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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 '불갑사 주차장 → 덫고개 → 호랑이굴 → 노적봉 → 법성봉 → 투구봉 → 장군봉 → 불갑산 정상 → 구수재 → 용천봉 → 불갑사 → 불갑사 주차장'의 9.4km, 5시간 코스를 환종주할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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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갑산[佛甲山]
높이: 518m
위치: 전남 영광군 불갑면 모악리
백제 때의 고찰인 불갑사를 품고 있는 그다지 높거나 크지는 않다. 그러나 울창한 숲으로 이루어진 산세가 포근한 느낌을 주고 단풍과 낙엽이 어우러진 늦가을 정취가 그윽하다. 전국의 유명한 단풍 관광지와는 달리, 발길이 비교적 뜸해 인파에 시달릴 걱정 없이 화려한 단풍을 조용히 감상할 수 있다.
불갑사 옆 계곡을 따라 핀 오색영롱한 단풍과 불갑사 마당의 노란 은행나무가 늦가을 정취를 자아낸다. 단풍 절정기는 대략 11월 초순~중순 무렵이다.
남도의 봄은 빠르고도 아름답다. 붉은 동백꽃이 송이 채 뚝뚝 떨어지는 동백골, 온통 길을 뒤덮은 맥문동, 암자터의 굵은 왕대숲, 멋대로 자란 비자나무. 해불암에서 바라보는 서해의 낙조가 장관이다. 일출을 보려거든 경주의 토함산을, 낙조를 보려거든 영광의 불갑산이라 할 만큼 낙조가 볼만하다.
불갑사 경내에는 보물 830호인 대웅전과 고려 공민왕 8년(1359년)에 이달충이 세운 진각국사비를 비롯하여 팔상전, 보광전, 명부전, 칠성각, 만세루, 천왕문, 일광당, 산신각, 관사정 등이 있다. - 한국의 산하
11월 2주 차 용화산, 오봉산 산행[산행기]의 진행 상황을 보기 위해 예약한 안내 산악회에 들러 이것저것 구경하다가, 불갑산이 11월 3주 차 산행으로 등록된 걸 발견했다. 바로 불갑산 예약 페이지를 클릭해 현황을 보니, 이미 예약 완료에 대기자가 5명이나 되었다. 11월 16일 산행에 10월 16일 확인한 거다. 불갑산이 이렇게 인기가 좋았나? 궁금해하며 다른 산악회는 어떤지 둘러보니 계획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바로 그 산악회에 회비를 입금하고 6번 대기자에 이름을 올렸다. 취소자가 없으면 환불받으면 되고, 취소자가 있어 내 순서까지 온다면 갔다 오면 되고.
대기자 등록 후 불갑산에 대해서는 잊고 있었는데, 10월 27일 불갑산행 버스에 내 자리를 배정했다고 산악회에서 문자가 날아왔다. 생각보다 많은 등산객이 중도에서 취소했다. 일단 선점하고 나중에 취소하는. 뭐 어쨌든 내가 불갑산에 간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다시 잊고 있다가 11월 11일 불갑산행 최종 점검을 위해 산악회 홈페이지에 갔다가 놀랐다. 버스에 10개의 빈자리가 있었다. 중도 취소자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어쨌든 버스에 빈자리가 있어 불갑산이 서울에서 멀기는 하지만, 산행 코스가 짧고, 험하지 않아 원하는 친구가 있으면 같이 가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등산방에 산행 계획을 올렸다.
산행 소개 글을 쓰려고 하자, 뭘 소개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어떤 경로로 불갑산을 알게 됐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소위 얘기하는 100대 명산인지 확인했다. 아니었다. 그럼 이전에 빨치산 활동무대로 인지하고 있었는지 확인했다. 불갑산이 빨치산 활동무대로 중요한 지역이라는 사실을 안 건 올해 초다. 작년에 계획을 세웠으니 그것도 아니다. 다시 산행 안내를 꼼꼼히 읽어보니 단풍에 관한 내용이 붉은색 폰트로 강조되어 있었다. 그럼 단풍 명산으로 한국의 산하에서 소개받았나 해서 '한국의 산하' 테마 산행 중 단풍 부분을 찾아봤다. 불갑산은 없다! 오리무중에 빠져 등산방에 이런 상황에 관해 글을 올렸다. 그걸 보고 흥수가 불갑산을 검색해 단서를 찾아냈다. 시작은 작년 8월 KTX를 타고 남도를 가던 홍 원장이 열차 내에 비치된 잡지를 보다 불갑산 상사화 기사를 사진으로 찍어 등산방에 올린 일이었다. 이런 산에도 가보자고. 그 사진을 보고 '한국의 산하'에 들어가 '불갑산'이 어떤 산인지 찾아봤고, 상사화가 아니라 단풍이 좋다는 내용을 보고 단풍철에 가자고 계획을 세운 거였다. 무언가 머리에 박히면, 근원이 뭐가 됐던 해결을 해야 직성이 풀리니, 강박으로 남아 있었던 거 같다.
