들고 통곡하시던 엄마의 말씀에 의하면, 세상의 온갖 먼지를 다 자셔서 그렇게 일찍 가셨다고 하네요.
아버지는 주무실 때에도 다리를 쭉 뻗지 못하고 책상다리를 하고 주무셨어요. 온종일 서서 일하다 보니 다리도 쉬고 싶었을 거예요. 간혹 오밤중에 다리에 쥐가 나서 발목을 부여잡고 입을 딱 벌린 채 일그러진 얼굴 표정을 지으셨는데요. 홀쭉한 정강이에는 떼지렁이가 엉켜있는 것처럼 시퍼런 힘줄이 우툴두툴했어요. 엄마는 무섭다고 그러셨어요.
스물 즈음에 처음으로 아버지를 따라 건축 현장에 가보았어요. 아파트 지하 주차장 건물의 목재나 철제 거푸집을 빠루를 들고 뜯어내는 작업인데요. 장마철이었는지 바닥 한편에는 저벅거릴 정도로 물이 차 있던 기억이 나네요. 아버지의 별명이 ‘두모가치’라나요. 두 사람 몫을 혼자 거뜬히 감당한다는 말이에요. 아버지는 휴식이나 새참 시간이 끝나면 장 폴 벨몬드처럼 입 언저리에 담배를 질끈 물고는 곧장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셨어요. 오야지가 아버지더러 “박 형 좀 쉬엄쉬엄 혀어-. 쎄빠지게 일헌다구 언놈이 일당 두 대가리라도 쳐주남?” 하고 야지를 놓아요. 그러면서도 아버지가 일 잘한다는 말은 누구나 다 하더라고요. 그날 바닥에 널브러진 거푸집에서 튀어나온 대못에 된통 발바닥을 찔렸어요. 아버지는 제 작업화를 벗기고는 발바닥에 소주를 붓고 상처 부위를 라이터 불로 지진 다음에 망치로 두어 번 두드려주시더군요. 약간의 이물감은 들었지만 통증은 거의 없었어요. 가공할 만한 ‘노가다식 민간요법’이라고나 할까요.
언젠가는 아파트 공사장 주변에 쓰다 남은 시멘트나 고철, 화목(火木) 나부랭이를 푸대에 담아 리어카로 실어다 한곳에 정리하는 일을 한 적이 있어요. 단순한 작업이에요. 그치만 한여름 땡볕에 바깥에서 일을 하다 보니 팥죽 같은 땀방울이 얼굴에서 뚝뚝 떨어져요.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중천에 걸린 해를 바라보면 머릿속에서 징소리가 울려 퍼지고 골머리가 지끈거리며 어지럼증이 났어요. 그때 어디선가 아버지가 나타나서 포카리스웨트 캔을 건네주시며 한 말씀 하셨어요. “땡볕에서 일을 해봐야 바람 한 점이 얼마나 고마운지 안다.” 실상 아버지의 검붉게 탄 얼굴은 번들거리기만 했을 뿐, 땀 한 방울 흐르지 않았어요. 이 세상에서의 모든 땀은 일찌감치 자연에 반납하신 것은 아닐는지요.
어느 해 추석이었어요. 광명시에 사는 외삼촌댁에 인사를 드리고 30번 버스를 타고 오류동으로 가는 버스로 갈아타려고 중간에 내렸지요. 아버지가 도로 경계석을 쾅쾅 발로 구르더니 귀퉁이의 흙먼지를 쓸어내고는 손바닥을 탁탁 터시면서 “아귀가 잘 맞았네. 10년 됐나── 이거, 내가 놓은 거란다. 장정 둘이서도 낑낑대며 들어다 놓는 걸, 나 혼자서 옮겨놓았지.” 하며 뿌듯해하시던 모습이 잊히지 않아요. 경계석은 양팔을 한껏 벌려야 할 만한 길이의 직사각형 화강암 덩어리에요. 아버지는 그놈을 곧추세운 다음에 뉘어 양팔로 품에 감싸 안고서 옮기셨대요. 사람들이 무심히 밟고 다니는, 심지어 침을 뱉고 담배꽁초를 짓이겨 밟는 개봉동 사거리의 경계석을 우리 아버지가 놓았답니다.
아버지는 일흔이 넘어서는 야방(夜番)을 보면서 낮에는 자재 정리 같은 단순한 작업을 하고는 열흘에 한 번 정도 집에 들르셨어요. 이제 기력도 달리고 해서 노동일을 그만둘 참이었는데 현장 소장의 배려로 그리된 거랍니다. 하루는 한낮에 돌아오셔서 안방에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끙끙 앓는 소리를 내시는 거예요. 공사 현장에서 일제 전동드릴이 사라졌는데 젊은 일꾼 하나가 아버지가 범인이라고 함부로 주둥아리를 놀렸다나요. 상대방의 귓방망이를 냅다 후려치고는, 휑하니 집에 와버린 거예요. 이튿날 소장이 찾아와서 사과하고 다시 모셔갔지요.
아버지는 목수일, 쓰미, 미장 따위 못하는 일이 없을 정도로 팔방미인이었지만 전문적인 기술은 없었어요. 우리 집은 30여 년 전에 소방도로가 나는 바람에 건물 한 모퉁이가 잘려 나가고 재건축을 하게 되었는데요. 당신께서 직접 관리 감독을 하셨고요. 바닥 공구리는 두터워 층간 소음은 어림 반 푼어치도 없네요. 외벽은 붉은 벽돌로 마감하고 옥상 방수 페인트도 몸소 여러 벌 꼼꼼하게 손보셨어요. 당시 소방도로 양편에 나란히 지은 여남은 채 건물 가운데 우리 집은 아직도 금 간 데 한 곳 없이 제일 튼튼하답니다.
“사람이 머리만 쓰면 악마가 되고 몸만 쓰면 짐승이 된다.”고 하잖아요. 울 아버지는 이 세상에서 몸만 쓴 분이라 할 수 있지만 짐승 같은 인간은 결코 아니었어요. 다소 고지식한 면은 있지만 정과 의리가 남달랐고 정직한 분이었습니다.
어릴 적 월급날, 아버지가 다갈색 봉투에 담긴 ‘센베이’ 과자를 사들고 오시면 우리 삼남매가 다람쥐처럼 아삭아삭 갉아먹거나 똑똑 부러뜨려 먹던 고소하던 그 시절이 하냥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