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2024.5.3 15;00-16;20 ★장소; 봉안식장및 제2충혼당(납골당) ★참가인원;18명 -제1충혼당 정면에서 추도식 행사-
대열동기회 사무총장 황종구 동기로부터 2024년 5월3일 15시 고 박승춘 동기 서울국립현충원 안장식이 있다는 메시지를 받고 오후 12시 20분경에 무거운 발걸음으로 현충원으로 향했다. 현충원(당시 국군묘지)을 처음 방문한 것은 1964년 고등학생 시절이었다. 정부 통제하에 서울 시내 고등학생들을 동원하여 소나무 재선충을 박멸하는 시기였다. 나무젓가락과 종이컵을 들고 벌레를 잡았다. 얼마나 징그런지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다. 그 당시 현충원은 보잘것 없는 뒷산 정도였다. 60년이 지난 지금 천지개벽할 정도로 울창한 숲과 정원으로 아름답게 변하였다. 어디서나 사진을 찍으면 그림처럼 펼쳐진다. 이곳에 잠든 고인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해 본다. 지하철4,9호선 동작역 8번 출구로 나오면 바로 현충원 정문이 나온다. 현충원은 고요하고 평화롭기만 하였다. 현충원은 관악산(632,2m)의 연주대에서 북진한 산줄기로 주산인 서달산(179m) 자락에 위치해 있으며 공작새가 알을 품고있 듯 상서로운 기맥이 흐르고 정면에는 한강수가 있어 전형적인 배산임수형으로 명당이다. 이곳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순국한 호국영령들이 안장되어 있는 성스러운 곳이다.
종합민원실에서 동기생들과 만나 자가용으로 봉안식장으로 향했다. 독립유공자묘역을 거쳐 봉안식장까지는 약 1,5km로 도보로 22분, 차량은 4분 정도 소요된다. 주차장 뒤편으로는 김영삼 대통령 묘역과 장군 3묘역이 위치해 있다. 봉안식장에는 유가족과 조문객들로 붐볐다. 오늘 합동봉안식은 고인 12분이다. 오후 3시 정각에 봉안식이 시작되었다. 제단에는 태극기가 걸려있고 그 아래로 고인의 영정이 나란히 놓여있었다. 박승춘 영정은 좌측에서 일곱번째 자리에 있었다. 사회자의 진행순서에 따라 먼저 국기에 대한 경례 후
유족대표는 차례로 나와 의장대 병사가 건네준 국화송이를 영정 옆에 올려놓고 향을 피운 다음 기도 또는 절을 하였다. 그리고 4발의 조총이 발사된 후 전체 묵념으로 1차 봉안식은 끝난다. 12명의 국방부 의장대 병사들이 고인의 위패와 유골함을 두 손으로 받쳐들고 일렬종대로 행진하는 뒤를 따라 유족들이 영정사진을 안고 제2충혼당(납골당)으로 향했다. 납골당은 이병부터 장군에 이르기까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봉안되는 순서대로 좌에서 우로, 1단에서 8단으로의 순으로 안치된다. 납골함은 부부합장용으로 만들어 놓았다.
비좁은 봉안실(610호)에 유골을 안치함으로서 모든 공식적인 행사는 끝난다. 봉안실에 고인을 안치 후 별도로 제1충혼당 앞에서 추도식을 거행하였다. 성유경 전임 동기회장이 대표로 향을 피우고 묵념을 올린 후 시종일관 울먹이는 목소리로 추도사를 낭독하였다. 모두 숙연한 분위기였다. 고 박승춘 장군 영전에
박장군! 지금 박장군이 사랑했던 가족들과 동기생들이 박장군을 보내기 위해 이 자리에 와있네. 박장군과 평생을 동고동락한 김남순 여사, 기도, 민서, 사위, 손주도 여기 있내. 이 가족들을 두고 어떻게 혼자 떠나는가. 너무 슬퍼하고 있네. 평생 군인으로 공직자로 몸바쳐 일하느라 가족들과 제대로 즐거운 시간을 갖지도 못하였는데 이제 좀 쉬면서 가족들과 여생을 보내려고 하는데 갑자기 떠나니 너무 아쉽고 안타깝기만 하네. 박장군의 비보를 듣고 많은 선후배들과 지인들이 찾아와 박장군과의 이별을 애도하였네. 황교안 전 국무총리께서는 문상을 오셔셔 박승춘 장군은 국무위원 중에서 세 손가락에 들 정도로 매우 훌륭한 분이었다고 칭찬을 하시더군. 군에서 전역 후 국정원 지원 아래 국민 안보교육을 했다는 이유로 온갖 고초를 당하면서 병까지 얻었지만 끗끗하게 잘 견디면서 이겨내지 않았던가. 박장군은 투철한 군인정신과 애국심으로 오로지 나라만을 생각하면서 정의로운 삶을 살았지. 육사에서 배운대로 초지일관한 삶은 육사인의 표상이었다네. 선후배들과 동기생들이 박장군을 아끼고 존경하는 이유라고 생각하네. 우리도 머지않아 박장군의 뒤를 이어 따라갈 것이니 이제는 무거운 짐 다 내려놓고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게나. 2024년 5.3 대열동기생 일동 오늘 고 박승춘 장군 봉안식에 참가한 동기생은 18명이었다. 고인을 떠나보내는 심정이 착잡하고 쓸쓸하기만 하였다. 동기생들이 하나 둘씩 떠날때마다 우리들도 머지 않아 떠날 때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세월이 흐를수록 과거는 점점 멀어지고 미래는 점점 더 짦아지고 있지 않은가. 이제 아쉬울게 무엇이 있겠는가. 마음을 비우며 편하게 살아가세. 쌓아놓았던 모든 물건들을 하나하나 정리하고 떠나세. 죽으면 다 사라질 물건들인데. 사는 날까지 동기생들과 편하게 어울리면서 즐겁게 지내는 것이 후회없이 사는 행복한 삶이 아닌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