산행 일이 가까워질수록 산악회는 취소자가 늘어나고 있었다. 나야 단풍을 떠나 빨치산의 활동무대[기사]로서의 불갑산이 궁금한 인간이라, 순례의 목적으로 언젠가는 꼭 가보겠다고 한 산이라 좋은 기회였지만, 다른 등산객에게는 그렇지 않은 거 같다. 그나마 상사화 기간이 아님에도 산악회가 불갑산을 찾는 이유는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까만 소 100대 산에 불갑산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상사화도 100대 산도 관심 없는 나지만, 올해 초, 소 키우는 친구와 불갑산에 관한 얘기를 나누다 몇 년 전에 들은 그 친구의 가족사와 관련 있는 산이 이 산이라는 사실을 알고 더욱 가 보고 싶었었다.
빨치산의 활동 무대로서의 불갑산에 관해 이것저것 살펴보다가, 다른 유명한 빨치산의 활동 무대인 백아산, 백운산 등과 연관 관계가 궁금해 지도를 펴 놓고 위치를 확인해봤다. 난 당연히 불갑산이 백아산, 백운산 아래, 남도의 끝에 있는 산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산과는 멀리 떨어져 있었고, 남해가 아니라 서해에 가까웠다. 위도상으로는 무등산 위에 있으며 백아산이나 백운산과 비슷한 위치에 있어 놀랐다. 내가 남도의 지명에 무지해 영암과 영광을 혼동해서 발생한 놀라움이지만, 빨치산을 특정 지역에 한정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빨치산의 활동 무대는 백아산, 백운산,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경로만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고 그렇기에 당연히 불갑산도 그 경로상에 있을 거라고 단정했었다. 결국 빨치산은 특정 지역이 아니라 남도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활동했다는 얘기다.
어쨌든 단풍으로 시작해 빨치산의 성지를 방문하는 거로 바뀐 산행이다. 이번에도 단독 산행이니만큼 지난 용화산, 오봉산 연계 산행과 같이 점심은 과일 몇 개와 비상식으로 해결하기로 해 간단히 배낭을 꾸린다. 당연히 무알코올 산행이지만, 산행 후 시간이 남으면 불갑산 곡차에 곁들여 도토리 맛은 어떤지, 도토리가 없으면 다른 특산물 맛을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목은 수능이라, 금은 수능 기념 한잔 약속이 있어 배낭을 쌀 시간이 없을 거 같아 수요일 퇴근 후 바로 배낭을 싸서 언제든지 들고 나갈 수 있도록 준비를 마쳤다.
그런데 계속해서 산행 취소자가 늘어나 성원 미달로 산행 자체가 취소될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이 들어 수시로 상황을 확인했다. 그렇게 확인 중에 갑자기 9명의 예약자가 추가되었고 내 자리가 동의도 없이 변경된 걸 발견했다. 변경된 자리도 옆자리가 비어 있어 문제 삼지 않고, 자리 배치를 잘 살펴보니 새로 추가된 9명이 버스 입구 쪽 첫 번째 자리에 길게 자리 잡은 게 보였다. 자리가 비자 바로 인원을 확보할 수 있는 산악회의 놀라운 영업력에 경의를 표하고, 왜 동행으로 보이는 9명은 같이 앉지 않고 운전석 기준 끝자리에 길게 앉았는지 궁금했다. 작은 산악회에서 단체로 신청한 거로 보이는 데 왜? 그러다 화면 왼쪽 위 "행선지"를 보고 궁금증이 풀렸다. 행선지에 "불갑산 31인승 리무진"으로 되어 있었다. 40인승에서 31인승 버스로 이동 수단을 바꿨다는 거다! 그걸 확인한 순간, 이 산악회가 대단히 마음에 들었다. 가능한 범위 안에서 이 산악회를 애용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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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저녁 집에 어떻게 들어갔는지 모르게 술을 마시고 산행 당일 알람에 기상했다. 숙취로 상태는 엉망. 배낭은 미리 싸뒀기에 아침만 간단히 먹고 산행 출발지인 사당으로 가기 위해 5시 50분이 넘어 집을 나섰다. 사당에서 7시에 출발하는 산악회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구산역에서 5시 58분 지하철을 타야 그나마 여유 있게 갈 수 있다. 그런데 집에서 늦게 나오는 바람에 그다음 차를 탔고 7시 5분 전에 사당에 도착했다.
나란히 서 있는 산악회 버스 중 제일 앞에 있던 불갑산행 버스 짐칸에 배낭을 싣고 패드와 카메라를 들고 버스에 탔다. 예상대로 버스는 31인승 리무진 버스로 사당 출발 등산객은 이미 다 타고 있었다. 분명 어제 오후 퇴근 전 확인 했을 때만 해도 4자리가 비었었는데 그 자리도 다 찼다. 산악회 마케팅 능력은 인정해야 할 듯. 그래서 다른 산악회와는 다르게 자체 버스를 가지고 운영하겠지. 역으로 버스를 가지고 있어 더 열심히 할지도.
쓰러지듯 자리에 앉아 바로 잠이 들었고 비몽사몽간에 세 번인가 정차해 등산객을 태우는 기척을 느꼈다. 양재, 죽전, 신갈이었던 듯. 버스가 휴게소로 들어가며 실내등을 켜는 순간 정신을 차렸다. 휴게소는 언제나 그렇듯 다양한 차로 만원이라 주차하는 데 애를 먹었다. 인솔자가 20분의 시간을 주며 볼일을 보라고 해 버스에서 내려 간단히 스트레칭한 다음 간이 우동 집으로 갔다. 분명 아침을 먹었음 애도 무언가 얼큰한 게 당겨 우동을 시켜 고춧가루를 잔뜩 부은 뒤 말끔히 마셨다. 과거에는 기차 여행 중 교행을 위한 기차 대기 시간에 우동을 먹는 재미가 있었다면, 이제는 고속도로 휴게소가 그걸 대신하는 듯. 시간에 쫓기며 마시듯 먹는 우동!
늘 그렇듯 휴게소를 떠나는 버스 안에서 인솔자가 간단하게 이번 산행에 관해 설명하고 다시 취침 모드에 돌입했다. 다만, 이미 충분히 잔 나는 잠이 오지 않아 패드를 꺼내 책을 읽고자 했지만,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 게임 모드로 변경해 불갑산에 도착할 때까지 했다. 불갑산 도착 10분 전쯤에 실내등이 들어오고 인솔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애초 계획은 11시에 불갑산에 도착해 산행 시작, 16시에 마감으로 대략 10km 산행에 5시간을 주었는데, 늦가을 행락객으로 고속도로가 막혀 40분이 늦은 11시 40분경 목적지 도착 예정이라고. 해서 승객에게 예정대로 16시에 마감할 건지, 아니면 늦어진 40분만큼 연장해 16시 40분에 마감할 건지 의견을 물었다.
숙취로 만사가 귀찮았던 나는 게임만 하고 있었고, 몇몇 나서기 좋아하는 등산객이 예정대로 16시에 마감하자는 의견을 냈고, 암묵적으로 그렇게 결론이 났다. 고로 산행 시간으로 주어졌던 시간이 5시간에서 4시간 20분으로 줄었다. 그러나 인솔자는 애초 예정된 코스를 다 하면 시간에 쫓길 우려가 있으니 예정된 코스인 '구수재'가 아닌 '해불암'에서 바로 하산하라고 강력히 권했다. 물론 산세나, 산의 모양이나, 주변 산과의 관계 따위에는 관심 없는 인증꾼에게 있어 코스를 줄인다는 건 큰 의미가 없겠지만, 산꾼에게는 심각한 문제다. 다만, 코스나 거리를 봤을 때 주어진 시간만으로도 충분히 갈 수 있겠다는 자신이 있어 조용히 있었을 뿐. 그걸 아는지 인솔자가 물론 빠른 산꾼은 충분히 주파할 수 있는 거리라고 보충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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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시 42분 불갑산 일주문 앞 주차장에 도착했다. 단풍철은 끝났다고 생각했던 내 예상과 달리 마지막 단풍을 즐기는 행락객으로 불갑산은 인파로 북적였다. 산악회는 우리와 수원에서 온 산악회 두 팀이 다였지만. 버스가 주차하자마자 줄어든 시간 내에 애초 계획했던 코스를 주파하고자 하는 등산객은 정신없이 산행을 시작했다. 그중에 나도 있었고. 나머지 인증꾼은 인증 포인트에서 사진 한 장 남기면 되는 거라 서두를 이유가 없어 여유 있게 이거저거 챙긴 후 산행을 시작했다. 처음 인솔자가 40분을 단축하고 단축된 거리를 추천했을 때, 그럼 물 한 통만 들고 가면 되겠다고 생각했었다. 배낭은 두고 물통만 들고 갈까, 잠깐 고민하다가 만약에 대비해 그냥 배낭을 짊어지고 갔다. 결론적으로 물통만 들고 가면 되는 산행이었다. 산행 내내 숙취의 후유증인 갈증으로 물 말고 먹은 게 없고, 배낭은 풀어보지도 않았다.
2인 이상 모이는 집단에는 리더가 되고 싶은 사람이 있고, 이번 산행에도 마찬가지였다. 애초 산악회 산행에 조용히 따라다니는 처지인 나야 아무 고민 없이 선두를 따라다녔지만, 이번에는 숙취 때문에 그나마 지도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따라나섰다. 만약에 대비해 카메라로 지도를 찍어 폰으로 전송은 해 두었다. 그런데 나야 리더가 될 생각이 없어서 확인을 안 했지만, 리더가 되고 싶은 사람이 지도를 확인하지 않아 초반부터 우왕좌왕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처음 계획에 의하면 불갑사 '무량수전' 좌측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덫고개'로 올라가면 되는데, 지도를 숙지 않은 리더들이 이정표에 분명 '덫고개'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무시했다. 나야 '덫고개'가 뭔지도 몰랐으니.
그렇게 길을 가다가 앞서던 리더 그룹이 갑자기 멈춰 폰으로 지도를 확인하더니 길을 잘못 왔다고 돌아가자고 했다. 난 분명히 리본을 확인하며 선두를 따라 왔는데 잘못된 길을 왔다니. 그래도 혹시나 해서 트랭글 지도를 확인하니 우리 앞에는 길이 없었고, 길은 불갑사 앞으로 나 있었다. 트랭글이 사용하는 지도가 네이버고, 네이버는 믿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잠깐 망각했다. 해서 나도 그들을 따라 다시 불갑사로 돌아와 계곡 옆으로 잘 만들어진 산책로를 따라 정상으로 갔다. 그 길은 산책로라고 부를 정도로 길이 좋았는데, 더불어 계곡을 따라 단풍이 절경이라 그 단풍을 보는 즐거움이 다른 모든 아쉬움을 상쇄했다. 그런데 그 길을 따라가며 보이는 이정표에는 '구수재' 방향이라고 계속 알려주고 있었다. 지도를 숙지하지는 않았지만, 슬쩍 지도에서 구수재라는 걸 본 기억이 나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아까 되돌아왔던 길이 애초 목적했던 코스가 맞고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은 인솔자가 단축하라 권했던 코스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제 와서 누구를 탓하겠는가? 다시 불갑사로 돌아갈까도 생각해봤지만, 이미 너무 멀리 왔다. 다 숙취가 몰고 온 참사라 치부하고 비록 목적한 코스는 아니지만, 불갑산을 즐기기로 했다. 그렇게 즐기며 가고 있는데, 이정표에 "불갑산 한국 호랑이 폭포'라는 게 계속 눈에 띄어 신경이 쓰였다. 저 문구가 의미하는 게 뭔지 궁금해하며 길을 가는데 12시 25분에 계곡에 시멘트로 만든 호랑이 조형물이 보였다. 그 앞에는 작은 연못이 있고. 속으로 이게 뭔 애들 장난이냐며 영광군청 욕을 하고 있다가 등산로에 있는 설명문을 보고 욕한 게 미안해졌다. 1908년 2월 불갑산에 살던 150kg짜리 호랑이를 농부가 잡았고, 그 호랑이가 물을 마시던 곳이 저기라고. 그 농부가 대단한 건지, 그 호랑이가 굶주림에 지친 건지. 어쨌든 그걸 기념해 연못에 인공 폭포를 만들었다는데 가물어서 그런지 물이 흐르지는 않았다.
왜놈의 손에 죽어 박제로 변한 마지막 불갑산 호랑이에게 애도를 표하고 길을 가 12시 28분에 정자가 있는 고갯마루에 도착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거기가 '구수재'라는 사실을 몰랐다. 그때는 구수재는 직진 방향 반대편에 있고 이 길은 불갑산의 상봉인 '연실봉'으로 가는 지름길로 알고 있었다. 인솔자가 추천한. 정자에는 예닐곱 명의 등산객이 자리를 잡고 앉아 점심 먹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도 뭐 좀 먹을까 하다 딱히 배가 고프지도 않고 배낭을 내려놓고 뭘 꺼낸다는 게 귀찮아 그냥 올라갔다. 그런데 12시 50분에 갈림길에 도착했는데, 그 갈림길의 목적은 '안전한 길'과 '위험한 길'을 구분하기 위함이었다. 이정표를 만든 사람에게 경의를 표하고 커다란 기대를 안고 당연히 위험한 길로 갔다. 나도 모르게 단축 코스로 왔으니 다른 것에서 보충하자는 심리도 있었다. 그런데 그 위험한 길이란 게 바위 두 개 넘는, 채 20m도 안 되는 거리였다. 아니 이게 위험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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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한 암릉을 따라 길을 만들며 정상을 향해 올라 1시 9분에 불갑산 정상인 연실봉에 올랐다. 연실봉에는 우리의 리더 그룹 몇 명만 인증을 찍거나 점심을 먹고 있었다. 삼각대를 꺼내 설치를 하고 나도 사진 몇 장 찍는 사이에 산악회 인솔자가 나머지 무리를 끌고 도착했다. 이 그룹이 애초 예정된 코스를 따라 연실봉까지 온 거다. 우리가 중간에서 길이 없다고 회군한 곳을 뚫고. 해발 516m에 불과한 연실봉이지만, 주변에 홀로 우뚝 솟은 어미의 산이라 모악산(母岳山)이라 불리듯이 주변의 모든 산을 굽어보고 있었고, 멀리 남해가 보이고 동쪽으로는 무등산이. 대략 5분가량 연실봉에서 주변 절경을 구경하고 장군봉을 향해 갔다. 그 시점부터 애초 계획과는 반대로 움직이고 있지만, 단축된 코스가 아니라 예정된 코스를 달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걸 확인한 건 산행이 끝난 후 산악회 지도와 내가 갔던 행적을 비교해보고 서다.
노루목, 장군봉, 투구봉, 덫고개를 향해 가며 우회로가 아니라 암릉을 따라갔고, 와중에 썩은 나무에 의지했다가 바위에서 떨어질 뻔한 위기도 겪었다. 그런데도 무사할 수 있었던 건 그동안 산신령에게 물통에서부터 모자, 랜턴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헌납을 했기 때문일 거다. 생각해보니 불갑산 신령은 필요한 물건이 없었는지 뭘 달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1시 28분에 또 '안전한 길', '위험한 길' 이정표에 도착했다. 선례가 있어 이것도 별거 아닐 거로 생각하고 갔는데, 별것 아닌 게 아니었다. 좀 아쉬운 게 있었다면 과도한 안전시설로 위험한 길이 위험이 아니라 대단히 안전할 길이 된 거. 우측은 깎아지른 낭떠러지, 좌측은 숲이 무성했지만, 위험한 절벽임에는 마찬가지였다. 아슬아슬한 바위 위를 가는 거였지만, 안전시설이 잘되어 있어 전혀 위험을 느낄 수 없었다. 물론 절벽 아래를 바라보면 오금이 저리지만.
그런데 가는 길 앞에는 에펠탑이 서 있었고, 건물이 보였다. 그리고 우측으로 그 건물까지 도로가 올라오고 있었다. 에펠탑과 도로라면 군사용 아니면 통신용일 텐데. 1시 36분에 에펠탑과 건물이 있는 곳에 도착했는데 차 한 대가 주차해 있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군사용 탑과 건물이었다. 그리고 거기가 노루목이다. 노루목을 지나 암릉을 따라 장군봉으로 가고 있는데, 우측 옆으로 이상한 게 보여 가보니 묘비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돌아 내려가 확인해보니 "김병우", "채희만" '여기에 잠들다'라는 비명이 음각되어 있었다. 옆을 보니 '1987.8.7 卒 친우 일동'이라고 적혀있었다. 1987년 8월 7일 불갑산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노루목에서 장군봉으로 가는 길 330m 중에는 20여 미터에 이르는 단풍 터널이 있었고, 붉게 물든 단풍과 아직 초록을 유지하고 있는 단풍이 어울려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혼자 지나기 아쉬웠지만, 강요해서 될 일이 아니니. 단풍 터널을 지나 1시 45분에 장군봉에 도착했다. 물론 정상석이란 게 있을 리가 없고 이정표에 장군봉이라고 적어놓았을 뿐이다. 그 시각이 1시 45분이면 3시 이전에 들머리이자 날머리인 불갑산 주차장에 도착한다. 다년간의 경험에 따라 남은 거리와 길의 상태를 봤을 때. 마감 4시에 3시 도착이면 1시간 동안 뭘 할지 고민해야 한다. 물론 불갑산 곡차와 도토리 맛을 보겠지만, 혼자서 30분 이상 맛보기 힘들고. 그렇다고 산에서 뭐 할 일도 없고, 커피나 내려 마실까 생각해봤지만, 배낭에서 꺼내고 설치하고 내리고 하는 게 귀찮았다. 해서 2시 30분까지 불갑사에 도착하는 걸 목표로 그냥 내려가기로 했다. 30분 정도 불갑사를 구경하고 3시부터 곡차와 도토리 맛을 본 다음 버스로 가서 자는 거로.
잘 다듬어진 길을 따라 투구봉에 도착한 시각이 1시 55분이다. 길을 가면 반대쪽에서 오는 등산객이 아닌 물통 하나만 든 관광객 대여섯 명을 만났는데, 그래도 되는 산이었다. 배낭을 메고 가는 게 창피할 지경. 처음 생각대로 버스에 배낭을 두고 왔어야 했는데. 2시 2분에 법성봉에 도착했고, 2시 9분에 노적봉에 도착했다. 노적봉에서 불갑사를 보며 사진을 찍으며 위에서 가람을 구경했는데, 내가 생각했던 이상의 절이었다. 산행 시작할 때는 시간에 쫓겨 절을 관찰할 여유가 없었는데, 하산 시에는 요모조모 둘러봐야겠다는 의욕이 생겼다. 법성봉으로 향하는 길에 연리목을 발견하고 그 밑에 향토 시인이 쓴 시를 감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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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 15분에 덫고개를 200m 남겨둔 곳에서 놀라운 걸 발견했다. 호랑이가 살았던 굴이 있었고 그 굴 앞에는 호랑이 조형물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궁금해했던 "덫"고개의 의미를 알았다. 덫을 놓아 호랑이를 잡던 고개라니. 호랑이 집을 구경하고 사진도 찍었다. 호랑이를 타고 인증을 찍을까 하다 이 나이에 할 짓이 아니라는 생각에 포기하고 다음 목적지를 향해 갔다. 2시 25분에 마침내 덫고개에 도착했다. 애초 여기서 산행이 시작되어야 했는데 어쨌든 왔으니 됐다.
덫고개는 사거리로 오던 방향에서 직진하면 불갑사 주차장으로 좌회전하면 불갑사로 우회전은 묘량으로 향했다. 최종 목적지가 주차장이니 직진하는 게 맞겠지만, 남는 게 시간이고 불갑사를 구경할 생각에 좌회전해 불갑사로 하산했다. 가뭄에 바짝 마른 계곡의 단풍을 구경하며 급경사를 내려가 아침에 무량수전 옆에서 리본을 본 지점에 2시 35분에 도착했다. 그 시각이 11시 53분경이니 불갑사를 끼고 대략 7km의 불갑산을 한 바퀴 도는데 2시간 42분이 걸렸다.
사실상 산행을 종료하고 본격적으로 불갑사 탐방에 나섰다. 먼저 등산로 입구에 있는 무량수전에 들러 본존불에게 인사를 하고 사진도 찍었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대웅전을 찍었는데, 알고 보니 보물 제830호였다. 그리고 대웅전 안의 삼존불 좌상 역시 보물이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대웅전 전면에서 봤을 때 본존불은 좌측에 안치되어 있었고 전면에는 탱화가 걸려있었다. 그리고 그 탱화를 향해 제를 올리고 있었다. 절 내에서 한국의 산하 불갑산 소개에서 봤던 은행나무 사진도 한 장 찍고 물도 마신 후 절 구경을 마치고 올라왔던 길과는 다른 길로 주차장을 향해 내려갔다.
주차장을 향하는 길에는 여러 곳에 조성된 상사화 군락지가 있었고 곳곳에 붉은 단풍이 요란했다. 주차장을 향해 가는 길에는 한국에서는 처음 본 탑원이라는 것도 조성되어 있었다. 2시 54분에 다시 일주문을 지났다. 절에서 일주문까지 오는 길에는 잔에 1,000원씩 잔 막걸리를 파는 곳이 있었다. 그 잔 막걸리의 유혹을 뿌리치고 도토리를 향해 계속 갔다. 고려말 각진국사가 심었다는 삼정자-지금은 당산-를 지나 관광버스가 대기하고 있는 주차장에 도착하는 거로 이번 산행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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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을 지났음에도 식당이 보이지 않아 잠깐 당황했다. 설마 그 잔 막걸리가 다는 아니겠지라는 생각으로 계속 내려가 보니 예상대로 식당가가 있었다. 그중 한 식당에 들어가니 손님이라곤 두 사람이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있었다. 하긴 오후 3시에 식사 손님이 있을 리가. 그 집 전문은 보리밥이었다. 불갑산에 오면서 들린 정암 휴게소에서 9시경 우동을 먹은 이후 물 외에는 먹은 게 없는 상태라 배가 고파 보리밥이 강하게 당겼지만, 지조를 지켜 도토리묵 무침과 막걸리를 시켰다. 남도의 영광답게 밑반찬으로는 마늘종과 같이 무친 게가 나왔다. 도토리묵 무침보다 그게 더 좋았다. 도토리 절반에 막걸리를 다 마시고 나니 배가 불러 더 먹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다 먹고 마시고 나온 시각이 3시 26분이다. 막걸리 한 병 마시는 데 25분 걸렸다. 배도 채웠겠다. 자기 위해 버스가 기다리는 주차장으로 갔다. 그런데 5대의 관광버스 중 우리가 타고 온 버스는 없었다. 1대는 수원에서 등산객을 싣고 온 차고, 나머지 4대는 라이온스 클럽 행사 때문에 전남 곳곳에서 온 차였다. 곧 오겠지 하며 기다리고 있는데 버스는 올 기미가 안 보이고 같이 온 등산객도 전혀 안 보였다. 혹시 내가 시간을 착각했나 고민하고 있는데, 등산객 서너 명이 주차장을 지나 밑으로 내려가고 있는 게 보였다. 해서 나도 그들을 따라 내려가 보니 당산나무 있는 주차장 100여 미터 아래에 버스 주차장이 따로 있었다. 거기에 우리가 타고 온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배낭을 짐칸에 싣고 자리에 앉아 바로 취침 상태에 돌입했다.
4시 정각에 출발한 버스는 정암 휴게소에 정차 후 바로 서울로 달렸다. 산악회 버스를 타고 다니는 중, 상·하행 모두 같은 휴게소에 들린 건 처음이다. 8시가 조금 넘어 양재역에 도착했고 양재역에서 집으로 갔다. 집에서 나오는 건 사당이 편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건 양재가 편리하기 때문에 달리한다.
애초 계획과는 반대로 '불갑사 주차장 → 불갑사 → 용천봉 → 구수재 → 연실봉 → 노루목 → 장군봉 → 투구봉 → 법성봉 → 노적봉 → 호랑이굴 → 덫고개 → 불갑사 → 불갑사 주차장' 9.94km(트랭글 기준), 3시간 20분 코스를 탐방했다. 이동 3시간 12분, 휴식 8분! 그 동안 먹은 건 물이 유일하다.
최소 한 번 정도는 가봐야 할 산이다.
그리고 그 산이 그렇게 험하지도 않아 가족 단위의 산행도 좋다.
당연히 정규 등산로에서 빨치산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지만, 토벌을 위해 소각했다는 용천사도 가볼 생각이다.
첫댓글 전날 누구랑 얼마나 마셨길래 산행기에서 숙취 숙취 해댈까?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 살려달라고 애원했던 친구
아직도 단풍이 있었군
한국의 산하가 수년에 걸쳐 수집한 정보라 생각보다 잘 맞는다.